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말발굽 소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눈을 헤치며 달려오는 소리였다. 일정하고 무거웠다.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세레나는 창가에 서서 어둠 너머로 흔들리는 횃불을 확인한 뒤에야 수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 흰 설원 위로 붉은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적어도 스무 기.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이 시간에 누굴 찾는 거지.” 세레나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뒤에서는 검은 설표가 벽난로 옆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을 감은 척하고 있었다. 귀 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밖의 소리를 전부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레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너도 신경 쓰여?” 설표의 귀가 멈췄다. “……역시 사람 말 알아듣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산기슭을 훑고 있었다. 눈밭을 수색하는 방식이 익숙했다. 사냥꾼도, 떠돌이 용병도 아니었다. 북부의 정규 기사단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의 망토에는 멀리서도 구분되는 은빛 문장이 달려 있었다. 검은 방패 위의 은색 설표. 세레나는 그 문양을 알아봤다. 에른하르트 대공가. “대공가 기사단이네.” 벽난로 옆에 누운 라시엘의 눈이 아주 조금 떠졌다. 세레나는 그걸 보지 못했다. 그녀는 창가에서 물러나 연구노트를 펼쳤다. 현장 조사 허가증을 받을 때 담당 관리가 보여 준 대공가 문장이 떠올랐다. 저 문장은 북부 국경 수비대와 대공 직속 기사단만 사용했다. 그 정도 인원이 한밤중에 설원을 뒤진다면 단순한 순찰은 아니었다. “아까 그 비상종 때문인가.” 라시엘은 속으로 짧게 욕했다. 역시나였다.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월식증이 발현하기 전 깊은 산속 별장으로 들어가 밤을 보낸 뒤 새벽 전에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는 게 그간의 방식이었다. 문제는 오늘이었다. 마력 폭주가 예상보다 빨리 시작됐고, 산맥 안쪽에서 정체 모를 공격까지 받았다. 누가 일부러 그를 노린 건지, 단순히 마력 폭주가 주변의 마물을 자극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의식이 끊긴 뒤 눈을 떠 보니 웬 연구원이 자신의 꼬리를 잡고 있었고. 이제는 부하들까지 들이닥칠 참이었다. 라시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저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럼 즉시 대공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설표의 모습으로. 자신의 기사들이라 해도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가문의 비밀은 대공 직속 호위대에서도 세 명만 알고 있었다. 지금 밖을 수색하는 자들이 그 셋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들켜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 여자 앞에서는.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뭘 주워 왔는지도 모른 채 연구노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금 전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인간의 마력 회로와 비슷하다고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진실에 접근할 여자였다. 위험했다. 생각보다 훨씬. 그런데도 이상하게 죽이거나 해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과 관련된 연구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세레나가 가까이 있을수록 마력은 안정되고 있었다. 라시엘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까망이.” 또 그 이름. 라시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세레나가 뒤를 돌아봤다. “밖에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알고 있다. “대공가 기사단 같아.” 그것도 알고 있다. “혹시 널 찾는 건 아니겠지?” 라시엘은 순간 그녀를 바라봤다. 세레나의 표정에는 진짜 고민이 담겨 있었다. “희귀 마물이 대공령에 나타났다는 걸 누가 먼저 발견했나?”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연구노트를 덮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현장 보고는 아직 안 올렸고, 요한도 마을 사람들한테 그냥 부상당한 설표라고만 말했을 텐데.” 라시엘은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는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살아 있는 멸종종을 발견했다고 들떠서 바로 왕립연구소에 연락할 줄 알았는데, 아직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라시엘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세레나는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너 여기 있어.”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절대 나가지 마.”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세레나는 설표의 표정을 읽지 못한 채 벽난로 옆의 담요를 한 겹 더 덮어 주었다. “일단 네 상태부터 안정시켜야 해. 만약 대공가에서 희귀 마물이라고 데려가겠다고 하면—” 세레나는 말을 멈췄다. 라시엘은 그녀를 바라봤다. “……안 되지.” 세레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금 넘겨 줄 순 없어.”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세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벽난로 옆에 놓인 큰 이동용 천막을 끌어왔다. 