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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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악녀, 사교 모임에서 말하다

악녀 수칙: 남의 입을 막으려면 내 입부터 열어야 한다.“제가 내일 할 말을 어떻게 알아요.”레녹스가 먹구름에게 물린 망토 자락을 빼냈다. 검은 털 몇 가닥이 은회색 천에 붙어 있었다.“거짓말만 아니면 된다.”“그건 안 해요.”“그럼 됐어.”먹구름이 다시 망토 쪽으로 코를 뻗었다. 나는 고삐를 짧게 잡았다.“그만. 그건 네 먹이가 아니야.”레녹스는 망토를 뒤로 넘기고 한 걸음 물러났다. 먹구름이 못마땅한 듯 바닥을 긁었다.대공은 말에게 밀려나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한테 물린 소매를 돌려받은 것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쓸어 주었다.“제가 시끄러운 날도 있을 텐데요.”“목소리가 큰 건 괜찮아.”그 말을 듣고 고삐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의 굳은살 자리에 가죽이 눌렸다.이상한 사람이었다. 조용한 게 좋다면서 내가 크게 떠드는 건 괜찮단다.나는 대답 대신 먹구름을 마구간 쪽으로 이끌었다. 뒤에서 긴 걸음 소리가 따라왔다.◐4월 20일 아침, 한나는 내 옷장 문을 모두 열어 놓았다.“아가씨, 오늘은 정말 골라 주셔야 해요.”침대 위에 옷이 세 벌이나 펼쳐져 있었다. 연분홍색, 옅은 노란색, 짙은 보라색. 앞의 둘은 누가 봐도 얌전한 옷이었다.나는 보라색 소매를 집었다.“이거.”“그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숨으러 가는 건 아니잖아.”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더니 보라색 옷을 들었다.파혼 뒤 처음 나가는 다과회였다. 초대장을 보낸 백작 부인은 어머니와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직접 이유를 물을 자리이기도 했다.안 가면 겁먹어서 못 온다는 소리가 나겠지.가면 뻔뻔해서 왔다는 소리가 날 테고.어차피 입은 저쪽에 있었다. 내 다리까지 저쪽 뜻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한나가 등 뒤에서 단추를 채웠다.“누가 좋지 않은 말을 하면요?”“듣고.”“네?”“뭐라고 했는지 알아야 대답을 하지.”거울 속 한나가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화장대 위 장갑을 들어 손가락부터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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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악녀, 편자를 뽑다

악녀 수칙: 내 말이 절면 남의 말보다 발밑부터 살핀다.“원래는 재미없는 쪽이었어.”이사벨이 접힌 부채를 턱 아래에 댔다.“지금은 바뀌었고?”“참는 걸 좀 줄였지.”“좀?”나는 마차 문 옆에 서 있는 한나를 보았다.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많이.”이사벨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정원 안에서도 들릴 만큼이었다.“다음에 또 보자.”“같은 자리에 있으면.”“먼저 약속은 안 해 주네.”“어디서 볼 건지도 모르는데.”이사벨은 부채를 들어 짧게 흔들고 돌아갔다. 나는 마차에 올라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 검지에 과자 부스러기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한나가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아가씨, 오늘 재미있으셨나 봐요.”“돌아가서 먹구름도 봐야 하니까.”나는 손을 털었다. 정원에서 받아 온 시선보다 마구간에서 기다릴 콧김이 나았다.◐4월 25일, 먹구름은 마구간 앞에서 또 걸음을 멈췄다.오른쪽 앞다리를 내밀었다가 바로 거뒀다. 고삐를 당기지 않았는데도 목이 뻣뻣해졌다.나는 함께 멈췄다.“오늘은 여기까지.”마당을 걷게 하려던 참이었다. 아직 안장도 올리지 않았다. 좋은 말을 싸게 샀다고 좋아하기에는 이 말의 걸음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베른이 무릎을 굽혀 먹구름의 다리를 살폈다.