All Chapters of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35 Chapters

101화: 3만의 파도 1

​둥- 둥- 둥- 둥-​지옥을 알리는 북소리가 새벽 안개를 찢었다.​나는 성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평야를 메우고 있던 오색 깃발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검은 철갑과 붉은 투구를 쓴 인간의 파도가 채우고 있었다.​3만 대군.글자로만 보던 숫자가 눈앞에 실체화되었을 때의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놈들이 내뿜는 살기가 진주성을 집어삼킬 듯이 일렁였다.​"철포대! 요이! (조총 부대! 준비!)"​성 아래에서 왜군 지휘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숙여!"​내 외침과 동시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몸을 웅크렸다.​타타타타탕-!​콩 볶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이었다. 수천 자루의 조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벽 위로 납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돌 틈에 박히고, 나무 기둥을 뚫고,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투구를 깨뜨렸다.​"으악!""내 팔! 팔이!"​비명 소리가 빗발치는 총성에 묻혔다. 화약 연기가 성벽을 휘감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이게 정규전이구나.산속에서 게릴라전이나 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은 거대한 폭력의 해일이었다.​"반격하라! 놈들을 성벽에 붙게 해선 안 된다!"​김시민 목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화살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꼿꼿이 서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쏴라!"​조선 관군과 익호군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피융! 피융!​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가 왜군의 선두 대열을 덮쳤다.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지만, 뒤에 있는 놈들은 시체를 밟고 계속해서 밀려왔다.​"사다리! 사다리를 걸어라!"​왜군들이 긴 대나무 사다리를 들고 해자를 건너왔다. 성벽에 사다리가 턱, 턱 걸리는 소리가 났다.​"밀어버려!"​최가가 소리쳤다. 익호군 녀석들이 긴 쇠스랑으로 사다리를 밀어냈다. 매달려 있던 왜군들이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하지만 하나를 밀어내면 두 개가 걸렸다.​"대장님! 북문 쪽이 위험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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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3만의 파도 2

​"이걸로 뭘 하려고? 대장도 한 곡조 부를 텐가?"​"한 곡조는 무슨, 랩 배틀이나 한 판 해야죠."​나는 깔때기를 입에 대고, 성벽 밖을 향해 섰다.그리고 배에 힘을 꽉 주고 고함을 질렀다.​"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깔때기를 타고 증폭되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피리 소리가 뚝 끊겼다.​"야! 거기 피리 부는 놈! 박자가 틀렸잖아! 밥은 먹고 부냐!"​정적.왜군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일본어와 병행해서 두번 도발 중이다.​"배고프지? 우리는 방금 소고기 국밥 먹었는데! 국물이 아주 끝내주더라! 깍두기도 아삭아삭하고!"​나는 쩝쩝거리는 소리까지 리얼하게 냈다.​"거기 총대장! 우키타인지 우끼끼인지 하는 놈! 너는 쌀밥 먹냐? 네 부하들은 배고파서 손가락 빨고 있는데 혼자 처먹으니까 맛있냐!"​패드립과 식고문.전생에 인터넷 게임 채팅창에서 갈고닦은 '아가리 파이터'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네놈들 보급 끊긴 거 다 안다! 우리가 다 털어먹었거든! 니네가 먹을 쌀, 우리가 배 터지게 먹고 있다! 억울하면 들어와 보든가! 아, 못 들어오지? 문이 닫혀서!"​성벽 위의 조선군들이 킥킥거렸다.우울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와하하! 맞습니다! 놈들 쫄쫄 굶고 있을 겁니다!""야! 너네 엄마가 밥은 먹고 다니라더냐!"​병사들이 덩달아 소리치기 시작했다. 욕설과 조롱이 성벽을 넘어 왜군 진영으로 쏟아졌다.​반면, 왜군 진영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조선의 장수가 신성한 다이묘의 이름을 욕하고, 배고픈 병사들의 상처를 후벼파고 있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그만해라! 저 놈의 입을 닥치게 해라!"​어둠 속에서 일본어 고함 소리가 들렸다.​반응 좋네.​나는 한 술 더 떴다.​"야! 니네 그거 아냐? 니네 대장 고바야카와 영감탱이, 저번에 나한테 턱주가리 돌아가서 밥도 못 씹는 거? 죽만 먹는다며? 불쌍해서 어쩌냐!"​도발의 정점.적장의 치부를 건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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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불타는 진주성 1

