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세레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거대한 검은 설표가 쓰러져 있던 자리였다. 은빛 마력선이 털 아래를 번져 가고, 몸이 경련하듯 굳더니 갑자기 눈앞을 덮은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남자. 아주 멀쩡하게 인간의 형태를 한,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 세레나는 자신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다. 그러나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과 단단한 가슴의 감촉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쿵. 쿵. 쿵. 심장박동도. 설표였을 때와 정확히 같았다. 세레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의 손은 여전히 남자의 맨가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리고 손목은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 “…….” 기묘할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세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제 손부터 놓아주시겠습니까?” 남자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내 몸에서 손을 먼저 떼는 게 순서 아닌가.” 세레나는 아래를 봤다. 자신의 손. 남자의 가슴. 다시 남자의 얼굴. “아.” 그제야 황급히 손을 떼려 했지만 손목은 여전히 붙잡혀 있었다. “놓으셔야 뗄 수 있는데요.” 남자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그는 마치 세레나가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처럼 바라봤지만, 몇 초 뒤 손에서 힘을 풀었다. 세레나는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상황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 남자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 곳곳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고, 특히 왼쪽 옆구리에는 세레나가 조금 전 설표에게 감아 놓았던 붕대가 그대로 감겨 있었다. 크기가 달라졌을 뿐 위치도 같았다. 세레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황스러움보다 연구자로서의 집중력이 더 빠르게 돌아왔다. “붕대.” 남자가 눈썹을 움직였다. “뭐?” “제가 감은 붕대가 그대로 있어요.” 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상처 위치도 같고.” “…….” “그럼 신체 변화 과정에서도 외부 물질은 같이 축소되거나 형태가 유지되는 건가? 아니면 변신할 때 마력장이 주변 물질까지 끌어들여서—” “지금.”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세레나는 멈췄다. “그게 궁금한가?” “네.”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세레나는 뒤늦게 그의 표정을 보고 조금 눈치를 챘다. “……아니, 물론 그것만 궁금한 건 아닙니다.” “그렇겠지.” “어떻게 사람이 설표로 변했는지도 궁금하고요.” 남자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레나는 그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질문 순서가 잘못됐다. 상대가 누구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 질문에 남자는 세레나를 오래 바라봤다.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으려는 것처럼. “모르는 건가?” “뭘요?” “나를.” 세레나는 잠깐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높은 콧대와 날카로운 눈매. 회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 검은 머리칼. 귀족으로 보일 만큼 단정한 이목구비와, 부상을 입고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분위기.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왕도 사교계에 거의 발을 들이지 않는 세레나에게 귀족들의 얼굴은 전공 밖이었다. “유명하신 분입니까?” 남자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세레나는 혹시 실례했나 싶어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왕도 사교계 쪽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 “학술원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데.” “아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모르면 됐다.” “그럼 성함을—” “라시엘.” 세레나는 펜을 찾을 뻔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라시엘.” 그녀가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성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에른하르트.” 세레나의 표정이 멈췄다. 이번에는 정말로. 몇 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벽난로 안에서 나무가 타닥 하고 무너지는 소리만 들렸다. 세레나가 천천히 물었다. “에른하르트……요?” “그래.” “그 에른하르트요?” “에른하르트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군.” 세레나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제야 퍼즐 조각들이 맞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대공가 기사단이 수십 명씩 나와 찾던 사람. 검은 머리. 중요한 사람. 에른하르트 대공령. 그리고 라시엘 에른하르트. 북부의 주인. “……대공 전하?” “이제 알아보겠나.” 세레나는 침묵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놀랍게도 신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었다. 