“어제도 이 자리에서 멈췄나요?”“응. 흙 위에서는 조금 나았고.”돌이 깔린 길에 나오면 걸음이 더 짧아졌다. 오른쪽 앞발을 딛고 왼쪽을 옮길 때 특히 그랬다.베른은 손바닥으로 다리를 차례로 짚었다. 먹구름이 귀를 뒤로 눕히자 잠시 손을 뗐다.“붓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네요.”“그런데 왜 계속 절지?”“다리 위쪽만 보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베른이 발굽을 들었다.나는 먹구름의 목 옆에 섰다. 손바닥으로 검은 털을 쓸어 주자 목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발굽 바닥에는 아침에 걷다가 낀 흙이 남아 있었다. 베른이 도구로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편자 안쪽을 살피던 손이 멈췄다.“아가씨, 저기 천 하나만 가져다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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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악녀, 숙녀 수업을 빠지다

악녀 수칙: 배우기 싫은 걸 숨기느라 배우고 싶은 걸 미루지 않는다.“대공 전하, 먹구름은 저쪽인데요.”레녹스가 그제야 물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먹구름은 물을 마시고도 입가를 털지 않았다. 턱에서 떨어진 물이 앞발 아래 흙을 적셨다.“잘 걷네.”“아까는 달렸어요.”“그것도 봤어.”나는 장갑을 벗어 안쪽을 털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괜히 다시 손가락을 끼워 넣는데 레녹스가 마당 쪽을 가리켰다.“다음에는 타겠네.”“베른이 괜찮다고 하면요.”“기다릴 수 있나?”“먹구름이 아픈 건 싫으니까요.”레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벗어 둔 망토를 가져다주었다. 마구간 문에 걸려 있던 자리에 검은 털이 조금 붙어 있었다.“이것도 다음에는 안 입고 오세요. 이제 낮에는 더워요.”“네 말이 또 먹을까 봐?”“그것도요.”레녹스는 망토를 받아 팔에 걸쳤다. 입지는 않았다.먹구름이 물통에서 고개를 들었다. 대공의 주머니를 보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나는 앞을 막았다.“오늘 각설탕은 끝이야.”먹구름이 내 어깨에 코를 댔다.못 들은 척하는 솜씨는 멀쩡한 다리보다 먼저 돌아왔다.◐5월 1일 아침, 한나는 승마복 대신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침대 위에 펼쳤다.나는 바지 한쪽에 발을 넣다가 멈췄다.“그 옷은 왜?”“후작님께서 오늘은 이걸 입으시래요.”“오늘 무슨 날인데?”한나가 드레스 소매를 반듯하게 펴 놓았다.“선생님이 오세요.”“무슨 선생님?”“숙녀 수업을 맡으실 분이요.”넣던 발을 마저 넣었다.한나가 내 바지를 보고, 드레스를 보고,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아가씨.”“일단 입고 이야기하자.”나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셔츠를 집었다. 한나가 잠시 망설이다 등을 돌려 주었다.창밖에서 마구간 쪽으로 가는 수레가 보였다. 베른이 아침부터 새 건초를 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안장을 올려도 좋다고 어제 약속했다.편자를 바꾼 뒤로 먹구름은 짧게 걷고 쉬었다. 베른은 매일 발굽을 살폈고, 나는 매일 같은 질문을 했다.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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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악녀, 과자를 나누다