마물 표본 운반용으로 쓰는 두꺼운 방한포였다. 라시엘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설마. “잠깐만 덮을게.” 설마가 맞았다. 세레나는 방한포를 펼쳐 라시엘 위로 덮기 시작했다. 라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 “쉿.” 감히 자신에게 조용히 하라고? “잠깐만.” 세레나는 진지했다. “네 정체를 알아보고 데려갈 수도 있어.” 라시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정확히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 여자가 자신을 대공가로부터 숨기고 있었다. 대공인 자신을. 자신의 기사들로부터. 그것도 커다란 천으로 덮어서. 라시엘은 태어나 처음 겪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세레나가 몸을 굳혔다. “누구십니까?” “에른하르트 대공가 직속 기사단입니다.” 낮고 단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야간 수색 중입니다. 잠시 확인하겠습니다.” 세레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문으로 향했다. 라시엘은 방한포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부기사단장 하인츠. 최악은 아니었다. 그는 월식증의 비밀을 모른다. 하지만 세레나가 자신을 보여 준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문이 열렸다. 찬 바람과 함께 눈 냄새가 방 안으로 들이쳤다. “실례하겠습니다.” 하인츠는 눈투성이 망토를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뒤에는 기사 둘이 서 있었다. 세레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조금 닫아 안쪽이 잘 보이지 않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립 마물생태연구소에서 오신 분 맞습니까?” “세레나 브리엘입니다.” 하인츠가 그녀의 조사복과 연구소 문장을 확인한 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이 근방에서 사람을 보셨습니까?” “사람이요?” 세레나는 되물었다. 하인츠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인 남자입니다.” 라시엘은 방한포 아래에서 눈을 떴다. 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즉답이었다. 하인츠가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합니까?” “네. 오늘은 현지 길잡이와 같이 있었고, 저녁 전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못 봤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세레나가 보기에는. 라시엘은 잠깐 눈을 감았다. “대신.” 세레나가 덧붙였다. 하인츠의 시선이 올라갔다. “대신?” “이 근처에서 상당히 큰 마물이 움직인 흔적은 발견했습니다.” 라시엘의 눈이 다시 떠졌다. 왜 그 말을. “종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어요. 피가 꽤 많이 떨어져 있었고요.” 하인츠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어느 방향이었습니까?” 세레나는 잠시 망설였다. 라시엘은 그 짧은 침묵을 느꼈다. 그녀는 완전히 거짓말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산맥 서쪽.” 세레나가 말했다. 실제 발견 장소와 반대 방향이었다. 라시엘은 잠깐 멍해졌다. 하인츠도 그녀의 얼굴을 살폈지만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부상당한 남자를 발견하시면 즉시 대공성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세레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중요한 분인가요?” 하인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답이었다. 세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인츠가 돌아서려다 멈췄다. 그의 시선이 방 안쪽으로 향했다. “저건 뭡니까?” 세레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벽난로 옆에 놓인 거대한 방한포 더미가 있었다. 설표 한 마리를 숨기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세레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표본입니다.” 방한포 아래 라시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표본. 또 표본. 하인츠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큰 표본이 있습니까?” “대형 마물 골격 일부예요.” 라시엘은 순간 정말로 천을 찢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골격 일부? 살아 있는 자신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하인츠가 물었다. 세레나는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세레나는 뒤늦게 설명을 붙였다. “마력 오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에 기사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효과가 좋았다. “밀봉한 상태라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일반 기사분들은.” “위험한 겁니까?” “아직 검사 전이라서요.” 세레나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잘못 건드렸다가 피부가 검게 변하거나 털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밖에 서 있던 기사가 자기 머리를 만졌다. 하인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시엘은 방한포 아래에서 처음으로 세레나가 상당히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하다니. 문이 닫히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세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갔네.” 