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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51 - チャプター 59

59 チャプター

떠나기 전에 남겨야 할 것

파리 출국까지 정확히 한 달이 남은 월요일, 유리는 자기 자리에서 이름표를 떼어내려다 손을 멈췄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짐을 싸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연구실 자리 배치를 조금 바꾸기로 했고, 그동안 유리 바로 옆에서 보조하던 세아가 BORDERLINE 후속 생산을 정식으로 맡게 되면서 두 사람의 책상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처음에는 단순한 자리 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HAN YURI / SENIOR PERFUMER라고 적힌 작은 명패를 손에 들자 이상하게 출국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그거 왜 들고 있어요?”뒤에서 세아가 묻자 유리는 명패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자리 바꾼다며.”“그래도 선배 자리 없애는 건 아니잖아요. 파리 가도 서울 소속 프로젝트 계속 보는데.”“그러니까 작은 자리 하나만 있으면 되지. 창가 쪽 빈 책상 있잖아.”세아의 표정이 금세 이상해졌다. “싫어요.”“뭐가.”“선배 자리 제가 먹은 것 같잖아요.”유리는 한동안 세아를 보다가 결국 웃었다. “먹으라고 주는 거야.”“그래도.”“윤세아.”유리는 의자를 돌려 세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BORDERLINE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세아는 유리가 정한 포뮬러를 따라가며 데이터를 정리하는 역할이 더 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후속 생산 배치에서 미세한 편차를 먼저 찾아내고, 품질팀과 직접 기준을 조율하고, 유리가 맡아보기도 전에 자기 판단으로 승인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정작 사람의 마음은 업무 권한처럼 버튼 하나로 넘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내가 이 책상 계속 차지하고 있으면 네가 매번 여기 와서 물어볼 거잖아.”“그럴 수도 있죠.”“그러면 내가 파리에 가는 의미가 없지.”“그건 너무한데.”“내가 없다고 네가 갑자기 조향을 못 해?”“아니요.”“BORDERLINE 기준 몰라?”“알아요.”“문제 생기면 누구랑 확인해야 하는지도 알고?”“품질팀이랑 생산팀이요. 기준 밖이면 선배한테 샘플 보내고.”“그럼 됐잖아.”유리는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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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재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던 저녁은 정말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다. 유리는 퇴근길에 장을 봤고, 재헌은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해 현관 앞에서 장바구니부터 받아 들었다. 둘이 만든 건 거창한 요리도 아니었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채소를 썰어 파스타를 만들고, 재헌이 사 온 빵을 데우고, 유리가 아껴두었던 와인을 한 병 열었다. 출국까지 스물아홉 날이 남았다는 사실도, 파리에서 살 집도, 장거리 연애도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재헌이 양파를 지나치게 일정한 크기로 써는 걸 보고 유리가 “이런 것도 본부장처럼 하네요”라고 놀렸고, 재헌은 “크기가 달라지면 익는 시간이 달라집니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해서 결국 유리가 한참 웃었다.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정말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리는 재헌의 어깨에 기대 태블릿으로 별 의미 없는 예능을 봤고, 재헌은 처음에는 화면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유리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향수도 뿌리지 않은 날이었다. 유리에게서 나는 건 샴푸와 세제, 조금 전 요리하면서 밴 버터 냄새 정도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예전에는 재헌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향이 느껴질 때마다 그 정체부터 알아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굳이 모든 냄새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재헌 씨.”“네.”“나중에 내가 파리에 있고 당신이 서울에 있을 때 오늘 같은 날 생각날 것 같아요.”재헌의 손이 유리의 머리카락 위에서 잠깐 멈췄다. 유리는 화면을 끄고 그의 어깨에 조금 더 깊게 기대었다. 슬픈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가슴 안쪽이 묘하게 저렸다.“특별한 데 갔던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생각날 것 같아. 퇴근하고 만나서 밥 먹고, 별것도 아닌 거 보다가, 졸리면 자고. 파리 가면 이런 건 바로 못 하잖아요.”“그렇겠죠.”“되게 담담하게 말하네.”“안 담담합니다.”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재헌은 잠시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내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기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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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연습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출국까지 스물한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 빈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시트는 아직 따뜻했지만 재헌은 없었다. 욕실에서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주방 쪽에서 작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파리에서 가져갈 짐을 정리하다 둘 다 소파에서 잠들 뻔했고, 결국 침대로 들어온 게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다. 그런데 재헌은 벌써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잠시 뒤 방문이 열렸다. 재헌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일어났습니까?”유리는 이불 밖으로 눈만 내놓았다.“몇 시예요?”“일곱 시 십이 분.”“왜 벌써 옷 입었어요.”“오늘 여덟 시 반 회의입니다.”“알아요.”“한유리 씨는 아홉 시 출근이고요.”“그것도 알아요.”재헌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유리는 그가 가까워지자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셔츠 자락을 잡았다.“그럼 조금만 있다 가요.”재헌의 움직임이 멈췄다.유리도 자기가 한 말을 뒤늦게 의식했다. 예전 같으면 ‘아니, 그냥 가요’ 하고 바로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며칠 전 어머니 앞에서 약속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하고, 아쉬우면 아쉽다고 하기로.그래서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몇 분이면 됩니까?”재헌이 물었다.“그걸 꼭 정해야 해요?”“안 정하면 회의에 늦을 것 같아서.”“……오 분.”재헌이 손목시계를 봤다.“좋습니다.”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그의 등에 이마를 기대었다. 재헌은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협탁에 내려놓고 유리의 손을 잡았다. 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가늘게 들어왔고, 어제 정리하다 만 여행용 캐리어가 방 한쪽에 벌어진 채 놓여 있었다.그 캐리어가.요즘 자꾸 눈에 들어왔다.처음 꺼냈을 때는 설렜다. 파리에서 입을 옷을 고르고,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고, 어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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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숨기는 대신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재헌이 지방 사업장에서 돌아온 날, 유리는 그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곧장 만나러 가지 못했다. BORDERLINE 유럽 테스트 물량의 대체 시더가 최종 품질 검증을 통과한 데다, 그 과정에서 생산 기준서를 새 원료에 맞춰 갱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아가 대부분의 작업을 맡았지만 유리가 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인수인계 항목도 남아 있었다. 결국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노트북을 닫은 유리는 연구실에 혼자 남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재헌 씨: 아직 회사입니까?한 시간 전 메시지였다. 그 아래에는 삼십 분 전에 하나가 더 와 있었다.재헌 씨: 재촉하는 건 아닙니다.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가방을 챙기면서 답했다.유리: 지금 끝났어요.답은 거의 동시에 왔다.재헌 씨: 1층입니다.유리의 손이 멈췄다.유리: 언제부터요?재헌 씨: 십오 분 정도.유리: 기다리지 말라니까.잠시 뒤 답이 왔다.재헌 씨: 오늘은 제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유리는 아침부터 쌓였던 피로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데 익숙해지자 기다리고 싶다는 말도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상대에게 빨리 내려오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리는 더 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1층 로비에는 야간 경비 직원 몇 명과 늦게 퇴근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문 가까이에 재헌이 서 있었다. 지방에서 곧장 돌아온 듯 짙은 회색 정장에 코트만 걸친 차림이었다. 유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재헌도 바로 그녀를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둘 다 주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리가 먼저 그에게 걸어갔다.“언제 도착했어요?”“한 시간쯤 됐습니다.”“집에 갔다 오지.”“그러려고 했는데.”재헌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유리의 얼굴을 바라봤다.“보고 싶어서요.”영상통화로 이미 들었던 말인데 직접 얼굴을 보고 들으니 전혀 달랐다. 유리는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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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결정은 당신이 하세요

