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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숨기는 대신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8 10:27:32

재헌이 지방 사업장에서 돌아온 날, 유리는 그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곧장 만나러 가지 못했다. BORDERLINE 유럽 테스트 물량의 대체 시더가 최종 품질 검증을 통과한 데다, 그 과정에서 생산 기준서를 새 원료에 맞춰 갱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아가 대부분의 작업을 맡았지만 유리가 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인수인계 항목도 남아 있었다. 결국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노트북을 닫은 유리는 연구실에 혼자 남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재헌 씨: 아직 회사입니까?

한 시간 전 메시지였다. 그 아래에는 삼십 분 전에 하나가 더 와 있었다.

재헌 씨: 재촉하는 건 아닙니다. 끝나면 연락하십시오.

유리는 가방을 챙기면서 답했다.

유리: 지금 끝났어요.

답은 거의 동시에 왔다.

재헌 씨: 1층입니다.

유리의 손이 멈췄다.

유리: 언제부터요?

재헌 씨: 십오 분 정도.

유리: 기다리지 말라니까.

잠시 뒤 답이 왔다.

재헌 씨: 오늘은 제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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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파리의 첫 번째 아침

    조향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향을 고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아하는 향은 많았다. 오래 사용한 원료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만든 포뮬러도 있었다. BORDERLINE을 가져가면 가장 명확한 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유리를 설명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다.유리는 캐리어에서 BORDERLINE 002를 꺼냈다. 세아가 파리 첫 출근 때 뿌리라며 건네준 병이었다. 유리는 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안에 담긴 향은 서울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첫 시향과 수정 과정, 재헌과의 수많은 대화, 세아가 맡아 완성한 생산 기준까지.그 향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한유리를 BORDERLINE을 만든 조향사로 기억할 것이다.틀린 소개는 아니었다.하지만.그게 전부는 아니었다.유리는 병을 다시 내려놓았다.그리고 노트북 옆에 놓인 빈 시향지 케이스를 바라봤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한국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재헌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지금 전화하면 잠을 깨울지도 몰랐다. 유리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멈췄다. 그러다 먼저 짧게 적었다.유리: 혹시 아직 안 자요?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재헌: 안 잡니다.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유리: 왜요?재헌: 유리 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화면이 켜지자 재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풀었지만 아직 셔츠 차림이었고,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안 자고 뭐 해요?”유리가 물었다.“일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또 일해요?”“이제 끝났습니다.”“거짓말.”재헌이 웃었다.“정말입니다.”유리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면 너머에 있었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파리의 첫 번째 아침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유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도시와 마주했다.비행기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에 눈은 뻑뻑했고, 장시간 앉아 있었던 다리는 묵직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두 개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커피보다 따뜻한 물 한 잔이 더 간절했다. 공항 픽업 담당자는 유리의 이름이 적힌 태블릿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서툴지 않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 뒤 차량에 올랐다.차창 밖으로 파리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건물과 오래된 석조 외벽, 좁은 발코니와 가로수들이 이어졌다. 관광객이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앞으로 이곳에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세탁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느 골목에 슈퍼마켓이 있는지, 지하철역은 얼마나 가까운지, 밤늦게 돌아와도 길을 찾기 어렵지 않을지 같은 것들.유리는 창밖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켰다.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헌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화면에 먼저 알림이 떠 있었다.재헌: 비행기 도착한 것 확인했습니다. 입국심사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웃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됐다. 자신에게 빨리 답장하라고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비행기 도착 여부만큼은 확인했을 것이다.유리: 입국심사 끝났어요. 지금 숙소 가는 중.메시지를 보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재헌: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많이 피곤합니까?유리: 엄청요. 지금 얼굴 보면 놀랄걸요.재헌: 보고 판단하겠습니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유리: 영상통화는 안 돼요.재헌: 아직 요청하지 않았습니다.유리: 요청할 것 같아서 미리 말했어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재헌: 그럼 숙소 도착하면 물부터 마시고 쉬십시오. 내일 연락해도 됩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보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헌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십 분 전에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일찍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도 평소와 같았고, 침대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익숙했다. 재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유리의 허리 아래에 놓여 있었고, 다른 손은 베개 옆에 느슨하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대 맞은편에 세워둔 캐리어를 발견했다.아.오늘이구나.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는 출국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정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몇 시간 뒤면 이 방을 나서고, 공항으로 향하고, 여권과 탑승권을 내밀어야 한다. 그렇게 익숙한 풍경들을 하나씩 지나면 어느 순간 서울은 비행기 창밖으로 멀어질 것이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헌을 깨우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허리에 놓인 팔에 힘이 들어왔다.“어디 갑니까.”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재헌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났다.“화장실.”“몇 시입니까?”“여섯 시 조금 넘었어요.”“아직 시간 있습니다.”“알아요.”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팔을 풀었다. 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다시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재헌의 품으로 들어갔다.“왜요?”그가 물었다.“그냥.”유리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조금만 더.”재헌은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유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는 오늘 아침이 오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눈물보다 이상한 평온함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재헌 씨.”“네.”“나 오늘 진짜 가요.”“알고 있습니다.”“당신은 안 가고.”“네.”유리는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떠나는 날에도 좋아할 겁니다