꼬리를 잡았다. 귀 뒤를 긁었다. 가슴을 만졌다. 배 가까이 손을 넣어 상처를 확인했다. ‘착하다’고 했다. 까망이라고 이름 붙였다. 생선 준다고 달랬다. 무릎에 머리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대공가 기사단에게 대공 본인을 방한포로 덮어 숨긴 뒤 대형 마물 골격 표본이라고 거짓말했다. 세레나는 아주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 “왜 그러지?” “잠시만요.” “뭘.” “제가 지금.” 세레나는 한숨을 삼켰다. “살면서 저지른 실수 순위를 다시 매기고 있습니다.” 라시엘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보기엔 부족했지만 분명 이전과는 달랐다. “결론은?” “오늘이 압도적인 1위입니다.” 라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레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가 아까 전하의 꼬리를—” “말하지 마.” 즉답이었다. 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 “그럼 까망이라고—” “그것도.” “착하다고—” “세레나 브리엘.” 이번에는 이름까지 불렸다. 세레나는 바로 조용해졌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제 이름을 알고 계셨네요.” 라시엘의 눈빛이 굳었다. 세레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아, 기사단이 말했을 때 들으셨겠군요.” “……그렇다.”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다. 기사단. 그때 이 남자는 완전히 설표였다. 그렇다면. “전하.” “왜.” “설표 상태에서도 사람 말을 전부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라시엘이 침묵했다. 세레나의 눈이 반짝였다. 아까까지의 민망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 제가 했던 말도 전부—” “전부 들었다.” 세레나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연구노트에 적어둔 기록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까망이’. ‘내 논문’. ‘성질 더럽고’. ‘꼬리는 예쁜데’. 그리고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말했다. ‘춥지?’ 세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벽을 바라봤다. 라시엘이 물었다. “왜 벽을 보지?” “지금은 전하의 얼굴을 보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조금?” “상당히.” 그는 이번에는 확실히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세레나가 그걸 봤다면 더욱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시엘도 오래 웃을 상태는 아니었다. 갑자기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세레나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전하?” 라시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고 있었다. “상처가—” “괜찮다.” “안 괜찮아 보입니다.” 세레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라시엘이 손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늦었다. 세레나는 이미 그의 옆구리에 감긴 붕대를 살피고 있었다. 붕대 가장자리가 붉게 젖어 있었다. 변신 과정에서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 “다시 출혈합니다.” “이 정도는.” “이 정도 아니에요.” 세레나는 단호했다. “잠깐 누우세요.”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는데도 명령하는군.” “환자는 환자니까요.” “나는 환자가 아니다.” 세레나는 붕대를 바라봤다. “피를 흘리고 있고 열이 있고 마력 폭주까지 일으켰는데 환자가 아니면 뭡니까?” 라시엘은 할 말을 잃었다. 세레나는 기다리지 않고 거실 한쪽의 긴 소파를 가리켰다. “저기로 가세요.” “…….” “전하.” “왜.” “다시 설표로 변해서 쓰러지시면 제가 또 옮겨야 합니다.” 라시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지금 걸을 수 있을 때 움직이세요.” 이상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못 보겠다고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상처를 발견한 순간 다시 연구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라시엘은 결국 소파 쪽으로 걸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몸이 흔들렸다. 세레나가 반사적으로 팔을 잡았다. “조심하세요.” 라시엘의 몸이 순간 굳었다. 손목을 잡는 정도의 접촉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들끓던 마력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의 손으로 향했다. 세레나는 그 변화를 모르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녀는 라시엘을 소파에 앉힌 뒤 약품함을 열었다. 라시엘은 손목에 남은 감각을 바라보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닿으면 가라앉는다. 설표의 몸일 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상태에서도. 이 여자의 접촉 자체가 자신의 마력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셔츠 같은 건 없나.” 라시엘이 물었다. 그 말에 세레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지했다. 지금까지 치료 생각에 잊고 있었다. 라시엘은 상체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였다. 설표에서 인간으로 변했으니 당연했다. 