"올라온다! 사다리를 걷어차라!"와르르 무너진 공성탑의 잔해는 놈들에게 훌륭한 계단이 되었다.박살 난 나무판자와 동료의 시체를 밟고, 왜군들이 개미 떼처럼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 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타타타타탕-!성 아래에서 수천 명의 조총수가 일제 사격을 가했다.콩 볶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이었다. 납탄이 비 오듯 쏟아져 성벽을 때렸다. 돌 틈에 박히고, 나무 기둥을 뚫고,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투구를 깨뜨렸다.핑!내 어깨를 때린 탄환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어딜."나는 옷에 묻은 납 가루를 툭툭 털었다."고개 숙여! 방패 뒤로 숨어!"나는 미숙이를 휘둘러 성벽 위로 튀어 오른 왜병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김시민 장군님!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화살도 다 떨어져 갑니다!"부관이 절규했다.3만 대군의 파상공세는 끝이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시체를 넘고 넘어 다시 기어 올라왔다. 성벽 아래는 이미 놈들의 시체로 언덕이 만들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김시민 장군은 침착했다.그는 피 묻은 칼을 뽑아 들고 성루 가장 높은 곳에 섰다."두려워 마라! 우리에겐 준비된 것이 아직 남아있다!"그의 호령과 함께 관군 포수들이 나섰다. 성벽 곳곳에 은폐해 두었던 조선의 화력 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현자총통(玄字銃筒)! 발사!"콰아아앙!포구가 불을 뿜었다.거대한 화살, 차대전(次大箭)이 붉은 꼬리를 끌며 날아갔다. 화살은 왜군 밀집 대열을 꼬치구이처럼 꿰뚫고 지나갔다. 한 발에 서너 명이 동시에 꿰뚫려 나뒹굴었다."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던져라!"도화선에 불을 붙인 둥근 쇠공들이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데구르르.왜군들이 저게 뭔가 싶어 쳐다보는 순간.콰광-! 쾅!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놈들의 하반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내가 가져온 고성능 흑색화약(입자화된 화약) 덕분에 폭발력은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쇠조각들이 비산하며 반경 10미터를 초토화시켰다."으아아악! 다리! 내 다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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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불타는 진주성 2

팽팽한 장력이 어깨를 조였다.근접전도 좋지만, 지금은 지휘관을 솎아내어 놈들의 머리를 마비시켜야 한다.피융-!화살이 전장을 가르고 날아가, 지휘하던 장교의 목을 관통했다."컥!"놈이 말에서 떨어지자 왜군들의 기세가 살짝 꺾였다."지금이다! 밀어붙여!"나는 성벽 난간을 밟고 뛰어다니며 활을 쏘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피융! 피융!백발백중.기수, 북 치는 놈, 장교. 머리가 될 만한 놈들은 모조리 내 표적이었다."괴물이다! 성벽 위에 괴물이 산다!"왜군들이 나를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총알을 맞고도 끄떡없고, 집채만 한 돌을 던지고, 백 보 밖에서 목을 꿰뚫는 사내.그 공포가 놈들의 발을 묶었다."마지막이다! 쥐어짜라!"김시민 장군이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성내의 모든 마른 짚단에 불을 붙여 성벽 아래로 던졌다.화르륵!성벽 밑이 거대한 불의 장벽으로 변했다.불길에 휩싸인 왜군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결국, 놈들이 등을 돌렸다."퇴각! 퇴각하라!"나팔 소리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적들.성벽 위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이겼다! 우리가 막아냈다!""만세! 김시민 장군 만세! 익호장군 만세!"나는 활을 내리고 주저앉았다.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후우...""대장님! 괜찮으십니까!"최가가 물바가지를 들고 달려왔다."어. 멀쩡해. 배가 좀 고프네."물을 들이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처참했다. 아군 시체와 적군 시체가 뒤엉킨 성벽. 피가 강물처럼 흘러 배수구를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뚫리지 않았다. 지켜냈다.김시민 장군이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다가왔다."자네 덕분에 살았네. 자네와 익호군이 아니었으면 오늘 동문은 뚫렸을 거야.""별말씀을요. 장군님의 전술이 기가 막혔습니다. 똥물은 진짜... 최고였습니다."우리는 마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터에서 피어나는 전우애."하지만 놈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오늘은 간만 본 거예요."나는 성벽 밖을 내다보았다.어둠 속으로 물러난 3만 대군. 놈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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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현무, 성문을 열다 1