세레나는 곧장 벽난로 옆으로 달려왔다. 방한포를 걷어 내자 검은 설표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 라시엘의 시선이 차가웠다. “숨길 방법이 없었어.” 세레나가 방한포를 치우며 말했다. “그래도 표본이라고 한 건 진짜 미안해.” 라시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레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근데 네가 너무 커서 다른 말이 생각 안 났어.” 으르릉. “알았어. 화 풀어.” 세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설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라시엘은 피하려다가 멈췄다. 손끝이 닿는 순간. 조금 전까지 기사들의 마력과 긴장 때문에 다시 요동치던 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라시엘의 눈빛이 굳었다. 확실하다. 우연이 아니다. 이 여자의 손이 닿으면 폭주가 멈춘다. 세레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손이 라시엘의 목덜미를 지나 옆구리 쪽으로 내려갔다. “아까 기사들이 찾던 사람.” 라시엘의 귀가 움직였다. “검은 머리의 남자라고 했지.” 라시엘은 꼬리를 말아 몸에 붙였다. 세레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대공가 기사단이 그 정도 인원으로 찾는 거면 귀족인가?” 라시엘은 가만히 있었다. “아니면.” 세레나의 시선이 설표에게 향했다. “대공 본인인가?” 라시엘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세레나는 그 변화를 놓쳤다. “뭐야?”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라시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반응했지?” 세레나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까망이.” 또. “혹시 대공가를 알아?” 라시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레나는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이제 둘의 얼굴 간 거리는 손바닥 하나 정도였다. 라시엘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냄새를 느꼈다. 눈 냄새. 약초. 잉크.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섞인 달콤한 향. 낯선데. 이상하게 안정되는 냄새. 세레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눈동자만 유심히 살폈다. “‘대공’이라는 단어에 반응했어.” 라시엘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역시 이해하는 거 맞지?” 그 순간 세레나가 그의 얼굴 양옆에 손을 올렸다. 라시엘이 굳었다. “한번 해 보자.” 뭘. 세레나는 매우 진지했다. “대공.” 라시엘은 가만히 있었다. “황제.” 무반응. “당근.” ……. “생선.” 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레나의 눈이 반짝였다. “생선은 좋아하나 봐.” 라시엘은 자신이 왜 이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연구소.” 라시엘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세레나.” 그 순간. 꼬리 끝이 움직였다. 세레나가 멈췄다. 라시엘도 멈췄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내 이름에 반응했어?” 라시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실수였다. “까망이.” 무반응. “세레나.” 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라시엘은 욕하고 싶었다. 세레나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진짜 알아듣는 거야?” 그녀가 본능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 알아?” 라시엘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했다. 목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면 듣게 됐다. 냄새가 가까워지면 마력이 잠잠해졌다. 손이 닿으면 몸이 긴장을 풀었다. 이 모든 게 불쾌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세레나는 한동안 그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물러났다. “피곤한가 보다.” 라시엘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드디어. 세레나는 연구도구를 정리했다. “약 먹고 자.” 약? 라시엘이 눈을 떴다. 세레나는 작은 그릇에 치료용 약초를 섞고 있었다. “육포에 섞으면 먹겠지.” 라시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잠시 뒤. 세레나는 잘게 찢은 고기에 약을 섞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먹어.” 라시엘은 그릇을 내려다봤다. 북부 대공인 자신에게. 마물용 접시. 약초 섞은 육포. “안 먹어?” 세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입맛 없나?” 라시엘은 고개를 돌렸다. “안 먹으면 약 못 먹는데.” 무시. “까망이.” 무시. “말 잘 들으면 생선 줄게.” 라시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생선 좋아하잖아.” 아니다. 방금 반응한 건 단순한 실수였다. “먹어.” 라시엘은 끝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정확히 칠 분 뒤. 그릇은 비어 있었다. 세레나는 만족스럽게 기록했다. 「관찰 02. 생선이라는 단어에 반응. 육류도 섭취. 약초가 섞여 있어도 거부 반응 없음.」 라시엘은 벽을 보고 누웠다. 이곳에서 하루라도 더 머무르면 안 된다. 반드시 새벽에 떠난다. ⸻ 밤이 깊어졌다. 세레나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설표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은 조금 내려갔다.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는 않았다. “잘 자.” 세레나는 담요를 정리해 주었다. 설표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내일 다시 검사하자.” 그녀가 불을 줄이고 침실 문을 닫았다. 