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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하지 않은 축하

정태준은 곧장 전화를 걸지 않았다. 민유리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를 확인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원본 화면을 캡처하고, 발신 번호와 수신 시각이 함께 보이도록 별도의 사진을 남기는 것이었다. 첨부된 이미지도 전달받은 상태 그대로 저장했다. 그 모든 행동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유리의 휴대전화를 쥔 손에는 눈에 띌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태준 씨.”“네.”“손부터 풀어요.”그제야 태준은 자신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가장자리를 세게 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천히 힘을 풀고 유리에게 기기를 돌려주었다.“이 번호로 연락하지 마요. 발신자 확인은 제가—”“잠깐만요.”유리가 말을 끊었다. 태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왜요?”“제 휴대전화로 저한테 온 메시지예요.”“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조심하는 것과 제가 빠지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태준의 입술이 굳었다. 온실 안에서 유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사람과 같은 남자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이제 그 얼굴이 분노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놀랐고, 두려웠고, 자신이 먼저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유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대신 혼자 답장하지는 않을게요. 우리 같이 문장을 정해요.”“답장을 해야 합니까?”“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보냈는지는 물어보고 싶어요. 사진을 어디서 찍었고, 다른 사람에게도 보냈는지 확인해야 하고요.”태준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질문만 보냅시다. 감정적인 반응은 하지 말고.”“그건 제가 정해요.”“유리 씨.”“제가 화났으면 화났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다만 지금은 화를 내기 전에 확인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예요.”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으면 유리를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고 자신이 모든 절차를 처리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싶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결국 한 걸음 물러났다.“알겠습니다. 당신이 쓰고, 보내기 전에 같이 확인하죠.”유리는 메시지 입력창을 열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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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뒤에도 민유리

윤혜림 작가와 정식 계약을 마친 다음 날, 민유리와 정태준의 거실 테이블 위에는 세 종류의 문서가 놓였다. 가장 얇은 것은 사진 촬영 계약서였고, 그 옆에는 유리 온실 대관 계약서가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서한나가 직접 만들어 온 결혼 준비 목록이었다.세 번째 문서만 유난히 두꺼웠다.유리는 첫 장을 넘기자마자 이마를 짚었다.“한나야, 이게 다 뭐야?”“결혼식 준비 목록.”“목록이 왜 열일곱 장인데?”“네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석 달이면 충분하다고 큰소리쳤다며.”서한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빨간 펜으로 항목 하나를 두드렸다.“장소랑 사진작가는 정했지. 그다음은 드레스, 정장, 헤어·메이크업, 부케, 식순, 사회자, 축가, 식사 메뉴, 답례품, 청첩장, 하객 명단, 좌석 배치, 혼인 서약, 양가 부모님 의상, 주차 안내, 비상약, 우천 대비—”“잠깐만.”유리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온실인데 우천 대비가 왜 필요해?”“비가 많이 오면 유리 천장에 빗소리가 커서 마이크 음향을 다시 맞춰야 한대.”“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내가 너보다 먼저 업체에 물어봤으니까.”태준은 문서를 읽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내용입니다.”유리가 옆을 돌아보았다.“태준 씨까지 왜 그래요?”“질문 항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내가 만든 목록과 합치면 누락을 줄일 수 있겠어요.”“그쪽 목록은 몇 장인데요?”“열두 장입니다.”한나의 눈이 빛났다.“역시 변호사님. 저랑 공유해 주세요.”“메일 주소를 주시죠.”“두 사람 지금 신났지?”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유리는 두꺼운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다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결혼은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날짜를 정하고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약속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결정해야 할 것은 약속 자체보다 그 약속을 둘러싼 것들이 훨씬 많았다.한나가 다음 장을 펼쳤다.“우선 오늘 결정할 건 하객 명단. 온실 최대 좌석이 오십 석이라면서?”“응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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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말고, 내 사람