"저게 뭐지?"최가가 손가락질했다.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시커먼 나무 구조물.바퀴가 달려 있고, 지붕에는 두꺼운 판자와 쇠가죽을 덮어씌운 흉물.충차(衝車).성문을 부수기 위해 만든 공성 병기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충차와는 달랐다. 화살과 총탄을 막기 위해 지붕을 거북이 등껍질처럼 덮어놓은 개량형이었다."저, 저거... 우리 현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요?"최가가 멍하니 말했다."비슷하긴 개뿔. 짝퉁이구만."놈들도 머리를 쓴 것이다. 성벽을 넘는 게 불가능하다면, 아예 문을 부수고 들어오겠다는 심산. 저 두꺼운 껍질은 일반 화살로는 뚫리지 않는다."성문! 성문을 노린다!"김시민 장군이 다급하게 외쳤다.충차 주변으로 왜군 정예병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호위하고 있었다. 놈들은 조총 사격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북문을 향해 직진해 왔다."막아! 돌을 던져!"병사들이 남은 돌을 던졌지만, 충차의 지붕에 맞고 튕겨 나갈 뿐이었다."젠장. 단단하네."내가 편전을 쏘아봤지만, 두꺼운 나무판자에 박힐 뿐 안까지 뚫지는 못했다.쿠웅! 쿠웅!왜군의 충차가 성문 코앞까지 왔다.놈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부숴라! 성문을 부숴라!"쿵!성문이 크게 울렸다. 빗장이 삐걱거렸다.쿵! 쿵! 쿵!성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거대한 통나무를 쇠사슬에 매달아 수십 명이 달려들어 찍어대는 소리였다."막아라! 빗장 더 걸어! 바위로 막아!"김시민 목사가 목이 터져라 고함쳤다.병사들이 성문 뒤에 바위와 쌀가마니를 쌓아 올렸지만, 충격이 올 때마다 성문 전체가 들썩였다.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지고, 두꺼운 참나무 빗장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우지끈!"뚫린다! 성문이 뚫린다!"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성벽 위를 기어오르는 놈들은 어떻게든 쳐내고 있었지만, 성문이 뚫리면 끝이다. 3만 대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면, 3,800명의 수비군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 될 터였다.나는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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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현무, 성문을 열다 2

바로 그때였다."지금이다! 축제 시작!"현무 1호기 위에서 나대용이 소리쳤다. 그는 두꺼운 가죽장갑을 끼고 고글까지 쓴 상태였다."풀무질하라! 쏴라!"익호군 장정 두 명이 현무 뒤에 달린 거대한 가죽 풀무 위로 뛰어올라 체중을 실어 밟았다.쉬이익-!강력한 공기 압력이 쇠 관을 타고 흘렀다.현무 전면부, 도깨비 입처럼 생긴 노즐 끝에 달린 심지에 불이 붙었다.그리고.쿠아아악-!고압으로 뿜어져 나온 시커먼 액체는 허공에서 불꽃을 만나 거대한 화룡(火龍)으로 변했다.숯가루와 유황이 섞인 끈적한 불덩어리가 10장(약 30미터) 앞까지 뻗어 나갔다."으아악! 불이다!""피해! 끄아악!"좁은 옹성 안은 순식간에 불지옥이 되었다.기름을 뒤집어쓴 왜군들이 횃불이 되어 춤을 췄다. 끈적한 맹화유는 갑옷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았다."계속 쏴라! 숨통을 끊어라!"나대용은 쉴 새 없이 풀무질을 독려했다. 네 대의 현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 줄기가 옹성을 가득 채웠다.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처절한 비명 소리가 진동했다."문 닫아!"나는 다시 성문 빗장을 걸었다.들어온 놈들은 못 나가고, 밖의 놈들은 못 들어온다.이제 이곳은 완벽한 밀실. 거대한 소각장이었다."대장님... 너무 끔찍합니다..."최가가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왈패 출신인 그조차도 눈 뜨고 못 볼 광경이었다."전쟁이다. 놈들이 우리한테 하려던 짓이야."나는 냉정하게 말했다.하지만 나 역시 속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자,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업보였다. 하지만 이기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그것이 난세의 법칙이었다.그때, 불길을 뚫고 튀어 나오는 놈들이 있었다.온몸에 불이 붙은 채, 고통을 잊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악귀 같은 놈들."죽어라! 같이 죽자!""조센징!"놈들은 현무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어딜."나는 미숙이를 휘둘렀다.퍼억!불타는 머리통이 날아갔다.불이 붙은 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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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야차(夜叉)의 밤 1

