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말발굽 소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눈을 헤치며 달려오는 소리였다. 일정하고 무거웠다.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세레나는 창가에 서서 어둠 너머로 흔들리는 횃불을 확인한 뒤에야 수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 흰 설원 위로 붉은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적어도 스무 기.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이 시간에 누굴 찾는 거지.” 세레나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뒤에서는 검은 설표가 벽난로 옆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을 감은 척하고 있었다. 귀 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밖의 소리를 전부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레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너도 신경 쓰여?” 설표의 귀가 멈췄다. “……역시 사람 말 알아듣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산기슭을 훑고 있었다. 눈밭을 수색하는 방식이 익숙했다. 사냥꾼도, 떠돌이 용병도 아니었다. 북부의 정규 기사단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의 망토에는 멀리서도 구분되는 은빛 문장이 달려 있었다. 검은 방패 위의 은색 설표. 세레나는 그 문양을 알아봤다. 에른하르트 대공가. “대공가 기사단이네.” 벽난로 옆에 누운 라시엘의 눈이 아주 조금 떠졌다. 세레나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녀는 창가에서 물러나 연구노트를 펼쳤다. 현장 조사 허가증을 받을 때 담당 관리가 보여 준 대공가 문장이 떠올랐다. 저 문장은 북부 국경 수비대와 대공 직속 기사단만 사용했다. 그 정도 인원이 한밤중에 설원을 뒤진다면 단순한 순찰은 아니었다. “아까 그 비상종 때문인가.” 라시엘은 속으로 짧게 욕했다. 역시나였다.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월식증이 발현하기 전 깊은 산속 별장으로 들어가 밤을 보낸 뒤 새벽 전에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는 게 그간의 방식이었다. 문제는 오늘이었다. 마력 폭주가 예상보다 빨리 시작됐고, 산맥 안쪽에서 정체 모를 공격까지 받았다. 누가 일부러 그를 노린 건지, 단순히 마력 폭주가 주변의 마물을 자극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의식이 끊긴 뒤 눈을 떠 보니 웬 연구원이 자신의 꼬리를 잡고 있었고. 이제는 부하들까지 들이닥칠 참이었다. 라시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저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럼 즉시 대공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설표의 모습으로. 자신의 기사들이라 해도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가문의 비밀은 대공 직속 호위대에서도 세 명만 알고 있었다. 지금 밖을 수색하는 자들이 그 셋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들켜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 여자 앞에서는.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뭘 주워 왔는지도 모른 채 연구노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금 전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인간의 마력 회로와 비슷하다고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진실에 접근할 여자였다. 위험했다. 생각보다 훨씬. 그런데도 이상하게 죽이거나 해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과 관련된 연구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세레나가 가까이 있을수록 마력은 안정되고 있었다. 라시엘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까망이.” 또 그 이름. 라시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세레나가 뒤를 돌아봤다. “밖에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알고 있다. “대공가 기사단 같아.” 그것도 알고 있다. “혹시 널 찾는 건 아니겠지?” 라시엘은 순간 그녀를 바라봤다. 세레나의 표정에는 진짜 고민이 담겨 있었다. “희귀 마물이 대공령에 나타났다는 걸 누가 먼저 발견했나?”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연구노트를 덮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현장 보고는 아직 안 올렸고, 요한도 마을 사람들한테 그냥 부상당한 설표라고만 말했을 텐데.” 라시엘은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는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살아 있는 멸종종을 발견했다고 들떠서 바로 왕립연구소에 연락할 줄 알았는데, 아직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라시엘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세레나는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너 여기 있어.”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절대 나가지 마.”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세레나는 설표의 표정을 읽지 못한 채 벽난로 옆의 담요를 한 겹 더 덮어 주었다. “일단 네 상태부터 안정시켜야 해. 만약 대공가에서 희귀 마물이라고 데려가겠다고 하면—” 세레나는 말을 멈췄다. 라시엘은 그녀를 바라봤다. “……안 되지.” 세레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금 넘겨 줄 순 없어.”