아래쪽은 변신 당시 붕대와 마력이 어찌어찌 최소한의 형태를 만들어 준 듯했지만, 그것도 아주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세레나는 매우 빠르게 시선을 위로 올렸다. “있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세레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라시엘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까까지 몸 곳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던 여자가 이제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설표일 때와 인간일 때의 차이를 본인만 지나치게 크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세레나가 셔츠 한 벌과 얇은 바지를 들고 나왔다. “연구소에서 현장복으로 준비해 둔 겁니다. 전하께는 조금 작을 수도 있어요.” 라시엘이 옷을 받았다. 손가락이 잠깐 스쳤다. 그 순간. 쿵. 마력핵이 반응했다. 라시엘의 시선이 낮아졌다. 세레나가 멈칫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라시엘은 손을 거뒀다. 지금 확신하면 안 된다. 이 현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월식증에 이런 반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읽은 가문 기록에는. 그렇다면 이 여자에게 무언가가 있다. 그 사실을 세레나가 먼저 알아채게 해서는 안 됐다. 그녀는 연구원이었다. 한 번 의문을 품으면 끝까지 파고들 사람이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았다. “갈아입으세요.” 세레나가 돌아섰다. “보지 않나?” “당연히 안 봅니다.” “설표일 때는 그렇게 잘 보더니.” 세레나의 등이 그대로 굳었다. 라시엘이 덧붙였다. “가슴도 만지고.” “전하.” “꼬리도.” “그건 연구였습니다.” “그래.” “정말로요.” “알고 있다.” “말씀하시는 방식이 전혀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라시엘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세레나는 등을 돌린 채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라시엘이 말했다. “됐다.” 세레나가 돌아봤다. 셔츠는 예상대로 조금 작았다. 어깨선이 팽팽했고 목 부분도 완전히 잠기지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이제 시선을 둘 곳이 생겼다. 세레나는 안도하며 약품을 들고 그의 앞에 앉았다. “붕대 풀겠습니다.” 라시엘의 눈썹이 올라갔다. “방금은 보지 않겠다더니.” “치료는 다릅니다.” “편리한 기준이군.” 세레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셔츠를 조금 들어 올리고 붕대를 풀었다. 다시 피부가 드러났다. 이번에는 연구자로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설표일 때와 달랐다. 같은 상처. 같은 위치. 분명 같은 존재인데. 손끝에 닿는 것은 털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였다. 뜨겁고 단단한 복부. 상처 주변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까지 손끝에 그대로 느껴졌다. 세레나는 숨을 조금 느리게 내쉬었다. 집중하자. 상처. 치료. 그것만 보면 된다. “아플 겁니다.” “설표일 때도 말했지.” “그때도 아프셨습니까?” “당연하지.” 세레나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 잘 참으셨네요.” “…….” “정말 착—” 세레나는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라시엘의 눈빛이 내려왔다. “계속해 봐.” “아닙니다.” “아까는 잘만 하더군.” “그건 설표였잖아요.” “같은 존재다.” 세레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논리적으로는 맞았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전하께서는 별 차이가 없으십니까?” 이번에는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지.” “설표일 때와 지금이요.” 세레나는 상처를 닦으며 물었다. “몸이 변하잖아요. 감각이나 사고방식도 달라집니까?” 라시엘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왜 묻지?” “연구—” 세레나는 멈췄다.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이 연구 대상으로 삼아도 되는 마물이 아니었다. 북부 대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죄송합니다.” 세레나가 손을 거뒀다. “습관적으로.” 라시엘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계속 물어도 된다.” 세레나의 눈이 올라갔다. “정말입니까?” “내가 대답할지는 별개지만.” 그래도 허락은 허락이었다. 세레나의 눈빛이 즉시 달라졌다. 라시엘은 속으로 후회했다. 너무 빨리 허락한 것 같았다. “설표 상태에서도 자아가 완전히 유지됩니까?” “대부분.” “대부분?” “시간이 길어질수록 흐려진다.” 세레나의 손이 멈췄다. “기억도요?” 라시엘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 세레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늘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에는 거의 없었다.” “제가 발견했을 때?” “아마.” “그럼 제가 꼬리를 잡았을 때는요?” 라시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아주 선명했다.” 세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필 그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잠시 정적. 세레나는 새로운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전하.” “말해.” “이건 저주입니까?” 라시엘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질문이 너무 정확했다. 세레나는 그 반응만으로도 어느 정도 답을 얻었다. “말하기 곤란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자연적인 변신으로 보기에는 마력 구조가 이상합니다.” 세레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전하가 설표였을 때 측정한 마력핵은 일반적인 마물과 달랐어요. 