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Chapter 81 - Chapter 90

95 Chapters

이름을 넘긴 사람

ONLYONE_REAL_ID.zip.파일명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익명으로 활동하던 사람의 진짜 이름을 확인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위해 묶었다는 뜻. 박소라가 우연히 인화 주문서에서 유리의 신분증 사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처음부터 ‘온리원’의 정체라고 표시해 건넸다는 증거였다.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채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태준의 체온이 바로 옆에 남아 있었지만 손끝은 차갑게 식었다. 온리원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 민유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가족과 한나를 제외하면 과거 공동 전시나 인화 작업 때문에 실명을 교환한 몇몇 팬 사이트 운영자뿐이었다.“누가 떠올라?”태준의 물음에 유리는 곧바로 이름을 대지 않았다. 의심만으로 과거의 사람을 범인으로 정하고 싶지 않았다.“몇 명은 있어요. 그런데 지금 말하면 내가 기억을 그 사람한테 맞추게 될 것 같아요.”“알겠어.”태준은 더 묻지 않고 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상이 연결되자 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한국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뒤편 회의실의 불까지 모두 켜져 있었다.—두 분 예정대로 오늘 귀국하는 거 맞지?“응. 비행기 바꾸지 않았어.”—잘했어. 여기 있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보다 파일 발신자를 특정할 단서가 나왔어.유리의 어깨가 굳었다.“메일 주소가 복원됐어요?”—주소 전체는 아직이지만, 압축 파일 내부에 삭제되지 않은 메타데이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맥 운영체제에서 만든 파일이고 사용자 계정명이 ‘POLARIS’로 기록돼 있어요. 첨부된 화면 캡처 중 하나에는 메신저 알림 일부도 남아 있고요.폴라리스.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정시온의 데뷔 초부터 활동했던 팬 사이트로,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진과 푸른 색감으로 유명했다. 운영자는 강세은. 온리원보다 두 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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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지 않은 사진의 주인

“정시온 씨의 전 매니저요.”강세은의 말이 떨어진 뒤, 회의실 안에서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태준의 손을 꽉 잡았다. 태준의 손가락이 곧바로 맞물려 왔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으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면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현석이 먼저 침묵을 깼다.“전 매니저의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세은은 마른 입술을 적신 뒤 대답했다.“최민규요. 정시온 씨가 데뷔한 해부터 약 이 년 동안 로드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기록 담당자의 손이 움직였다. 현석은 세은 앞에 놓인 휴대전화와 작은 외장 저장 장치를 가리켰다.“오늘 제출하겠다고 한 자료가 그 사람과 관련된 겁니까?”“네.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와 백업 파일이에요. 박소라와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 메일, 받은 사진의 미리 보기 파일이 남아 있습니다. 원본 사진은 저장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열어 본 뒤 바로 지웠는데…… 복구될 수도 있다고 해서 기기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잠금 비밀번호와 포렌식 분석 동의서는 준비하셨습니까?”“네.”세은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종이 모서리가 테이블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현석은 서두르지 않고 봉투를 받아 증거 목록과 대조했다. 그동안 유리는 세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최민규가 찍은 사진이라는 건 언제 알았어요?”유리의 질문에 세은이 고개를 들었다.“파일을 받은 날에는 몰랐어요. 박소라는 전부 온리원이 찍은 거라고 했습니다. 민유리 씨가 공개 스케줄에서는 팬들에게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뒤로는 사생활 사진을 모아 해외 구매자에게 팔고 있다고 했어요.”“그 말을 왜 믿었죠?”세은의 눈가가 붉어졌다.“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변명보다 더 잔인한 대답이었다. 유리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태준이 그 힘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랐다는 뜻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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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기 전에 지켜야 할 것

