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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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호스피스

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벗어 둔 돋보기를 손끝으로 접어 신문 위에 올려놓았다. 접힌 다리가 종이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회장실의 향나무 냄새는 겨울이면 더 진해졌다. 난방에 데워진 나무 책장이 제 냄새를 조금씩 내놓았다."앉아라."도혁은 앉지 않았다."할아버지.""앉으라고 했다. 서서 들을 얘기가 아니다."도혁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석 달 전 서린이 앉았다던 그 자리였다. 의자 가죽이 차가웠다.회장은 한동안 창밖을 보았다. 겨울 하늘은 낮고 희었다. 건너편 빌딩 옥상에 녹지 않은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네 아비가 아플 때, 너는 어디 있었냐."도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싱가포르에 있었습니다.""얼마나.""……일 년 반이요.""그동안 병원에 몇 번 왔지."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 번이었다. 수술 날 한 번, 추석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 봄에 한 번. 앞의 두 번은 합쳐서 다섯 시간도 되지 않았다. 병실 문 앞에서 전화를 받느라 절반을 복도에 서 있었다.회장은 그 숫자를 묻지 않았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네 아비는 세한병원 11층에 있었다. 항암을 두 번 하고 나서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지. 본인이 옮겨 달라고 했다. 더는 싸우기 싫다고.""알고 있습니다.""그래, 그건 알겠지. 보고서로 받았을 테니."회장의 말에는 가시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그 병동에 토요일마다 오는 봉사자가 있었다. 향기 봉사라고 하더구나. 환자한테 물어본다. 기억나는 냄새가 뭐냐고. 어릴 때 살던 집 마루 냄새, 어머니 앞치마 냄새, 첫 월급 받고 사 먹은 짜장면 냄새. 그걸 듣고 다음 주에 작은 병에 담아 온다."도혁은 숨을 멈췄다."스물다섯 살짜리 아가씨였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가방에 병을 잔뜩 넣어 다녔지. 네 아비가 그 아이 얘기를 나한테 한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오늘은 그 아가씨가 옆 침대 할머니한테 된장 냄새를 만들어 줬다. 할머니가 그걸 맡고 울더라. 그런 얘기를.""……서린이요.""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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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병원

2월 첫 주, 병원 주차장에는 밤새 내린 눈이 얇게 얼어 있었다.도혁은 운전석에서 한참 내리지 않았다. 강민재가 같이 가겠다는 걸 말렸다. 혼자 오고 싶었다. 3년 반 전에 혼자 오지 않은 곳이었다. 그때는 늘 누군가 옆에 있었다. 비서, 기사, 다음 일정을 알려 주는 휴대폰.조수석에 회장이 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걸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발밑에서 언 눈이 바삭하게 부서졌다.세한병원 11층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조용했다.다른 층처럼 호출 벨이 울리지 않았다. 복도 벽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고, 창가마다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귤을 까고 있는지 새콤한 냄새가 복도 끝까지 번져 있었다. 그 아래로 소독약 냄새가 얇게 깔렸다. 병원 냄새는 그 정도였다.도혁은 간호사실 앞에 섰다.3년 반 동안 한 번도 이 층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마지막 봄에 온 날도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병실까지 곧장 걸었다. 복도에 그림이 걸려 있었는지, 화분이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차도혁 님이시죠?"오십 대 후반쯤 된 간호사가 안경을 벗으며 일어났다. 명찰에 「수간호사 배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강민재가 며칠을 뒤져 찾아낸 이름이었다. 이 병동에서 12년째 일하는 사람."비서분한테 연락 받았어요. 부회장님 아드님이 오신다고. 얼굴은 처음 뵙네요."처음이라는 말에 가시는 없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그래서 도혁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네. 처음 뵙겠습니다."배정희는 그를 휴게실로 데려갔다. 보호자들이 쓰는 작은 방이었다. 전기 주전자, 종이컵, 낡은 소파. 벽에 달력이 걸려 있었는데 날짜마다 볼펜으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봉사자 일정표였다."뭘 여쭤보러 오신 건지는 대충 짐작해요."배정희가 종이컵에 녹차 티백을 넣고 물을 부었다."향 아가씨죠."도혁이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불렀어요?""우리끼리는요. 이름은 따로 있었는데, 환자분들이 다 그렇게 불렀어요. 향 아가씨 언제 와요, 토요일이에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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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비누 냄새

