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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41 - チャプター 50

59 チャプター

내가 선택된 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지켜본 겁니다

루시앙 바렐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Clone A와 같은 세션 안에서 발견됐지만, 유리는 그날 밤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L.VAREL은 분명 루시앙이 과거 Vela에서 사용했던 은퇴 임원용 아카이브 계정이었고, BORDERLINE_MASTER_1.0이 Vela에 도착하기 27분 전 그 계정이 활성화된 것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접속에 사용된 인증서가 Custodian Master Certificate의 Clone A였다. 하지만 계정 이름과 인증서가 한 화면에 있다고 해서 키보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루시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계정과 오래된 직책, 폐기된 인증서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다.“연락은 증거 묶고 나서 해요. L.VAREL 계정의 원래 인증 방식, 마지막 정상 사용, 복구 요청, 접속 기기까지 전부 확인하고요.”유리의 지시에 보안팀이 밤새 Vela 측과 자료를 맞췄고, 다음 날 오전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첫 결과가 나왔다. L.VAREL 계정은 루시앙이 경영에서 물러난 9년 전 읽기 전용으로 전환됐지만 삭제되지는 않았다. 창립자 자료와 과거 시장조사 보고서의 저작권 문제 때문에 법무 보존 계정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새 기기에서 로그인할 수 없었고, 접근이 필요할 경우 Vela 법무팀이 일회성 링크를 발급해야 했다.그런데 4개월 전의 접속에는 일회성 링크가 없었다.“레거시 신뢰 경로로 들어왔습니다.”보안팀장이 인증 흐름을 확대했다. Clone A가 Vela의 오래된 아카이브 서버에 자신을 Aster Methodology Legacy Partner로 인식시켰고, 서버는 그 인증서를 루시앙의 퇴직 전 권한과 연결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루시앙의 비밀번호를 훔쳐 로그인한 게 아니었다. Aster라는 과거 조직의 권한을 이용해 L.VAREL 계정을 다시 깨운 것이었다.유리는 턱을 괴었다.“그럼 오히려 루시앙 개인이라는 증거는 약해졌네요.”“계정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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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였던 적조차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유리는 출근하자마자 INTERPRETER CANDIDATES 폴더부터 열지 않았다. 전날 밤 보안팀이 보내온 보고서에는 폴더 생성일이 12년 전이라는 사실과 현재 폴더 안에 한유리의 이름이 있다는 것만 적혀 있었다. 그 두 사실을 붙이면 마치 누군가가 유리가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그녀를 ‘해석자 후보’로 골라두고 기다렸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사건에서 가장 위험했던 건 늘 그런 식의 빈칸이었다. 서로 다른 시점에 만들어진 기록을 한 화면에 겹쳐놓으면 우연은 계획처럼 보였고, 누락된 장소를 지우면 만나지도 않았던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연결돼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유리는 그래서 이번에는 폴더의 내용보다 먼저 버전 기록을 요구했다.결과는 오전 아홉 시 반에 나왔다. INTERPRETER CANDIDATES라는 폴더 자체는 정말 12년 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들어 있던 것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세 개의 분류표뿐이었다. Sensory Language, Associative Description, Spatial Perception.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 연상 묘사의 특성, 거리와 공간을 표현하는 언어 패턴을 분류하기 위한 오래된 데이터 정리 폴더였다. 한유리의 이름은 없었다. 한서연도 없었고, 권재헌 역시 없었다.“그럼 내 이름이 들어온 건 언제예요?”보안팀장이 버전 이력을 한 줄 아래로 내렸다.4개월 전.R-01 블라인드 테스트가 끝난 뒤.정확히.23분 후.유리는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12년 전부터 자신을 후보로 두었다는 이야기가 또 하나의 기묘한 운명처럼 붙으려 했다. 하지만 실제 기록은 훨씬 평범했다. 12년 전에 만들어진 낡은 분류 폴더를 누군가 4개월 전에 다시 열었고, 그 안에 최근의 한유리 데이터를 집어넣었다. 오래된 상자에 새 종이를 넣었다고 해서 그 종이까지 12년 전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세아가 헛웃음을 흘렸다.“또 타임스탬프 장난이었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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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한 사람과 결론 내린 사람

