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복수의 불장난 - 내 최고의 친구의 남편이 나에게 불륜을 제안했다: Chapter 161 - Chapter 170

245 Chapters

161. 우리 셋이 함께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쪼그려 앉은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샘의 귀는 여전히 빨갰고, 얼굴도 발그레했다. 하지만 떨림은 멎었다. 이제 그는 네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린 채 몰래 훔쳐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어느 순간 네리사는 샘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거둔 모양이었다. 그녀는 언제 그랬는지도 모른 채 자기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마야가 너랑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고 했어.”샘이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뭐라고요?”“놀이공원. 몇 주 전에 얘기하더라. 네가 관람차를 태워 주겠다고 약속했다던데.”네리사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차갑지도, 업무적인 어조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지친 사람의 목소리였다.샘이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맞아요. 관람차를 타고 싶어 해요. 같이 가기로 약속했는데, 아직 못 갔어요. 일이 늘 많았잖아요.”네리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저물면서 수면 위로 주황색과 보라색이 번지고 있었다.“이번 주말에 가는 건 어때?”그녀가 물었다.“우리 셋이서. 마야도 좋아할 것 같아.”샘이 그대로 굳었다.“우리 셋이요?”목소리가 갈라졌다.“같이요? 정말요?”네리사가 그를 바라봤다. 샘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희망과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불가능한 일을 방금 허락받은 소년 같았다.이 사람, 정말 오래 기다렸구나. 어쩌면 평생을.네리사는 웃음을 참을 뻔했다.“정말이야.”그 한마디에 샘의 얼굴이 환하게 달라졌다. 잔뜩 들어가 있던 긴장이 풀렸다. 귀는 아까보다 더 빨개졌지만, 이번에는 창피해서가 아니었다.기쁨 때문이었다.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순수한 기쁨.“좋아요.”샘이 얼른 대답했다.“네, 좋아요. 정말 좋아요. 마야가 엄청 기뻐하겠어요. 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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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두 남자

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화려한 색으로 가득했으며, 시끌벅적했다.아이들은 풍선과 솜사탕을 손에 든 채 부모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회전목마에서는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고, 관람차는 옅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관람차의 곤돌라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마야는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그랬다. 작은 손은 샘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마야는 짙은 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온갖 놀이기구를 향해 그를 끌고 다녔다. 회색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파파 샘! 파파 샘! 관람차예요! 저기 봐요!”“나도 보여, 꼬마 아가씨.”“우리 지금 타면 안 돼요? 제발요? 네?”샘이 웃었다.“먼저 표를 사야지. 그리고 엄마도 기다려야 하고.”마야가 뒤를 돌아봤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네리사는 지갑을 찾느라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보더니 미소 지었다.“먼저 가. 금방 따라갈게.”샘은 잠시 망설였다.“정말 괜찮아요?”“응. 표부터 사. 내가 찾아갈게.”마야가 샘의 손을 잡아당겼다.“어서요, 파파 샘!”샘은 결국 마야에게 이끌려 매표소로 향했다. 네리사는 두 사람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줄은 길지 않았다. 샘은 표 세 장을 샀다. 마야는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곤돌라들을 가리켰다.“빨간색 타면 안 돼요? 빨간색이요, 파파 샘!”“글쎄, 어디 보자.”그 근처에는 관람차를 기다리는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휴대전화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카메라를 든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샘을 발견한 뒤, 곧 마야에게 시선이 옮겨 갔다.그녀는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세상에. 저 남자 좀 봐.”친구가 고개를 들었다. 눈썹이 올라갔다.“잘생겼다.”“아이한테도 정말 다정하네. 딸인가?”“모르겠어. 그런데 반지는 안 꼈네.”두 사람은 샘이 마야 옆에 무릎을 굽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샘은 마야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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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당신이 여기에 왜 있어요?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던 건 아닙니다.”밴스가 말했다.“레오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부인을 뵙고 나니 직접 말씀을 나누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이블린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무슨 일로요?”“머물 곳이 필요합니다. 호텔보다는 조금 더 오래 지낼 수 있는 곳이요. 리프 앤 리클레임과 함께 일하고 있으니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지역 사회를 좀 더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레오가 자기 집에 빈방이 있다고 했지만……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군요.”“레오가 망설이는 건 샘과 자기 여동생에게 충실하기 때문이에요.”“그 점은 이해합니다. 레오의 의리를 저버리라고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다른 곳을 알고 계신지, 아니면 제가 레오의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쭤보려는 겁니다.”이블린은 밴스를 유심히 살폈다. 날카롭고 빈틈없는 시선이었다.“블랙우드 씨, 당신은 숙소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군요. 내 딸과 손녀 때문이죠.”밴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두 사람 가까이에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억지로 다가갈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머물 곳이 필요하고, 레오의 집은 현실적으로 가장 적합한 선택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그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이블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람이 정원 사이로 지나가며 채소 잎을 흔들었다.“마야의 눈이 당신을 닮았더군요.”그녀가 입을 열었다.“해변에서 알아봤어요. 당신도 네리사와 같은 눈을 가졌으니까.”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블린은 팔짱을 낀 채 그를 계속 살폈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이었다.“블랙우드 씨. 질문 하나 하겠어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길 바라요.”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노력하겠습니다.”“내가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당신을 돕는 순간, 나는 내 딸과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어요.”질문이 공중에 묵직하게 걸렸다.밴스는 그녀를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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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휘트모어 가족