평창동 본가는 한 달 사이에 냄새가 바뀌어 있었다.현관문을 열자마자 도혁은 그걸 알았다. 예전에는 들어서는 순간 꽃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현관과 거실에 꽃을 사흘마다 갈았다. 작약, 장미, 프리지어. 백합만 빼고. 그 꽃들 사이로 어머니의 향수가 무겁게 떠 있었다. 파우더와 앰버. 누가 이 집의 주인인지 알려 주는 냄새였다.오늘은 꽃이 없었다.현관 화병은 비어 있었고, 거실 탁자 위 크리스털 화병에는 마른 줄기 몇 개만 꽂혀 있었다. 갈지 않은 지 오래된 물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향수 냄새도 옅었다. 뿌리지 않은 지 며칠 된 사람의 집이었다."오셨어요, 도련님."가사도우미 권 여사가 슬리퍼를 내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20년 넘게 이 집 살림을 맡아 온 사람이었다."어머니는.""안방에 계세요. 요즘 거의 안 나오세요. 식사도 방에서 조금만 드시고요.""꽃은 왜 안 갈았습니까."권 여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사모님이 치우라고 하셨어요. 보기 싫다고. 누구 보여 줄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꽂느냐고요."권 여사는 거기서 말을 멈추려다 한마디를 더 보탰다."작은 사모님 계실 때는 제삿날이면 꽃을 직접 골라 오셨어요. 새벽 꽃시장에서요. 백합은 절대 안 섞으시고, 향 센 건 빼고요. 제사상에 향 섞이면 안 된다고. 그 뒤로는 제가 해 보려고 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도혁은 그 말을 처음 들었다. 제삿날 본가에 오면 늘 꽃이 있었다. 누가 사 왔는지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3년 동안 그 꽃은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식탁의 밥처럼, 셔츠의 단추처럼.거실 벽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부회장 취임식 때 찍은 사진이었다.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웃지 않는 얼굴. 도혁이 아는 아버지는 그 얼굴이었다. 병실 창가의 마른 어깨는 그 사진 어디에도 없었다.도혁은 안방 쪽을 보았다. 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게 석 달 전이었다. 12월에는 회장이 태강 공식 행사에서 그녀의 이름을 뺐다. 신년 하례식 명단에 어머니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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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윤정숙

아들은 현관에서 한마디를 더 하고 갔다."그 봉사자, 서린이었습니다."윤정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차 소리가 멀어지고, 권 여사가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녀는 화장대 앞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바닥 위에 닳은 비누 조각을 올려놓은 채로."사모님, 저녁 차릴까요.""됐어.""조금이라도…….""됐다고 했잖아."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권 여사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윤정숙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기가 방금 누구의 말투를 썼는지 알았다. 3년 동안 며느리에게 쓰던 말투였다.* * *그녀는 잠을 자지 못했다.새벽 두 시에 일어나 불을 켰다. 비누는 화장대 위, 한지 위에 놓여 있었다. 방 안 공기에 그 냄새가 아주 얇게 섞여 있었다. 장미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오래된 기름 냄새. 30년 넘게 서랍 속에 있던 것이 하룻밤 사이에 방을 조금 차지하고 있었다.그녀는 그 냄새를 맡으며 병원을 떠올렸다.마지막 봄, 남편이 떠나고 사흘 뒤였다. 병실을 비워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권 여사를 데리고 갔다. 환자복, 슬리퍼, 약봉지, 다 읽지 못한 책 두 권. 쓰레기봉투 두 개와 종이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30년을 산 사람의 마지막 방이 그만큼이었다.창틀에 병이 하나 있었다.손가락 두 마디만 한 병. 코르크 마개, 실로 묶은 꼬리표. 그녀는 그걸 집었다. 꼬리표에 둥근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읽지 않았다. 병원까지 와서 향수를 받아 쓰는 남편이 우스웠고, 그걸 만들어 준 낯선 아가씨가 괜히 불편했다. 그녀는 병을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약봉지 위로 떨어지며 작게 부딪는 소리가 났다.그 소리를 그녀는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새벽 두 시에 그 소리가 났다.그 병 안에 이 냄새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울산의 욕실. 창문 없는 좁은 방. 보일러가 꺼진 겨울 아침, 김이 서린 거울 앞에서 분홍 비누를 문지르던 스물여섯 살의 자신. 남편이 마지막에 맡고 싶어 했던 것은 청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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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무향