미셸 로랑의 인사기록이 도착한 건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유리는 이름보다 먼저 입사일과 직무 변동, 2년 전 파리 출장, 4개월 전 서울 방문 목적을 나란히 놓았다. Senior Observer, Consumer Response Strategy라는 직책에 Observer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시스템의 Observer 권한 사용자라고 결론 내릴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Vela에서 Observer는 소비자가 광고와 제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고 정리하는 시장조사 직무에서 흔히 쓰던 명칭이었다.하지만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겹치는 지점이 많았다. 미셸은 11년 전 Aster가 Vela로 흡수되던 시기에 입사했고, 초기에 루시앙 바렐 직속 소비자 반응팀에서 일했다. 2년 전 파리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워크숍 때는 브랜드 반응 자문 명목으로 메종 르비에를 방문했고, 4개월 전 서울에서는 20주년 캠페인의 초기 소비자 언어 분석을 위해 브랜드전략팀 외부 자문으로 등록돼 있었다. 최민서가 임시 출입카드를 발급한 것도 그 업무 때문이었고, 계약서와 회의록, 비용 처리까지 모두 정상적으로 남아 있었다.“민서 씨부터 빼도 되겠네요.”세아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미셸 씨를 회사에 들인 것 자체는 정상 업무였어. 브랜드전략 문장도 마찬가지고.”최민서는 4개월 전 캠페인 정렬 회의에서 유리의 감각 언어를 참고해 ‘향은 거리를 줄이지 않는다. 사람이 먼저 줄인다.’라는 문장을 내부 덱에 옮겼다. 그 문장이 해외 계정에 그대로 올라가면서 한때 민서가 유출자처럼 보였지만, 이번에 복구된 기록에서는 민서가 덱을 저장한 뒤 GLOBAL_FORMULATION_SHARED가 그 파일을 읽은 시점이 명확히 분리됐다. 민서가 외부로 보낸 게 아니라, 정상적으로 만든 내부 자료를 누군가 죽은 공유 계정으로 가져간 것이다.검은 랜야드와 은색 장식도 이미 설명된 것과 일치했다. 파리 워크숍 참가자들에게 나눠준 기념 장식이었고, 원래 끈이 끊어진 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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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붙인 의미는 내 것이 아닙니다