청첩장 인쇄본이 도착한 날, 민유리는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상자를 한동안 열지 못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종이 오십 장뿐이었다. 이미 시안도 여러 번 확인했고 인쇄 직전에는 정태준과 나란히 앉아 이름의 간격과 글자 크기까지 살폈다. 그런데 막상 실물로 도착하고 나니, 그 종이가 두 사람이 정말 결혼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처럼 느껴졌다.유리는 식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사진부터 찍었다. 포장된 상태로 한 장, 칼로 테이프를 가른 뒤 한 장, 청첩장의 모서리가 처음 보이는 순간도 한 장.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준이 물었다.“언제까지 찍을 겁니까?”“기록하는 중이에요.”“조금 전에는 카메라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연습을 한다고 했잖아요.”“결혼식 날 이야기죠. 오늘은 제가 찍어도 돼요.”“청첩장보다 당신이 먼저 보고 싶습니다.”유리가 카메라를 내렸다.“왜요?”“내 표정이 어떤지 궁금하다면서요.”그제야 유리는 렌즈를 태준 쪽으로 돌렸다. 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셔츠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상자 위에 올린 손끝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유리가 셔터를 누르지 않고 기다리자 태준이 눈썹을 올렸다.“안 찍습니까?”“긴장했어요?”“아닙니다.”“손가락에 힘 들어갔는데.”태준이 상자에서 손을 뗐다.“이제 아닙니다.”“그렇게 숨기면 더 티 나요.”유리는 카메라를 식탁에 내려놓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맨 위에는 인쇄소에서 보호용으로 넣은 얇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걷자 아이보리색 청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면에는 온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유리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은 태준과 맞잡고 있었다.청첩장을 펼친 태준이 안쪽의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정태준과 민유리가서로의 가장 평범한 날을 함께 살아가기로 했습니다.그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유리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어때요?”“좋습니다.”“그게 다예요?”“종이를 보고 울지는 않습니다.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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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걷는 사람들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다온갤러리 2층의 작은 회의실이었다. 처음 받은 기획안에서는 호텔 스위트룸과 웨딩드레스를 촬영 장소로 제안했지만, 수정된 기획안에는 민유리의 사진이 걸린 전시장과 작업실만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도 결혼 반지를 강조하기 위한 꽃 장식 대신 《좋아한다는 마음을 찍는 법》과 싱가포르 전시에 출품할 작품 목록이 놓였다.유리는 자리에 앉기 전 녹음기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인터뷰를 맡은 기자는 삼십 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먼저 명함을 건네고, 사전에 합의한 질문 외에는 추가 질문을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했다.“그래도 민 작가님께서 불편하시면 언제든 중단하셔도 됩니다.”“네. 저도 질문에 따라 대답하지 않을 수 있고요.”“물론입니다.”기자가 녹음 버튼을 누르기 전 다시 동의를 구했다. 그 작은 절차만으로도 유리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록하는 자리였지만, 오늘은 무엇을 남길지 미리 알고 있었다.첫 질문은 파리에서 찍은 〈기다리는 사람의 자리〉 연작에 관한 것이었다. 유리는 두 개의 커피잔에서 시작한 작업이 어떻게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가족과 이름을 잃은 사진들로 넓어졌는지 설명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행동이라고 말했다.“사진집 제목이 《좋아한다는 마음을 찍는 법》인데요. 작가님께 사진은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의 표현인가요?”“네. 다만 예전과는 뜻이 많이 달라졌어요.”“어떻게 달라졌나요?”유리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예전에는 오래 바라보면 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오래 바라본다는 이유로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많이 안다고 느끼는 순간, 상대의 뜻을 묻지 않고 넘어가기 쉬워지거든요.”“그 변화에는 과거 팬 사진을 촬영하셨던 경험도 영향을 주었을까요?”사전 질문지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질문 자체가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유리는 대답하기 전에 기자를 바라보았다. 기자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그 질문은 하셔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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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평범한 날의 약속