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세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벽난로 옆에 놓인 큰 이동용 천막을 끌어왔다. 마물 표본 운반용으로 쓰는 두꺼운 방한포였다. 라시엘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설마. “잠깐만 덮을게.” 설마가 맞았다. 세레나는 방한포를 펼쳐 라시엘 위로 덮기 시작했다. 라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 “쉿.” 감히 자신에게 조용히 하라고? “잠깐만.” 세레나는 진지했다. “네 정체를 알아보고 데려갈 수도 있어.” 라시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정확히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 여자가 자신을 대공가로부터 숨기고 있었다. 대공인 자신을. 자신의 기사들로부터. 그것도 커다란 천으로 덮어서. 라시엘은 태어나 처음 겪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세레나가 몸을 굳혔다. “누구십니까?” “에른하르트 대공가 직속 기사단입니다.” 낮고 단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야간 수색 중입니다. 잠시 확인하겠습니다.” 세레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문으로 향했다. 라시엘은 방한포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부기사단장 하인츠. 최악은 아니었다. 그는 월식증의 비밀을 모른다. 하지만 세레나가 자신을 보여 준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문이 열렸다. 찬 바람과 함께 눈 냄새가 방 안으로 들이쳤다. “실례하겠습니다.” 하인츠는 눈투성이 망토를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뒤에는 기사 둘이 서 있었다. 세레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조금 닫아 안쪽이 잘 보이지 않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립 마물생태연구소에서 오신 분 맞습니까?” “세레나 브리엘입니다.” 하인츠가 그녀의 조사복과 연구소 문장을 확인한 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이 근방에서 사람을 보셨습니까?” “사람이요?” 세레나는 되물었다. 하인츠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인 남자입니다.” 라시엘은 방한포 아래에서 눈을 떴다. 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즉답이었다. 하인츠가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합니까?” “네. 오늘은 현지 길잡이와 같이 있었고, 저녁 전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못 봤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세레나가 보기에는. 라시엘은 잠깐 눈을 감았다. “대신.” 세레나가 덧붙였다. 하인츠의 시선이 올라갔다. “대신?” “이 근처에서 상당히 큰 마물이 움직인 흔적은 발견했습니다.” 라시엘의 눈이 다시 떠졌다. 왜 그 말을. “종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어요. 피가 꽤 많이 떨어져 있었고요.” 하인츠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어느 방향이었습니까?” 세레나는 잠시 망설였다. 라시엘은 그 짧은 침묵을 느꼈다. 그녀는 완전히 거짓말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산맥 서쪽.” 세레나가 말했다. 실제 발견 장소와 반대 방향이었다. 라시엘은 잠깐 멍해졌다. 하인츠도 그녀의 얼굴을 살폈지만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부상당한 남자를 발견하시면 즉시 대공성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세레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중요한 분인가요?” 하인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답이었다. 세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인츠가 돌아서려다 멈췄다. 그의 시선이 방 안쪽으로 향했다. “저건 뭡니까?” 세레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벽난로 옆에 놓인 거대한 방한포 더미가 있었다. 설표 한 마리를 숨기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세레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표본입니다.” 방한포 아래 라시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표본. 또 표본. 하인츠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큰 표본이 있습니까?” “대형 마물 골격 일부예요.” 라시엘은 순간 정말로 천을 찢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골격 일부? 살아 있는 자신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하인츠가 물었다. 세레나는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세레나는 뒤늦게 설명을 붙였다. “마력 오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에 기사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효과가 좋았다. “밀봉한 상태라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일반 기사분들은.” “위험한 겁니까?” “아직 검사 전이라서요.” 세레나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잘못 건드렸다가 피부가 검게 변하거나 털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밖에 서 있던 기사가 자기 머리를 만졌다. 하인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시엘은 방한포 아래에서 처음으로 세레나가 상당히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하다니. 