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1 - Chapitr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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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달력 끝의 한 문장

노을이 붉게 물든 학생식당 앞 벤치에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도현의 숟가락질이 허공에서 굳었고, 손에 쥔 바닐라 컵아이스크림 표면으로 하얀 크림이 녹아내렸다.흐릿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선배……?"채아는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이 무엇인지 깨닫고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다음엔 내 경기도…….’스물여덟의 초겨울, 차가운 월세방 달력에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썼던 전생의 마지막 비명.자신의 청춘과 관절을 도현의 재기에 모조리 갈아 넣은 뒤, 심장이 멎기 직전에야 삼켰던 그 통한의 한마디였다.그 말이 왜 하필 지금 튀어나왔단 말인가.채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도현이 굳은 턱을 천천히 돌려 채아 쪽을 응시했다.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었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떨림은 살갗을 베어낼 듯 날카로웠다."……채아야."도현의 목소리가 긁히듯 갈라져 나왔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네? 아, 저요?"채아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억누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선배 훈련 도와주는 것도 좋은데, 내 춘계 선발전 준비도 바짝 해야겠다고요! 5시 반에 훈련 끝나고 쿨다운 스트레칭하는데 문득 그 생각이 났거든요. 내 경기 준비도 바쁜데 말이 헛나왔네요."채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었다.차가운 단맛이 혀끝을 마비시켰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도현은 채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공기를 가르는 채아의 가쁜 숨소리, 컵 가장자리를 스치는 숟가락의 잔떨림까지 고스란히 그의 감각에 걸렸다.단순한 말실수라고 치부하기엔 도현 자신의 심장 고동이 지나치게 빨랐다.도현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그래. 네 경기가 먼저지."도현이 낮게 읊조렸다.하지만 그의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은 지워지지 않았다.‘다음엔 내 경기도…… 왜 그 말이 저토록 서글프게 들렸던 거지?’도현은 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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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손목에서 풀린 매듭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차도현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피가 배어 나오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었다.찬물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가슴 안쪽을 태우는 지옥 같은 불길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온전하게 돌아온 기억.그것은 스물두 살의 차도현에게 내려진 가장 가혹하고 정당한 사형 선고였다.‘내가 죽인 거다.’도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전생의 자신은 눈이 나빠질수록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쉽게 화를 냈다. 채아가 말없이 받아주면, 그날의 잘못까지 없어진 줄 알았다.시력을 잃어간다는 공포에 짓눌려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웠고, 그 날카로운 분노를 가장 가까이에서 온몸으로 받아내던 존재가 바로 윤채아였다.채아의 발목 인대가 끊어졌을 때도, 의사가 "더 이상 전력 질주는 불가능하다"고 진단을 내렸을 때도, 도현은 제 기록과 패럴림픽 출전권에 눈이 멀어 있었다.‘선배, 난 괜찮아요. 선배 혼자 뛰는 것보다 내가 옆에서 봐주는 게 마음 편해요.’바보처럼 웃던 채아의 그 한마디를 비겁한 방패막이로 삼았다.그녀가 밤새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의 밀린 영수증을 처리하고, 새벽마다 대리운전을 뛰며 제 특수 영양제 값을 벌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채아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파렴치한 착각.그리고 채아가 스물여덟의 나이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과로사로 홀로 숨을 거둔 날.영안실 구석에서 차진우가 태연하게 내뱉던 말들이 도현의 뇌리를 비수처럼 난도질했다.‘도현아, 채아 걔 장례비는 내가 대충 치를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걔가 쓰던 보조비랑 후원금 정산서, 내가 알아서 마이너스 처리해 놨어. 넌 이번 세계대회 결승만 뛰면 돼.’그 순간에야 도현은 깨달았었다.자신이 딛고 섰던 영광의 시상대가, 실은 채아의 뼈와 살을 갈아 만든 무덤이었다는 사실을.그 뒤로 도현은 단 하루도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다.채아가 괜찮다고 말한 날마다 도현은 안심했다. 왜 괜찮은지, 정말 쉴 시간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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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선배의 기록은 선배가