결혼식 날 아침, 민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 분 전에 눈을 떴다. 특별한 예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옆자리의 정태준이 밤새 세 번이나 뒤척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긴장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주장했지만, 평소라면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는 사람이 새벽 두 시에는 물을 마시러 나갔고 네 시에는 휴대전화를 확인했으며 여섯 시에는 베개를 바로 놓는 척 유리가 잘 자고 있는지 살폈다.유리는 눈을 감은 채 물었다.“지금도 안 떨려요?”옆에서 움직임이 멈췄다.“깼습니까?”“태준 씨가 계속 깨우잖아요.”“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사람이 옆에서 긴장하면 침대가 알아요.”유리가 눈을 뜨자 태준은 이미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그의 왼손 약지에는 전날까지 끼고 있던 반지가 없었다. 결혼식 때 다시 서로 끼워 주기로 하고 두 사람의 반지를 한 상자에 넣어 윤혜림에게 맡겼기 때문이다.그제야 유리는 자신의 손가락도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하룻밤인데도 허전했다. 반지 자리에 남은 옅은 자국을 엄지로 쓸자 태준의 시선이 따라왔다.“잃어버린 것 같아요.”“윤 작가님이 보관하고 있습니다.”“알아요. 그런데 손에 없으니까 이상해요.”태준이 유리의 빈 약지를 잡아 입술에 댔다.“몇 시간 뒤에 다시 끼워 주겠습니다.”“긴장해서 떨어뜨리면요?”“그럴 일 없습니다.”“지금 심장 엄청 빨리 뛰는데.”유리가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얇은 잠옷 아래로 규칙보다 조금 빠른 박동이 느껴졌다. 태준은 손을 치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손을 겹쳤다.“당신도 빠릅니다.”“저는 긴장한다고 인정했잖아요.”“그러면 나도 인정하겠습니다.”“뭘요?”태준은 유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많이 떨립니다.”그 말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유리는 베개 위에서 조금 가까이 다가가 그의 턱 아래에 이마를 기댔다.“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어요?”“아닙니다.”“저는 조금 도망가고 싶어요.”태준의 몸이 굳었다. 유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결혼식 말고 준비 과정에서요.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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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다음 날에도

민유리가 결혼 다음 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남편의 얼굴도, 손가락에 돌아온 반지도 아니었다.허리가 움직이는지였다.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던 유리는 아주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렸다. 등과 허리에 묵직한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도하며 이불을 끌어 올리는 순간, 뒤에서 팔 하나가 허리를 감쌌다.“어디 갑니까?”잠긴 목소리가 목덜미 가까이에서 들렸다. 유리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팔을 손바닥으로 눌렀다.“안 가요. 시간 보려고.”“휴대전화는 반대쪽에 있습니다.”“그러니까 일어나려고 했죠.”“더 자요.”정태준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평소라면 먼저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뉴스까지 확인했을 사람이 오늘은 이불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유리는 그의 왼손을 찾아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제 다시 끼워 준 반지가 창문 틈으로 들어온 아침빛을 희미하게 반사했다. 반지 안쪽의 문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남편.”유리가 시험하듯 부르자 태준의 팔에 바로 힘이 들어갔다.“한 번 더.”“싫어요.”“방금은 왜 불렀습니까?”“잘 자나 확인하려고.”“이제 깼습니다.”“그럼 일어나요.”유리가 몸을 빼려 하자 태준은 허리를 놓는 대신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따뜻한 숨이 피부에 닿고, 어젯밤 그의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에 다시 간지러운 감각이 번졌다.“정태준 씨.”“네.”“아침이에요.”“알고 있습니다.”“어제 결혼식 했어요.”“그것도 알고 있습니다.”“피곤하지 않아요?”“피곤합니다.”“그런데 왜 이래요?”그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유리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잠이 덜 깬 얼굴인데도 시선만은 지나치게 선명했다.“남편이라고 불러 놓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호칭 한 번에 반응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요?”“매번 반응하면서 살겠습니다.”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 순간, 태준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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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진의 자리