어둠이 내려앉은 진주성.성 밖은 시체 썩는 냄새와 매캐한 그을음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하지만 성 안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비록 수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우리는 3만 대군의 파상 공세를 이틀이나 막아냈다. 그것도 압도적인 교환비로 놈들을 태워 죽이면서."목사님, 좀 쉬십시오. 며칠 밤을 꼬박 새우셨잖습니까."부관이 간곡하게 권했지만, 김시민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아닐세. 놈들이 언제 다시 기어 올라올지 몰라. 내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겠네."그는 횃불을 든 호위병 몇 명만 대동한 채, 시체들이 즐비한 북문 쪽 성벽을 순찰하고 있었다. 갑옷은 피와 먼지로 떡이 되어 있었지만, 병사들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따뜻했다."고생이 많다. 조금만 더 버티자.""다친 곳은 좀 어떠냐. 내일은 꼭 밥 든든히 먹어라."그는 병사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주었다. 그것이 김시민이라는 장수의 리더십이었다. 권위보다는 헌신으로, 호령보다는 솔선수범으로 부하들을 이끄는 힘.나는 멀찍이서 미숙이를 닦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대단한 양반이야.'역사책에서 봤던 '충무공 김시민'.이순신 장군님과 같은 시호를 받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런 지휘관이라면 지옥 불구덩이라도 따라갈 맛이 나지.그때였다.성벽 아래, 시체 더미인 줄 알았던 검은 그림자 하나가 꿈틀했다.본능이 경고음을 울렸다.살기(殺氣).죽은 자에게선 날 수 없는, 날카롭고 끈적한 살의가 느껴졌다."장군님!"내가 소리치며 땅을 박찼다.하지만 빛보다 빠른 건 없어도, 소리보다 빠른 건 있었다.타앙-!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조총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찢어발겼다.나의 손이 닿기 직전.김시민 장군의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투구가 벗겨져 나가고, 붉은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장군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목사님!!"부관과 호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나는 그자리에 굳어버렸다.안일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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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야차(夜叉)의 밤 2

슈우우웅-10미터가 넘는 높이.바람이 귀를 때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리가 부러졌겠지만, 나는 무릎을 굽혀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다.쿵!착지와 동시에 흙먼지가 일었다.성 밖은 고요했다. 멀리서 풀벌레 소리와, 왜군 진영의 횃불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것만 보였다.'냄새가 난다.'화약 냄새. 그리고 놈들의 비릿한 살기.저격을 했던 놈들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다.나는 숲을 향해 걸었다.숨죽여 걷지 않았다. 뚜벅뚜벅, 일부러 낙엽을 밟으며 발소리를 냈다.'나 여기 있다. 쏴 봐라, 이 새끼들아.'부스럭.숲속 30보 전방. 인기척이 느껴졌다."키타!(왔다!)""빠가야로! 제 발로 죽으러 오다니!""저 거인을 쏴라!!"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타타타! 탕! 탕! 탕!세 발이 아니었다.숨어있던 10명의 그림자가 더 일어났다. 총 13개의 총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매캐한 연기가 숲을 가득 메웠다.나는 피하지 않았다. 팔을 들어 얼굴만 가렸다.티티팅! 팅! 투두둑! 퍼벅! 파파팍!총알이 팔뚝과 가슴을 사정없이 때렸고 서백설이 만들어준 붉은 누빔옷이 걸레짝처럼 변해갔다.근접 거리에서 가해진 수십 발의 총격.여러 발이 동시에 전개되다 보니, 겹겹이 쌓이는 충격에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던 탄환이 점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마치 온몸을 거세게 안마받는 기분이었다."크음..."점점 따끔해지는 통증.박힌 납탄들이 근육을 파고들려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뚫지는 못했다.나의 근육은 강철보다 질겼다. 금강불괴의 피부는 박혀있던 납탄들을 하나둘씩 밀어내고 뱉어냈다.툭, 투둑.피 묻은 납덩어리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이게... 끝이냐?"나는 연기를 뚫고 놈들을 노려보았다."바, 바케모노...!(괴, 괴물...!)"왜군들의 눈이 공포로 뒤집혔다."위치는 확인했다."나는 땅을 박찼다.쿠웅!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재장전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았다.나는 미숙이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방망이에 붉게 새겨진 '미숙가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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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야차(夜叉)의 밤 3