문이 닫히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세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갔네.” 세레나는 곧장 벽난로 옆으로 달려왔다. 방한포를 걷어 내자 검은 설표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 라시엘의 시선이 차가웠다. “숨길 방법이 없었어.” 세레나가 방한포를 치우며 말했다. “그래도 표본이라고 한 건 진짜 미안해.” 라시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레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근데 네가 너무 커서 다른 말이 생각 안 났어.” 으르릉. “알았어. 화 풀어.” 세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설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라시엘은 피하려다가 멈췄다. 손끝이 닿는 순간. 조금 전까지 기사들의 마력과 긴장 때문에 다시 요동치던 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라시엘의 눈빛이 굳었다. 확실하다. 우연이 아니다. 이 여자의 손이 닿으면 폭주가 멈춘다. 세레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손이 라시엘의 목덜미를 지나 옆구리 쪽으로 내려갔다. “아까 기사들이 찾던 사람.” 라시엘의 귀가 움직였다. “검은 머리의 남자라고 했지.” 라시엘은 꼬리를 말아 몸에 붙였다. 세레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대공가 기사단이 그 정도 인원으로 찾는 거면 귀족인가?” 라시엘은 가만히 있었다. “아니면.” 세레나의 시선이 설표에게 향했다. “대공 본인인가?” 라시엘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세레나는 그 변화를 놓쳤다. “뭐야?”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라시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반응했지?” 세레나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까망이.” 또. “혹시 대공가를 알아?” 라시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레나는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이제 둘의 얼굴 간 거리는 손바닥 하나 정도였다. 라시엘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냄새를 느꼈다. 눈 냄새. 약초. 잉크.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섞인 달콤한 향. 낯선데. 이상하게 안정되는 냄새. 세레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눈동자만 유심히 살폈다. “‘대공’이라는 단어에 반응했어.” 라시엘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역시 이해하는 거 맞지?” 그 순간 세레나가 그의 얼굴 양옆에 손을 올렸다. 라시엘이 굳었다. “한번 해 보자.” 뭘. 세레나는 매우 진지했다. “대공.” 라시엘은 가만히 있었다. “황제.” 무반응. “당근.” ……. “생선.” 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레나의 눈이 반짝였다. “생선은 좋아하나 봐.” 라시엘은 자신이 왜 이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연구소.” 라시엘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세레나.” 그 순간. 꼬리 끝이 움직였다. 세레나가 멈췄다. 라시엘도 멈췄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내 이름에 반응했어?” 라시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실수였다. “까망이.” 무반응. “세레나.” 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라시엘은 욕하고 싶었다. 세레나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진짜 알아듣는 거야?” 그녀가 본능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 알아?” 라시엘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했다. 목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면 듣게 됐다. 냄새가 가까워지면 마력이 잠잠해졌다. 손이 닿으면 몸이 긴장을 풀었다. 이 모든 게 불쾌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세레나는 한동안 그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물러났다. “피곤한가 보다.” 라시엘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드디어. 세레나는 연구도구를 정리했다. “약 먹고 자.” 약? 라시엘이 눈을 떴다. 세레나는 작은 그릇에 치료용 약초를 섞고 있었다. “육포에 섞으면 먹겠지.” 라시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잠시 뒤. 세레나는 잘게 찢은 고기에 약을 섞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먹어.” 라시엘은 그릇을 내려다봤다. 북부 대공인 자신에게. 마물용 접시. 약초 섞은 육포. “안 먹어?” 세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입맛 없나?” 라시엘은 고개를 돌렸다. “안 먹으면 약 못 먹는데.” 무시. “까망이.” 무시. “말 잘 들으면 생선 줄게.” 라시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생선 좋아하잖아.” 아니다. 방금 반응한 건 단순한 실수였다. “먹어.” 라시엘은 끝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정확히 칠 분 뒤. 그릇은 비어 있었다. 세레나는 만족스럽게 기록했다. 「관찰 02. 생선이라는 단어에 반응. 육류도 섭취. 약초가 섞여 있어도 거부 반응 없음.」 라시엘은 벽을 보고 누웠다. 이곳에서 하루라도 더 머무르면 안 된다. 반드시 새벽에 떠난다. ⸻ 밤이 깊어졌다. 세레나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설표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은 조금 내려갔다.