루시앙 바렐과의 두 번째 면담을 잡기 전, 유리는 법무팀이 준비한 질문지를 절반 가까이 지웠다. 왜 한유리를 선택했는가, 왜 KJ-04와 연결했는가, BORDERLINE을 성공작이라고 판단했는가 같은 질문이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반드시 물었을 내용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루시앙이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한유리가 특별한 해석자였고, 권재헌이 올바른 대상이었으며, 두 사람이 만난 순간부터 어떤 가설이 검증되기 시작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유리는 새 질문지를 작성했다.한유리의 발언을 누가 AST-H2 기준에 따라 재분류했는가.NATURAL ENCOUNTER OCCURRED를 NATURAL ENCOUNTER CONFIRMED로 변경한 사람은 누구인가.AST-VR-01을 반환받고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진술한 이유는 무엇인가.MASTER 1.0 무단 출력 이후 Methodology 권한으로 실행된 작업을 모두 설명할 것.세아가 질문지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왜 골랐냐는 건 아예 안 물어보네요.”“응. 그 사람이 나를 골랐다는 전제부터 안 받아주려고.”유리는 노트북을 닫지 않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신은 열네 명의 후보 중 처음에는 7위였다. R-01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거리의 변화를 사람의 움직임에 빗대어 설명한 뒤에야 1위로 올라갔다. 그것도 한유리라는 사람 전체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AST-H2의 기준과 문장 하나가 닮았다는 이유였다. 그 뒤 권재헌과 실제로 만나고 BORDERLINE이 만들어지자, 누군가 뒤늦게 과거의 조각들을 이어붙여 처음부터 예정된 것처럼 설명했다.“사람 하나를 골랐다기보다 자기 가설에 맞는 문장을 골랐던 거지.”“그런데 그 문장을 한 선배가 권재헌 본부장님을 좋아하게 됐고요.”“그러니까 자기들이 더 확신했겠지.”“우연히 답이 맞은 것처럼 보여서.”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답이 맞은 게 아니야. 질문 자체가 틀렸으니까.”한유리가 권재헌을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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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노아 클라인의 두 번째 진술은 다음 날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 이번에도 유리는 면담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노아가 한유리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는 요청을 세 번째로 보냈지만, 그가 원하는 장면을 굳이 만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대신 법무팀과 보안팀이 같은 질문을 정확한 순서로 던지도록 했다. 선을 넘었다는 걸 알고도, 왜 두 번이나 직접 승인했습니까. 차량 노출과 clean-subject 패널, 두 실행 기록 모두 CUSTODIAN_EXEC 아래 노아의 승인으로 남아 있었고, 그 직전 시스템은 ‘비공개 인간 노출 조건이 생성된다’는 경고까지 분명하게 띄웠다. 실수로 누른 것도, 의미를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처음 십여 분 동안 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사관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그는 자신이 승인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BL-B9-EVAL 2는 사전 성분 검토에서 독성이나 급성 자극 위험이 없는 향료 조합이었고, clean-subject 패널 역시 정식 시향 전에 보안팀이 발견해 실제 노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사관은 곧바로 질문을 되돌렸다. 위험 물질이 아니었다는 것과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더구나 차량 노출은 권재헌에게 어떤 향이 사용되는지, 왜 사용되는지 알리지 않은 채 송풍구를 통해 이루어졌다.노아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알고 있었습니다.”유리는 별도 회의실 화면으로 그 문장을 읽었다. 예상했던 답인데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몰랐다’는 말이 나왔다면 기록으로 반박하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알고 있었다. MASTER 1.0이 무단 출력된 순간 이미 자신들이 보존이라고 부르던 일이 사람의 선택을 침해하는 단계로 넘어갔다는 것도 알았고, 차량 노출 직전 뜬 경고의 의미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OVERRIDE를 눌렀다.조사관이 물었다.“왜 승인했습니까?”노아가 한참 뒤 대답했다.“Methodology가 어디까지 갈지 확인해야 했습니다.”세아가 옆에서 기가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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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한 거리

아침에 눈을 뜬 유리는 한동안 자신이 왜 평소와 다른 천장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기 집 천장이 맞았는데, 시야 한쪽으로 보이는 것이 평소와 달랐다. 베개 옆에 놓인 남자의 팔, 이불 아래로 느껴지는 체온,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일정한 숨소리. 어젯밤 현관에서 시작된 키스가 거실을 지나 침실 앞까지 이어졌고, 그 뒤에도 재헌은 몇 번이나 정말 괜찮은지 물었다. 유리는 그때마다 대답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묻는 그의 입을 먼저 막아버렸던 기억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유리는 눈을 감았다.‘미쳤다.’회사에서는 권우그룹 총괄본부장과 메종 르비에 책임 조향사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회의할 때도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고, 시향지를 건넬 때조차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권재헌이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것도 셔츠는 거실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유리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그의 맨살에 뺨을 기대고 있었던 순간이었다.슬쩍 몸을 빼내려던 유리의 허리에 팔이 감겼다.“어디 갑니까.”잠긴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유리가 움찔하며 돌아보자 방금까지 자는 줄 알았던 재헌이 눈을 뜨고 있었다. 머리가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고, 회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느슨한 얼굴이었다.“안 잤어요?”“잤습니다.”“근데 어떻게 바로 알아.”“당신이 움직이니까.”재헌의 팔이 허리에서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유리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괜히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대담해놓고 아침이 되자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재헌은 그런 유리를 한참 바라보다 입가를 아주 조금 올렸다.“웃지 마요.”“안 웃었습니다.”“지금 웃었잖아요.”“좋아서 그런 겁니다.”그 대답이 더 문제였다. 유리는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가 결국 재헌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회사에서 이 얼굴 하지 마요. 진짜 티 나니까.” 그러자 재헌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웃었다.“회사에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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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 향입니다