출국까지 열흘이 남은 월요일 아침, 유리는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파리로 가져갈 자료는 이미 대부분 정리했고,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없었으니 누군가 잘못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투 앞면에는 분명히 한유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메종 르비에 파리 글로벌 브랜드팀이었다.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BORDERLINE의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최종 캠페인 자료가 들어 있었다. 패키지 디자인과 제품 사진, 매장 진열 가이드는 서울에서 승인한 것과 거의 같았다. 문제는 마지막 페이지에 있었다. 유럽 소비자를 대상으로 새롭게 작성한 광고 문구가 검토 요청 표시와 함께 첨부돼 있었다.You can’t help coming closer.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유리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읽자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글로벌 브랜드팀은 BORDERLINE의 차가운 첫 향과 피부에 가까워질수록 부드러워지는 잔향을 ‘본능적으로 상대에게 끌리게 되는 경험’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문구인 건 맞았다. 짧고 기억하기 쉬웠으며,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기대를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기대가 유리가 만든 향의 의도와 정반대라는 게 문제였다.“선배, 뭐 봐요?”커피를 들고 들어온 세아가 물었다. 유리는 말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내밀었다. 세아는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다가, 세 번째 줄에서 눈썹을 찌푸렸다.“이거 이상한데요.”“어디가?”“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요. 우리 향은 그런 거 아닌데.”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가 끝까지 읽도록 기다렸다. 세아는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원래 한국 캠페인의 문구가 적힌 모니터를 바라봤다.가까워질지는, 당신이 정합니다.두 문장은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거리와 가까워짐을 말하고 있었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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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에도 좋아할 겁니다