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는 않았다. “잘 자.” 세레나는 담요를 정리해 주었다. 설표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내일 다시 검사하자.” 그녀가 불을 줄이고 침실 문을 닫았다. 라시엘은 곧바로 눈을 떴다. 기다렸다. 세레나의 호흡이 일정해질 때까지. 완전히 잠들었음을 확인한 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당겼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력도 놀라울 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나갈 수 있다. 지금 성으로 돌아가면 된다. 문제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시점이었다. 라시엘은 창문 너머 달을 확인했다. 곧 자정. 마력 흐름이 예상대로라면 변신이 풀릴 시간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쾅. 심장이 크게 뛰었다. 라시엘이 멈췄다. 마력이 뒤틀렸다. 검은 털 아래로 은빛 선이 번졌다. 예상보다 빠르게 변화가 시작됐다. 몸이 뜨거워졌다. 뼈가 뒤틀리는 통증. 숨이 거칠어졌다. 라시엘은 이를 악물 수조차 없는 짐승의 상태로 몸을 낮췄다. 안 된다. 여기서 변하면. 그 순간 침실 문이 열렸다. “까망이?” 세레나였다. 라시엘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야?” 그녀가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친 채 다가왔다. 라시엘은 으르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처음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래?” 세레나의 얼굴이 굳었다. 설표의 몸에 번진 은빛 마력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력 폭주?” 그녀가 곧장 다가왔다. 라시엘은 피하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쿵.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까망이!” 세레나가 달려왔다. 손이 그의 목과 가슴에 닿았다. 그 순간. 마력이 폭발했다. 새하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레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털을 만지고 있던 손끝의 감촉이 달라졌다. 부드러운 털. 그게 사라졌다. 대신 뜨거운 피부가 손바닥 아래에 닿았다. 세레나는 숨을 멈췄다. 빛이 가라앉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설표가 있던 자리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넓은 어깨. 상처투성이 옆구리. 그리고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세레나의 손은 여전히 남자의 가슴 위에 있었다. 쿵. 쿵. 쿵. 익숙한 심장박동. 조금 전까지 설표에게서 느끼던 것과 똑같았다. 세레나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남자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 세레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아르젠 설표의 눈. 남자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간 세레나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세레나의 얼굴로 올라왔다. 한동안 침묵. 세레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까망이?” 남자의 관자놀이가 확실하게 꿈틀했다. 그리고 아주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이름으로.” 라시엘이 세레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 번만 더 불러 봐.” 그 순간 세레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멸종 마물을 주운 게 아니었다. 남자를 주웠다.그때.북부 대공성에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세린이었다.『세레나 님!』세레나가 바로 수정구를 열었다.“무슨 일입니까?”세린의 얼굴이 창백했다.『말씀하신 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동쪽 별관 아래에서 갑자기 반응이 시작됐어요.』“어떤 반응이죠?”『문이 생겼어요.』세레나의 손이 멈췄다.“누가 열었습니까?”『아무도요.』세린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돌렸다.동쪽 별관의 오래된 복도.그 끝.원래는 평범한 돌벽이어야 할 자리에.검은 문이 나타나 있었다.문 위에는 은빛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WHO WILL OPEN THE DOOR?」그리고.그 아래.새로운 문장.「THE KEY HOLDER HAS REFUSED」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마티아스의 6년 전 거부가.아직도 남아 있었다.그런데 문은 열리고 있었다.“세린, 모두 물러나세요. 절대 접근하지 마세요.”『네!』그 순간.문 아래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SECONDARY ACCESS HOLDER DETECTED」세레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누구입니까?”세린이 화면을 확대했다.은빛 글자가 천천히 바뀌었다.「OBSERVER AUXILIARY ACCESS」「CURRENT CANDIDATE : SERENA BRIEL」세레나의 얼굴이 굳었다.자신의 이름.그러나.그녀는 지금 NODE XII에 있었다.대공성의 문 앞에 있지도 않았다.접근을 허락한 적도 없었다.그런데 시스템은 그녀를 보조 접근 후보로 지정하고 있었다.라시엘이 낮게 물었다.“네가 열쇠라는 건가?”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그녀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정확히는 저를 열쇠로 사용하려는 겁니다.”그때.검은 문 위에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CANDIDATE CONSENT : NOT REQUIRED」세레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또.