주방이 이렇게 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네리사는 문간에 선 채 문틀에 손을 얹고 밴스를 바라보았다. 밴스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나무 주걱을 들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그곳이 원래 자신의 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밴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밴스는 주걱을 내려놓았다.“저녁 준비를 돕고 있어.”네리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잖아요.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요.”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앞으로 레오의 별채에 있는 방을 빌려 지내기로 했어.”네리사의 시선이 곧장 레오에게 향했다. 레오는 식탁에 접시를 놓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지만 어깨가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레오는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고는 샘을 바라보며 말했다.“미안하다, 친구. 엄마가 워낙 고집을 부리셔서.”“엄마?”네리사는 냄비를 저으며 등을 돌리고 있는 이블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이블린은 젓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얘야, 일단 저녁부터 준비하자. 그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잖니?”그녀는 샘 쪽으로 몸을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샘, 너도 저녁 먹고 가렴. 네가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었단다. 나중에 부모님과 여동생에게도 좀 가져다주고.”샘은 굳은 턱을 풀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 에비 아주머니.”그는 애써 평소의 밝은 말투를 되찾으려 했다.이블린이 미소 지었다.“네가 그렇게 부르는 게 난 늘 좋더라. 정말 너다운 호칭이지.”“오래된 버릇이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아주머니가 절 좋아하시는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닌데요.”샘이 가볍게 웃으며 덧붙이자 이블린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주방에는 다시 익숙한 소리가 채워졌다. 접시가 놓이고, 냄비가 저어지고, 마야는 관람차 꼭대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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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그래. 마야는 네 딸이야

“네 곁에 있고 싶어.” 밴스가 말했다. “그게 잘못된 일이야?”네리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또 말을 돌리거나 얼버무릴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예상하도록 스스로를 길들여 온, 차갑고 감정을 통제하는 밴스의 모습을 말이다. 이런 솔직함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슴이 아플 만큼 적나라한 진심은 더더욱.네리사는 시선을 돌렸다. 목이 꽉 막히는 듯했다.“당신에겐 내 곁에 있을 권리가 없어요. 우리 사이는 5년 전에 끝났어요.”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원하는 만큼 거리를 뒀지. 네가 그리울 때마다 널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마음도 억눌렀어.”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네 곁에 다가가지 않으려고 애썼어. 철저히 업무적인 관계로만 대하려고 했고. 당장이라도 널 끌어안고 싶은데도 손을 뻗지 않고 참았어. 그런데 네가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봤지. 네 주변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든, 젊고 밝은 새뮤얼 하트와.”밴스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만지는 모습을 보는 게 어땠는지, 그가 네게 손을 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어땠는지 알아?”턱이 단단하게 굳었다.“내 영혼 깊은 곳까지 불타는 것 같았어.”네리사는 몸을 떨었다.“그 남자와 함께 있으니 그렇게 행복해?”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눈은 네리사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그를 사랑해, 네리사?”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사랑한다는 말이 혀끝에서 재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네리사는 숨을 죽였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내가 대답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밴스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큰 키에 드리운 그림자가 네리사를 통째로 삼킬 듯 덮쳤다.“말해 봐.”낮고 거친 목소리였다.“언제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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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내 아이