심장 주변을 감싸는 형태였고, 그 아래에서 인간의 마력 회로와 비슷한 흐름이 보였습니다.” 라시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걸 한 번 보고 알아냈다고?” “정확히 알아낸 건 아닙니다.” “그 차이가 있나?” “많이 있죠.” 세레나는 진지했다. “지금은 가설뿐입니다.” 라시엘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궁금증. 그리고 자신이 잘못 판단할까 경계하는 연구자의 신중함이 있었다. “기록했나?” “네.” “어디에.” 세레나가 멈췄다. “왜요?” “그 기록을 폐기해.” 즉시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세레나의 얼굴에서도 조금 전까지의 당황스러움이 사라졌다.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필요 없다.”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세레나.” “제가 얻은 연구 자료입니다.” 라시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 몸에 대한 자료다.” 세레나의 입술이 닫혔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설표를 마물로 알고 있을 때는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의 신체와 질병에 대한 정보. 그것은 본인의 동의 없이 공개하거나 연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세레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라시엘이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를 봤다. “폐기하겠습니다.” “……쉽게 받아들이는군.” “전하가 사람인 걸 알았으니까요.” 세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뭐지.” “저는 이미 봤습니다.”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본 것까지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전하의 동의 없이 발표하거나 외부에 알리지는 않겠습니다.” 세레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치료가 필요하다면 연구해야 합니다.” “치료?” “설표 상태가 길어질수록 기억이 흐려진다고 하셨잖아요.” 그 한마디에 라시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세레나는 놓치지 않았다. “계속 진행되는 거죠?” “…….” “전하.” 라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세레나는 억지로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마지막 붕대를 고정했다. “끝났습니다.” 손을 떼려는 순간. 라시엘의 손이 세레나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이번에는 위협이 아니었다. 세레나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봤다. “전하?” 라시엘도 자기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듯 손을 내려다봤다. 접촉이 끊기려는 순간. 다시 마력의 통증이 올라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손목을 감싼 세레나의 피부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마력의 흐름이 다시 잦아들었다. 확실하다. 세레나도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라시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 “잠깐.” “네?” “그대로 있어.” 세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태가 안 좋으세요?” “확인 중이다.” “뭘요?” 라시엘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레나는 잠시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른 손으로 마력 측정기를 집었다. 라시엘의 눈빛이 굳었다. “뭐 하는 거지?” “전하가 확인 중이라고 하셔서 저도 확인하려고요.” “하지 마.” 이미 늦었다. 수정판에서 은빛 빛이 올라왔다. 세레나는 수치를 바라봤다. 그리고. 표정이 멈췄다. “……이상하네.” 라시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마력 수치가 내려갔어요.” 세레나는 수정판을 다시 봤다. “아까보다 훨씬.” 라시엘은 침묵했다. 세레나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라시엘의 손. 다시 측정기. 그리고 다시 손. 설마. 세레나의 눈빛이 변했다. “전하.” 라시엘은 이미 그다음 질문을 알 것 같았다. “혹시.” 세레나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저를 잡고 있어서 그런 겁니까?” 라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면 충분했다. 세레나의 눈이 커졌다. “진짜로?” 연구자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라시엘은 불길함을 느꼈다. “다시 해 보죠.” “뭘.” “놓아보세요.” “싫다.” 세레나가 멈췄다. “……네?” 라시엘 역시 자기 입에서 나온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상태가 다시 나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할 필요 없어.” “있습니다.” “없다.” “전하.” 세레나의 목소리가 아주 진지해졌다. “접촉 여부에 따라 마력 수치가 달라진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놓으라는 건가?” “네.” 라시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 세레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먼저 포기한 건 의외로 라시엘이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세레나는 즉시 수치를 확인했다. 십 초. 이십 초. 그리고. 수정판 위의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요.” 라시엘의 턱이 굳었다. 세레나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제가 잡아볼게요.” 