체육지원처 감사실의 1차 긴급 조사 결과는 다음 날 오전 9시, 육상부 전원에게 공식 통보되었다.최수아가 라커룸에서 커터칼을 쥐고 서성이던 모습이 선명하게 담긴 복도 CCTV 영상, 새벽 6시 14분의 도어록 전자 출입 로그, 그리고 1학년 후배 민지의 자필 목격 진술서까지.모든 증거는 같은 날 새벽 수아가 라커룸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가리켰다.체육처는 즉각 최수아에 대해 ‘학생선수 징계위원회 최종 의결 시까지 육상부 공식 훈련장 및 장비실 출입 금지, 피해 선수에 대한 접촉 금지’라는 잠정 격리 조치를 내렸다.사물함 앞을 서성이며 특혜와 권위를 누리던 4학년의 오만한 완장은 하룻밤 사이에 산산조각이 났다."이거 놔! 내가 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아빠한테 전화 한 통만 하면……!"최수아가 감사팀 조사관들의 제지를 받으며 악을 썼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늘 침묵을 강요당하던 후배 선수들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볼 뿐이었다.최수아는 결국 모자를 눌러쓴 채 도망치듯 기숙사로 쫓겨났다.그러나 부패한 카르텔의 뿌리는 여전히 질겼다.육상부 총감독 마정호는 수아의 부친이 시 체육발전재단의 유력 이사라는 점을 앞세워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하려 발악했다.사건이 정식 징계로 이어져 자신의 관리 부실과 비리 장부까지 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마 감독은 정오 무렵 채아를 감독실로 은밀히 불러들였다.블라인드가 굳게 닫힌 감독실 안에는 독한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가죽 소파에 앉은 마 감독은 찻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으며 거칠게 으름장을 놓았다."윤채아, 너 이번 일로 아주 기고만장해졌지? 선배 앞길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니까 속이 아주 시원해?"채아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늘한 눈으로 마 감독을 응시했다."선배 앞길을 망친 건 제가 아닙니다. 타인의 장비를 고의로 파손한 선배 본인의 범죄 행위죠.""입 닥쳐! 이 버릇없는 자식!"마 감독이 벌떡 일어나 책상을 쾅 내리쳤다."수아 아버지가 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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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20분의 동행

이튿날 오전 8시, 체육관 옆 야외 테라스 테이블.봄바람이 살랑이며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아침 햇살을 흩뿌리고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채아의 스프링 연습 일지와 도현의 가죽 다이어리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과 펜을 든 채 시간표를 대조하고 있었다.전생의 채아에게 '시간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오직 차도현의 훈련 시간, 차도현의 병원 예약, 차도현의 원정 경기 일정만이 그녀의 달력을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자신의 전공 강의는 밥 먹듯이 결석했고, 학점은 학사 경고 직전까지 곤두박질쳤으며, 실업팀 장학금도 날아갔었다.그러나 지금, 채아의 노트에는 2학년 1학기 전공 강의명들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선배, 오전 일정부터 정리해요."채아가 볼펜 끝으로 시간표의 칸을 짚었다."월·수·금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는 전공 필수 수업 시간이에요. 선배는 스포츠의학이랑 기능해부학 듣죠? 전 운동생리학이랑 육상 트랙 지도론 들어요. 수업 시간에는 서로 연락 금지, 각자 공부와 학점에 집중하기."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년필로 자신의 다이어리에 반듯하게 적었다."그래. 졸업 못 하고 계속 학교에서 마주치면 좀 곤란하겠지."도현이 다음 요일 칸을 가리켰다."화·목 오전에는 병원 일정이 잡혀 있어. 이번 주는 10시부터 12시까지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남은 시기능에 맞는 보조 수단과 생활 적응 방법을 상담받기로 했어."채아의 시선이 도현의 안과 진료 칸에 멈추었다.기억 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전생에서 도현이 병원을 갈 때마다 채아는 혼자 두려움에 떨 그의 곁을 지키겠다며 수업을 팽개치고 따라나섰었다.그 시절의 습관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선배…… 화요일 진료 때 내가 같이 가 줄까요? 10시면 내 생리학 교양 수업 하나만 빠지면 되는데……."순간, 도현의 손이 채아의 노트를 가볍게 톡 쳤다.탁.도현이 선글라스 너머로 채아를 똑바로 응시했다.