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Kapitel 81 – Kapitel 90

100 Kapitel

81화. 하나만

문자는 법원 주차장에서 받았다.도혁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지 않고 있었다. 넥타이를 반쯤 풀다 말았다. 증언대에 한 시간 사십 분을 서 있었다. 3년 전 일을, 코트에 묻은 향을, 한 사람의 이름을 몇 번이나 입에 올렸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고생했어요. 오늘은 제가 물어볼게요. 하나만.」그는 화면을 한참 보았다. 석 달 동안 하루 하나씩 물은 건 그였다. 대답은 늘 짧았고, 어떤 날은 오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묻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어디로 가면 돼.」답은 금방 왔다.「한강이요. 뚝섬 쪽 편의점. 라면 먹을래요.」도혁은 풀다 만 넥타이를 끝까지 풀어 조수석에 놓았다. 그리고 시동을 걸었다.* * *같은 시각, 성수동 작업실.서린은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작업대에 엎어 놓았다. 화면이 보이지 않게. 답이 오는 걸 기다리는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소용없었다. 지현이 원료장 앞에서 라벨을 붙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보냈어요?""뭘요.""방금 휴대폰 엎은 거요. 서린 씨는 뭐 보내고 나면 꼭 엎어요. 10년째."하람이 포장 상자를 접다가 입을 가렸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으려는 손이었다. 출시를 보름 앞둔 작업실에는 빈 상자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골판지 냄새, 새 유리병을 닦은 알코올 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옥탑의 향이 옅게 떠돌았다. 시제품을 너무 많이 뿌려서 이제는 벽지에도 배어 있었다.휴대폰이 진동했다. 서린은 뒤집어 보지 않고 코트를 집었다."먼저 들어갈게요. 상자는 내일 마저 접어요.""어디 가는지는 안 물어볼게요."지현이 말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저녁은 꼭 먹고 와요. 오늘 점심도 소금빵 반 개였잖아요."서린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휴대폰을 뒤집었다. 「어디로 가면 돼.」 다섯 글자였다. 그녀는 계단 중간에 서서 그 다섯 글자를 한 번 더 읽었다.* * *3월의 마지막 주였다. 낮에는 봄 같다가 해가 지면 다시 겨울로 돌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2화. 출시

출시 날 아침, 서린은 알람보다 먼저 깼다.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옥탑방 창문에 김이 서려 있었다. 밤새 비가 왔다가 그친 모양이었다. 창을 열자 젖은 시멘트 냄새가 들어왔다. 옥상 난간에 맺힌 물방울, 아래층 빵집 환풍구에서 올라오는 첫 반죽 냄새, 멀리 인쇄소 셔터가 올라가는 쇳소리.그녀는 창가에 서서 숨을 세 번 쉬었다.이 냄새로 만든 향이 오늘 세상에 나간다. 이름은 「옥탑」. 병에는 N이라는 글자와 무향이라는 이름만 들어갔다. 사진도, 설명도 없었다. 라벨티 마케팅팀은 적어도 향의 설명 세 줄은 넣자고 했다. 서린은 한 줄만 허락했다.「비 그친 새벽, 계단 위의 방.」표상진은 그 한 줄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숫자를 말했다. 이 문장으로는 검색에 안 걸린다고. 서린은 그럼 안 걸려도 된다고 했다. 표상진은 사흘 뒤에 전화해서, 검색에 안 걸리는 게 오히려 화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목소리가 약간 억울해 보였다.서린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묶었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긴장한 건 손이었다. 머리끈을 두 번이나 놓쳤다.* * *팝업은 골목 끝 오래된 인쇄소 창고였다.작년까지 종이를 쌓아 두던 곳이었다. 벽에는 아직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서린은 그 얼룩을 지우지 말자고 했다. 바닥은 시멘트 그대로, 천장에는 백열등 몇 개. 한가운데 긴 나무 테이블 하나에 병 삼백 개가 줄지어 있었다. 첫 물량이었다."삼백 개 맞아요. 세 번 셌어요."하람이 목장갑을 낀 채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그래도 눈은 반짝였다. 하람은 병 하나하나의 라벨이 똑바로 붙었는지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하람 씨, 그만 세요. 병이 닳아요."지현이 커피를 내밀었다. 지현도 잠을 못 잔 건 마찬가지였다. 눈 밑이 거뭇했다. 그런데 입은 쉬지 않았다."다온이가 학교 끝나자마자 온대요. 조퇴한다는 걸 내가 말렸어요. 고1이 향수 팝업 간다고 조퇴하면 담임이 뭐라 그러겠어요. 근데 벌써 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3화. 흔들기