화분은 아침 일곱 시에 샀다.골목 끝 꽃집이 문을 여는 시각이었다. 사장은 셔터를 반쯤 올린 채 양동이에 물을 받고 있었다. 서린은 가게 앞 선반에서 작은 로즈마리 화분 하나를 골랐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토분이었다. 잎을 손끝으로 한 번 쓸자 송진 같은 냄새가 확 올라왔다. 차갑고 맑은, 겨울에도 죽지 않는 냄새."선물이에요?""네. 첫 출근 하는 사람한테요.""그럼 리본 달아 줄까요?""아뇨. 그냥 주세요."리본을 달면 무슨 날처럼 보일 것이었다. 서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원래 있던 것처럼, 그 자리에 늘 있었던 것처럼 두고 싶었다.작업실 문 앞 계단참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문 옆, 우편함 아래. 들어오는 사람 무릎께에 잎이 스치는 자리였다. 그리고 화분 흙에 작은 나무 팻말 하나를 꽂았다. 네임펜으로 한 줄.「구하람 자리」* * *통지는 지난주 목요일에 왔다.승아가 전화로 먼저 알려 주었다. 검찰이 하람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고. 자수했고, 협박당한 정황이 분명하고, 피해자가 선처를 탄원했으니까. 승아는 그 말을 하며 세 번쯤 코를 풀었다. 감기라고 했다."야, 한서린. 너 진짜 끝까지 걔 편 들었다.""편 든 거 아니야. 사실대로 쓴 거야.""씨……. 그게 편 든 거야, 이 사람아."서린은 웃었다. 승아도 웃었다. 그리고 한참 둘 다 말이 없었다. 하람이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날, 서린과 지현은 그 앞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 하람은 나와서 제일 먼저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였다. 울지는 않았다. 그날 하람은 처음으로 울지 않았다.그 뒤로 하람은 작업실에 나오지 않았다. 처분이 날 때까지는 오지 않겠다고 했다. 자기가 있으면 작업실에 또 기자가 올 거라고. 서린은 말리지 않았다. 대신 12월 월급날에 월급을 그대로 보냈다. 하람이 돌려보냈고, 서린이 다시 보냈다. 하람은 두 번째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대신 짧은 문자가 왔다. 「꼭 갚을게요.」 서린은 답하지 않았다. 갚을 돈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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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사과

그날 아침 서린은 전날 엎어 둔 휴대폰을 뒤집었다.도혁의 답이 와 있었다. 난로 위 고구마요, 라고 보낸 것에 대한 답이었다.「그날 옥탑 거 말하는 거면, 나도 그거.」한 줄이었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보냈다가 지우려다 못 지운 것처럼 조금 늦게 온 줄이었다.「타는 냄새까지.」서린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12월 첫눈 오던 날, 옥탑 난로 위에서 고구마가 구워지고 있었다. 껍질 끝이 까맣게 그을려 달큰한 연기가 올라왔다. 그 연기가 그의 손목에서 올라오던 첫눈과 섞였다. 베르가모트와 삼나무 사이로 탄 설탕 냄새가 끼어드는 게 이상하게 어울렸다. 서린은 그날 그 냄새를 따로 적어 두지 않았다. 적지 않아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그걸 기억하는구나, 하고 서린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더 따라가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이 많았다.* * *계단에서 나는 냄새로 서린은 누가 올라오는지 알았다.파우더와 앰버. 무겁고 오래된, 누가 이 방의 주인인지 먼저 알리려는 냄새. 3년 동안 본가 현관에서, 제사상 앞에서, 전화기 너머로도 맡은 것 같던 냄새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냄새가 옅었다. 뿌린 지 오래된 사람처럼. 그리고 그 밑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서린이 아는 것이었다. 앰버를 조금 줄이고 장미를 한 방울 넣은.서린은 시향지를 내려놓았다.지현이 먼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두 달 전 라벨티 연구소에서 이 여자가 서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지현은 옆에서 다 들었다. 하람도 책상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도 지현 뒤에 섰다.윤정숙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코트 차림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린은 그것부터 보았다. 진주 목걸이가 없는 목. 3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이었다."서린이 있니.""여기 있어요."서린이 일어섰다. 지현 옆으로 걸어 나와 지현의 팔을 가볍게 한 번 잡았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지현은 입술을 깨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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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옮긴 말