팟-!정적이 깨졌다.내 몸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오른손의 오다치가 은색 섬광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서걱.소리는 뒤늦게 찾아왔다.내 앞을 막아선 창병 다섯 명의 허리가 동시에 분리되었다.상체가 미끄러져 내리고, 그 단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후두둑.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나는 춤을 추듯 적진 사이를 누볐다.서걱! 퍼억!오른손의 오다치가 반원을 그리면 창대와 함께 병사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왼손의 미숙이가 내려쳐지면 투구가 찌그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되었다.베고, 부수고.베고, 부수고.단조로운 리듬이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내 주위로 붉은 원이 그려졌다. 그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으아악!""내 팔! 팔이!"비명 소리가 전장을 뒤덮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크흐흐흐..."내 귀에는 오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살이 찢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괴, 괴물이다!""칼이 안 들어가! 도망쳐!"왜군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3만 대군이 고작 한 명에게 밀리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내 숫자를 가늠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공포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 내가 휘두르는 건 무기가 아니라 재앙이었다.차락차락.찰박찰박.피에 절여진 내 바지와. 신발이 빗속을 걷는 소리를 낸다.나는 적진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피로 물든 길을 걸어, 가장 화려한 천막을 향해.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본진."막아라! 다이묘를 지켜라!"친위대 무사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실력이 제법인 놈들이었다."비켜."나는 바닥에 떨어진 쇠스랑을 주워 던져 한 놈을 꿰뚫고, 달려드는 놈의 칼을 맨손으로 잡았다.빠각!칼을 부러뜨리고, 그 부러진 칼날을 놈의 목에 박아 넣었다.그때였다.오른쪽 3시 방향.평범해 보이는 군막 하나가 미세하게 떨렸다.내 감각은 최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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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진주 대첩 1

서걱.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목이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놈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 있었다. 자신이, 일본 관백의 양자가, 조선의 이름 없는 장수에게 목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놈의 상투를 낚아챘다.그리고 높이 들어 올렸다."끄아아아아아!!"내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짐승의 포효. 아니,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의 절규였다.피를 뒤집어쓴 붉은 갑옷(누빔옷).가슴에 박힌 탄환 자국에서 흘러내리는 선혈.한 손엔 검은 방망이, 한 손엔 적장의 머리.그 모습은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될 공포 그 자체였다."아... 아아...""아카오니(赤鬼)...! 붉은 귀신이다!"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친위대 무사들이 뒷걸음질 쳤다. 칼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감히 덤빌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총대장이 죽었다. 그것도 괴물에게 잡아먹히듯 참살당했다.그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부장,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그는 우키타가 죽는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했다.'저건 사람이 아니다. 싸우면 죽는다.'사무라이의 명예? 주군에 대한 충성?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는 개나 줘버려야 할 사치였다."퇴각하라! 전군 퇴각!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호소카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그 명령은 둑이 터지는 신호탄이었다."도망쳐! 다 죽는다!""오니가 쫓아온다!"3만 대군이 무너졌다.무기를 버리고, 깃발을 버리고, 동료를 밟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 거대한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도망가는 놈들을 쫓을 힘이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자,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가슴이 뜨거웠다. 오오즈츠 탄환이 박힌 자리가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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