출시 두 주 뒤, 하람이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출근했다.아침 아홉 시였다. 작업실 창문으로 4월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원료장 유리문에 걸려 있었다. 서린은 작업대에서 2차 생산분 배합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라벨티 공장에서 올라온 시험 병 여섯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백 소장이 밤새 맞춘 것들이었다.하람은 인사도 하지 않고 비닐봉지를 작업대 끝에 내려놓았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대표님, 이거 보세요. 역 앞 화장품 가게에서 샀어요. 입구 바로 앞 매대에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봉지 안에서 나온 건 흰 상자였다. 앞면에 큼직한 글씨가 박혀 있었다.「해밀 — 루프탑 레인. 비 그친 새벽의 향.」그 아래 작은 글씨로 가격이 적혀 있었다. 19,900원. 옥탑의 오분의 일도 되지 않는 값이었다.지현이 커피잔을 든 채 다가왔다. 상자를 들여다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비 그친 새벽? 이거 우리 병에 쓴 한 줄이잖아요. 토씨 하나 안 바꾸고.""한 글자 바꿨어요. 우린 새벽, 계단 위의 방이고 여긴 새벽의 향이에요."하람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서린은 아무 말 없이 상자를 열었다. 병 모양도 비슷했다. 옥탑의 병은 두꺼운 사각 유리에 모서리만 둥글게 깎은 모양이었다. 루프탑 레인은 그걸 조금 더 날씬하게 늘려 놓았을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헷갈릴 정도였다.해밀은 국내에서 가장 큰 뷰티 기업이었다. 전국에 매장이 이천 개가 넘었다. 샴푸부터 립스틱까지 안 파는 게 없었다. 향수는 늘 유행하는 걸 빨리, 싸게 따라 만드는 쪽이었다. 업계에서는 그런 제품을 듀프라고 불렀다. 복제품이라고 부르면 소송이 걸리니까.서린은 시향지에 루프탑 레인을 한 번 뿌렸다. 그리고 옥탑을 다른 시향지에 한 번. 두 장을 나란히 들고 번갈아 맡았다.처음 오 분은 거의 같았다.마른 리넨, 젖은 시멘트, 창틀의 빗물. 첫 인상을 만드는 원료들은 요즘 기계로 분석하면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었다. 서린은 그걸 알고 있었다. 출시한 날부터 누군가 이걸 따라 할 거라는 것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4화. 듀프

해밀에 보낸 답은 한 줄이었다.「팔지 않습니다. — 무향」서린은 그 한 줄을 쓰는 데 오 분이 걸렸다. 쓰는 데는 십 초면 됐다. 나머지 사 분 오십 초 동안은 작업실 창밖을 보았다. 빵집 앞 줄, 인쇄소 앞 종이 뭉치, 그리고 골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무향 작업실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오늘 역 앞 매대에서 이만 원짜리 흰 상자를 샀을 것이다.그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옥탑은 비쌌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살 수도 없었다.전송 버튼을 누르자 지현이 박수를 쳤다. 한 번, 크게."속이 다 시원하네요.""아직 시원할 거 없어요, 실장님. 이제부터예요."* * *오후에 라벨티 사람들이 왔다. 표상진, 백 소장, 그리고 라벨티 법무팀 과장 한 명. 작업실의 작은 테이블에 네 사람이 둘러앉자 무릎이 서로 닿았다.법무팀 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디자인 소송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각 병에 모서리 깎은 건 너무 흔한 모양이라서요. 해밀이 이 년 전에 등록했다는 디자인도 봤는데, 비슷하다고 우기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시간 끌기용일 겁니다.""그럼 반대로요."서린이 말했다."저쪽 루프탑 레인은요. 막을 수 있어요?"과장이 표상진을 한 번 보았다. 표상진이 안경을 고쳐 썼다. 둘 다 대답하기 싫은 얼굴이었다."……어렵습니다."과장이 말했다."향수 배합은 특허를 받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받는다 해도 특허를 내려면 배합을 공개해야 하고요. 그러면 모두가 그 배합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대표님이 영업비밀 원본증명으로 지켜 오신 거고요.""알아요.""원본증명은 누가 배합을 훔쳤을 때 싸울 수 있게 해 줍니다. 7번 때처럼요. 그런데 해밀은 훔친 게 아닙니다. 완성된 향을 사서 기계로 분석하고, 비슷하게 만든 겁니다. 그건 법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업계가 다 그렇게 굴러갑니다."백 소장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서 밤샘의 냄새가 났다. 식은 커피와 실험실 장갑의 라텍스 냄새."분석기에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5화. 상표

