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51 - チャプター 60

95 チャプター

이번에는 제 이름으로 갑니다

정시온 아시아 투어 공식 사진가 계약서는 총 스물여덟 쪽이었다.유리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두 번 읽었고, 태준은 그보다 한 번 더 읽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작업실 책상 위에는 계약서와 일정표, 촬영 가이드가 빈틈없이 펼쳐져 있었다. 유리가 첫 문장을 적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새 책상은 예상보다 빨리 사진가와 변호사의 공동 업무 공간이 됐다.“원본 파일 일체를 회사에 제공한다는 조항은 수정해야 합니다.”태준이 붉은 펜으로 열한 번째 페이지에 선을 그었다.“회사도 최종 사진을 고르려면 원본을 봐야 하잖아요.”“확인을 위한 열람과 원본 파일의 영구 제공은 다릅니다. 계약이 끝난 뒤에도 회사가 모든 원본을 보관할 수 있게 돼 있어요.”“보관 기간을 정하면 어때요?”“선별 기간은 삼십 일, 사용하지 않는 원본은 삭제. 선정한 사진도 계약 목적 외의 이용은 별도 동의를 받는 것으로 하죠.”유리는 태준이 적은 수정 문구를 읽었다. 법률 용어로 정리됐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같았다.“팬들 얼굴이 나온 사진은요?”“사전 동의가 있는 프로그램만 촬영한다고 돼 있습니다. 다만 현장 안내만으로 포괄 동의를 받는 방식은 부족해요. 개별 초상 사용 동의 절차와 철회 방법을 부속 합의서에 넣어야 합니다.”“그건 내가 담당자에게 직접 요청할게요.”“내가 수정안에 포함하겠습니다.”“태준 씨가 다 하면 내 계약이 아니라 태준 씨 계약이 되잖아요.”붉은 펜이 멈췄다.유리는 계약서 위에 손을 올렸다.“법률적으로 문제 있는 부분을 확인해 주는 건 고마워요. 그런데 어떤 사진을 찍고, 회사랑 어떻게 일할지는 내가 직접 얘기하고 싶어요.”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펜을 내려놓았다.“맞습니다.”“기분 나빴어요?”“아니요. 내가 선을 넘었습니다.”그가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 오히려 유리가 머쓱해졌다.“선을 넘은 것까지는 아니고.”“계약 당사자가 결정할 내용에 대리인의 의견을 먼저 넣으려고 했으니 넘은 겁니다.”태준은 수정안을 별도의 메모지에 옮겼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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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일정이 끝난 뒤

“허락할게요.”유리의 대답이 떨어지자 태준의 눈매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까지 날아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유리는 그가 손에 쥔 여행 가방 손잡이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렇게 꽉 잡으면 손잡이 부러지겠는데요.”태준이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천천히 손을 풀었다.“내가 긴장한 것처럼 보입니까?”“네. 아주 많이.”“민유리 씨를 만나러 오는 길에 비행기가 세 번쯤 흔들렸습니다.”“비행기 탓을 하시네.”“다른 이유를 말하면 놀릴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이미 놀리고 있는데요?”유리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이 오가는 호텔 로비 한복판이라 대놓고 끌어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시온의 투어 스태프들이 묵는 호텔이었다. 언제 매니저나 촬영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지 알 수 없었다. 유리는 잠시 주변을 살핀 뒤 태준의 코트 소매 끝을 잡았다. 손끝으로 고급스러운 천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겨우 하루 반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그가 몹시 그리웠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태준이 낮게 물었다.“이게 도쿄식 환영입니까?”“공식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적 행동이에요.”“그럼 호텔 밖에서는 더 해도 됩니까?”“정태준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그의 시선이 유리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 평소였다면 허리를 감아 당겼을 시선이었다. 그러나 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가 잡고 있던 소매를 살짝 당겨 그녀의 손을 감쌌다.“먼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오늘 일정은 완전히 끝났습니까?”“네. 사진 백업도 세 군데 해뒀고, 현장 셀렉도 전달했어요. 내일 집합은 오전 열 시고요.”“숙소 복귀 시간은?”“자정 전. 특별히 정해진 통금은 없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팀에 그렇게 말해뒀어요.”태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일곱 시 십이 분이었다.“네 시간 사십팔 분이군요.”“초 단위로 쓰실 생각이에요?”“그러고 싶지만 참겠습니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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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대답하겠습니다

