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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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악녀, 조사를 받다

악녀 수칙: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내 죄를 정하게 두지 않는다.누군가 의자를 밀었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났다.왕은 그쪽을 한 번 보고 손을 들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클로에는 눈가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내리지 않았다.“대공. 방금 한 말은 성녀가 거짓을 말했다는 뜻인가?”“아닙니다.”레녹스의 대답은 짧았다.“제 귀가 조용하다는 것과 영애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이제 와서 발트하임의 귀를 의심하자는 건가?”브루노가 부드럽게 물었다. 손가락의 반지들이 손수건보다 더 눈에 띄었다.레녹스는 대신관을 보았다.“조사를 하자는 뜻입니다.”나는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앞에 서 있던 데릭이 옆으로 비켜 주었다.“저도 그걸 원해요.”필립이 나를 보았다.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왕이 물었다.“에버린 영애. 성녀의 주장에 답하겠나?”“저는 성녀님의 차에 독을 넣지 않았어요. 넣으려고 한 적도 없고요.”클로에의 손수건이 내려갔다.“비올라 님, 저는 분명히…….”“어디서, 언제, 무엇을 보셨는지 조사관에게 말씀하세요. 저도 그렇게 할 테니까요.”울고 있는 사람을 달래 줄 생각은 없었다. 저 눈물을 받아 주면 다음에는 내 손에 찻잔을 쥐여 줄 것이다.왕이 팔걸이를 짚었다.“성녀의 주장과 영애의 답변을 모두 기록하라. 차와 사용한 잔, 당시 드나든 사람을 확인하도록.”서기가 펜을 움직였다.“조사가 끝날 때까지 에버린 영애는 저택에 머문다. 허락 없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손바닥이 뻣뻣해졌다.전에도 저 말을 들었다. 저택에 있으라고 했다. 곧 오해가 풀릴 거라고 했다. 그다음에는 창문이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나는 오른손을 폈다. 고삐를 쥐던 자리에 굳은살이 있었다.지금은 그 방이 아니었다.“저택 안에서는 움직여도 되나요?”왕의 시선이 내 손에서 얼굴로 올라왔다.“허락한다.”“조사 내용 중 제가 답해야 할 것은 제게 직접 물어 주세요. 제 아버지나 오빠가 대신 답하게 하지 마시고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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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악녀, 갇혀서도 연습하다

악녀 수칙: 문이 막혔다고 할 일까지 멈추지는 않는다.레녹스가 종이를 접었다. 검어진 방울을 적은 쪽지가 손안으로 사라졌다.“다른 방울은?”“제가 본 건 하나예요. 끝부분만요.”“나도.”나는 철문 밖의 왼쪽 귀를 보았다. 작은 은 귀걸이가 저녁빛을 받았다.“아직 이유는 모르죠?”“확인할 거야.”“확인되면 알려 주세요. 저에 관한 건데 저만 모르고 싶지는 않아요.”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오웬이 마차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헛기침 대신 문손잡이를 두드렸다. 제법 참은 모양이었다.“가세요. 오웬이 문을 떼기 전에.”“내일 올게.”“저는 내일 마구간에 있을 거예요.”“그럼 다녀온 뒤에 만나.”밖으로 못 나가는 사람에게도 다녀올 곳은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면 충분했다.나는 경비에게 펜을 돌려주었다. 레녹스가 마차에 오른 뒤에야 몸을 돌렸다.마구간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10월 3일 아침, 나는 승마복을 입고 저택 뒤 마당에 섰다.먹구름이 내 어깨 옆으로 코를 내밀었다.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바로 고개를 돌렸다.“인사가 좀 짧네.”먹구름은 대답 대신 고삐를 씹으려 했다. 내가 고삐를 빼내자 앞발로 흙을 긁었다.달리고 싶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베른은 마당 가운데에 말뚝을 박고 있었다. 말뚝에 묶은 긴 줄을 팽팽하게 당긴 뒤, 끝에 꽂은 나무막대로 땅을 긁었다.나는 먹구름을 데리고 옆으로 비켰다.베른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자 마당에 커다란 원이 남았다.“이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돌아야 할 때마다 안쪽으로 붙으면 거리가 달라집니다.”“원 바깥을 도는 거죠?”“예. 한 자리로 돌아와야 셀 수 있습니다.”“조사받는 동안 숫자 공부까지 하네.”“경주에 나가신다고 하셨잖습니까.”나는 고삐를 고쳐 쥐었다.그랬지. 내 입으로 했다. 죄를 지었다는 말은 남이 붙였지만, 경주에 나가겠다는 말은 내가 골랐다.베른은 줄에 표시한 매듭을 확인했다. 허리를 숙였다가 천천히 펴는 손에 흙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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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악녀, 증인을 찾다