공항 체크인 카운터의 저울이 24.7킬로그램을 가리켰다.직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고, 민유리는 아주 천천히 정태준을 돌아보았다. 태준은 팔짱을 낀 채 문제의 캐리어를 내려다봤다.“내가 카메라는 기내로 들고 타라고 했지.”“카메라는 기내 가방에 있어요.”“그럼 저 안에 뭐가 들었는데.”“렌즈 두 개, 조명 장비, 설치용 장갑, 테이프, 여분 케이블, 프린트 보관함, 옷.”“옷은 마지막이네.”“출장이잖아요.”“신혼여행이기도 하고.”유리는 대답 대신 그의 캐리어를 저울 위로 밀었다. 14.2킬로그램. 어딘지 억울할 만큼 단정한 숫자였다.“정 변호사님 가방에는 뭐가 들었는데요?”“옷, 상비약, 충전기, 네가 놓고 온 멀티어댑터 두 개, 진통제, 위장약, 밴드, 여분 배터리, 우산.”“……내 보호자 가방이에요?”“남편 가방.”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정정했다. 결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그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묘하게 능숙했다. 유리는 아직도 ‘남편’이라는 말을 속으로 한 번 굴려 본 다음에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직원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두 분 짐을 합산하면 허용 범위 안입니다.”“다행이네요.”“신혼여행이세요?”유리와 태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출장입니다.”“신혼여행입니다.”둘의 말이 정확히 겹쳤다. 직원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두 가지 다이시군요.”탑승권을 받아 든 유리가 태준의 팔을 툭 쳤다.“왜 혼자 신혼여행이라고 해요?”“왜 혼자 출장이라고 해.”“싱가포르 다큐멘터리 포럼에 초청받아서 가는 거잖아요.”“결혼식 열이틀 뒤에 같이 비행기를 탔고, 일정 뒤로 사흘을 비워 뒀잖아.”“그건 정 변호사님이 멋대로 연차를 길게 낸 거고요.”“대표한테 결재받았으니까 멋대로는 아니지.”“호텔도 내가 잡은 포럼 숙소 그대로면서.”태준은 잠깐 침묵했다. 그 미세한 틈을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왜요?”“방은 바꿨어.”“뭘로?”“도착하면 봐.”그의 시선이 지나치게 태연했다. 유리는 눈을 가늘게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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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말아야 할 사진

화면 속 321번 사진은 확대할수록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리온실 뒤편의 좁은 통로, 빗물이 맺힌 유리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커튼 사이에서 오현석은 서한나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지만 요란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익숙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에 가까웠다. 현석의 다른 손은 한나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팔꿈치 아래를 받치고 있었고, 한나는 놀란 기색 없이 그의 재킷 깃을 붙들고 있었다.“이건 우연히 한 번 입 맞춘 사람들이 아닌데요.”유리의 말에 태준이 화면 오른쪽의 촬영 정보를 확인했다.“결혼식 당일 오후 세 시 사십이 분.”“시간을 묻진 않았어요.”“증거를 볼 때는 기본 정보부터 확인해야지.”“휴가 중인 변호사님 아니었어요?”“친구의 중대한 은폐가 발견됐는데 휴가가 중요해?”유리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아래에는 윤혜림이 남긴 작은 표시가 있었다. 공개 갤러리에 포함되지 않으며, 당사자 동의를 확인하기 전까지 다운로드가 제한되는 사진이라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결혼식 전체 사진과 별도로 분류해 둔 모양이었다. 혜림은 우연히 포착한 순간을 신랑 신부에게는 알리되, 사진 속 사람들의 허락 없이 누구도 파일을 가져갈 수 없도록 잠가 두었다.그 표시를 발견하자 유리는 화면을 닫았다.“왜 닫아?”“보면 안 되는 사진이었어요.”“이미 봤는데.”“봤으니까 더 보면 안 되죠. 혜림 작가님도 잠가 뒀고.”태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친구를 추궁할 준비가 이미 끝난 얼굴이었다.“현석이가 결혼식 날 나한테 증인 서명을 두 번 확인했어.”“그게 왜요?”“평소보다 말이 많았지.”“긴장해서 그랬겠죠. 자기도 몰래 연애 중이면서 친구 혼인 신고 증인란에 서명하려니까.”“그러고 보니 구청에서도 한나 씨한테 계속 커피를 건넸어.”“그건 현석 씨가 원래 친절해서…….”말끝이 흐려졌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이상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었다.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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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찍고 싶었던 사람