어머니의 전화는 저녁 여덟 시에 왔다.도혁은 회의실에 있었다. 라벨티 유통 일정 보고였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는 회의를 멈췄다. 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물었다. 석 달 동안은 한 번도 없었다."본가로 와라. 오늘.""무슨 일입니까.""와서 들어."전화가 끊겼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갈라져 있었고, 명령하는 말투인데 명령처럼 들리지 않았다.* * *평창동 거실에 꽃이 한 송이 꽂혀 있었다.크리스털 화병이 아니었다. 부엌 찬장에서 꺼낸 듯한 작은 유리컵에, 노란 프리지어 한 줄기. 권 여사가 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소박했다. 성수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직접 골랐을까. 줄기 끝이 비스듬히 서툴게 잘려 있었다. 도혁은 그 꽃 앞에서 잠깐 멈췄다. 달큰하고 가벼운 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파우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늘은 아예 뿌리지 않은 것 같았다.윤정숙은 거실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목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도혁은 그걸 보고 발을 멈췄다. 기사가 나고 석 달 동안 한 번도 풀지 않던 목걸이였다."앉아."그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탁자 위만 보았다. 탁자 위에 작은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절반쯤 남은 향수병. 도혁은 그 병을 몰랐다."오늘 성수동에 갔었다."도혁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그 아이 작업실에. 차를 한 잔 얻어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온도로.""……사과하셨습니까.""못 했다."윤정숙이 짧게 웃었다. 자기 자신을 비웃는 웃음이었다."하려고 갔는데 못 했어. 입이 안 떨어지더라. 고맙다는 말만 하고 왔다. 그 비누 고맙다고.""…….""그리고 하나를 말하고 왔다. 너한테도 해야 하는 말이다. 그래서 불렀어."도혁은 기다렸다.윤정숙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시선을 들었다.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도혁이 기억하는 한, 어머니가 이런 눈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다. 무언가를 시키거나 탓하는 눈이 아니었다."3년 반 전 겨울. 상견례 사흘 전이었다.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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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3년 치

도혁은 공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다섯 달 전, 그녀가 나간 지 일주일째 되던 밤 부엌 바닥에 선 채로 읽었다. 두 번째는 셔츠 요일을 외우려고 드레스룸에서 읽었다. 그때는 이 공책이 설명서였다. 이 집을 어떻게 굴리는지 적어 둔 것.이번에는 달랐다.「1. 전무님 셔츠 — 드레스룸 안쪽 벽 밀면 문 있음.」이 문을 찾으려고 그녀는 이 집에 들어온 첫 주에 벽을 몇 번이나 밀어 보았을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집에 산 지 5년이 넘도록 그 문이 있는 줄 몰랐다.「2. 두통약 — 커피와 같이 드시면 위가 상하심.」그가 커피와 두통약을 같이 먹는다는 걸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새벽에 부엌에서 약을 삼키는 걸 그녀가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거실에 있었던가. 그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거기 있었는지조차.그는 장을 넘겼다. 뒷부분, 가계부.세 번째 읽는 가계부는 숫자가 다르게 보였다. 관리비, 식비, 경조사비. 달마다 줄이 이어졌다. 그리고 매 줄 끝의 괄호.「(개인 계좌)」그는 계산기를 꺼냈다. 서재 서랍 맨 안쪽, 한 번도 쓴 적 없는 계산기였다. 달마다의 합계를 하나씩 눌렀다.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본가 제사 장보기, 할아버지 생신 한과, 어머니 생일 꽃바구니, 명절 선물. 펜트하우스 관리비는 한 달에 백만 원이 넘었다. 그녀는 그걸 36개월 동안 냈다.마지막에 나온 숫자를 그는 오래 보았다.N의 향이 한 병에 얼마인지 그는 이제 알았다. 파리 면세점에서 산 6번 병의 가격을 기억했다. 그녀는 향 몇 병 값을 이 집의 전기와 물과 제사상에 썼다. 3년 동안. 그가 매달 보낸 생활비 통장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돈 보고 들어온 여자.그는 그 말을 소리 내어 해 보았다. 서재 안에서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들렸다.통장을 다시 꺼냈다. 「생활비 — 전무님」. 3년 치 입금, 비어 있는 출금란. 이자가 붙어 조금 늘어난 잔액. 그 통장 옆에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한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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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한기택