“네. 갑니다.”유리는 카메라 가방을 고쳐 메고 호텔 출입문을 나섰다. 전날 내린 비가 거짓말처럼 그친 도쿄의 거리는 맑았고, 오전 햇빛을 받은 건물의 유리창이 눈부시게 빛났다. 촬영팀을 태운 차량이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시온은 뒷좌석 창문을 내린 채 빨리 타라는 손짓을 보냈다. 유리는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방금 전송한 메일을 다시 떠올렸다.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짧은 답장에는 질문지와 게재 범위, 사진 사용 조건을 먼저 확인하고 싶다는 요청을 함께 적었다. 누군가에게 대신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지도, 태준이 검토해 줄 때까지 답변을 미루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선택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온 제안에는 자신이 먼저 답하고 싶었다.차량에 오르자 매니저가 태블릿을 내밀었다.“유리 씨,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오늘 현지 행사 동선입니다. 오전에는 방송국 사전 녹화가 있고, 오후에는 팬들과 함께하는 미니 토크가 있어요. 저녁에는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전까지 자유 촬영이 가능하고요.”유리는 일정표를 받아 세부 항목부터 확인했다. 방송국 무대 촬영 구역, 아티스트 이동 동선, 관객 입장 시각까지는 정리되어 있었으나 팬 참여 행사에는 촬영 고지 방식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오후 행사 관객은 몇 명이에요?”“백이십 명 정도요.”“입장권에 촬영 고지가 들어갔나요?”“현지 주최 측에서 안내했다고 들었는데, 확인해 볼게요.”“촬영 동의와 단순한 현장 고지는 달라요. 공식 계정에 얼굴이 식별되는 사진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면 선택권을 따로 줘야 해요. 촬영 비동의 구역을 뒤쪽에 만들거나, 좌석 표식을 구분하는 게 좋겠어요.”시온이 앞좌석 등받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어제 사진도 얼굴이 보이는 팬들한테 직접 물어봤다면서요?”“네. 무대만 찍는다고 생각하고 온 사람이 갑자기 홍보 사진에 얼굴이 나가면 싫을 수도 있으니까요.”“누나는 예전에도 그랬어요?”“팬사이트 할 때요?”“네.”유리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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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민유리 입장문.’저장된 파일명을 확인한 유리는 휴대전화를 매니저에게 건넸다. 차량이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동안 매니저는 입장문을 두 번 읽었고, 두 번째 문장을 확인할 때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앞좌석에 앉은 시온은 안전벨트를 풀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솔직하고 좋아요. 다만 첫 문장부터 호텔에 함께 들어간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연애 중이라는 건 이미 알려졌지만, 이 부분까지 직접 확인해 주면 기사 제목이 더 자극적으로 바뀔 수도 있어요.”매니저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홍보팀 역시 같은 이유로 식당에서 만났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하고 호텔 사진에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 방향을 제안했다. 그러나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사진에 찍힌 사실을 애매하게 피하면 기자는 계속 그 부분만 물을 거예요. 제가 언제 호텔에서 나왔는지, 방에서 뭘 했는지까지 해명하라고 할 수도 있고요.”“그런 요구에는 답하지 않으면 됩니다.”“맞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거기까지가 제 사생활이라고 선을 긋고 싶어요. 호텔에 함께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성인인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난 일은 업무 검증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요.”시온이 낮게 감탄했다.“우리 형이 들으면 좋아하겠다.”“지금 이걸 좋아할 상황은 아니지 않아요?”“누나가 호텔에 같이 들어갔다고 인정한 부분 말고, 선 긋는 부분이요.”“정시온 씨.”“네. 조용히 있을게요.”시온은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에는 묘한 자부심이 남아 있었다. 유리는 다시 입장문을 읽었다. 글을 쓸 때는 괜찮았는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신이 써 내려간 문장 하나하나가 곧 수많은 사람에게 읽힐 것이다. 일부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겠지만, 일부는 단어를 잘라 새로운 제목을 만들 것이고, 또 누군가는 태준과의 관계를 상상하며 조롱할지도 몰랐다.그럼에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은 달랐다. 유리는 자신이 선택한 만큼만 말하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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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은 감형 사유가 아닙니다