라시엘은 곧바로 눈을 떴다. 기다렸다. 세레나의 호흡이 일정해질 때까지. 완전히 잠들었음을 확인한 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당겼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력도 놀라울 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나갈 수 있다. 지금 성으로 돌아가면 된다. 문제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시점이었다. 라시엘은 창문 너머 달을 확인했다. 곧 자정. 마력 흐름이 예상대로라면 변신이 풀릴 시간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쾅. 심장이 크게 뛰었다. 라시엘이 멈췄다. 마력이 뒤틀렸다. 검은 털 아래로 은빛 선이 번졌다. 예상보다 빠르게 변화가 시작됐다. 몸이 뜨거워졌다. 뼈가 뒤틀리는 통증. 숨이 거칠어졌다. 라시엘은 이를 악물 수조차 없는 짐승의 상태로 몸을 낮췄다. 안 된다. 여기서 변하면. 그 순간 침실 문이 열렸다. “까망이?” 세레나였다. 라시엘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야?” 그녀가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친 채 다가왔다. 라시엘은 으르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처음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래?” 세레나의 얼굴이 굳었다. 설표의 몸에 번진 은빛 마력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력 폭주?” 그녀가 곧장 다가왔다. 라시엘은 피하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쿵.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까망이!” 세레나가 달려왔다. 손이 그의 목과 가슴에 닿았다. 그 순간. 마력이 폭발했다. 새하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레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털을 만지고 있던 손끝의 감촉이 달라졌다. 부드러운 털. 그게 사라졌다. 대신 뜨거운 피부가 손바닥 아래에 닿았다. 세레나는 숨을 멈췄다. 빛이 가라앉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설표가 있던 자리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넓은 어깨. 상처투성이 옆구리. 그리고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세레나의 손은 여전히 남자의 가슴 위에 있었다. 쿵. 쿵. 쿵. 익숙한 심장박동. 조금 전까지 설표에게서 느끼던 것과 똑같았다. 세레나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남자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 세레나는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아르젠 설표의 눈. 남자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간 세레나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세레나의 얼굴로 올라왔다. 한동안 침묵. 세레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까망이?” 남자의 관자놀이가 확실하게 꿈틀했다. 그리고 아주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이름으로.” 라시엘이 세레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 번만 더 불러 봐.” 그 순간 세레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멸종 마물을 주운 게 아니었다. 남자를 주웠다.“아직 아무도 열지 못한 방의 열쇠지.”황태자 클라우드의 손끝에서 낡은 은빛 열쇠가 천천히 흔들렸다.북부의 차가운 햇빛이 변색된 금속 표면을 스쳤다. 손잡이에 새겨진 것은 분명 브리엘의 문장이었다. 두 개의 반원과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별. 어제 에른하르트의 지하 기록실에서 세레나의 피에 반응해 열렸던 보관함에도 같은 문양이 있었다.세레나는 열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로웬이 사라지기 사흘 전.황실 연구원에 맡긴 물건.그리고 세레나 브리엘이 직접 찾아오는 날에만 넘기라는 조건.이상했다.너무 이상했다.“교수님이 직접 맡겼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클라우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첫 질문이 그것인가?”“중요하니까요.”“내가 황태자라는 사실보다?”“전하께서 황태자라는 사실과 그 열쇠의 출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굳었다.황실 수행원들 가운데 몇 명이 세레나를 쳐다봤다. 카른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라시엘은 오히려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클라우드는 그런 라시엘을 잠깐 보더니 다시 세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듣던 대로군.”세레나의 눈썹이 움직였다.“어제부터 다들 저를 들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대체 누구에게 뭘 들으신 겁니까?”“여러 사람에게.”“구체적으로요.”“세레나.”라시엘이 낮게 불렀다.그제야 세레나는 자신이 황태자를 성문 앞에 세워 둔 채 심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죄송합니다.”클라우드가 작게 웃었다.“나는 재미있으니 괜찮다.”“나는 안 괜찮습니다.”라시엘이 즉시 잘랐다.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웃고 있는 클라우드.표정 없는 라시엘.그 사이에 선 세레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구실의 위험한 마물 두 마리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물론 한쪽은 정말 마물로 변하기도 했다.그 생각을 한 순간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왜.”“아무것도 아닙니다.”“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안 했습니다.”“표정이 그랬는데.”