아침에 문을 열자 보리차 병이 계단 맨 위 칸에 있었다.식어 있었다. 병 표면에 새벽 이슬이 얇게 맺혀 있었다. 라벨이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서린은 그걸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차가웠다.그녀는 병을 들고 옥탑 안으로 들어왔다. 뚜껑을 열지 않았다. 창틀 위에 올려 두었다. 시향지와 빈 병들 사이에. 2월 끝자락의 아침 햇빛이 병을 통과해 창틀에 연한 갈색 그림자를 떨구었다.그리고 휴대폰을 열었다. 새벽에 온 문자가 있었다. 읽음 표시를 띄우지 않으려고 알림 창으로만 읽었다.「하루 하나. 오늘은 내가 대답할게. 미안해. 전부.」서린은 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었다.* * *아버지의 사무실은 서울 서쪽 끝, 오래된 공장 골목의 철물점 2층에 있었다.옛 공장 자리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공장은 몇 년 전에 닫았다. 그 자리에는 이제 택배 창고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공장을 닫고도 이 골목을 떠나지 못했다.냄새가 먼저 마중 나왔다.철물점 셔터 안에서 녹슨 철과 기계 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 서린은 계단 앞에서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쇳가루의 비릿한 냄새, 오래된 윤활유. 그 사이로 믹스커피와 담배. 어릴 때 아버지 작업복에서 나던 냄새와 거의 같았다. 기계 소리만 없었다.이 냄새를 좋아했다. 이 냄새가 계속 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3년 전 그 차 안에서 물었다. 아빠, 이제 공장 괜찮은 거지.좁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자 전기난로 냄새가 훅 끼쳤다. 먼지 탄 냄새. 책상 하나, 접이식 의자 둘, 철제 선반. 벽의 달력은 아직 작년 12월에 머물러 있었다. 한기택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서린이 들어서자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철제 선반에 부딪혔다."왔냐. 앉아. 커피 타 줄까. 아니, 너 커피 안 마시지. 보리차 있다, 보리차.""괜찮아요."서린은 앉았다. 한기택은 한동안 서 있다가 도로 앉았다.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가, 무릎으로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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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계속했던 사람

강민재는 오후 두 시에 작업실에 왔다.라벨티 유통 계약 부속 서류를 들고서였다. 도장 받을 곳이 세 군데 있었다. 원래는 우편으로 보내도 되는 서류였다. 그런데 그는 직접 왔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한 번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 들렸다."N 선생님. 서류 때문에 왔습니다.""들어오세요."강민재는 들어와서 먼저 로즈마리 화분을 보았다. 팻말을 읽고 하람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람이 얼떨결에 같이 숙였다.서린은 창가 탁자로 그를 안내했다. 며칠 전 윤정숙이 앉았던 자리였다. 강민재는 의자 끝에 반쯤 걸터앉았다. 무릎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이 두툼했다. 서류 세 장이 들어 있기에는.서린은 도장을 찍었다. 한 군데, 두 군데, 세 군데. 강민재는 서류를 받아 넣으면서도 가방을 닫지 않았다. 지퍼를 반쯤 올렸다가 멈췄다.그의 코트에서 복사기 토너 냄새가 났다. 막 뽑은 종이를 오래 안고 있던 사람의 냄새였다. 그리고 편의점 김밥. 점심을 차 안에서 먹었을 것이다."강 비서님.""네.""하나만 여쭤볼게요."강민재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서린은 그걸 보았다. 이 사람은 오늘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 꺼낼지 말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전무님이 저희 아버지 빚을 갚으셨어요?"강민재가 숨을 멈췄다.작업실이 조용해졌다. 지현이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었고, 하람은 시향지를 든 채로 굳었다."그건……."강민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무님 개인 일이라서요.""네. 알아요."서린은 더 묻지 않았다. 기다렸다.강민재는 무릎 위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열린 지퍼 사이로 흰 서류철 모서리가 보였다. 두꺼웠다. 서린은 그 두께를 보았다. 3년이면 서른여섯 달이었다. 한 달에 한 장씩이면 그 정도 두께가 될 것이었다.강민재의 손이 서류철 모서리에 닿았다. 잡았다. 그리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그는 서류철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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