라시엘은 그녀를 바라봤다. “전하 손.” 잠시 후 라시엘이 손을 내밀었다. 세레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맞닿았다. 라시엘의 손은 세레나보다 훨씬 컸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 세레나가 수정판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려간다.” 정말이었다. 마력 폭주 수치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세레나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이건 우연이 아닌데.” 라시엘은 수치가 아니라 세레나를 보고 있었다. 세레나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그의 손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는 것도.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졌다는 것도. “왜 저한테 반응하는 거죠?”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력 속성이 상쇄되는 건가? 아니면 전하의 마력핵이 외부 안정화 마력에 반응하는 건가. 그런데 제 마력은 원래 안정화 계열이 아닌데…….” 세레나는 생각에 빠질수록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줬다. 라시엘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 이상했다. 마력이 안정되는 것과는 별개로.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 불쾌했다. 라시엘이 먼저 손을 뺐다.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왜 놓으셨어요?” “충분히 확인했잖아.” “한 번 더 해야 합니다.” “싫다.” “조건을 바꿔서 측정해야죠.” “세레나.”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팔목만—” “그만.” 세레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라시엘은 그 얼굴을 보며 기가 막혔다. “내가 사람이 된 뒤에도 연구 대상인가?” 세레나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요.” 라시엘의 눈썹이 올라갔다. “조금?” “많이 궁금하긴 하지만.” 세레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동의 없이 연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대단한 배려군.” “중요합니다.” “그럼.” 라시엘이 등을 소파에 기대며 물었다. “내가 동의하면?” 세레나가 멈췄다. “네?” “연구해도 된다고 하면.”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라시엘은 아직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필요해서였다. 이 여자가 자신의 마력 폭주를 안정시킬 수 있다. 그 원인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가까이 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뿐이다. “조건이 있다.” 세레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말씀하세요.” “내 정체와 오늘 본 것 모두 외부에 알리지 마.” “네.” “연구 기록은 내가 허락한 것만 남긴다.” 세레나는 잠시 고민했다. “원자료까지요?” “그래.” “그건 연구 윤리상—” “그럼 하지 마.” “……조율할 수 있습니다.” 라시엘의 눈에 미세한 만족감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내 허락 없이 몸에 손대지 마.” 세레나가 침묵했다. 몇 초 뒤. “설표 상태에서도요?” 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 세레나는 매우 진지했다. “연구상 필요한 촉진 검사가 있을 수도 있어서.” “안 된다.” “전부요?” “전부.” 세레나가 미묘하게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귀 뒤도?” “…….” “그쪽 반응이 굉장히 명확했는데.” 라시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세레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창문이 덜컹거렸다. 세레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이 가까웠다. “전하.” “왜.” “오늘은 여기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성으로 돌아갈 거다.” “이 상태로요?” “갈 수 있다.” “못 갑니다.” “세레나.” “아까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하셨습니다.” “그건—” “그리고 기사단은 아직 설원을 수색하고 있어요.” 세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설표로 다시 변하면 어떡하시려고요?” 라시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이었다. 세레나는 소파를 가리켰다. “여기서 주무세요.” 라시엘이 소파를 바라봤다. 길이는 충분했지만 편하게 잘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세레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불편하시면 침대를 쓰셔도 되고요.” 라시엘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왔다. 세레나는 아무 생각 없이 덧붙였다. “저는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네 침대?” “네.” “…….” 라시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세레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침대 쓰세요.” “됐어.” “상처에 소파가 더 안 좋습니다.” “상관없다.” “전하.” “여기서 잔다.” 고집이었다. 세레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담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라시엘의 어깨에 덮어 주려 했다. 라시엘이 손으로 막았다. 세레나가 멈췄다. “왜요?” “내가 한다.” “아.” 아까 정한 조건이 떠올랐다. 