같은 방식이었다.권한이 있다는 이유로.그 사람의 선택을 건너뛰고.문을 열려고 한다.세레나는 즉시 렌에게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어요.”「뭔데?」“세라가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셨죠?”「응.」“혹시 세라가 당신에게 남긴 다른 말이 있습니까?”아래에서 한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그러다.「하나 있어.」세레나의 눈빛이 달라졌다.“무슨 말입니까?”「문을 열기 전에 대답을 들으라고 했어.」“누구의 대답이요?”「안에 있는 사람.」세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합니다.”「아니.」아래의 목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문 안에 있는 사람 말고.」세레나의 손이 멈췄다.“그럼.”「문을 열려는 사람.」잠시 침묵.「그 사람한테도 물으라고 했어.」세레나의 눈빛이 달라졌다.“무엇을요?”「정말 열고 싶은지.」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문 안의 사람이 나가고 싶어 하는지 확인하는 건 당연하다.그러나 문을 여는 사람에게도 선택이 필요하다.그 행위가 위험하다면.문을 여는 사람 역시 자기 의사와 책임을 알아야 한다.“세라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압니까?”「응.」“무엇입니까?”「옛날에는 문을 여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대.」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야 했고, 문을 열고 나면 그 안에서 나온 걸 책임져야 했대.」BRIEL.KALT.HOLDER.OBSERVER.역할.권한.의무.그 모든 것과 연결되는 말이었다.세레나는 천천히 물었다.“그러니까 문을 여는 사람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응.」그 존재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열쇠가 있다고 해서 열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세레나는 그 문장을 그대로 기록했다.다음 날 아침, 세레나는 마티아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심박 안정.체온 35.8도.KALT 유지선 반응은 전날보다 낮았다.다만 기억 연속성은 여전히 불안정했다.“오늘은 실제 분리 실험을 하지 않습니다.”마티아스가 고개를 들었다.“왜?”“어제 경계 고정 회로를 조사할 때 당신의 접근키가 자동으로 반응했어요. 먼
루시가 옆에서 말했다.『그런데 240년 전 도면에 이상한 표시가 있어요.』작은 원형 문양이었다.원 안에 짧은 선 두 개.세레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자신이 예전에 본 표본 기록을 떠올렸다.검은 유리 같은 마력석.은빛 선.그리고 외부 마력을 받으면 같은 파형을 약화 없이 전달하던 구조.“렌, 7번 표본장의 검은 유리 표본과 비교해 주세요.”『응.』두 문양이 겹쳐졌다.형태 유사도 92.1%.세레나의 눈빛이 달라졌다.“중계 장치 계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라시엘이 물었다.“그럼 그 방 아래에서 수도 연구소까지 신호를 보냈다는 건가?”“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연결 경로가 확인되지 않았어요.”세레나는 세린에게 말했다.“지금은 공간을 열지 말고, 별관의 마력관 사용 기록만 확인해 주세요. 특히 제가 북부에 온 뒤부터요.”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기록이 나타났다.세레나가 북부에 도착한 날.동쪽 별관 마력관 사용량이 평소보다 3.8% 증가했다.그날 밤.검은 설표를 침대에 눕힌 직후.사용량이 다시 증가했다.그리고 라시엘이 인간으로 돌아온 새벽.별관 아래에서 아주 짧은 신호가 발생했다.「BOUNDARY RESPONSE DETECTED」세레나의 손이 멈췄다.“당시 저는 별관 아래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나도 몰랐다.”“그렇다면 그때 신호가 발생한 이유를 확인해야 합니다.”렌이 과거 기록을 더 확대했다.신호 발생 시각.라시엘의 인간형 복귀 시각과 거의 일치했다.그러나 정확히 같은 시각은 아니었다.경계 반응이 먼저 발생했고.그로부터 11초 뒤.라시엘의 형태가 안정됐다.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11초.”라시엘이 물었다.“그게 중요한가?”“인과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전하가 돌아온 결과로 신호가 발생했다고 보기에는 순서가 반대예요.”그녀는 곧바로 다른 가능성을 적었다.별관 아래의 경계 기록이 라시엘의 변화를 도왔을 수도 있다.라시엘이 변하기 직
북부 대공성 동쪽 별관의 지하에는 공식 도면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정확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록된 공간이었다.세레나는 NODE XII에서 전달받은 좌표를 세 번 확인한 뒤 북부 대공성의 건축 도면을 불러왔다. 동쪽 별관은 약 240년 전 증축됐고, 그 아래 지반은 자연 암반으로 표시돼 있었다. 지하실도, 배수로도, 비밀 통로도 없었다. 그러나 607년 전 관찰자 세라의 마지막 경계 흔적은 분명히 그 암반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더 이상한 점은 그 신호가 현재도 활성 상태라는 사실이었다.“렌, ACTIVE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부터 확인해 주세요.”『경계 기록이 지금도 응답하고 있다는 뜻이야.』“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 응답하는 겁니까?”『그건 몰라.』“독립 자기 인식은요?”『아직 확인 못 했어.』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기록 장치가 자동으로 응답해도 시스템에는 ACTIVE라고 표시될 수 있었다. 누군가 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고, 과거의 신호가 다른 회로를 통해 반복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 세라가 살아 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라시엘은 화면에 나타난 별관 도면을 한동안 바라봤다.“그 방이라면 기억한다.”세레나가 그를 돌아봤다.“제가 까망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사용했던 방이죠?”“그래.”“전하가 사람으로 돌아온 뒤 제 침대에 누워 계셔서 제가 굉장히 놀랐던 곳이기도 하고요.”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놀랐던 정도였나?”“제 연구 인생에서 가장 큰 혼란 중 하나였습니다.”“그런데 날 쫓아내지는 않았지.”“환자였으니까요.”“그 뒤에도.”세레나는 그를 잠시 바라봤다.“그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죠.”“어떻게?”“환자가 자꾸 연구원의 허리를 잡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으니까요.”옆에서 장비를 정리하던 카른이 손에 든 금속 고리를 떨어뜨렸다.챙그랑.세레나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카른 경, 괜찮습니까?”“예. 아주 괜찮습니다.”“안색이 좋지 않은데요.”“연