“교수님.” 이번에는. 그 이름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세레나는 사진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로웬 브리엘. 자신이 열여섯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처음 만난 교수. 말수가 적고, 학생을 칭찬하는 법도 거의 없고, 논문을 가져가면 빨간 잉크로 여백을 가득 채우던 사람. 처음 아르젠 설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였다. ‘기록이 이상하면 기록부터 의심해.’ ‘생물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아르젠이 정말 멸종했는지는 네가 직접 확인해.’ 그 말들이. 이제는 전부 달라졌다. 그 사람은 아르젠을 몰라서 세레나에게 연구를 맡긴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아르젠이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3실험실이 있다는 것도. 브리엘이라는 혈통이 그 실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에블린이 브리엘의 숨겨진 계열이었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세레나가 사진을 뒤집었다. 「아이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를 날이 오지 않기를.」 글씨가 흐릿해졌다. 세레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글씨가 다시 선명해졌다. 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보다 먼저 드는 건 화였다. “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라시엘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제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아르젠 기록의 공백. 삼백 년 전 문헌의 불일치. 왜 아르젠의 마력 구조가 인간과 닮았는지. 왜 관련 자료만 이상하게 누락되어 있는지. 세레나는 학생 때부터 물었다. 로웬은 늘 비슷하게 답했다. ‘네가 찾아.’ ‘가설부터 세워.’ ‘남이 주는 답을 믿지 마.’ 그때는 그것이 교육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교육이면서 동시에. 회피였다. 세레나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교수님은 제가 어디까지 알아낼지 보고 있었던 거네요.” 카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단정하
“같은 브리엘로서.”문 너머의 남자가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꼭 만나 뵙고 싶다고.”세레나는 손에 들린 명함을 내려다봤다.「엘리엇 브리엘」몇 번을 봐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브리엘.자신과 같은 성.그런데 황실 마력연구원의 수석 연구관.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수십 개의 가설이 떠올랐다.먼 친척.분가.호적에서 지워진 방계.혹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세레나는 마지막 가능성에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어제 습격자는 자신을 정확히 ‘브리엘의 후손’이라고 불렀다.황실은 브리엘 혈통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날.황실에서 또 다른 브리엘을 보냈다.우연이라고 보기에는.지나치게 정교했다.“들여보낼까요?”카른이 낮게 물었다.라시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문이 아니라 세레나에게 향해 있었다.“싫으면 안 만나도 된다.”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제가요?”“그래.”“하지만 저를 만나러 왔다잖아요.”“그래서 더.”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황실이 네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틀리지 않았다.엘리엇 브리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미끼일 수도 있었다.동요하는지.아는 것이 있는지.로웬 브리엘에게서 무엇을 들었는지.자신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그렇다면 더 만나야 합니다.”라시엘의 미간이 좁아졌다.“세레나.”“저 사람이 저를 확인하려는 거라면 저도 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잖아요.”“위험하다.”“여기는 전하의 성입니다.”“그래도.”“그리고.”세레나는 문을 바라봤다.“계속 피하면 황실은 제가 뭔가 알고 있다고 확신할 겁니다.”카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은 맞습니다.”라시엘이 카른을 차갑게 봤다.“누구 편이지.”“전하 편입니다.”카른은 아주 태연했다.“그래서 현실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라시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결국 말했다.“들여보내.”카른이 문으로 향했다.그런데
“황태자가 직접 옵니다.”카른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집무실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세레나는 손에 들린 황태자궁의 서신을 다시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완벽한 문장이었다. 북부의 이상 마력 반응을 조사하겠다는 명분도 있었고, 왕립 마물생태연구소 소속인 자신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는 절차도 틀린 데가 없었다.문제는 타이밍이었다.세레나가 라시엘과 함께 대공성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자신이 브리엘의 안정화 인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오늘 아침이었다.그런데 사흘 뒤.황태자가 직접 온다.너무 정확했다.“혹시 원래 황태자 전하께서 북부를 자주 방문하십니까?”세레나가 물었다.카른이 코웃음을 쳤다.“지난 오 년 동안 한 번도 없습니다.”“그럼 굉장히 오랜만이네요.”“오랜만이라기보다 처음에 가깝습니다.”세레나는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명분은 충분합니다. 북부에서 정체불명의 습격이 있었고, 마물성 마력 반응까지 발견됐으니까요.”