최종 접속 오전 9시 14분.그 한 줄을 확인한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오 년 전의 거래와 침해를 복원하는 자리였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바로 오늘 증거에 손을 댄 사건이 되었다. 현석은 화면을 닫지 않은 채 포렌식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접속 시각 이후의 활동 기록부터 확인해 주세요. 파일 열람, 이동, 삭제, 다운로드, 공유 링크 생성까지 전부요. 계정에 직접 들어가지는 말고 현재 확보된 토큰과 서버 로그 범위 안에서만 확인하십시오. 동시에 사업자 측에 긴급 보전 요청을 보내고요.”전화를 끊기도 전에 다른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시온의 소속사 법무팀에도 즉시 연락이 들어갔다. 정시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저 사람이 지금 사진을 지우고 있는 거예요?”“아직은 몰라.”태준의 답은 짧았다.“접속만 했을 수도 있고, 내려받거나 다른 계정으로 옮겼을 수도 있어. 확인 전에는 단정하지 마.”“형은 이미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잖아.”“그래서 단정하지 말라는 거야.”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태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른쪽 검지 마디가 희게 변할 만큼 주먹을 쥐고 있었다. 유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그 손목에 가볍게 손을 댔다.태준이 돌아봤다.“당신이 직접 맡으면 안 돼요.”“알아.”대답은 빨랐지만 손의 힘은 풀리지 않았다.“현석 씨가 지휘하게 해요. 당신은 시온이 형이고, 사진에 찍힌 당사자이기도 해요. 이번에는 변호사 자리보다 가족 자리에 있어요.”태준은 몇 초 동안 유리를 바라봤다. 보호해야 할 사람이 둘이나 같은 방에 있고, 침해한 자의 움직임은 화면 속 숫자로만 보이는 상황에서 사건의 지휘권을 내려놓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 했던 약속은 편안한 순간에만 지키는 문장이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쥐었던 손을 펴고 자신의 노트를 현석 쪽으로 밀었다.“오현석.”“응.”“내가 이 사건에서 직접 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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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만든 거짓말

—신분만 확보하면 계약은 제가 만들게요.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민유리가 직접 넘긴 것처럼 보이면 됩니다.녹음이 끝난 뒤에도 박소라의 목소리는 거실에 남아 있는 듯했다. 유리는 뒤집어 놓은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발음됐는데도, 그 안의 민유리는 자신이 아니었다. 박소라가 범죄를 숨기기 위해 만든 가짜 인물이었다. 남의 사생활을 찍고, 사진을 팔고, 계약서까지 조작하는 사람. 실제 유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으면서 이름과 신분만 같은 허수아비였다.“나머지도 들을래?”현석이 전화 너머에서 물었다.“음성 파일이 네 개라고 했죠?”—응. 방금 들은 건 첫 번째 파일의 일부야. 두 번째는 최민규와 판매 가격을 조율하는 내용이고, 세 번째는 독일 유통업체에 보낼 파일의 정보값을 바꾸는 방법에 관한 대화야. 마지막 파일은 박소라 혼자 녹음한 메모로 보여. 위조 계약서에 넣을 항목을 읽어 놓았어.태준이 유리를 살폈다. 지금은 변호사가 아니라 남편으로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증거의 구조가 정리되고 있었다. 음성 원본의 생성 시각, 녹음 장치, 편집 여부, 계약서와의 일치점.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그는 먼저 유리의 선택을 기다렸다.“전부 한 번만 들을게요.”유리가 말했다.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응. 나중으로 미루면 계속 상상할 것 같아요. 실제보다 더 나쁜 말이 들어 있을까 봐.”—그럼 파일을 보내지는 않을게. 내가 필요한 구간만 순서대로 재생하고, 중간에 멈추고 싶으면 바로 말해.“그렇게 해 주세요.”현석은 두 번째 파일부터 재생했다. 최민규의 목소리는 박소라보다 작고 불분명했지만, 대화의 의미는 분명했다.—병원 사진은 빼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건 바로 문제 될 텐데.—그래서 값이 붙는 거예요. 얼굴이 잘 나온 것만 고르세요. 가족 사진은 정시온 혼자 있는 것보다 묶어서 팔아야 하고요.—출처 물어보면 뭐라고 합니까?—팬이 찍었다고 하면 돼요. 요즘 팬들은 병원까지 따라가잖아요.유리의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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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카메라