정태준은 메시지를 읽은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독립 서점이 있는 골목을 향해 걷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피해 양옆으로 흘러갔고, 횡단보도의 신호는 어느새 한 번 바뀌었다가 다시 붉어져 있었다. 유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검은 코트와 오른쪽 손목의 시계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의 가장자리가 흐렸다. 분명 누군가를 찍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조금 내렸으며, 남자는 법학관 앞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그가 얼굴을 돌릴 때 셔터를 누르지 않았던 것까지는 기억났다.태준이 먼저 휴대전화를 내렸다.“호텔로 돌아갈까?”“사진부터 확인하려고요?”“아니. 네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게 힘들어 보여서.”그 말에 유리는 자신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준은 이유를 묻기 전에 손부터 감쌌다. 마음대로 끌고 가지도, 괜찮을 거라고 단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선택을 기다렸다.유리는 독립 서점의 간판을 올려다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려고 했던 곳이었다. 창가에는 작은 사진집과 여행 에세이가 진열되어 있었고, 문이 열릴 때마다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자신들이 계획한 하루는 그대로 눈앞에 있었지만, 한국에서 날아온 문장 하나가 그 시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돌아가요.”“호텔로?”“네.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여기서 책을 봐도 아무것도 안 들어올 것 같아요.”태준은 알겠다고만 했다. 택시를 잡는 동안 현석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봉투와 사진을 분리하지 말고 현재 상태 그대로 보관해. 발견 경위와 인계자부터 확인해 줘. 우리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야. 안전한 방식으로 영상 연결하자.유리는 그 문장을 옆에서 읽었다.“벌써 일하고 있네요.”“남편 업무인지 변호사 업무인지 아직 구분이 안 돼.”“구분해야 해요?”“해야지. 남편으로서는 사진을 당장 보고 싶고, 변호사로서는 보기 전에 증거 상태부터 확인해야 하니까.”“어느 쪽이 이겼어요?”“둘 다 보자는 데는 동의했어.”평소 같았으면 웃었을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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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분류표가 아니다

현석이 보낸 화면에는 유리의 과거가 폴더명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 출판사, 공연장, 자택 주변. 자신이 붙인 적 없는 이름들이었고, 자신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분류 방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사진에 우연히 등장했거나 유리와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표처럼 나열되어 있었다.A—유명인 또는 판매 가치가 높은 인물.B—가족, 연인, 소속사 관계자 등 유명인과 연결 가능한 인물.C—일반인. 신원 확인 불필요.정태준의 이름 옆에는 B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정시온의 친형 추정’, ‘법률대리인 활용 가능성’, ‘민유리와의 직접 접촉 기록 없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작성 날짜는 두 사람이 처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기 석 달 전이었다.유리는 문서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만 기억나는 사람도 있었다.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자주 마주쳤던 직원, 사진 인화를 맡기러 갔을 때 상담해 주었던 기사, 출판사 동료와 거래처 디자이너. 그들은 유리의 삶을 스쳐 간 사람이었지만 박소라의 표에서는 A와 B와 C 중 하나였다.“C는 신원 확인 불필요라네요.”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판매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지.”태준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화면을 확대했다.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리는 그의 엄지가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알아봤다. 화가 날수록 말과 행동이 더 차분해지는 사람이었다.“사람을 가격표처럼 나눴어요.”“응.”“시온이는 A고, 당신은 B고, 이름 모르는 사람은 C. 그런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어요.”분류표의 주인은 유리였지만 정작 표 안에 유리는 없었다. 박소라에게 민유리는 사진을 찍은 사람도, 삶을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인물들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파일의 출처를 꾸미기 위해 빌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태준이 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현석이 받았다.—보고 있었지?“응. 외장 장치 원본 이미징은 끝났어?”—독일 쪽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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