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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맺는 약속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0 16:52:33

“나와 결혼해.”

카시안의 청혼은 무너진 수도원 앞에서 이루어졌다.

반지도, 꽃도 없었다. 그의 검은 제복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한쪽 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라엘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마복 안쪽에서는 터진 상처의 피가 배어 나왔고, 장갑은 검은 가시에 찢겨 있었다.

황태자의 청혼이라고 하기에는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라엘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것보다 눈앞의 남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카시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라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늘 명령하는 데 익숙한 남자가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당할 가능성까지 받아들인 사람처럼.

라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시안의 눈빛이 조금씩 굳었다.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으나 그녀의 손을 감싼 손가락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

“아니.”

“그럼 왜 말이 없지?”

“황태자도 초조해하는지 구경하고 있었어.”

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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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우리가 저들을 초대하는 거야.”라엘의 말이 끝나자 침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대 곁에는 카시안과 루시안, 데미안, 세레나가 둘러서 있었고, 탁자 위에는 독침과 협박문, 동부 종탑에서 압수한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그중 누구도 라엘의 제안에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다.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카시안이었다.“안 돼.”“아직 설명도 안 했는데.”“설명을 들으면 네가 독에 중독된 몸으로 결혼식장에 나가 미끼가 되겠다는 계획이 갑자기 안전해지나?”“독은 거의 다 빠졌어.”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라엘은 곧바로 어깨를 눌렸다. 카시안은 한 손으로 그녀를 다시 베개에 기대게 한 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렸다. 의원이 절대 안정을 명했다는 이유로 그는 한 걸음 떨어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거의라는 말은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지.”“네 상처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던데?”“내 상처와 네 목숨을 같은 선에 놓지 마.”카시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라엘은 반박하려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눈 깊숙한 곳에 남은 것은 분노보다 두려움이었다. 독에 중독된 라엘이 그의 품에서 의식을 잃은 지 겨우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라엘은 이불 위로 그의 손을 찾아 손가락을 끼웠다.“결혼식 날까지 스무 날 남았어. 오늘 당장 미끼가 되겠다는 게 아니야.”“스무 날 뒤에도 안 돼.”“카시안.”“결혼식을 미룬다.”“싫다고 했잖아.”“이번에는 네 뜻을 들어줄 수 없어.”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기류를 지켜보던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헛기침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세레나는 익숙하다는 듯 의자에 앉았고, 루시안은 손에 든 협박문을 다시 읽으며 형과 라엘의 다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라엘이 먼저 물었다.“결혼식을 미루면 저들이 멈출 것 같아?”“그사이에 잔당을 찾아내면 된다.”“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제국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찾겠다.”“그러면 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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