밴스의 손이 네리사의 팔을 더욱 꽉 붙들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아직은 어떻게든 참아 내고 있었다. 아직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듯했다.“내가 그 여자 때문에 너를 버렸을 거라고 생각해?”밴스가 물었다.“그럴 리 없어. 나는 너를 위해 싸웠을 거야. 그 아이를 위해서도 싸웠을 거고. 설령…… 그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더라도. 아무리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더라도 말이야.”네리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나도 알아요. 그래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당신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 아이를 위해서도요. 그곳에 남아 있는 건 모든 걸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어요.”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당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도 되고 싶지 않았고요. 당신은 이미 결혼 생활과 부모님, 그리고 자신의 경력까지 지키느라 힘겨워하고 있었잖아요. 내가 곁에 남았다면 당신이 어떻게든 붙들고 있던 모든 걸 무너뜨렸을 거예요.”밴스가 애써 붙들고 있던 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래서 도망쳤구나.”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선 끝까지 나를 모르게 했어. 마야에 대해서도. 내 딸에 대해서도!”끝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넌…….”밴스는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넌 나를 믿었어야 해. 조금만 더 믿어 줬어야 한다고. 적어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았어야…….”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울음을 억지로 삼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네리사 역시 시선을 돌렸다. 눈물이 양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울었다. 밴스의 손가락은 여전히 네리사의 팔을 붙들고 있었지만, 누구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긴 침묵 끝에 밴스가 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가 조용히 말했다.“이해해.”그는 네리사 쪽으로 돌아섰다. 눈가가 붉게 물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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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수면 위의 진실

네리사는 뒷문으로 들어와 주방을 가로질렀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이블린도, 레오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곧장 자기 방으로 걸어가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는 소리보다 그 뒤에 찾아온 침묵이 더 크게 느껴졌다.이블린은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딸이 사라진 복도 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레오는 접시를 여러 장 포개어 든 채 식탁 옆에 얼어붙어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잠시 후 이블린이 침실로 향했다. 문 앞에 멈춰 선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번 노크했다.“네리사.”대답이 없었다.이블린은 문을 열었다.네리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아직 개지 않은 빨래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옷을 접고, 손바닥으로 꾹 눌러 주름을 펴고, 차곡차곡 쌓았다.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이블린은 딸의 곁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네리사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접고. 누르고. 쌓고.접고. 누르고. 쌓고.“정말 용감하게 버텨 왔구나, 얘야.”이블린이 조용히 말했다.네리사의 손이 멈췄다.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거칠고, 갈라지고,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울음이었다.이블린은 딸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네리사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상심했을 때마다 그랬듯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알아. 엄마가 다 알아.”이블린이 속삭였다.네리사는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잃어버린 세월을 위해 울었다. 마침내 입 밖으로 꺼낸 진실을 위해 울었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신에게 물었던 남자를 위해서도 울었다.혼자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얼마나 무너져 있었던 거야?문밖에서는 레오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여동생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복도 끝을 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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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넌 아직도 날 걱정하는구나