허락 없이 손대지 않기. 세레나는 담요를 넘겼다. “죄송합니다. 습관이 아직.” “고쳐.” “노력하겠습니다.” 세레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라시엘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상한 하루였다. 죽을 뻔했고. 수십 년 동안 숨긴 비밀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들켰으며. 꼬리를 잡혔고. 까망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그런데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마력이 안정되어 있었다. 세레나가 방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접촉했을 때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라시엘은 눈을 감았다. 이 여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왜 자신에게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세레나 브리엘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가라앉았다. ⸻ 얼마나 지났을까. 세레나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긁는 소리. 그리고 낮은 숨소리. 처음에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툭. 무언가 침실 문을 건드렸다. 세레나는 몸을 일으켰다. “전하?”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췄다. 거실에 라시엘은 없었다. 대신. 문 바로 앞에 검은 설표가 앉아 있었다. 세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 “…….” 설표가 아주 천천히 꼬리를 바닥에 내렸다. 세레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설표의 귀가 뒤로 눕는다. 맞았다. 세레나는 아래를 보았다. 설표가 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거실에 깔아 준 담요. 그것을 입에 문 채 침실 문 앞까지 끌고 온 모양이었다. 세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여기 계세요?” 설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주무신다면서요.” 꼬리가 한 번 움직였다. 세레나는 설표와 자신의 침대를 번갈아 봤다. 설마. “……안에 들어오고 싶으십니까?” 설표가 가만히 있었다. 세레나의 입술이 떨렸다. 웃으면 안 된다. 상대는 북부 대공이다. 조금 전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연구 조건을 협상하던 남자다. 그런데. 지금은 커다란 검은 설표가 담요를 물고 침실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세레나는 결국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노려봤다. “혹시.” 세레나가 최대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주무시는 게 무서우십니까?” 설표의 털이 확 부풀었다. 세레나는 그날 두 번째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아직 아무도 열지 못한 방의 열쇠지.”황태자 클라우드의 손끝에서 낡은 은빛 열쇠가 천천히 흔들렸다.북부의 차가운 햇빛이 변색된 금속 표면을 스쳤다. 손잡이에 새겨진 것은 분명 브리엘의 문장이었다. 두 개의 반원과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별. 어제 에른하르트의 지하 기록실에서 세레나의 피에 반응해 열렸던 보관함에도 같은 문양이 있었다.세레나는 열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로웬이 사라지기 사흘 전.황실 연구원에 맡긴 물건.그리고 세레나 브리엘이 직접 찾아오는 날에만 넘기라는 조건.이상했다.너무 이상했다.“교수님이 직접 맡겼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클라우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첫 질문이 그것인가?”“중요하니까요.”“내가 황태자라는 사실보다?”“전하께서 황태자라는 사실과 그 열쇠의 출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굳었다.황실 수행원들 가운데 몇 명이 세레나를 쳐다봤다. 카른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라시엘은 오히려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클라우드는 그런 라시엘을 잠깐 보더니 다시 세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듣던 대로군.”세레나의 눈썹이 움직였다.“어제부터 다들 저를 들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대체 누구에게 뭘 들으신 겁니까?”“여러 사람에게.”“구체적으로요.”“세레나.”라시엘이 낮게 불렀다.그제야 세레나는 자신이 황태자를 성문 앞에 세워 둔 채 심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죄송합니다.”클라우드가 작게 웃었다.“나는 재미있으니 괜찮다.”“나는 안 괜찮습니다.”라시엘이 즉시 잘랐다.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웃고 있는 클라우드.표정 없는 라시엘.그 사이에 선 세레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구실의 위험한 마물 두 마리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물론 한쪽은 정말 마물로 변하기도 했다.그 생각을 한 순간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왜.”“아무것도 아닙니다.”“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안 했습니다.”“표정이 그랬는데.”