그날 그 자리에, 유리와 태준 말고도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오현석이 노트북 화면을 확대했다. 낡은 필름 특유의 입자가 뭉개진 사진 속에서 스무 살의 민유리는 카메라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스물다섯 살의 정태준이 서 있었다. 유리가 직접 찍어 간직했던 사진과 정확히 반대되는 구도였다.태준을 찍은 유리.그리고 그런 유리를 찍은 누군가.유리는 화면 가까이 몸을 숙였다. 오래된 사진은 흐렸지만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찬 바람에 귀가 시렸고, 카메라를 잡은 손가락은 곱아 있었다. 태준은 법학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유리는 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허락을 받은 뒤 셔터를 눌렀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원본 파일의 촬영 정보는?”태준의 질문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박소라가 한 번 손댄 파일이라 메타데이터는 믿을 수 없어. 다만 독일 쪽에서 압수한 인쇄물 뒷면에 희미한 표기가 남아 있었어. 유통용으로 새로 출력하면서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모양이야.”현석이 사진을 뒤집어 촬영한 이미지를 띄웠다. 종이 뒷면 한구석에 연필로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MHK. 07-11. 기다림.유리는 세 글자를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문하경 선배.”“아는 사람이야?”“대학교 사진 동아리 선배예요. 그날 과제를 지도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요.”기억 속의 목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유리야, 너무 멀리 가지 마. 필름 아껴. 그리고 동아리 활동을 기록해야 한다며 회원들을 따라다니던 은색 카메라. 하경은 결과물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의 모습도 남겨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유리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그날 선배가 있었어요. 아예 잊고 있었어.”“몰래 찍은 겁니까?”태준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유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동아리 기록 촬영은 미리 동의를 받았어요. 저도 찍히는 걸 알고 있었고요. 다만 이 장면이 남았다는 건 몰랐어요.”“그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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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돌려주는 문장

‘그들은 사진의 주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지우지 않은 채 문서를 저장했다. 아침 햇빛이 식탁 끝에 걸려 있었고, 옆에 놓인 커피에서는 가느다란 김이 올라왔다. 어젯밤 현상 사진들을 정리하느라 늦게 잠든 탓에 눈꺼풀이 묵직했지만, 화면 속 문장을 보는 동안에는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졌다. 실수였다는 말로 덮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고도 가져가고, 누구의 이름인지 알고도 바꾸어 붙인 일. 유리는 그 차이를 끝까지 남기고 싶었다. 주방에서 나온 태준이 커피잔 옆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토스트 위에 달걀이 조금 삐뚤게 얹혀 있었다. 유리는 접시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웃었다.“오늘은 계란이 이겼네.”태준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맛에는 영향 없어.”“어제는 모양도 실력이라면서.”“그건 내가 이겼을 때의 기준이고.”유리는 포크로 달걀 끝을 찌르며 고개를 저었다.이런 식으로 기준을 바꾸는 사람이 법정에서는 누구보다 일관된다는 것이 가끔 우스웠다. 태준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그는 문서를 읽고도 곧바로 고칠 곳을 말하지 않았다. 유리가 먼저 물을 때까지 자기 접시의 토스트를 잘랐다. 그 잠깐의 여유가 유리에게는 배려로 느껴졌다.“마지막 문장, 너무 세?”태준은 다시 화면을 보았다.“세지. 그래서 확인된 범위와 붙여야 해.”그는 문장 아래 빈칸을 가리켰다.“지금 확보한 자료에는 원소유자 정보가 남아 있었다는 설명. 그걸 붙이면 감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문장이 돼.”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압수된 보관 자료에는 촬영자 이름과 작업 번호가 기록되어 있었고, 일부 파일은 ‘원소유자 확인 완료’라는 폴더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길어졌지만 문장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태준은 수정된 글을 읽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이건 현석이가 최종 확인할 거야. 나는 남편으로서 아침을 먹으라는 의견만 내겠습니다.”유리가 포크를 든 채 그를 보았다.“그 의견은 받아들일게.”“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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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돌려주는 문장