    출국까지 여덟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파리에서 온 메일을 읽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광고 문구의 사전 소비자 반응 조사 결과였다. 세아가 제안했던 **Closer is a choice.**는 가장 높은 즉각 구매 의향을 기록한 문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이라는 표현을 조금 순화한 다른 후보가 첫인상 평가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제품 설명을 읽은 뒤의 이해도와 향을 직접 맡은 뒤의 만족도에서는 결과가 달랐다. 세아의 문구를 본 소비자들이 향의 전개를 더 정확하게 이해했고, 자신이 예상했던 향과 실제 향 사이의 차이도 적게 느꼈다.유리는 자료를 끝까지 읽은 뒤 세아에게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자리에서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 세아는 결과표를 확대하고, 국가별 응답 차이를 확인하고, 정성 평가 문장들을 따로 추출했다. 유리는 그런 세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같은 자료를 나란히 펼쳐놓고 누가 먼저 문제를 찾아내는지 경쟁하듯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모든 자료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은 인수인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십오 분쯤 지났을 때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배, 잠깐 봐주세요.”유리는 의자를 돌렸다. 세아는 태블릿을 들고 와 결과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프랑스와 독일의 응답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탈리아 테스트 그룹에서는 문장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향수 광고답지 않다는 평가가 일부 있었다. 세아는 그 차이를 설명한 뒤, 국가마다 완전히 다른 문구를 쓰는 대신 메인 카피는 유지하고 보조 설명만 현지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그렇게 하면 콘셉트는 지키면서도 표현의 온도는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탈리아 쪽은 재테스트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고요.”“비용은?”“브랜드팀이랑 확인했어요. 기존 예산 안에서 가능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당신이 하세요

    출국까지 열흘이 남은 월요일 아침, 유리는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파리로 가져갈 자료는 이미 대부분 정리했고,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없었으니 누군가 잘못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투 앞면에는 분명히 한유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메종 르비에 파리 글로벌 브랜드팀이었다.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BORDERLINE의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최종 캠페인 자료가 들어 있었다. 패키지 디자인과 제품 사진, 매장 진열 가이드는 서울에서 승인한 것과 거의 같았다. 문제는 마지막 페이지에 있었다. 유럽 소비자를 대상으로 새롭게 작성한 광고 문구가 검토 요청 표시와 함께 첨부돼 있었다.You can’t help coming closer.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유리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읽자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글로벌 브랜드팀은 BORDERLINE의 차가운 첫 향과 피부에 가까워질수록 부드러워지는 잔향을 ‘본능적으로 상대에게 끌리게 되는 경험’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문구인 건 맞았다. 짧고 기억하기 쉬웠으며,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기대를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기대가 유리가 만든 향의 의도와 정반대라는 게 문제였다.“선배, 뭐 봐요?”커피를 들고 들어온 세아가 물었다. 유리는 말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내밀었다. 세아는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다가, 세 번째 줄에서 눈썹을 찌푸렸다.“이거 이상한데요.”“어디가?”“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요. 우리 향은 그런 거 아닌데.”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가 끝까지 읽도록 기다렸다. 세아는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원래 한국 캠페인의 문구가 적힌 모니터를 바라봤다.가까워질지는, 당신이 정합니다.두 문장은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거리와 가까워짐을 말하고 있었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이제는 숨기는 대신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재헌이 지방 사업장에서 돌아온 날, 유리는 그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곧장 만나러 가지 못했다. BORDERLINE 유럽 테스트 물량의 대체 시더가 최종 품질 검증을 통과한 데다, 그 과정에서 생산 기준서를 새 원료에 맞춰 갱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아가 대부분의 작업을 맡았지만 유리가 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인수인계 항목도 남아 있었다. 결국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노트북을 닫은 유리는 연구실에 혼자 남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재헌 씨: 아직 회사입니까?한 시간 전 메시지였다. 그 아래에는 삼십 분 전에 하나가 더 와 있었다.재헌 씨: 재촉하는 건 아닙니다.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가방을 챙기면서 답했다.유리: 지금 끝났어요.답은 거의 동시에 왔다.재헌 씨: 1층입니다.유리의 손이 멈췄다.유리: 언제부터요?재헌 씨: 십오 분 정도.유리: 기다리지 말라니까.잠시 뒤 답이 왔다.재헌 씨: 오늘은 제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유리는 아침부터 쌓였던 피로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데 익숙해지자 기다리고 싶다는 말도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상대에게 빨리 내려오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리는 더 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1층 로비에는 야간 경비 직원 몇 명과 늦게 퇴근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문 가까이에 재헌이 서 있었다. 지방에서 곧장 돌아온 듯 짙은 회색 정장에 코트만 걸친 차림이었다. 유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재헌도 바로 그녀를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둘 다 주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리가 먼저 그에게 걸어갔다.“언제 도착했어요?”“한 시간쯤 됐습니다.”“집에 갔다 오지.”“그러려고 했는데.”재헌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유리의 얼굴을 바라봤다.“보고 싶어서요.”영상통화로 이미 들었던 말인데 직접 얼굴을 보고 들으니 전혀 달랐다. 유리는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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