“교수님.” 이번에는. 그 이름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세레나는 사진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로웬 브리엘. 자신이 열여섯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처음 만난 교수. 말수가 적고, 학생을 칭찬하는 법도 거의 없고, 논문을 가져가면 빨간 잉크로 여백을 가득 채우던 사람. 처음 아르젠 설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였다. ‘기록이 이상하면 기록부터 의심해.’ ‘생물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아르젠이 정말 멸종했는지는 네가 직접 확인해.’ 그 말들이. 이제는 전부 달라졌다. 그 사람은 아르젠을 몰라서 세레나에게 연구를 맡긴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아르젠이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3실험실이 있다는 것도. 브리엘이라는 혈통이 그 실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에블린이 브리엘의 숨겨진 계열이었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세레나가 사진을 뒤집었다. 「아이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를 날이 오지 않기를.」 글씨가 흐릿해졌다. 세레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글씨가 다시 선명해졌다. 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보다 먼저 드는 건 화였다. “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라시엘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제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아르젠 기록의 공백. 삼백 년 전 문헌의 불일치. 왜 아르젠의 마력 구조가 인간과 닮았는지. 왜 관련 자료만 이상하게 누락되어 있는지. 세레나는 학생 때부터 물었다. 로웬은 늘 비슷하게 답했다. ‘네가 찾아.’ ‘가설부터 세워.’ ‘남이 주는 답을 믿지 마.’ 그때는 그것이 교육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교육이면서 동시에. 회피였다. 세레나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교수님은 제가 어디까지 알아낼지 보고 있었던 거네요.” 카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단정하
“같은 브리엘로서.”문 너머의 남자가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꼭 만나 뵙고 싶다고.”세레나는 손에 들린 명함을 내려다봤다.「엘리엇 브리엘」몇 번을 봐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브리엘.자신과 같은 성.그런데 황실 마력연구원의 수석 연구관.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수십 개의 가설이 떠올랐다.먼 친척.분가.호적에서 지워진 방계.혹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세레나는 마지막 가능성에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어제 습격자는 자신을 정확히 ‘브리엘의 후손’이라고 불렀다.황실은 브리엘 혈통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날.황실에서 또 다른 브리엘을 보냈다.우연이라고 보기에는.지나치게 정교했다.“들여보낼까요?”카른이 낮게 물었다.라시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문이 아니라 세레나에게 향해 있었다.“싫으면 안 만나도 된다.”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제가요?”“그래.”“하지만 저를 만나러 왔다잖아요.”“그래서 더.”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황실이 네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틀리지 않았다.엘리엇 브리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미끼일 수도 있었다.동요하는지.아는 것이 있는지.로웬 브리엘에게서 무엇을 들었는지.자신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그렇다면 더 만나야 합니다.”라시엘의 미간이 좁아졌다.“세레나.”“저 사람이 저를 확인하려는 거라면 저도 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잖아요.”“위험하다.”“여기는 전하의 성입니다.”“그래도.”“그리고.”세레나는 문을 바라봤다.“계속 피하면 황실은 제가 뭔가 알고 있다고 확신할 겁니다.”카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은 맞습니다.”라시엘이 카른을 차갑게 봤다.“누구 편이지.”“전하 편입니다.”카른은 아주 태연했다.“그래서 현실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라시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결국 말했다.“들여보내.”카른이 문으로 향했다.그런데
“황태자가 직접 옵니다.”카른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집무실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세레나는 손에 들린 황태자궁의 서신을 다시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완벽한 문장이었다. 북부의 이상 마력 반응을 조사하겠다는 명분도 있었고, 왕립 마물생태연구소 소속인 자신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는 절차도 틀린 데가 없었다.문제는 타이밍이었다.세레나가 라시엘과 함께 대공성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자신이 브리엘의 안정화 인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오늘 아침이었다.그런데 사흘 뒤.황태자가 직접 온다.너무 정확했다.“혹시 원래 황태자 전하께서 북부를 자주 방문하십니까?”세레나가 물었다.카른이 코웃음을 쳤다.“지난 오 년 동안 한 번도 없습니다.”“그럼 굉장히 오랜만이네요.”“오랜만이라기보다 처음에 가깝습니다.”세레나는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명분은 충분합니다. 북부에서 정체불명의 습격이 있었고, 마물성 마력 반응까지 발견됐으니까요.”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그자의 편을 들 생각인가?”“아뇨.”세레나는 바로 부정했다.