BORDERLINE_MASTER_1.1이 생산 전환 상태로 바뀐 다음 날, 유리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마스터가 확정됐다고 해서 조향사의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연구실 안에서 몇 밀리리터씩 만들던 향이 수십, 수백 배 규모의 생산 배치로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원료 로트와 숙성 조건, 충전 과정에서 생기는 미세한 편차까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특히 1.1은 앰버가 올라오는 시점을 의도적으로 늦춘 만큼 온도와 교반 조건의 영향을 더 예민하게 받았다. 유리는 생산팀에서 올라온 첫 대량 배치 샘플을 손목이 아니라 시향지에 뿌리고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첫 30초는 베르가못과 페티그레인이 차갑게 열렸다. 바이올렛 리프가 얇고 선명한 선을 만들고, 그 뒤에서 아이리스가 서두르지 않고 경계를 흐렸다. 3분, 5분, 8분. 시더가 중심을 잡은 뒤에도 앰버는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유리는 시향지를 코끝 가까이 가져갔다가 조금 멀리했고, 다시 가까이 가져오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기록했다. 세아도 맞은편에서 다른 로트의 시향지를 확인하고 있었다.“어때?”“3번이 2번보다 아이리스가 조금 건조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수치 차이는 거의 없어요. 앰버는 이번엔 다 비슷하게 올라오고요.”유리는 세아가 내민 3번 시향지를 받아 자기 것과 바꿔 맡았다. 확실히 아주 미세한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향은 기계가 아니었다. 천연 원료가 들어가는 이상 모든 병이 분자 하나까지 똑같을 수는 없고, 중요한 건 그 차이가 제품의 정체성을 흔드느냐였다. 유리는 3번을 다시 한 번 맡은 뒤 고개를 저었다.“이건 괜찮아. 억지로 똑같이 만들려고 손대면 오히려 전체 균형 깨져.”“통과?”“응. 대신 첫 세 배치는 아이리스 로트 바뀔 때마다 내가 확인할게. 그다음부터 네가 받아.”세아가 기록하던 손을 멈췄다. “제가요?”“왜. 싫어?”“아니, 그게 아니라.”세아의 시선이 유리에게서 생산 샘플로 내려갔다. 이제 파리 출국까지 여섯 주가 남았다. 그동안 인수인계를 해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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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에게 맡길 차례입니다

BORDERLINE 캠페인 촬영은 출시를 열흘 앞둔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됐다. 메종 르비에 본사 1층 쇼룸은 평소의 진열대를 모두 걷어내고 촬영 세트로 바뀌어 있었다. 중앙에는 유리가 최종 승인한 완제품 병이 놓였고, 그 뒤로 반투명 유리판 두 장이 서로 닿지 않을 만큼 미세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사이에 분명한 틈이 보이는 구조였다. 캠페인 문구인 ‘가까워질지는, 당신이 정합니다.’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세트였고, 유리는 촬영팀이 조명을 맞추는 동안 향이 놓일 위치와 분사량부터 다시 확인했다.“향수 광고 촬영장에서 모델보다 향수병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처음 보네.”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유리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향수 광고니까 당연하지.”“나는?”“병 다음.”“너무하네.”차선우가 유리 옆으로 다가와 세트 중앙을 들여다봤다. 검은 셔츠 위에 회색 재킷을 걸친 그는 아직 헤어와 메이크업을 완전히 끝내기 전인데도 이미 촬영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보였다. 유리는 그런 선우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본 뒤 재킷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 손목과 손등이 보이는 컷이 있어서 향을 실제로 분사할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오늘 손목에 다른 향 뿌렸어?”“안 뿌렸어. 바디워시도 네가 보내준 무향으로 썼고.”“로션은?”“그것도 무향.”“좋아. 촬영 들어가기 10분 전에 한 번만 뿌릴 거야. 중간에 향 죽었다고 덧뿌리지 말고. 클로즈업 컷 때문에 피부 광택제 쓰면 분사 위치 피하고.”선우가 피식 웃었다. “역시 나한테는 일 얘기밖에 안 하지.”“일하러 왔잖아.”“예전에는 그래도 밥 먹었냐 정도는 물어봤는데.”유리가 그제야 선우를 쳐다봤다. “밥 먹었어?”“먹었지.”“그럼 됐네.”선우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촬영 스태프 몇 명이 두 사람 쪽을 힐끗 봤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어서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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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은 뒤에도 우리는 우리였습니다