출국까지 여덟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파리에서 온 메일을 읽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광고 문구의 사전 소비자 반응 조사 결과였다. 세아가 제안했던 **Closer is a choice.**는 가장 높은 즉각 구매 의향을 기록한 문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이라는 표현을 조금 순화한 다른 후보가 첫인상 평가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제품 설명을 읽은 뒤의 이해도와 향을 직접 맡은 뒤의 만족도에서는 결과가 달랐다. 세아의 문구를 본 소비자들이 향의 전개를 더 정확하게 이해했고, 자신이 예상했던 향과 실제 향 사이의 차이도 적게 느꼈다.유리는 자료를 끝까지 읽은 뒤 세아에게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자리에서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 세아는 결과표를 확대하고, 국가별 응답 차이를 확인하고, 정성 평가 문장들을 따로 추출했다. 유리는 그런 세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같은 자료를 나란히 펼쳐놓고 누가 먼저 문제를 찾아내는지 경쟁하듯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모든 자료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은 인수인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십오 분쯤 지났을 때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배, 잠깐 봐주세요.”유리는 의자를 돌렸다. 세아는 태블릿을 들고 와 결과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프랑스와 독일의 응답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탈리아 테스트 그룹에서는 문장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향수 광고답지 않다는 평가가 일부 있었다. 세아는 그 차이를 설명한 뒤, 국가마다 완전히 다른 문구를 쓰는 대신 메인 카피는 유지하고 보조 설명만 현지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그렇게 하면 콘셉트는 지키면서도 표현의 온도는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탈리아 쪽은 재테스트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고요.”“비용은?”“브랜드팀이랑 확인했어요. 기존 예산 안에서 가능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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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십 분 전에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일찍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도 평소와 같았고, 침대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익숙했다. 재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유리의 허리 아래에 놓여 있었고, 다른 손은 베개 옆에 느슨하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대 맞은편에 세워둔 캐리어를 발견했다.아.오늘이구나.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는 출국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정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몇 시간 뒤면 이 방을 나서고, 공항으로 향하고, 여권과 탑승권을 내밀어야 한다. 그렇게 익숙한 풍경들을 하나씩 지나면 어느 순간 서울은 비행기 창밖으로 멀어질 것이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헌을 깨우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허리에 놓인 팔에 힘이 들어왔다.“어디 갑니까.”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재헌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났다.“화장실.”“몇 시입니까?”“여섯 시 조금 넘었어요.”“아직 시간 있습니다.”“알아요.”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팔을 풀었다. 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다시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재헌의 품으로 들어갔다.“왜요?”그가 물었다.“그냥.”유리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조금만 더.”재헌은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유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는 오늘 아침이 오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눈물보다 이상한 평온함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재헌 씨.”“네.”“나 오늘 진짜 가요.”“알고 있습니다.”“당신은 안 가고.”“네.”유리는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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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첫 번째 아침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유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도시와 마주했다.비행기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에 눈은 뻑뻑했고, 장시간 앉아 있었던 다리는 묵직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두 개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커피보다 따뜻한 물 한 잔이 더 간절했다. 공항 픽업 담당자는 유리의 이름이 적힌 태블릿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서툴지 않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 뒤 차량에 올랐다.차창 밖으로 파리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건물과 오래된 석조 외벽, 좁은 발코니와 가로수들이 이어졌다. 관광객이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앞으로 이곳에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세탁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느 골목에 슈퍼마켓이 있는지, 지하철역은 얼마나 가까운지, 밤늦게 돌아와도 길을 찾기 어렵지 않을지 같은 것들.유리는 창밖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켰다.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헌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화면에 먼저 알림이 떠 있었다.재헌: 비행기 도착한 것 확인했습니다. 입국심사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웃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됐다. 자신에게 빨리 답장하라고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비행기 도착 여부만큼은 확인했을 것이다.유리: 입국심사 끝났어요. 지금 숙소 가는 중.메시지를 보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재헌: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많이 피곤합니까?유리: 엄청요. 지금 얼굴 보면 놀랄걸요.재헌: 보고 판단하겠습니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유리: 영상통화는 안 돼요.재헌: 아직 요청하지 않았습니다.유리: 요청할 것 같아서 미리 말했어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재헌: 그럼 숙소 도착하면 물부터 마시고 쉬십시오. 내일 연락해도 됩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보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헌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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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첫 번째 아침

조향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향을 고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아하는 향은 많았다. 오래 사용한 원료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만든 포뮬러도 있었다. BORDERLINE을 가져가면 가장 명확한 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유리를 설명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다.유리는 캐리어에서 BORDERLINE 002를 꺼냈다. 세아가 파리 첫 출근 때 뿌리라며 건네준 병이었다. 유리는 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안에 담긴 향은 서울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첫 시향과 수정 과정, 재헌과의 수많은 대화, 세아가 맡아 완성한 생산 기준까지.그 향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한유리를 BORDERLINE을 만든 조향사로 기억할 것이다.틀린 소개는 아니었다.하지만.그게 전부는 아니었다.유리는 병을 다시 내려놓았다.그리고 노트북 옆에 놓인 빈 시향지 케이스를 바라봤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한국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재헌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지금 전화하면 잠을 깨울지도 몰랐다. 유리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멈췄다. 그러다 먼저 짧게 적었다.유리: 혹시 아직 안 자요?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재헌: 안 잡니다.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유리: 왜요?재헌: 유리 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화면이 켜지자 재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풀었지만 아직 셔츠 차림이었고,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안 자고 뭐 해요?”유리가 물었다.“일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또 일해요?”“이제 끝났습니다.”“거짓말.”재헌이 웃었다.“정말입니다.”유리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면 너머에 있었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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