악녀 수칙: 나눠 먹을 때는 안 먹겠다는 사람의 눈부터 본다.“망토는 두고 왔어.”레녹스가 자기 어깨를 한 번 내려다봤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조금 거뒀다. 앞에 약속한 나무가 가까워졌다.“잘하셨어요. 먹구름도 오늘은 안장만 물면 되겠네요.”“안장도 무나?”“입에 닿으면요.”먹구름이 귀를 뒤로 돌렸다. 자기 이야기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나는 목을 가볍게 두드리고 속도를 늦췄다. 레녹스도 회색 말을 걷게 했다. 말 둘이 나란히 풀밭을 밟았다.“더 안 달려?”“오늘은 여기까지예요. 베른과 약속했어요.”“그럼 돌아가지.”레녹스가 회색 말의 머리를 돌렸다.나는 대공을 보다가 앞을 봤다. 더 달리자고 할 줄 알았다. 바람도 좋았고, 먹구름의 걸음도 고른데.“대공 전하는 더 타셔도 되는데요.”“나도 여기까지.”저 사람은 북부에서부터 저런 식으로 따라왔을까.누가 길을 잘못 들면 함께 잘못 들고, 돌아서면 함께 돌아서고.나는 고삐를 쥔 손을 고쳐 잡았다.“저택으로 돌아갈 거예요.”“알아.”“마구간까지 오시면 베른한테 붙잡히실 수도 있어요. 안장 걸이가 너무 높다고 했거든요.”레녹스가 자기 팔을 내려다봤다.“내리면 되겠네.”그날 안장 걸이는 베른의 어깨 높이로 내려왔다.베른은 고맙다는 말을 세 번 했다. 레녹스는 세 번 다 고개만 끄덕였다.먹구름은 그동안 대공의 빈 주머니를 코로 뒤졌다.◐5월 6일, 한나는 내 머리를 묶다가 리본 두 개를 나란히 들었다.“시장에는 어느 걸 하고 가실래요?”“덜 풀리는 것.”한나는 망설임 없이 짙은 보라색 리본을 골랐다.나는 거울 앞에서 귀밑으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넘겼다. 오늘은 말을 타지 않았다. 얇은 회색 드레스에 낮은 구두를 신었다.한나가 작은 돈주머니를 내밀었다.“정말 걸어서 구경하실 거예요?”“마차 안에서 보면 물건보다 사람 모자가 더 잘 보이잖아.”“후작님께서는 남문까지 마차로 가라고 하셨어요.”“거기까지는 탈 거야.”마차를 타는 일과 시장을 걷는 일은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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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악녀, 필립과 다시 마주치다

악녀 수칙: 억지 사과는 안 받는다.나는 레녹스의 빨개진 귀에서 외투 주머니로 눈을 옮겼다.“봉지째 맛을 보시는군요.”“…조각이 작아서.”“다음에는 큰 걸 사 드릴게요. 하나만 맛보시게.”레녹스가 입을 다물었다.말을 끌고 온 오웬은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고삐를 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나는 마차에 올랐다. 한나가 솔 꾸러미를 무릎에 올려놓고 꽃을 창가에 세웠다.창밖에서 레녹스가 주머니를 한 번 눌렀다. 접어 넣은 봉지가 바스락거렸다.“다음에는 내가 살게.”“단 것 말고요?”대공이 잠깐 나를 봤다.“네가 먹을 것.”그렇다면 하나만 사면 되겠네.나는 대꾸하지 않고 창문을 닫았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조금 웃고 있었다.◐5월 15일, 한나는 내 허리 뒤에서 리본을 묶었다.“이 정도면 움직이기 괜찮으세요?”“응. 앉을 수도 있겠어.”“가든파티에서 계속 서 계실 건 아니잖아요.”“사람들이 쓸데없는 말을 하면 서 있게 될지도 모르지.”의자에 앉으면 일어나야 했다. 서 있으면 바로 가 버릴 수 있었다. 사교 모임에서 배운 것 가운데 그나마 쓸모 있는 지식이었다.한나는 리본 끝을 가지런히 펴고 내 앞을 돌아봤다.옅은 보랏빛 드레스였다. 소매는 손목을 가리지 않았고, 치마는 걸을 때 구두에 걸리지 않았다. 허리를 졸라 숨을 줄일 필요도 없었다.나는 거울 앞에서 한 번 돌아섰다.“좋네.”“정말요?”“응. 뛰지만 않으면 되겠어.”한나가 고개를 들었다.“오늘 왕궁에서 뛰실 일이 있나요?”“없었으면 좋겠어.”한나는 잠깐 내 얼굴을 보더니 작은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흙이 묻어도 털 수 있게 챙길게요.”나를 제법 잘 아는 하녀였다.현관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지팡이 손잡이를 두드리고 있었다.“오늘은 왕실에서 여는 자리다.”“초대장에 적혀 있었어요.”“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아버지의 콧수염 끝이 움직였다.“필립 전하를 뵙더라도 예의를 갖춰라. 이미 끝난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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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악녀, 브로치를 돌려주다