‘제가 다시 웃고 일하며 사랑하게 된 것은 피해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유리는 첫 문장을 적은 뒤 한동안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바라봤다. 곁에 앉은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얽혀 있던 두 사람은 얇은 로브와 셔츠 차림으로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침대 위에는 흐트러진 이불이 남아 있었고, 현관에는 아직 풀지 못한 여행 가방이 세워져 있었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 이곳은 귀국한 연인을 맞이하는 집이었지만, 이제 책상 위에는 항소심 기록과 남기혁 측 추가 의견서가 놓여 있었다.태준은 오현석이 보내온 의견서를 태블릿으로 확인한 뒤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유리가 요청하기 전에는 세부 내용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태블릿을 가리켰다.“전부 볼게요.”“핵심 내용은 이미 들었습니다.”“그 사람이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답할 수 있어요.”“읽지 않아도 반박은 가능합니다.”“가능하다는 것과 제가 원하는 건 달라요.”태준의 입술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유리가 결정할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성이 충돌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뒤 태블릿을 들었지만 곧바로 건네지는 않았다.“자극적인 표현이 있습니다.”“예상했어요.”“당신의 사생활과 공개 활동을 임의로 연결했습니다. 읽고 나서 힘들어지면 바로 멈춰도 됩니다.”“네.”“혼자 견딜 필요도 없습니다.”유리는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그러려고 옆에 앉아 있는 거 아니에요?”태준은 짧게 숨을 내쉬고 태블릿을 건넸다. 의견서는 모두 열두 쪽이었다. 앞부분에는 형량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기존 주장이 반복됐고, 뒤쪽에는 1심 선고 이후 유리의 활동을 정리한 표가 첨부되어 있었다. 전시회 개최, 공동 집필 계약, 시온의 공식 사진가 채용, 해외 출국, 공개 연애 기사까지 날짜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사진과 기사 화면도 증거자료라는 이름으로 붙어 있었다.유리는 자신이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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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어야 할 곳

대만 출국을 이틀 앞둔 밤, 유리는 식탁 위에 휴대전화 두 대를 나란히 놓고 태준을 바라봤다. 하나는 평소 사용하는 개인 전화였고, 다른 하나는 소속사에서 해외 일정용으로 지급한 업무 전화였다. 태준은 보안 점검 결과가 정리된 문서를 펼친 채 일정별 연락 체계와 비상시 대피 경로를 설명하고 있었다.“개인 전화의 위치 공유는 현지 체류 기간에만 활성화하겠습니다. 공유 대상은 매니저와 나, 두 사람으로 제한하고요. 업무 전화에는 현지 경호 책임자와 대만 법률사무소 연락처가 저장돼 있습니다. 숙소 층과 객실 번호는 촬영팀 내부에서도 매니저와 총괄 감독만 알게 될 겁니다.”유리는 문서를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태준 씨도 제 객실 번호는 모르는 거예요?”“공식 일정 중에는 그렇습니다.”“대만에 온다면서요.”“당신이 오라고 했으니까 갑니다. 하지만 소속사 호텔에 임의로 찾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내 숙소는 별도로 예약했고, 당신이 일정을 마친 뒤 만나러 오는 방식으로 정리했습니다.”유리는 그가 건넨 문서의 마지막 장을 확인했다. ‘개인 일정 합류 시 아티스트 및 투어팀 동선과 분리’라는 항목 옆에는 태준의 이름과 도착 시간이 적혀 있었다. 도쿄에서 찍힌 사진 때문에 이번에는 회사에 사전 고지까지 마친 모양이었다.“정말 합의서라도 쓴 것 같네요.”“필요하다면 작성할 수 있습니다.”“우리 데이트 계약서요?”“당신이 업무와 사생활을 분리하고 싶다고 했으니까요.”“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도쿄에서 한번 경험했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태준의 말은 단호했지만 유리는 그가 지나치게 준비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남기혁이 구치소 안에서도 자신의 활동 자료를 받아봤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부터 그는 사소한 위험까지 모두 문장으로 통제하려 했다. 유리가 현지 촬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출국일이 가까워질수록 문서의 분량은 늘어났다.유리는 종이를 내려놓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위치 공유는 내가 켤게요.”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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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는 사람도 사진 안에 있어야 하니까