문자는 밤 열한 시에 왔다.서린은 옥탑방에서 여름 옥탑의 두 번째 시향지를 적시던 참이었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사진 한 장과 짧은 글이었다.「특허청 출원 목록. 확인된 거라 보내. 추측이었으면 안 보냈어.」사진 속 표의 한 칸에 두 글자가 있었다. 무향. 출원인 해밀 주식회사.서린은 사진을 확대하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충분했다. 스포이트를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비는 그쳤고, 난간에서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녹슨 쇠에 고였던 빗물이 한 방울씩, 규칙적으로.그녀는 한참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답을 보냈다.「고마워요. 확인될 때까지 기다린 것도요.」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오 분 뒤에야 한 줄이 더 왔다. 무슨 말을 쓸지 오래 고른 사람의 오 분이었다.「내일 변호사 만나. 혼자 싸우지 말고.」서린은 휴대폰을 엎어 놓았다. 그러다 다시 뒤집어 한 줄을 더 보냈다.「혼자 아니에요. 원래부터.」* *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승아가 작업실 문을 발로 밀고 들어왔다.양손에 서류 가방과 커피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커피 네 잔에서 진한 원두 냄새가 났다. 승아는 그걸 작업대에 내려놓자마자 서린을 향해 손가락질했다."야. 한서린.""응.""상표 출원을 안 했어? 10년 동안? 조향사가 자기 가게 이름을?""안 했어.""왜!""필요 없었어. 아무도 몰랐으니까."승아가 이마를 짚었다. 지현과 하람은 작업대 구석에서 커피를 하나씩 집어 들고 숨을 죽였다. 승아가 서린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처음 보는 하람은 눈이 동그래졌다. 지현은 익숙하다는 듯 빨대를 꽂았다."그래, 아무도 몰랐지. 근데 이젠 전 국민이 알아. 너 얼굴 까고 N입니다 했잖아. 병에 무향이라고 박아서 삼백 병을 한 시간 만에 팔았잖아. 그럼 그다음 날 누가 달려가? 특허청으로. 씨…… 해밀 법무팀이 그렇게 빠른 줄 몰랐네. 아니지, 출원일 보니까 너 출시하기도 전이네.""칠 주 전.""알고 있었다는 거지. 누가 알려 줬다는 거고."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6화. 지분

안건은 사흘 뒤 이사회 사무국에 올라왔다.강민재가 출력해 온 종이는 두 장이었다. 도혁은 첫 장부터 읽었다.「제1호 안건. 라벨티 — 무향 단독 브랜드 유통 계약 해지의 건.」사유가 세 줄로 적혀 있었다. 상표 분쟁 발생. 디자인 소송 예고. 브랜드 존속 불확실로 인한 유통 손실 우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 분쟁과 소송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두 번째 장을 넘겼다.「제2호 안건. 전무이사 차도혁 해임의 건.」사유는 한 줄이었다. 「사적 관계에 기인한 경영 판단으로 회사에 반복적 손실을 초래함.」제안자 칸에는 이사 네 명의 이름이 있었다. 맨 위가 노경식이었다."두 안건을 묶었습니다."강민재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1호가 부결되면 2호를 바로 올리겠다는 겁니다. 무향 계약을 지키겠다고 표를 던지면, 그게 곧 사적 관계로 판단한다는 증거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거꾸로 1호가 가결되면 2호는 철회하겠다는 뜻이고요. 사무국에 비공식으로 그렇게 전했답니다.""계약을 버리면 자리는 남겨 주겠다.""……네. 그런 뜻입니다."도혁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5월 초의 한강이 보였다. 물빛이 한 달 전보다 짙어져 있었다. 강 건너 뚝섬 쪽 편의점 지붕이 조그맣게 보였다. 그는 그 지붕을 잠깐 보았다."표 계산해 봐.""이미 했습니다. 1호, 해지 찬성이 여섯, 반대가 다섯입니다. 3월 이사회 때 동수였는데 한 분이 넘어갔습니다. 해밀 소송 얘기가 돌면서요.""넘어간 사람이 걱정하는 건.""돈입니다. 소송이 길어지면 라벨티가 물어야 할 수도 있는 돈. 무향이 상표를 잃으면 그동안 깔아 놓은 유통 비용."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강민재는 그 침묵을 알았다. 5년 동안 가장 많이 옆에서 들은 침묵이었다. 결정을 이미 내린 사람이 그 결정을 소리 내어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무게를 다는 시간."그럼 그 돈을 내가 막으면 되겠네.""네?""무향 관련 소송 비용이랑 손실. 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7화. 알리지 마세요

