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던 저녁은 정말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다. 유리는 퇴근길에 장을 봤고, 재헌은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해 현관 앞에서 장바구니부터 받아 들었다. 둘이 만든 건 거창한 요리도 아니었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채소를 썰어 파스타를 만들고, 재헌이 사 온 빵을 데우고, 유리가 아껴두었던 와인을 한 병 열었다. 출국까지 스물아홉 날이 남았다는 사실도, 파리에서 살 집도, 장거리 연애도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재헌이 양파를 지나치게 일정한 크기로 써는 걸 보고 유리가 “이런 것도 본부장처럼 하네요”라고 놀렸고, 재헌은 “크기가 달라지면 익는 시간이 달라집니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해서 결국 유리가 한참 웃었다.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정말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리는 재헌의 어깨에 기대 태블릿으로 별 의미 없는 예능을 봤고, 재헌은 처음에는 화면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유리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향수도 뿌리지 않은 날이었다. 유리에게서 나는 건 샴푸와 세제, 조금 전 요리하면서 밴 버터 냄새 정도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예전에는 재헌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향이 느껴질 때마다 그 정체부터 알아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굳이 모든 냄새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재헌 씨.”“네.”“나중에 내가 파리에 있고 당신이 서울에 있을 때 오늘 같은 날 생각날 것 같아요.”재헌의 손이 유리의 머리카락 위에서 잠깐 멈췄다. 유리는 화면을 끄고 그의 어깨에 조금 더 깊게 기대었다. 슬픈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가슴 안쪽이 묘하게 저렸다.“특별한 데 갔던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생각날 것 같아. 퇴근하고 만나서 밥 먹고, 별것도 아닌 거 보다가, 졸리면 자고. 파리 가면 이런 건 바로 못 하잖아요.”“그렇겠죠.”“되게 담담하게 말하네.”“안 담담합니다.”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재헌은 잠시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내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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