악녀 수칙: 내 편의 물건은 내 편에게 돌려준다.찻잔 가장자리가 입술에 닿기 전에 멈췄다.필립은 내 손을 보다가 덧붙였다.“신전에서 오래 준비한 일이라고 한다. 왕궁에서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고.”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받침과 부딪치지 않게 손잡이를 끝까지 잡고 있었다.“그렇군요.”“너도 초대받을 거다.”“초대장이 오면 읽어 볼게요.”필립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뒤에서 시종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자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나는 필립의 금발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레녹스가 내 앞의 찻잔을 조금 안쪽으로 옮겼다.“안 걸을 거야?”“걸을 거예요.”나는 일어났다.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름을 펴려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걸으면 다시 구겨질 옷이었다.레녹스는 정원 길로 먼저 나가지 않았다. 내가 탁자에서 벗어나자 옆으로 따라왔다.“싫은 소식이었나.”“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어요.”“응.”그것만 묻고 말았다.나는 꽃길 끝에서 멈췄다. 흰 꽃 사이로 물소리가 들렸다. 정원 안쪽에도 작은 분수가 있었다.레녹스가 내 걸음을 따라 멈췄다.“돌아갈래?”“네. 오늘은 꽃을 충분히 봤어요.”대공은 오웬을 불렀다. 마차를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오웬이 곧장 입구로 갔다.나는 분수 쪽을 한 번 더 봤다.지금은 아무도 넘어져 있지 않았다.◐5월 20일, 나는 화장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찾아 두었던 브로치는 작은 천 위에 놓여 있었다. 보랏빛 돌을 둘러싼 진주 알이 아침빛을 받았다.나는 돌보다 뒤쪽의 핀을 먼저 살폈다. 끝이 조금 휘어 있었다. 손끝으로 누르자 걸쇠에서 미끄러졌다.한나는 침대 위에 펼친 드레스를 정리하고 있었다.“아가씨, 이건 오늘 입으실 거예요?”“아니. 오늘은 마구간에 갈 거야.”“그럼 승마복으로 꺼낼게요.”“그전에 잠깐 와 봐.”한나가 드레스를 내려놓았다.내 손에 든 브로치를 보고 걸음이 느려졌다. 앞치마를 쥔 손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그걸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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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악녀, 오빠의 검을 고치다

악녀 수칙: 미운 사람의 망가진 물건도 그냥 두지는 않는다.잉크가 마르기 전에 종이를 접을 뻔했다.나는 펜을 내려놓고 종이 끝을 눌렀다. 손가락에 검은 점이 묻었다. 문질렀더니 점이 옆으로 번졌다.분수대에서 일어날 일은 종이에 남겨 두었다. 다만 종이를 쳐다본다고 날짜가 빨리 오지는 않았다.마른 종이를 서랍 안에 넣었다.문밖에서 한나가 물었다.“아가씨, 저녁 식사 전에 손 씻으실 거예요?”“응. 잉크가 묻었어.”“물을 새로 가져올게요.”나는 닫힌 서랍에서 손을 뗐다.기다리는 동안 할 일은 있었다. 먹구름도 걸어야 했고, 나도 밥을 먹어야 했다.◐5월 28일, 한나는 내 모자 옆에 달린 리본을 만지다가 손을 멈췄다.“정말 이걸 쓰실 거예요?”“왜?”“지난번에 데릭 도련님께서 너무 눈에 띈다고 하셨잖아요.”보랏빛 리본이었다. 검은 모자에 달았으니 눈에 띄기는 했다.나는 거울을 보고 고개를 조금 돌렸다.“오늘은 오빠가 앞을 보면 돼. 내 모자 말고.”한나가 리본을 펴 주었다.“응원은 하실 거죠?”“시합은 볼 거야.”그 이상은 약속하지 않았다.데릭은 아침부터 검을 들고 현관으로 나갔다. 내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동안에도 검집의 위치를 고쳐 달았다. 허리띠는 멀쩡했는데 손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네가 왜 가?”“기사 시합을 보러.”“관람석에 앉아서 떠들지 마.”“오빠가 시합 중에 내 말을 들을 정도면 상대가 무척 한가한가 보네.”데릭이 나를 봤다.나는 모자를 썼다. 리본 끝이 어깨에 닿았다.“안 떠들게. 보고만 있을 거야.”