레오의 별장은 네리사가 문을 두드렸을 때 조용했다.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네리사는 어깨로 문을 밀어 열면서도 손에 든 쟁반이 기울지 않도록 조심했다. 수프와 빵, 물 한 잔. 지금 자신이 가져다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밴스는 작은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수복은 벗고 마른 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마 레오의 옷일 것이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감겨 있었다.네리사가 들어서자 그가 눈을 떴다.“누워서 쉬어야 해요.”“쉬고 있어.”“병원에 가야 한다고요.”“난 괜찮아.”밴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네리사는 쟁반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그의 어깨를 눌렀다.“일단 먹어요. 그다음에 따지든가요.”밴스는 어깨에 놓인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네리사의 얼굴을 보았다. 네리사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저녁 준비를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괜찮아요. 레오가 알아서 했어요. 엄마도 당신이 먼저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요.”밴스는 잠시 망설였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샘은?”네리사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샘을 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집에 갔어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속에서 본 샘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침착했던 목소리, 물에 젖은 눈, 그리고 자신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샘이 네리사를 바라보던 눈빛도 기억났다. 언제나 그랬듯 편안한 미소와 인내심 어린 눈빛. 굳이 입 밖으로 내세우지 않아도 드러나는 헌신이었다.네리사도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이 밴스를 끌어안았을 때 샘의 얼굴에 스쳤던 표정. 그가 돌아서서 헤엄쳐 가던 모습.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물러났을 뿐이었다.물에 젖어 있던 샘의 눈이 평소의 다정한 미소와 겹쳐 떠올랐다.가슴이 조여 왔다.밴스가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그 사람 생각하고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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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럼 이제 그만 척해.”밴스가 조용히 말했다.네리사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밴스의 손은 창백했고, 아직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반면 그녀의 손은 흔들림 없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마야에 대해 알게 됐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요.”밴스는 잠시 침묵했다.“마야가 나를 알아줬으면 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마야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 애의 진짜 아버지가 되고 싶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내가 그래도 될까?”네리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밴스의 얼굴에는 아무런 방어막도 없었다. 취약할 만큼 솔직했고, 그녀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예전의 네리사였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다시 도망쳤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도망치는 데 지쳐 있었다.“그렇게 해요.”네리사가 대답했다.“어쩌면 이제는 마야가 당신에 대해 알아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그녀는 밴스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가 여전히 이곳에 있고,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온기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천천히 해 주세요. 마야는 아직 어린아이예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어요. 거짓말도, 비밀도요. 마야가 아는 건 파파 샘이 있고, 자기와 똑같은 눈을 가진 밴스 아저씨가 있다는 것뿐이에요.”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서두르지 않을게.”“마야는 질문을 많이 할 거예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요. 미리 각오해야 해요.”“배워 나갈게.”네리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를 뻔했다.“그 말 참 자주 하네요.”“내가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손을 맞잡은 채, 방 안이 서서히 어둠에 잠기는 것을 느끼면서.한참이 지나서야 네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쟁반을 집어 들었다.“쉬어요.”“네리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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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네가 원하니까

아침 햇살이 컨테이너 사무실 위로 옅은 황금빛을 드리웠다.샘은 이미 선착장에 나와 배에 장비를 싣고 있었다. 손놀림은 익숙하고 조용했다. 밤새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눈 밑에 드리운 그늘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레오가 태블릿을 손에 든 채 경사로를 내려왔다.“오늘은 같이 못 가. 재활용 업체 쪽에서 미팅을 오늘 아침으로 당겼어. 내가 직접 가야 해.”샘이 고개를 끄덕였다.“혼자서도 할 수 있어.”“그건 알아.” 레오는 네리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방금 선착장에 도착해 텀블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새로운 장소를 지도에 표시하려면 샘도 도움이 필요할 거야. 같이 가 줄래?”네리사는 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네. 그러죠.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저도 처음부터 배우고 싶고요.”그제야 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조심스러운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정말 괜찮겠어?”“물론이죠.”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자.”두 사람은 배에 올라탔다. 레오가 밧줄을 풀어 배를 밀어냈다. 엔진이 몇 번 거칠게 소리를 내더니 이내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안선이 점점 멀어졌다.네리사는 뱃머리에 앉았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얼굴 위로 흩날렸다. 샘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키를 잡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네리사는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키를 움켜쥔 손, 굳게 다문 턱. 밴스가 사고를 당한 뒤로 샘은 줄곧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상처받았구나.네리사는 생각했다.내가 상처를 준 거야.“GPS를 보니까 새로운 산호 양식장은 곶을 조금 지나면 나와.” 샘이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네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수심은요?”“15미터. 바닥은 모래고. 산호 조각을 옮겨 심기에는 딱 좋을 거야.”네리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햇볕에 그을린 팔뚝은 단단해 보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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