현석은 서류를 두 묶음으로 나누었다. 세은의 촬영물 피해에 관한 항목과, 유리의 신분 자료를 제공한 행위에 관한 항목이었다. 한쪽에 서명한다고 다른 쪽의 책임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며, 공동 대응 참여 역시 용서나 화해를 뜻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세은은 두 서류를 번갈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제 피해 통지는 받겠습니다. 그리고 민유리 씨에게 한 일에 관한 조사도 따로 응하겠습니다.”유리는 그제야 그녀와 눈을 맞췄다.“저도 두 가지를 따로 볼게요.”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한꺼번에 안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서류를 바로 제출했고, 누군가는 가족과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접속을 종료했다. 유리는 참석자 목록에서 사라지는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미완료로 표시하려다 손을 멈췄다. 대신 ‘검토 중’이라고 적었다. 돌아오지 않은 답변을 재촉하기 전에, 질문을 받은 사람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부터 기억해야 했다.회의실 밖 복도에는 서한나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유리를 발견한 한나가 하나를 내밀었다.“얼굴이 회의 세 개 한 사람 같아.”“하나밖에 안 했어.”“그 하나에 사람이 열 명 넘었잖아. 곱하면 돼.”유리는 따뜻한 차를 받아 들다가 한나의 뒤편을 보았다. 현석의 사무실 문 앞에 작은 도시락 가방이 놓여 있었다. 한나는 유리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즉시 가방을 발끝으로 밀었다. 너무 늦은 은폐였다.“도시락?”“내 거.”“현석 변호사님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도시락도 가끔 신분을 바꾸잖아.”유리는 웃음이 터질까 봐 종이컵을 입에 가져갔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고 현석이 나왔다. 그는 도시락 가방을 발견하자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다가, 유리를 보고 손을 멈췄다. 한나와 현석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생겼다. 유리는 두 사람을 한 번씩 보고 차를 마셨다.“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다만 음식은 빨리 드세요.”한나가 눈을 가늘게 뜨자 유리는 덧붙였다.“신분 바꾸느라 상하면 안 되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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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돌려주는 문장

집에 돌아온 유리는 손을 씻은 뒤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을 힘도 아까워 그대로 두고 침대 끝에 앉았다. 조금 뒤 태준이 마른 수건을 들고 와 그녀의 젖은 머리끝을 감쌌다. 그가 가까이 서자 셔츠에 밴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유리는 그의 허리 양옆을 잡고 이마를 배에 기댔다. 아까까지 버티고 있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 태준의 손도 머리 위에서 멈췄다.“잠깐 이러고 있을래?”유리는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태준은 재촉하지 않았다. 수건을 내려놓고 유리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일정한 손길에 호흡이 조금씩 길어졌다. 유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오늘 누가 내 이름을 안 쓰겠다고 했을 때, 잠깐 서운했어.”태준이 그녀를 내려다봤다.“공동 정정문에서?”“응. 같이 이름을 돌려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나는 내 이름을 숨기고 싶었던 시간을 잊고 있었더라.”그녀는 그의 셔츠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내가 괜찮아졌다고 남도 준비됐을 거라고 생각했어.”“말하기 전에 멈췄잖아.”“마음속으로는 못 멈췄는데.”태준은 유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마음속에서 처음 든 생각까지 항상 맞을 수는 없지. 그다음에 뭘 했는지가 중요해.”유리는 그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준의 얼굴이 가까웠다. 자신을 향해 내려온 시선에는 오늘의 선택을 평가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오늘은 위로도 잘하네.”“보상이 또 구체적이지 않을까 봐 걱정인데.”유리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태준이 물러나지 않자 두 번째 입맞춤은 조금 길어졌다. 그의 손이 유리의 허리를 받치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움직였다. 유리는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가까워진 체온에 차갑던 손끝이 녹았다. 태준이 입술을 떼고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기댔다.“저녁부터 먹을까.”유리는 그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낮게 웃었다.“지금 그 말을 할 수 있어?”“할 수는 있지. 지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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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앞에 서는 사람