악녀 수칙: 겁먹은 사람에게 대답부터 재촉하지 않는다.나는 계단 위에 올렸던 발을 내려놓았다.“매일 밤?”“물건을 나르는 사람이 본 날에는 그랬대.”“그럼 매일인지는 모르는 거네.”데릭이 물병을 내려다봤다.“그렇지. 내가 말을 잘못 옮겼어.”“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면 본 것만 물어봐 줘. 성녀가 대신관 방에 가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너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나는 과자 봉투의 접힌 끝을 눌렀다.이상했다. 은방울도, 조용해진 귀도, 성녀가 밤마다 찾아가는 방도.그렇다고 이상한 것을 전부 죄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그 짓을 당해 봤으니까.“생각은 해. 아직 아는 건 없고.”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병을 든 손이 조금 내려갔다.“사본이 오면 같이 볼까?”“내가 먼저 보고. 물어볼 게 있으면 부를게.”“그래.”이번에는 대답 뒤에 서운한 얼굴을 붙이지 않았다.나는 계단을 다시 올랐다. 과자 봉투가 팔에 닿아 바스락거렸다. 반이나 비었는데도 버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10월 8일 아침, 나는 책상 위에 조사 서류를 펼쳤다.다음 날 도착한 사본은 며칠 동안 접었다 펴서 모서리가 조금 닳아 있었다. 내 진술, 신전에서 보낸 진술, 아직 확인하지 못한 물건 목록.그리고 증인 명단.한나는 창가에서 내 승마 장갑을 말리고 있었다. 어제 연습하다가 물통에 빠뜨린 것들이었다.“아가씨, 이건 오늘 못 쓰시겠어요.”“다른 것 있어.”“오른쪽만 축축해요. 왼쪽은 괜찮은데.”“양손이 서로 다른 날씨를 겪게 할 수는 없잖아.”한나가 장갑을 나란히 걸었다.나는 명단 마지막 줄에 손가락을 댔다.이름만 읽었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아래 적힌 일을 보고서야 손가락이 멈췄다.『성녀의 의복과 제단보를 관리하는 하녀.』접힌 제단보를 안고 있던 팔. 손톱 옆에 남은 붉은 자국. 재판장에서 끝내 내 쪽을 보지 않던 얼굴.나는 종이를 가까이 당겼다.전생에도 이 사람이었다.성녀가 쓰던 방에 드나들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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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악녀, 오빠를 얻다