강민재는 골목에 선 채로 전부 말했다.안건 두 개. 묶인 표. 여섯 대 다섯. 소송 비용과 손실 전부에 대한 보증. 담보는 차성준 부회장이 남긴 지분. 어젯밤 아홉 시, 회장이 건넨 낡은 만년필로 다섯 장에 서명.서린은 끝까지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빈 상자를 안은 채 서서 들었다. 발밑에 떨어진 상자 하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빵집에서 나온 손님 하나가 그 상자를 피해 돌아갔다.강민재가 말을 마쳤다. 서린이 물었다. 질문은 하나였다."이사회가 언제예요.""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열흘 남았습니다.""서명은 이미 했고요.""네. 어젯밤에요. 서류는 오늘 아침 사무국에 들어갔습니다."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밑의 상자를 주웠다. 먼지를 한 번 털고, 안고 있던 상자들 위에 얹었다."고마워요, 강 비서님.""……화 안 내십니까.""비서님한테요? 왜요.""말하지 말라는 걸 말했으니까요. 전무님이 아시면 저는…….""안 잘라요, 그 사람."서린이 말했다. 확신하는 목소리였다."예전 같으면 잘랐겠죠. 지금은 안 잘라요. 대신 한동안 말을 안 걸 거예요. 사흘쯤. 그러고 나서 커피 한 잔 사 줄 거예요. 사과는 안 하고."강민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떻게 아셨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 사람은 3년 동안 그 남자의 넥타이를 매 준 사람이었다."들어가 보세요. 반차 내셨죠. 사모님 기다리세요.""그걸 어떻게…….""양복에서 새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요. 결혼하고 바뀐 거죠. 그리고 평일 오후 두 시에 여기 서 계시잖아요."* * *한 시간 뒤, 태강그룹 본사 로비.회전문을 밀고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냄새가 먼저 닿았다. 광택제와 에어컨 바람. 안내 데스크 옆에 김 반장이 서 있었다. 20년 동안 이 로비를 지킨 사람이었다. 그가 서린을 보고 모자챙에 손을 댔다."N 선생님. 약속 있으십니까.""없어요. 22층이요."김 반장은 잠깐 서린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묻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8화. 두 길

이안의 얼굴이 노트북 화면에 떴을 때, 파리는 아침 일곱 시였다.그는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머리는 막 감은 듯 젖어 있었다. 뒤로 보이는 창밖이 흐렸다. 화면 너머로 냄새가 올 리 없는데도 서린은 비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파리의 돌바닥에 떨어지는 5월의 비."좋은 아침…… 아니, 좋은 오후이시옵니다."작업실 구석에서 상자를 접던 하람이 고개를 들었다."대표님, 오후 두 시에는 그냥 안녕하세요, 하시면 돼요. 이시옵니다 말고요.""아, 하람 씨. 거기 계셨습니까. 다행입니다. 제 한국어 선생님이 돌아오셨습니다."하람이 웃음을 참으며 다시 상자를 접었다. 지현은 옆에서 노트를 펴고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서린은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작업대 위에 리안 쪽에서 밤새 보낸 서류가 출력되어 있었다. 스무 장이 넘었다."초안 보셨습니까.""네. 세 번 읽었어요.""궁금하신 점부터 말씀해 주십시오.""이름이요."서린이 서류 한 장을 들었다."무향이라는 이름, 계약서 어디에도 리안 거라고 안 쓰여 있네요.""당연합니다. 이름은 N의 것입니다. 저희는 문만 엽니다. 파리, 밀라노, 런던. 그리고 한국은 저희와 오래 일한 수입사가 맡습니다. 해밀과 손잡은 유통사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향을 아는 곳입니다.""수수료가 라벨티보다 높아요.""작은 문이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적게 드나드는 대신 다들 오래 머뭅니다."이안은 서류를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10년 동안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낸 사람다운 기다림이었다."한 가지 여쭙겠습니다.""네.""이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태강은 어떻게 됩니까."서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인쇄소 기계가 덜컹거렸다."서명 안 해요. 아직은."이안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대안이에요, 이안 씨. 쓰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안 써도 되게 만드는 거요. 태강 계약이 날아가도 무향이 산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으면, 그 계약이 날아갈 이유가 사라져요.""……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89화. 두 번째 이사회