시온의 입장문은 유리가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공개됐다. 소속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예상보다 짧았다. 무단으로 유통된 사생활 사진의 촬영 경위가 확인 중이며, 온리원이 해당 사진들을 촬영하거나 판매하는 데 동의한 사실은 없다는 설명이 먼저 나왔다. 뒤이어 사진을 촬영하고 유통한 사람들의 책임은 각 행위에 따라 확인될 것이라는 문장이 붙었다. 마지막 문단은 시온이 직접 고른 말이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진을 찍히는 일을 하더라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촬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유리는 글을 끝까지 읽은 뒤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본명도, 태준과의 관계도 없었다. 시온이 병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보여 주는 사진 역시 붙지 않았다. 누군가의 잘못을 설명하기 위해 피해를 다시 전시하지 않아도 되는 글이었다.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아?”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온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보여.” “세 번 고쳤대.” “오빠한테 보내서?” “두 번은 담당자한테. 마지막 한 번은 나한테.”“뭐 고쳐 달랬는데?”“‘앞으로 더욱 조심하겠습니다’를 뺐어.”유리는 화면을 다시 켰다. 그런 문장은 없었다. 대신 앞으로 촬영과 자료 관리 과정에서 필요한 기준을 소속사와 함께 정비하겠다는 말이 남아 있었다. 시온이 더 조심해야 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형은 짧은 수정으로 돌려주었다. 유리는 태준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 “잘했네.” 태준이 컵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오늘 업무 시작 전 평가가 좋군.” “계속 유지해.”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는데.”입장문이 공개된 뒤 온리원의 오래된 계정에도 알림이 쌓이기 시작했다. 유리는 아직 계정을 다시 운영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정 안내를 올리기 위해 접속 권한을 정리해 두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제라도 사실이 밝혀져 다행이라는 말, 당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 남아 있는 사진을 다시 올려 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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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앞에 서는 사람

유리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담당자도 등을 곧게 폈다. 그녀는 빈 액자가 표시된 도면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첫 작품에 제가 뭐라고 적었는지 봐 주세요. 사진에 남은 사람이 공개하지 않기로 선택해서 비워 둔 자리예요. 그런데 전시를 알리는 데 제 가족 관계를 먼저 쓰면, 관람객한테는 다른 말을 하면서 제 생활은 예외로 취급하게 돼요.”담당자는 도면과 홍보안을 번갈아 보았다. 곧바로 수긍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간 대관료와 인쇄 비용, 외부 지원사의 관심도를 설명했다. 주목받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적인 사정이기도 했다. 유리는 그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비용이 들지 않는 것처럼 이상적인 이야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결혼을 홍보 수단으로 쓰는 데 동의한 적도 없었다.“그럼 규모를 줄이는 안부터 같이 봐 주세요.” 유리는 도면의 두 번째 방을 가리켰다. “추가 공간을 빼고, 대형 출력 세 점도 작은 크기로 바꾸면 얼마나 줄어들까요? 개막 행사도 토크 형식으로 크게 하지 않고 예약 관람으로 진행할 수 있어요. 홍보가 필요한 건 알아요. 대신 홍보할 내용을 제가 정하고 싶어요.”담당자가 계산기를 켰다. 잠시 숫자를 두드리던 그가 말했다. “후원 없이 전부 진행하는 건 어렵습니다.” “후원을 받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제 사생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조건을 먼저 제안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유리는 가방에서 다른 종이를 꺼냈다. 전시 설명을 어려워할 관람객을 위해 준비한 질문들이었다. 내가 올린 사진에 함께 찍힌 사람은 어디까지 동의했는지, 오래된 사진을 다시 공개할 때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사람을 잘 찍고 싶다는 마음과 그 사람의 경계를 어떻게 함께 지킬지.담당자는 종이를 받아 읽다가 세 번째 질문에서 멈췄다. “이건 팬들이 와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팬이 아니어도요. 가족사진을 올리는 사람, 아이 사진을 찍는 사람, 친구와 여행 다녀온 사람도요.” 유리는 빈 테이블이 그려진 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사진을 가져오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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