악녀 수칙: 사과는 말보다 그다음 행동을 보고 받는다.“차갑다는 게 어느 정도예요?”하녀가 보따리를 고쳐 안았다. 손가락 끝이 갈색 천 아래로 들어갔다.“오래 잡고 있기가 싫을 만큼요.”“옷을 정리할 때마다 그랬어요?”“목걸이를 받은 뒤로는…… 네.”나는 더 묻지 않았다. 하녀는 이미 마차 문 앞에 서 있었다. 떠나려던 사람에게 질문을 하나씩 붙이면 끝이 없었다.“알려 줘서 고마워요.”하녀가 고개를 숙였다.이사벨은 먼저 마차에 올라 안쪽 자리를 비웠다. 하녀가 앉고 나서야 부채를 폈다. 평소처럼 말을 걸지는 않았다.마차 문이 닫혔다.나는 바퀴가 돌아가는 동안 철문 안에 서 있었다. 한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아가씨, 손 시리세요?”내 손가락이 철문을 잡고 있었다.“조금.”“들어가세요. 오늘은 장갑도 안 끼셨잖아요.”나는 손을 뗐다. 손바닥에 세로로 자국이 남아 있었다.은으로 만든 물건이 차가운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녀는 그 말을 하려고 정문 앞에서 멈췄다.그냥 차가운 은이었다면.나는 본관 쪽으로 돌아섰다.아직은 거기까지였다.◐10월 14일 아침, 데릭은 마구간 앞에서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날을 뽑은 것도 아니었다. 검집째 들고 장화를 털다가 손잡이의 가죽이 돌아갔다. 검집 끝이 돌바닥에 닿으며 둔한 소리를 냈다.먹구름이 귀를 뒤로 젖혔다.“말 앞에서 뭐 하는 거야.”“미끄러졌어.”“장갑이?”데릭이 손잡이를 돌려 보였다. 끝부분의 가죽끈이 풀려 있었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베른에게 넘겼다. 베른은 말을 끌고 몇 걸음 떨어졌다.“이걸 들고 다녔어?”“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괜찮은 물건은 잡았다고 돌아가지 않아.”데릭은 대꾸하지 않았다.검을 받아 난간 위에 놓았다. 검집은 그대로 두고 풀린 끝을 당겼다. 안쪽에 낀 가죽이 얇게 닳아 있었다.“새로 감아야겠네.”“나중에 맡기면 돼.”“오늘도 들고 나갈 거잖아.”“그렇기는 하지.”베른이 마구간 안에서 짧은 가죽끈을 가져왔다.“고삐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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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악녀, 과자를 굽다

악녀 수칙: 고마운 사람에게 줄 것은 내 손으로 고른다.“옷에 부딪힌 건 아니고?”데릭은 장갑을 무릎 위에 놓았다.“손을 잡기 전에는 안 났어. 잡고 나서 한 번.”“움직이기는 했겠지. 손을 뻗었으니까.”“그랬겠지.”나는 데릭의 오른손을 봤다. 손을 잡았다는 말과 방울이 울렸다는 말 사이에 무엇을 끼워 넣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아직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두는 게 나았다. 아는 척을 해 봤자 성녀 흉내밖에 더 되나.“다음에 또 들리면 알려 줘.”“다시 찾아가 보려고.”“또 그 질문 하러?”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답은 못 들었으니까.”“그럼 가도 되고. 다만 목걸이를 만지려고 하지는 마.”“왜?”“그쪽 하녀가 오래 잡고 있기 싫을 만큼 차갑다고 했어.”데릭은 장갑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은 뒤 검 손잡이를 잡았다.“알겠어.”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내밀었다. 입술로 머리카락을 건드리려기에 얼른 몸을 돌렸다.“그건 못 먹어.”베른이 고삐를 짧게 잡았다. 데릭은 일어서며 검집 위치를 고쳤다.나는 새로 묶은 손잡이를 한 번 눌러 봤다.“이건 먹구름보다 먼저 챙겨. 오늘 맡긴다며.”“지금 가.”데릭은 마구간을 나가다가 돌아왔다. 평상에 놓고 간 장갑 한 짝을 집었다.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한나만 입술을 단단히 물었다.◐10월 20일, 조사관은 내가 서명한 종이를 앞뒤로 넘겼다.복도에 누가 있었는지. 성녀 방 쪽으로 왜 갔는지.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이미 대답한 질문이었다.나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오른손 손바닥에 남은 고삐 자국을 조사관이 잠깐 봤다.“진술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십니까?”“잘못 적힌 부분이 있나요?”“그런 뜻은 아닙니다.”“그럼 바꿀 게 없어요.”한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사관은 펜 끝을 종이에 대려다가 멈췄다.“기억이 뒤늦게 나는 경우도 있어서요.”“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없어요.”조사관은 그 문장을 더 적지 않았다. 펜을 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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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악녀, 조사에서 풀려나다