「누가 나를 여기 넣었는지부터 알려 줘.」NODE XII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문장은 짧았지만, 세레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찾아낸 기록은 대부분 누군가를 살리거나 되돌리겠다는 명목으로 작성돼 있었다. FIRST HEART를 복원한다는 명령도, 아르젠-1에서 사람을 꺼내겠다는 시도도, 오래된 역할을 후임자에게 넘기려던 규칙도 모두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당한 사람이 무엇을 원했는지는 언제나 가장 나중에 확인됐다.이번에는 순서를 바꿔야 했다.세레나는 측정기를 내려놓고 닫힌 문을 향해 자세를 바로 했다.“질문을 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저희가 가진 기록만으로는 누가 당신을 이곳에 넣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모른다고?」“네. 당시 사용된 권한은 확인했지만 실제로 명령을 내린 사람과 당신을 옮긴 사람이 같은지도 모릅니다.”「그럼 왜 왔어?」세레나는 잠깐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온 이유는 최종 거부권을 확인하고, 루시안의 상태를 살피고, 마티아스가 NODE XII를 떠나지 못하는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COMPANION HEART XII의 마지막 반응을 추적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 아래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은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처음부터 당신을 찾으러 온 건 아닙니다. 이곳의 오래된 권한과 경계 기록을 조사하러 왔다가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그럼 나를 꺼내러 온 것도 아니네.」“네.”「……이상하군.」“무엇이요?”「여기 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꺼내겠다고 했는데.」세레나의 눈빛이 달라졌다.“이전에 누군가 찾아왔습니까?”「여러 번.」“직접 만났습니까?”「아니.」“대화는요?”「나를 꺼내면 모두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어.」세레나는 즉시 렌을 바라봤다. 렌은 이미 NODE XII의 오래된 출입 기록을 검색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고개를 젓자 탐색 범위를 바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문을 여는 방법이 아니라, 누가 이 존재를 어떤 목적
세레나는 화면에 떠오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처음에는 번역 오류를 의심했고, 두 번째에는 앞뒤 문장이 빠졌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조금 전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세라는 아르젠-1로 돌아가고 싶었다.그것은 기록에 남아 있는 사실이었다.그러나 세라가 돌아가기 위해 AMENDMENT 04를 잠갔다는 것은 아직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다.“렌, 마지막 문장은 그대로 두고 승인 범위를 보여 주세요.”『승인 범위?』“세라가 무엇을 원했는지와 실제로 어떤 명령에 동의했는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방금 나온 건 승인 사유에 첨부된 문장이지, 실행 명령 전체가 아니잖아요.”렌의 빛이 잠시 흔들렸다.『맞아.』세레나는 관찰일지를 펼쳤다. 조금 전까지 자신도 세라가 스스로 만든 안전장치를 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기록이 실제로 증명하는 건 그보다 좁았다. 세라의 이름으로 된 관찰자 인증이 있었고, 그 인증을 이용해 AMENDMENT 04가 잠겼으며, 세라가 아르젠-1로 돌아가고 싶다는 문장을 남겼다는 것뿐이었다.“당사자가 원한 것과 시스템이 실행한 일이 같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라시엘이 옆에서 물었다.“그럼 세라가 동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건가?”“그럴 수도 있고, 일부에만 동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정말 잠그는 데 동의했을 가능성도 남아 있어요. 지금은 어느 쪽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NODE XII 아래에서 전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세라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세레나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그 사람이 얼마나 화냈는지 봤으니까. 아르젠-1에서 나왔을 때도, 자기 동의 없이 꺼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때도, 다시는 누구에게도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했을 때도 내가 옆에 있었어.”“그렇군요.”“그러니까 세라가 그 규칙을 없앴을 리 없어.”세레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차분히 대답했다.“그 기억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라가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