데릭은 모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현관 아래에는 레녹스가 서 있었다.오웬이 옆에서 내 모자와 대공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기사 시합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대공 전하도 보러 가세요?”“응.”레녹스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같이 가도 돼?”“오빠랑 같은 마차를 타려고요.”“내 마차로 따라갈게.”오웬이 준비된 마차를 가리켰다.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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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악녀, 날짜를 세다

악녀 수칙: 필요한 부탁은 돌려 말하지 않는다.데릭의 시선이 마구간에서 내 손으로 돌아왔다.나는 수건을 접은 채 무릎 위에 놓았다.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 검은 가죽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너도 거기 있었어?”“응.”“검을 손봤어?”“베른이 고쳤고, 나는 가죽을 잡았어.”데릭은 손잡이 끝을 엄지로 문질렀다. 새로 감은 가죽이 손에 잘 맞는지 쥐었다가 놓았다.“그냥 맡기라고 하지.”“그냥 맡기라고 했잖아. 대공 전하가.”“너까지 나설 일은 아니었어.”“다음에 헐거워지면 바로 맡겨. 그러면 내가 안 나서도 돼.”데릭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나는 수건을 한나에게 건넸다. 한나는 손바닥을 더 닦아야 한다며 깨끗한 면을 다시 내밀었다.데릭은 검을 장비대에 걸지 않았다. 손에 든 채 계단으로 돌아섰다.첫 계단에 발을 올렸을 때 작은 말이 들렸다.“베른에게 고맙다고 전해.”“직접 해. 마구간은 안 도망가.”데릭이 뒤를 봤다.나는 젖은 손가락을 펴 보였다. 아직 닦는 중이었다.오빠는 더 말하지 않고 올라갔다. 검집 끝이 계단 난간에 닿기 전에 손을 고쳐 잡았다.◐6월 5일 아침, 나는 식탁에 놓인 달력에서 손을 뗐다.10일까지 닷새였다.손가락으로 세어도 닷새. 눈으로 세어도 닷새.하나는 줄어들어 줘도 될 텐데 날짜는 융통성이 없었다.“그날 무슨 약속이 있니?”아버지가 읽던 편지를 접었다.나는 빵에 버터를 바르던 칼을 내려놓았다.“왕궁에 가요.”“신전에서 오는 행렬을 보러?”“네.”“파혼한 뒤에도 초대가 왔으니 처신을 잘해야 한다. 왕자 전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마주치면 인사할게요.”먼저 찾아가겠다고는 하지 않았다.아버지는 콧수염 아래를 손으로 눌렀다.“성녀께서 오시는 자리다. 불필요한 말은 삼가.”“어떤 말이 불필요한데요?”“듣는 사람이 불편해할 말.”“그럼 아버지가 제게 파혼 얘기를 하시면 안 되겠네요.”맞은편에서 데릭의 숟가락이 멈췄다.아버지는 편지를 다시 펼쳤다. 종이 끝이 조금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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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악녀, 성녀를 만나다

악녀 수칙: 잡힌 손보다 내 발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핀다.“조금만요.”내가 대답하자 레녹스는 등잔을 그대로 뒀다.불을 더 밝히지도 않았다. 심지 옆으로 흘러내린 기름만 천으로 닦았다.나는 작업대 위에 올려 둔 손을 내려 무릎에 놓았다. 끈이 풀린 겉옷 자락이 벌어졌다. 한쪽을 여미고 나니 의자가 생각보다 낮다는 걸 알았다.레녹스가 앉으면 작고, 내가 앉으면 낮았다. 베른만 편한 의자였다.먹구름이 발굽을 움직였다.나는 고개를 돌렸다. 먹구름은 눈을 감은 채 꼬리만 한 번 흔들었다.“자는 데 방해되겠어요.”“목소리를 낮추면 돼.”대공은 정말로 목소리를 낮췄다.나는 작업대 끝의 못 자국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베른이 말고삐를 고치면서 만든 자국이었다. 손가락이 걸리는 곳에서 멈췄다.“분수대에서 제가 이상한 행동을 해도 놀라지 마세요.”“어떤 행동?”“아직은 저도 몰라요.”준비한 대로 될지 알 수 없었다. 클로에가 전과 똑같이 움직일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확실한 것만 말하려니 할 말이 짧았다.