유리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호텔의 천장이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타이베이의 아침 햇살이 벽 위에 가느다란 선을 만들고 있었고, 침대 옆 협탁에는 손목 보호대와 물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과 목덜미에 닿는 규칙적인 숨결을 느끼는 순간, 전날 밤의 기억이 느린 파도처럼 밀려왔다.도쿄에서 멈췄던 입맞춤, 서울에서 미뤄두었던 약속, 욕실을 채우던 따뜻한 물소리와 몇 번이고 괜찮은지 묻던 낮은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에는 청혼할 날을 준비해도 되겠느냐고 묻던 태준의 얼굴까지.유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 감았다. 잠든 척을 더 하고 싶었지만 허리에 둘린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깼으면 눈을 뜨는 게 어떻습니까?”바로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거의 없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삼십 분 전부터.”“왜 안 일어났어요?”“당신이 내 팔을 베고 있었습니다.”“빼면 되잖아요.”“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유리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봤다. 태준은 이미 씻었는지 머리카락이 단정했고, 검은 티셔츠까지 입은 상태였다. 잠옷 차림으로 이불에 파묻혀 있는 자신과 너무 비교됐다.“혼자 준비했네요.”“당신은 더 자야 할 것 같아서.”“몇 시예요?”“일곱 시 이십 분입니다. 집합까지 한 시간 사십 분 남았습니다.”유리는 안도하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 태준이 ‘아침에 판단하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은 피곤했지만 공식 일정에 늦을 정도는 아니었다.“최선을 다한 건 인정해 줄게요.”“무엇에 대해서 말입니까?”“모르는 척하지 마요.”“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상당히 절제했습니다.”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그게 절제한 거예요?”“그렇습니다.”“기준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건데요?”태준은 대답 대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손끝이 귓바퀴를 스치자 유리의 어깨가 작게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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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람을 안는 법

인천공항 도착 안내 방송이 나오자 유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아래로 익숙한 도시의 불빛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름 남짓한 일정이었지만 몇 달 만에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도쿄에서 처음 공식 카메라를 들던 순간부터 타이베이의 비, 방콕의 젖은 우산, 싱가포르의 마지막 응원봉까지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장치 안에 들어 있었다. 항소심 판결문도 그 사이에 도착했고, 일본 매거진 인터뷰는 예상보다 큰 반응을 얻었다.많은 것이 끝났고, 많은 것이 시작됐다.그러나 착륙 안내등이 켜진 순간 유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었다.‘공항으로 가겠습니다.’태준이 마지막 영상 통화에서 했던 말이었다.유리는 휴대전화를 비행 모드에서 해제했다. 곧바로 메시지 알림이 여러 개 들어왔다. 다온북스 편집팀 단체 대화방에는 서한나가 올린 ‘민 편집자 귀국 축하’ 스티커가 가득했고, 고은채는 사진 에세이 회의 일정을 무리하지 말고 조정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소속사에서는 입국 동선과 취재진 규모를 공유했다.그 사이에서 태준의 메시지는 하나뿐이었다.― 도착층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유리는 짧게 답했다.― 약속 기억하죠?답장은 곧바로 왔다.― 당신이 먼저 안아준다고 했습니다.그 한 문장을 읽자 가슴이 간질거렸다. 옆자리에서 안전벨트를 푸는 시온이 유리의 화면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누나, 형이랑 문자는 왜 항상 계약 확인 같아요?”“안 봤거든요.”“표정만 봐도 알아요. 형 만나기 전에는 멀쩡하다가 갑자기 웃잖아요.”“정시온 씨도 팬들 메시지 볼 때 웃던데.”“저는 직업상 하는 미소죠.”“지금 팬들한테 그대로 말해줄까요?”“누나가 형한테 물든 뒤로 공격적이 됐어.”시온은 투덜거리면서도 유리의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려 했다. 유리는 손목 보호대를 보여주며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작은 보조 가방을 가져갔다.“무거운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입국장 나가면 형이 어차피 전부 들고 갈 텐데.”“태준 씨는 제 짐꾼이 아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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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는 날에