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한 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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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1.82 — 낯선 속도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대운동장 라커룸 앞 야외 벤치.한태준이 어깨에 메고 있던 묵직한 카본 스포츠 가방을 내려놓으며 시원하게 웃었다.태양빛에 짙은 구릿빛으로 그을린 탄탄한 목덜미와 단거리 스프린터 특유의 거대한 대퇴사두근.한태준의 남자 100미터 공인 개인 최고 기록 10초 42.대학 시절 차도현과 전국체전 결승에서 0.1초 차이로 명승부를 다투었던 오랜 라이벌이자, 실업팀 활동을 거쳐 시각장애 육상 T11 전문 가이드 러너로 전향한 베테랑 스프린터였다.태준이 땀을 닦으며 도현과 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오랜만이다, 도현아. 서민경 코치님 연락받고 한달음에 달려왔어."도현이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으로 태준의 손을 맞잡았다."와줘서 고맙다, 태준아. 네가 가이드 러너로 전향했다는 소식 들었어.""단거리 실업팀에서 뛰다가 패럴림픽 텐덤 레이스를 직관한 적이 있거든. 두 스프린터가 하나의 호흡으로 10초대를 찢는 걸 보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고. 그때부터 가이드 훈련을 받고 선수 등록 절차를 밟았지."태준이 가방 지퍼를 열고 장비들을 하나씩 꺼내 야외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정렬했다.길이가 늘어나지 않는 경기용 테더, 훈련 때 구령을 확인할 무선 인터컴 헤드셋 세트, 그리고 안대와 차광용 아이패치가 차례로 놓였다. 테더의 두 고리를 끝까지 펼치자 전체 길이가 30cm였다.태준은 고리를 벌려 마감과 스토퍼를 보여주었다. 보행 연습 때 쓰던 벨크로 끈과 달리, 경기 도중 고리가 풀리거나 길이가 바뀌지 않도록 확인한 장비였다.태준이 테더의 닫힌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채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윤채아 선수. 지금까지 도현이 저속 기초 텐덤 맡아주셨다고 들었습니다.""네. 보행 드릴이랑 50미터 저속 빌드업 주로까지 맞춰봤어요."채아가 차분하게 대답하자, 태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태블릿 모니터를 켰다."고생 많으셨습니다. 채아 선수가 기초 장력 감각을 워낙 훌륭하게 잡아준 덕분에 도현이의 발목 탄성과 보폭 밸런스가 흐트러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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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3번 테이핑의 비밀

11초 82.전광판의 붉은 디지털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혼자 달리던 때보다 1초 넘게 늦어진 기록을 도현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바람 한 점 없는 트랙 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과거의 차도현이었다면 스파이크를 집어던지고 애꿎은 트랙 바닥을 걷어차며 거친 폭언을 쏟아냈을 터였다.자신의 무너진 자존심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었을 순간.실제로 전생의 스물두 살 도현은 첫 시각 장애 테스트에서 이 똑같은 11초대를 마주했을 때, 합숙소 기물을 부수며 한 달 동안 술에 절어 살았었다.그리고 그 모든 폭력적인 방황과 절망의 파편을 채아가 홀로 눈물로 치워냈었다.그러나 지금의 도현은 달랐다.그는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천천히 골라내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트랙 너머에서 일부 선배들이 수군거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차도현도 결국 끝났네. 11초 후반이면 여자부 기록이랑 비슷하잖아.""가이드 러너 붙여봐야 눈먼 선수가 뛸 수 있는 한계지. 패럴림픽은 무슨."비열한 조소와 동정이 뒤섞인 말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도현의 주먹에 파르르 힘이 들어갔지만, 곁에 서 있던 한태준이 도현의 어깨를 툭 치며 씩 웃었다."야, 남들 떠드는 거 듣지 마. 우리 방금 처음 끝까지 뛰었잖아. 부족한 데부터 찾자."태준의 든든한 한마디에 도현의 턱선이 부드럽게 풀렸다.그때 채아가 수건을 건네며 곁에 섰다. 도현은 수건을 받아 목에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다시는 그 아이 앞에서 나약한 투정을 부리거나 도망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도현의 척추를 꼿꼿하게 세웠다.태준이 태블릿 모니터를 든 채 다가왔다."도현아. 초반 30미터 분석 나왔다."도현이 고개를 돌렸다."괜찮아, 태준아. 솔직하게 말해줘. 어디가 문제였지?"자신의 참담한 기록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묻는 도현의 태도에, 태준은 안도하며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몸의 근육과 신경계는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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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전생이라는 한마디