레녹스는 다리를 올렸던 의자에서 발을 내렸다.“네가 싫다는 일은 안 할게.”“제가 부탁드린 건 와 달라는 것뿐이에요.”“응.”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등잔 곁의 서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그건 안 보세요?”“아까 봤어.”“여기서요?”“베른이 의자를 빌려 줬어.”“앞으로 대공 전하의 서재에 건초를 들여놓으셔야겠네요.”대공이 먹구름을 봤다.먹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밤중에 자기 방을 빌려 줬다고 서재까지 따라갈 말은 아니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이제 들어갈게요.”레녹스도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내 의자를 대신 옮기려다가 손을 멈췄다. 나는 의자를 작업대 아래에 넣었다.문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겉옷 틈으로 들어왔다.대공은 본관 앞까지 함께 걸었다. 현관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는 정문 쪽으로 돌아섰다.나는 문을 닫기 전에 말했다.“닷새 뒤에 봬요.”“그 전에 또 올 건데.”“그건 알고 있어요.”레녹스가 봉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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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악녀, 밀지 않았다

악녀 수칙: 하지 않은 일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분수대 물소리만 남았다.클로에가 짚은 손 옆으로 물이 튀었다. 하얀 치맛자락 끝이 젖은 바닥에 붙었다.사람들이 내 쪽을 봤다.나는 오른손에 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다. 왼손도 그대로 옆에 뒀다. 누구에게 닿았는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손이었다.필립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성녀님.”필립은 클로에 앞에 몸을 낮추고 팔을 내밀었다. 클로에는 그 팔을 잡기 전에 나를 한 번 올려다봤다.“제가 뭘 잘못했나요?”작은 목소리였다.가까이에 선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들렸다.전생에도 저 말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 짧은 사이에 필립이 나를 꾸짖었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먼저 입을 열었다.“안 밀었어요.”필립의 손이 멈췄다.클로에가 눈을 깜빡였다.나는 둘을 내려다봤다.“성녀님 몸에 손도 안 댔어요.”끝을 흐리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다들 내 입만 보고 있었으니까.필립이 클로에를 일으켰다.하얀 치맛자락이 돌바닥에서 떨어졌다. 클로에는 무릎을 조금 굽혔다가 폈다. 손바닥을 위로 돌려 살피고는 소매 안으로 감췄다.“괜찮으십니까?”“네, 전하. 저는 괜찮아요…….”대답과 달리 필립의 팔을 놓지 않았다.필립은 내 손을 봤다. 다음에는 발밑을 봤다.“비올레타, 무슨 일이 있었지?”“성녀님이 제 앞에서 넘어졌어요.”“넘어지기 전에.”“같이 분수대를 보러 왔어요. 성녀님이 저를 돌아보면서 걷다가 넘어졌고요.”클로에가 고개를 숙였다.필립의 눈썹이 좁혀졌다.“손을 잡고 있지 않았나?”“인사할 때는 잡았어요. 넘어질 때는 안 잡고 있었고요.”붙잡은 손과 밀친 손은 다르다.그 정도는 구분해 줬으면 했다. 왕자라서가 아니라 눈이 있으니까.나는 오른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이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있었어요.”옷에 남은 주름이 손가락 아래에 모였다.필립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뒤에서 누군가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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