아침 여덟 시, 성수동 작업실 앞.지현과 하람이 계단 아래에 나란히 서 있었다. 둘 다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와 있었다. 하람은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빵집 사장이 문 열기 전에 따로 구워 준 소금빵이었다."차에서 드세요. 이사회 길어지면 배고파요.""고마워요."서린은 봉투를 받았다. 따뜻했다. 버터와 굵은 소금 냄새가 봉투 틈으로 올라왔다. 이 골목에서 10년 동안 맡은 아침 냄새였다. 오늘은 그 냄새를 태강 이사회실까지 들고 가게 되었다.지현은 한참 서린의 얼굴을 보았다. 뭔가 당부하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결국 딴말을 했다."간판 사진, 제일 큰 걸로 넣었어요? 제 글씨 잘 보이게?""네. 실장님 글씨 크게 넣었어요. 번진 데까지.""번진 건 빼 주지.""번진 게 증거예요."지현이 웃었다. 웃다가 서린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10년 전 개업 날 밤에도 이렇게 두드렸었다. 그때는 지현이 울고 있었다."잘하고 와요. 아니, 잘할 거 알아요. 그냥 오세요."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택시에 올랐다. 뒷유리 너머로 두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하람은 택시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았다.* * *이사회실은 3월과 같은 방이었다.긴 타원형 테이블, 열한 개의 의자, 창을 가린 회색 블라인드. 공기청정기가 구석에서 낮게 돌고 있었다. 3월에 서린이 필터 냄새를 지적한 뒤로 필터를 새로 갈았다. 이번에는 먼지 냄새 대신 새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서린은 방에 들어서며 그걸 맡았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전 열 시. 이사 열한 명이 자리에 앉았다. 도혁은 창가 쪽 끝에 앉았다. 넥타이 매듭이 반듯했다. 로비에서 김 반장이 그를 붙잡고 한마디 했다는 건 서린도 들었다. 전무님, 넥타이 괜찮으십니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회장은 오지 않았다. 의장석이 비어 있었다. 사회는 선임 이사인 노경식이 맡았다. 그는 맞은편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은색 행커치프, 뒤로 넘긴 흰 머리. 파이프 담배 냄새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90화. 해밀

강민재가 마지막 서류를 맞춘 건 이사회 엿새 뒤 새벽 두 시였다.비서실 책상 위에 종이가 네 겹으로 쌓여 있었다. 노경식 이사 사위 회사의 법인 등기, 해밀과의 자문 계약서, 석 달 치 송금 내역. 그리고 마지막 한 장. 3월 이사회 이틀 전, 이사회 자료가 배포된 날 밤 노경식의 개인 메일에서 사위 회사로 넘어간 파일 목록이었다. 파일 이름 가운데 하나가 「라벨티_무향_병디자인_최종」이었다.강민재는 그 한 줄에 형광펜을 긋다가 손을 멈췄다. 형광펜이 필요 없었다. 그 줄은 긋지 않아도 보였다.그는 서류를 봉투에 넣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새벽 두 시였는데도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전무님은 오늘도 집에 가지 않았다."다 맞췄습니다."도혁이 봉투를 받았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는 데 오 분이 걸렸다. 그는 파일 목록의 그 한 줄에서 오래 멈췄다."법무팀이랑 감사위원회, 아침 여덟 시에 부를까요.""아니. 그 전에 할 게 있어."* * *아침 일곱 시 반, 21층 이사실.노경식은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창가에서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있었다. 실내 금연이라 불은 붙이지 않았다. 그냥 채우고, 냄새를 맡고, 다시 비우는 게 그의 아침 습관이었다. 방 안에 마른 담뱃잎 냄새가 가득했다.도혁이 노크 없이 들어갔다. 노경식이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이사회 뒤로 이런 아침이 올 걸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차 전무. 이른 시간에."도혁은 대답 대신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노경식은 파이프를 든 채 봉투를 보았다. 열지 않았다."뭔가.""사위분 회사 자문 계약서입니다. 해밀하고요. 송금 내역도 있고, 3월 이사회 자료가 넘어간 기록도 있습니다."노경식의 손에서 파이프가 멈췄다."아홉 시에 감사위원회에 올라갑니다. 그 전에 사임서를 쓰시면, 감사위원회에는 사임 사유만 올라갑니다. 수사 의뢰는 회사가 결정합니다. 제가 아니라.""……이 사람이."노경식이 파이프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자네 전처 하나 때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
ZURÜCK
1
...
5678910
CODE SCANNEN, UM IN DER APP ZU LESE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