트랙 위로 내려앉은 저녁노을이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대운동장 스탠드 벤치 아래, 차도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채아의 오른발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무리하면 인대 완전히 파열돼. 전생에서…… 아니, 예전부터 이 부위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도현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흘러나왔던 그 금기의 단어.‘전생에서…….’순간, 채아의 귓가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날카로운 굉음이 울렸다.채아는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풀린 신발 끈이 발등에 닿아 있었지만, 다시 묶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채아는 얼어붙은 눈동자로 제 발목을 쥐고 있는 도현의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도현 역시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듯, 하얗게 질린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손은 여전히 채아의 발목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 손아귀에 실린 힘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시간이 통째로 굳어버린 듯한 지독한 침묵 속에서, 스탠드 위로 서늘한 봄바람만이 스쳐 지나갔다.채아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뗐다."선배."목소리가 잘게 갈라져 나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도현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채아가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입술을 열었다가 소리 없이 다물기만 했다.채아가 도현의 손아귀에서 제 발목을 홱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운동화 끈이 풀린 채 차가운 흙바닥을 디딘 발목 바깥쪽에서 찌릿한 열감이 올라왔지만, 그런 육체적 통증 따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선배, 내가 묻고 있잖아요. 전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채아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균열이 일었다."왜 내 발목의 비골하단 건초염을 알고 있어요? 아직 병원 진료도 안 받았고, 서 코치님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선배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채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그녀의 머릿속에서 지난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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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손목에 남은 7년

"스물한 살의 봄. 네가 신청서도 못 내고, 내 방으로 불려와 밤새 암전 훈련 돕느라…… 네 출발선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그 선발전."도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잔인하고 선명한 과거.그 한마디가 어두운 호숫가의 허공을 가르는 순간, 채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막연한 의심과 기시감이 마침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진실이 되어 채아의 온몸을 덮쳐 눌렀다.채아는 떨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래. 기억해."채아의 목소리가 서럽게 갈라져 나왔다."내가 내 손으로 신청서도 못 내고, 마정호랑 최수아한테 밀려 울면서 포기했던 날. 그리고 그날 밤 선배 합숙소 방으로 불려가서, 눈 멀어가는 선배 수발드느라 내 육상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었던 바로 그 선발전."채아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전생의 첫날 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마정호 감독에게 뺨을 맞고 신청서를 뺏겨 기숙사 방에서 울고 있던 스물한 살의 채아.그때 합숙소 302호로 불려갔을 때, 도현은 모든 전등을 꺼둔 채 암흑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선배, 괜찮아요? 제가 불 켤까요?’‘불 켜지 마. 나 레인이 안 보여…… 채아야, 나 좀 도와줘.’절망에 빠져 떨고 있던 천재 스프린터의 그 한마디에, 채아는 바보처럼 제 모든 것을 내던졌었다.선배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최고의 단거리 스프린터라는 이유로, 그가 다시 달릴 수만 있다면 제 하루쯤 갈아 넣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던 미련한 청춘.새벽 5시마다 얼어붙은 손으로 붉은 테더를 쥐고, 합숙소 복도에서 도현의 가방을 챙기던 차가운 공기.실업팀 스카우트 명단에서 제 이름이 지워졌을 때 마정호가 던졌던 비열한 웃음.원정 경기 때마다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너 도현이 덕에 비행기 타는 줄 알아라"며 온갖 잡무와 영수증 정리를 떠넘기던 모욕.병원비와 훈련 진행비가 모자라면 밤마다 식당 설거지와 배달 아르바이트를 뛰며 부르튼 손을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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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두 권의 시간표