“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뭘.”“이렇게 명분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오히려 의심해야죠.”라시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세레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황실이 정말 어제 습격과 무관하다면, 마력 이상이 보고된 직후 황태자가 직접 움직일 이유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대로 관련이 있다면…….”“실패 여부를 직접 확인하러 오는 거겠지.”카른이 말을 받았다.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저도요.”짧은 침묵.라시엘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사흘 동안 성 밖으로 나가지 마.”“전하.”“연구소에도 당분간 돌아가지 않는다.”“그건 곤란합니다.”“왜.”“제 연구 자료가 연구소에 남아 있습니다.”“사람을 보내.”“제가 직접 분류해야 하는 자료도 있고요.”“안 된다.”“폐쇄 절차가 시작되면 다른 연
세레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정확히는.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았다.눈을 감으면 지하 기록실에서 본 문장들이 떠올랐다.「브리엘의 혈통은 아직 남아 있다.」「안정화 인자의 마지막 계승자를 황실보다 먼저 숨겨야 한다.」그리고.라시엘에게 손을 대는 순간마다 거짓말처럼 가라앉던 마력.설원에서.마차 안에서.습격을 받았을 때.심지어 완전 변이 직전에도.자신이 가까이 가자 그의 변화가 멈췄다.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그다음에는 마력 상성.그리고 이제는.삼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의도적인 무언가가 자신의 피 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까지 생겼다.세레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마지막 계승자라.”입 밖으로 내놓자 더 이상했다.자신은 평범한 연구원이었다.정확히는 멸종한 마물 하나에 인생을 걸어서 연구실까지 폐쇄될 위기에 놓인 조금 이상한 연구원.그 정도였다.브리엘 가문이라고 해 봐야 몰락한 귀족가.어릴 때부터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은 적도 없었다.마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었다.왕립 아카데미에서 받은 평가도 늘 비슷했다.‘마력량은 평균.’‘정밀 제어 능력 우수.’‘실전 마법에는 부적합.’그래서 연구자가 됐다.마법을 직접 쓰기보다 분석하는 쪽이 훨씬 잘 맞았으니까.그런데.그 평범한 마력이 라시엘에게는 다르다고 했다.세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탁자 위에는 어젯밤 급하게 정리해 둔 기록장이 펼쳐져 있었다.그녀는 펜을 집었다.그리고 한참 동안 빈 종이를 바라보다 첫 줄을 적었다.「비공개 치료 관찰 기록.」잠시 생각.그 아래.「피관찰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 대공.」세레나의 펜이 멈췄다.‘피관찰자’라는 표현도 조금 이상했다.‘연구 협력자.’그게 낫겠다.줄을 긋고 다시 적었다.「연구 협력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조금 마음에 들었다.그 아래.「연구자 : 세레나 브리엘.」그리고 마지막으로.「기록은 당사자 동의 없이 외부 공개하지 않음.」세레나는 그 문장을 두
딸깍.기록실 가장 안쪽.수백 년 동안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철제 보관함의 문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세레나는 숨을 멈췄다.누가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라시엘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고, 그의 손은 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보관함에서 적어도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었다.그런데.끼이익—묵직한 철문이 조금 더 열렸다.틈 사이로 은빛 빛이 흘러나왔다.마력.그런데 이상했다.라시엘에게서 느껴지는 거칠고 차가운 마력과는 전혀 달랐다. 공격자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검고 탁한 마력과도 달랐다.따뜻했다.마력에 온도가 있을 리 없는데.세레나는 이상하게 그렇게 느꼈다.그리고 그 순간.“……!”왼쪽 손목이 뜨거워졌다.세레나가 반사적으로 손목을 감쌌다.“세레나?”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돌아봤다.“왜.”“손목이…….”세레나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아무것도 없었다.상처도.붉어진 흔적도.그런데 피부 아래에서 뜨거운 맥박 같은 것이 뛰고 있었다.쿵.쿵.심장과는 다른 박동.세레나가 미간을 좁혔다.“이상합니다.”라시엘이 그녀의 손목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아까 정한 약속이 떠오른 듯했다.세레나는 그걸 보고 먼저 손목을 내밀었다.“만져보셔도 됩니다.”라시엘의 눈이 잠깐 그녀에게 향했다.그리고 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감쌌다.뜨거운 피부.그 순간.은빛 빛이 더 강해졌다.“…….”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세레나도 같은 걸 봤다.보관함 안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마치 반응하듯 한 번 크게 뛰었다.“지금.”세레나가 낮게 말했다.“전하가 저를 만지니까 반응했습니다.”“아니.”라시엘의 시선은 보관함에 고정되어 있었다.“내 마력에 반응한 게 아니다.”“그럼요?”“너다.”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제가요?”“내가 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 아니야.”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저 보관함도 수십 번 봤다.”세레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한 번도 열린 적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