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씀드리지만, 피해자 의견 진술은 증인신문이 아닙니다.”정태준은 식탁 위에 놓인 서류를 반듯하게 맞추며 말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유리는 그가 같은 설명을 오늘만 벌써 세 번째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선서도 하지 않고, 변호인에게 직접 반대신문을 받지도 않아요. 재판장에게 사건으로 입은 피해와 처벌에 관한 의견을 말하는 겁니다. 질문이 나오더라도 재판장이 필요한 범위에서만 할 거고요.”“네, 변호사님.”유리가 일부러 공손하게 대답하자 태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민유리 씨.”“네, 정태준 변호사님.”“지금 장난할 기분 아닙니다.”“그러니까 하는 거예요.”유리는 붉은 펜으로 빽빽하게 수정된 진술서를 집어 들었다. 초안의 절반 이상에 밑줄과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지속적인 공포를 느꼈다’는 문장 옆에는 구체적인 증상을 추가하라는 표시가 있었고, ‘일상이 무너졌다’는 표현 밑에는 출근 중단과 주거 이전, 불면 증세를 날짜별로 정리해 놓았다.법률 문서로서는 더없이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유리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이대로 읽으면 판사님은 잘 이해하시겠죠.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남기혁 씨 주장이 왜 말이 안 되는지도요.”“그래야 하니까요.”“그런데 나는 못 읽을 것 같아요.”태준의 손이 멈췄다.유리는 진술서를 내려다보았다. 종이에 적힌 모든 문장은 사실이었다. 남기혁은 칠 년 동안 자신을 뒤쫓았고, 개인정보를 빼냈으며, 집에 침입해 카메라를 설치했다. 사진을 조작해 정시온의 열애설에 이용했고, 폐극장으로 유인했으며, 그곳에서도 자신이 원해서 왔다는 식으로 말했다.그런데 활자로 정돈된 순간, 그 일들은 자신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버렸다. ‘피해자’라는 이름 아래 가지런히 분류된 항목처럼 보였다.“내가 왜 무서웠는지는 여기 다 있어요. 그런데 내가 왜 화가 났는지는 없는 것 같아요.”“화가 났다는 표현도 넣을 수 있습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유리는 종이를 뒤집었다.
最終更新日 : 2026-09-17 続きを読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