BORDERLINE 론칭 당일,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오전 다섯 시 사십칠 분이었다. 평소라면 다시 눈을 감았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출시 행사 시작은 오후 두 시였고, 첫 판매는 오전 열 시부터였다. 생산과 물류, 온라인 스토어 준비까지 전날 모두 확인했으니 지금 유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지만, 몇 달 동안 손끝에서만 존재하던 향이 오늘부터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잠이 다시 올 리 없었다.주방으로 나온 유리는 물을 끓이다가 식탁 위에 놓아둔 작은 상자를 봤다. 정식 완제품과 똑같은 아이보리빛 패키지였지만 옆면에는 일반 판매품과 다른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PERFUMER ARCHIVE / 017. 조향사 보관분으로 별도 배정받은 병이었다. Sample 17에서 시작된 번호를 굳이 선택한 이유를 세아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재헌에게는 더더욱 말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 자기가 너무 안전하다고 평가했던 향, 그 향을 확인하겠다고 처음 보는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던 순간, 그리고 그 남자가 이제는 자기 연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둘뿐이면 충분했다.휴대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뻔해서 유리는 화면을 보기도 전에 웃었다.재헌 씨: 깼습니까?유리는 바로 답했다.유리: 어떻게 알았어요?재헌 씨: 저도 깼으니까요.유리: 본부장님이 긴장도 해요?잠시 뒤 답이 왔다.재헌 씨: 제 향수도 아닌데 제가 왜 긴장하겠습니까.유리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내렸다.유리: 그럼 다시 자요.재헌 씨: 한유리 씨는요?유리는 식탁 위의 017번 상자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유리: 나는 내 향수라서 못 자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재헌 씨: 그럼 오늘 끝나고 축하합시다. 제대로.유리는 그 문장을 읽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늘 끝나고’라는 말 뒤에는 조사 회의나 보안 보고서가 붙었다. 누가 어떤 계정에 접근했고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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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이

BORDERLINE 론칭 다음 날, 유리는 평소보다 십 분 늦게 회사 로비에 들어섰다. 전날 행사가 끝난 뒤 재헌과 집에서 늦게까지 샴페인을 마신 탓도 있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워 있던 재헌을 두고 먼저 일어나기가 싫었던 탓이었다. 출근해야 한다며 이불을 걷어낸 사람은 유리였는데, 정작 욕실에 다녀와서는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재헌의 흐트러진 머리를 구경했고, 그러다 눈을 뜬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침부터 키스를 한 번 더 했다. 결국 재헌이 “이러다 둘 다 지각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떨어졌으니, 지금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이 평소보다 묘하게 풀려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닐 것이다.문제는 오늘부터 굳이 그 얼굴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 BORDERLINE이 정식 론칭됐고, 둘이 정한 비밀 연애의 종료 시점도 지났다. 그렇다고 전 직원에게 사내 메신저로 ‘한유리와 권재헌이 연애합니다’라고 공지할 생각은 없었지만, 누군가 눈치채고 물으면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말로는 별것 아닌 결정처럼 들렸는데, 막상 회사에 들어오니 유리는 평소보다 주변을 더 의식했다. 자신이 재헌과 같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곧바로 ‘왜 다행이지?’ 싶어 혼자 미간을 찌푸렸다.“선배.”뒤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돌아보자 커피 두 잔을 든 세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잔을 자연스럽게 건네받자 세아는 유리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왜.”“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표정으로 했잖아.”“그럼 질문 하나만.”세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유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제 본부장님이랑 같이 갔죠?”유리는 예전처럼 주변부터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진짜 이제 안 숨기네요?”“숨기지 않는 거랑 떠벌리고 다니는 건 다르거든.”“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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