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그자의 편을 들 생각인가?”“아뇨.”세레나는 바로 부정했다.“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뭘.”“이렇게 명분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오히려 의심해야죠.”라시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세레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황실이 정말 어제 습격과 무관하다면, 마력 이상이 보고된 직후 황태자가 직접 움직일 이유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대로 관련이 있다면…….”“실패 여부를 직접 확인하러 오는 거겠지.”카른이 말을 받았다.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저도요.”짧은 침묵.라시엘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사흘 동안 성 밖으로 나가지 마.”“전하.”“연구소에도 당분간 돌아가지 않는다.”“그건 곤란합니다.”“왜.”“제 연구 자료가 연구소에 남아 있습니다.”“사람을 보내.”“제가 직접 분류해야 하는 자료도 있고요.”“안 된다.”“폐쇄 절차가 시작되면 다른 연
세레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정확히는.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았다.눈을 감으면 지하 기록실에서 본 문장들이 떠올랐다.「브리엘의 혈통은 아직 남아 있다.」「안정화 인자의 마지막 계승자를 황실보다 먼저 숨겨야 한다.」그리고.라시엘에게 손을 대는 순간마다 거짓말처럼 가라앉던 마력.설원에서.마차 안에서.습격을 받았을 때.심지어 완전 변이 직전에도.자신이 가까이 가자 그의 변화가 멈췄다.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그다음에는 마력 상성.그리고 이제는.삼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의도적인 무언가가 자신의 피 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까지 생겼다.세레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마지막 계승자라.”입 밖으로 내놓자 더 이상했다.자신은 평범한 연구원이었다.정확히는 멸종한 마물 하나에 인생을 걸어서 연구실까지 폐쇄될 위기에 놓인 조금 이상한 연구원.그 정도였다.브리엘 가문이라고 해 봐야 몰락한 귀족가.어릴 때부터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은 적도 없었다.마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었다.왕립 아카데미에서 받은 평가도 늘 비슷했다.‘마력량은 평균.’‘정밀 제어 능력 우수.’‘실전 마법에는 부적합.’그래서 연구자가 됐다.마법을 직접 쓰기보다 분석하는 쪽이 훨씬 잘 맞았으니까.그런데.그 평범한 마력이 라시엘에게는 다르다고 했다.세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탁자 위에는 어젯밤 급하게 정리해 둔 기록장이 펼쳐져 있었다.그녀는 펜을 집었다.그리고 한참 동안 빈 종이를 바라보다 첫 줄을 적었다.「비공개 치료 관찰 기록.」잠시 생각.그 아래.「피관찰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 대공.」세레나의 펜이 멈췄다.‘피관찰자’라는 표현도 조금 이상했다.‘연구 협력자.’그게 낫겠다.줄을 긋고 다시 적었다.「연구 협력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조금 마음에 들었다.그 아래.「연구자 : 세레나 브리엘.」그리고 마지막으로.「기록은 당사자 동의 없이 외부 공개하지 않음.」세레나는 그 문장을 두
딸깍.기록실 가장 안쪽.수백 년 동안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철제 보관함의 문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세레나는 숨을 멈췄다.누가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라시엘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고, 그의 손은 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보관함에서 적어도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었다.그런데.끼이익—묵직한 철문이 조금 더 열렸다.틈 사이로 은빛 빛이 흘러나왔다.마력.그런데 이상했다.라시엘에게서 느껴지는 거칠고 차가운 마력과는 전혀 달랐다. 공격자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검고 탁한 마력과도 달랐다.따뜻했다.마력에 온도가 있을 리 없는데.세레나는 이상하게 그렇게 느꼈다.그리고 그 순간.“……!”왼쪽 손목이 뜨거워졌다.세레나가 반사적으로 손목을 감쌌다.“세레나?”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돌아봤다.“왜.”“손목이…….”세레나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아무것도 없었다.상처도.붉어진 흔적도.그런데 피부 아래에서 뜨거운 맥박 같은 것이 뛰고 있었다.쿵.쿵.심장과는 다른 박동.세레나가 미간을 좁혔다.“이상합니다.”라시엘이 그녀의 손목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아까 정한 약속이 떠오른 듯했다.세레나는 그걸 보고 먼저 손목을 내밀었다.“만져보셔도 됩니다.”라시엘의 눈이 잠깐 그녀에게 향했다.그리고 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감쌌다.뜨거운 피부.그 순간.은빛 빛이 더 강해졌다.“…….”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세레나도 같은 걸 봤다.보관함 안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마치 반응하듯 한 번 크게 뛰었다.“지금.”세레나가 낮게 말했다.“전하가 저를 만지니까 반응했습니다.”“아니.”라시엘의 시선은 보관함에 고정되어 있었다.“내 마력에 반응한 게 아니다.”“그럼요?”“너다.”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제가요?”“내가 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 아니야.”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저 보관함도 수십 번 봤다.”세레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한 번도 열린 적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