두 액자 사이에 놓인 보랏빛 상자는 작았지만, 유리의 시선을 붙잡기에는 충분했다.그녀는 작업실 문 앞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액자에는 타이베이의 호텔 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태준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싱가포르 무대 위에서 촬영팀 동료들과 웃는 자신이 있었다. 그 사이에 놓인 상자는 우연히 올려둔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짙은 보랏빛 벨벳과 뚜껑 가장자리의 얇은 금색 선은 정태준의 어머니가 가족 식사 때 보여준 반지 상자와 똑같았다.유리가 뒤를 돌아보자 태준은 프린터 옆에서 사진 출력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인화지가 다 나온 뒤에도 같은 버튼을 두 번 누르는 손끝이 그의 긴장을 드러냈다.“태준 씨.”“네.”“저거 뭐예요?”그가 유리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모르는 물건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상자를 바라보는 모습이 지나치게 어색했다.“반지 상자입니다.”“그건 저도 알아요.”“알면서 왜 물었습니까?”“왜 거기 있는지 묻는 거예요.”태준은 인화지를 정리한 뒤에야 대답했다.“액자를 놓다가 꺼냈습니다.”“그러니까 액자를 놓다가 금고를 열고, 반지 상자를 꺼내서, 정확히 두 사진 사이에 놓았다고요?”“설명하니 이상하군요.”“원래 이상한 행동이니까요.”유리가 상자 앞으로 다가가자 태준도 한 걸음 움직였다. 가져갈지, 그대로 둘지 판단하지 못한 사람처럼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열어봐도 돼요?”“안 됩니다.”대답이 너무 빨라 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제 반지가 아닌가 봐요?”“당신에게 줄 가능성이 높은 반지입니다.”“가능성이 높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 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태준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변호사님이 애매하게 말하니까 그렇죠.”“아직 청혼하지 않았으니 당신의 반지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유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법정에서는 어떤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작은 상자 하나 앞에서 문장마다 스스로 함정을 만들고 있었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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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수요일

“아무 일도 없는 날이 대체 언제지?”정태준의 혼잣말을 들은 오현석이 펜을 내려놓았다.오전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의뢰인에게 전달할 의견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 범위를 냉정하게 계산하던 태준이 갑자기 달력을 켜고 중얼거렸으니, 현석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무슨 날을 찾는데?”“아무 일도 없는 날.”“그런 날을 왜 달력에서 찾아? 아무것도 안 적힌 날이 아무 일도 없는 날이지.”“비어 있는 날에도 예정되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잖아.”현석은 태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책상 위 휴대전화 달력에는 유리의 일정이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다온북스 근무일은 보라색, 사진집 회의는 파란색, 시온의 앨범 콘셉트 회의는 붉은색, 사진 에세이 집필 일정은 노란색이었다. 태준 자신의 재판과 상담 일정은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두 사람의 달력을 겹치자 한 달 내내 아무것도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설마 청혼 날짜 찾는 거야?”현석의 물음에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소리 낮춰.”“여기 우리 둘밖에 없어.”“직원들이 복도에 있잖아.”“그럼 맞네.”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달력을 닫았다. 현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었다.“지난번에는 준비해도 되냐고 허락까지 받았다면서. 그냥 하면 되지, 날짜는 왜 찾아?”“유리 씨가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날에 해달라고 했어.”“그럼 오늘 저녁에 해.”“오늘은 다온북스 근무 형태 변경 계약에 서명하는 날이야.”“내일은?”“투어 사진집 계약 최종 협상.”“금요일.”“고은채 작가와 에세이 원고 마감.”“주말은?”“어머니가 식사하자고 하셨다.”현석은 하나씩 듣다가 얼굴을 찌푸렸다.“정 변호사님, 그 정도면 평범한 날이 없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너무 바쁜 건데.”“그래서 문제야.”“다음 주 월요일은?”“시온 앨범 첫 콘셉트 회의.”“화요일은 비어 있잖아.”“내 재판 선고가 있어.”“그럼 수요일.”태준은 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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