호숫가 나무 벤치 위로 봄밤의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도현은 조금 전 채아가 잡아줬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를 허락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려 했다.채아가 노트를 꺼내는 소리가 났다. 도현은 같은 소리를 따라 가방 지퍼를 열었다.바람에 종이가 들려 채아가 모서리를 눌렀다. 가까이 앉았어도 두 사람의 손은 다시 닿지 않았다.도현이 천천히 손을 풀며 채아를 바라보았다.흐릿하게 어둠이 내린 시야 속에서도,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이성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잊었다는 말 못 하게 적어두자. 방금 네가 한 말 그대로."도현이 주머니에서 가죽 다이어리와 만년필을 꺼내 벤치 위에 펼쳤다.채아 역시 자신의 훈련 일지 노트를 꺼내 나란히 놓았다.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두 권의 노트가 나란히 빛을 받았다.채아가 볼펜을 쥐고 첫 번째 조항을 또박또박 읊었다."첫째, 부상과 출전, 그리고 모든 훈련 계획은 각자 전담 지도자와 상의해 독립적으로 결정한다. 상대방의 사정이나 부탁 때문에 자신의 진료나 공식 선발전 출전을 결코 미루거나 취소하지 않는다."전생의 비극을 원천 차단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항이었다.도현의 일정에 휘둘려 제 병원 진료를 미루다 발목 인대가 회복 불능으로 망가졌던 채아.그리고 채아의 헌신에 취해 그녀의 선수 생명이 갉아먹히는 것을 외면했던 도현.스물한 살의 춘계 대회 참가 신청을 마감하던 무렵, 채아는 도현의 야간 적응 훈련을 돕느라 병원 물리치료를 거르고 제 참가 신청서조차 빼앗겼었다.물리치료 예약이 적혔다가 지워진 날짜들이 떠올랐다. 채아는 이번에는 그 칸을 비워두지 않겠다고 적었다.두 사람은 두 번 다시 그 끔찍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로 맹세했다.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년필로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동의해. 그리고 둘째, 보조 인력과 생활 관리는 철저하게 외부 전문가에게 위탁한다. 텐덤 주행은 한태준 가이드가 전담하고, 내 이동 보조와 행정 잡무는 체육처 전담 인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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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선을 넘은 사람

"시각장애인 된 차도현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눈먼 놈한테 매달리면…… 네 선수 인생도 거기서 완전히 끝장이야."복도 모퉁이에 메아리친 최수아의 독설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지나가던 육상부 1, 2학년 후배들이 숨을 들이켜며 걸음을 멈췄다."수아 선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동기 이진희가 분통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채아가 팔을 뻗어 진희를 가만히 제지했다.저 멀리 보조 트랙 입구에서 한태준과 함께 워밍업을 준비하던 차도현의 고개가 복도 쪽을 향해 홱 돌아갔다.수아의 높은 목소리가 복도 벽을 타고 트랙 입구까지 들려왔다. 도현은 태준에게 누가 있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도현의 턱선이 굳어지며 성큼성큼 복도를 향해 걸어오려 했다.그의 주먹에 핏줄이 곤두서 있었다.채아는 도현 쪽으로 몸을 돌리고, 복도 건너편에서도 들리도록 분명하게 말했다."오지 마요, 선배. 제가 이야기할게요."어젯밤 호숫가 벤치에서 맺었던 첫 번째 약속.채아가 직접 대답하겠다고 했다. 도현은 끼어들 말을 삼켰다. 대신 태준에게 코치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채아의 단호한 목소리를 듣고, 도현은 주먹을 꽉 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채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최수아를 똑바로 응시했다.그녀의 입가에는 분노 대신 서늘한 비소가 걸려 있었다."수아 선배님."채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명료했다."제 앞길 걱정해 주시는 건 참 눈물겹게 감사한데요. 그런 걱정은 입이 아니라 기록으로 하시는 게 어때요?"수아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뭐라고?"수아의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지난 4년 동안 그녀는 스포츠재단 이사인 부친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육상부의 여왕으로 군림해 왔다.후배들에게 물통 청소와 스파이크 닦기를 떠넘기고, 좋은 훈련 레인을 독점하며 당연하게 여겼던 특혜들.그 모든 권위가 2학년 후배 윤채아의 당당한 거절과 11초 42라는 압도적인 기록표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자신의 무능함과 바닥난 실력을 인정할 수 없어 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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