악녀 수칙: 열린 문 앞에서 허락을 더 기다리지 않는다.나는 바구니 안에 남은 부스러기를 봤다.“숨기신다고 숨겨지는 건 아니었어요.”레녹스가 빈 물잔을 한나에게 돌려줬다.“알고 있었나.”“과자를 그렇게 드셨는데 모르면 제가 둔한 거죠.”“다행이네.”“뭐가요?”“다음에도 단 걸 주겠어.”오웬이 옆구리에 끼운 서류를 바로 들었다.“그다음에는 제 몫도 따로 부탁드립니다. 같은 바구니에 들어 있으면 제 것이 아닌 듯합니다.”“따로 싸 드릴게요.”“영애께서 해 주신 약속 중 가장 든든합니다.”레녹스는 오웬을 잠깐 봤다. 오웬은 서류를 펼쳐 얼굴 아래를 가렸다.나는 바구니 손잡이에 낀 천을 빼냈다. 문틈을 오가면서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저는 연습하러 갈 거예요.”“마당에서?”“아직은요.”레녹스의 시선이 문 안쪽으로 옮겨졌다. 본관 옆을 돌아가면 마구간이었다. 거기까지는 따라올 수 없었다.“다녀와.”“오늘은 여기서 그만 기다리세요. 과자도 없어요.”“알아.”레녹스가 장갑을 꼈다.나는 돌아서다가 다시 봤다. 오웬이 먼저 마차 쪽으로 움직였고, 레녹스도 따라갔다. 정문 앞에는 물잔을 든 한나와 빈 바구니를 든 나만 남았다.한나가 작게 말했다.“다 드셨네요.”“그러게.”“짠 것도요.”“다음에는 잘 구워야겠어.”바구니 안의 천을 접었다. 소금이 든 첫 판을 담았던 쪽부터 안으로 넣었다.◐10월 26일 아침, 조사관은 질문지가 아니라 봉인된 종이를 가져왔다.나는 응접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봉인부터 봤다. 왕실의 문양이었다.한나가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앉으셔도 됩니다, 영애.”“서서 들으면 안 되는 말인가요?”“아닙니다.”“그럼 말씀하세요.”조사관은 봉인을 뜯었다. 뒤에 서 있던 다른 조사관이 작은 서류 뭉치를 탁자에 놓았다.종이는 생각보다 적었다.내가 한 말을 그렇게 많이 받아 적더니, 끝내는 데 필요한 종이는 저 정도였다.“에버린 영애에 대한 외출 제한을 오늘부로 해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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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악녀, 들판을 달리다

악녀 수칙: 결승선은 남이 정한 자리보다 먼저 넘는다.클로에가 방울을 손안에 감췄다.나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쥐었다. 길 한가운데서 목걸이를 오래 봤다고 검은 부분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대공님도 보셨죠?”“응.”“지난번보다 더 검어요.”레녹스가 창을 한 번 더 봤다. 클로에는 안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흰 소매 끝만 잠깐 보이다가 사라졌다.“확인할게.”“저도 기억해 둘 거예요.”먹구름이 내 팔꿈치를 코로 밀었다. 멈춰 선 김에 먹을 걸 내놓으라는 뜻이었다.나는 검은 목을 가볍게 쓸었다.“너는 경주부터 하자.”레녹스가 먹구름 반대편으로 걸어왔다.“같이 가.”“저택까지요?”“네가 가는 곳이니까.”“오늘은 말도 데려오셨네요.”“걸어서 따라가면 늦어.”먹구름이 회색 말을 돌아봤다. 나는 고삐를 짧게 잡았다.“지금은 걸어.”경쟁 상대가 생길 때마다 뛰어서는 3,000미터를 못 버틴다. 말도 그렇고 나도 그랬다.◐11월 15일, 먹구름은 베른의 옷자락을 씹었다.왕국 경주에 나가는 말답게 의젓해질 생각은 없었다. 나는 접수 탁자에서 받아 온 기수 표를 안장 옆에 달다가 손을 멈췄다.“놓으라고 했잖아.”베른이 옷자락을 빼냈다.먹구름은 입 안에 아무것도 없어진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움직였다.“각설탕은 경주 끝나고 드립니다.”“제가 말할 때보다 잘 듣네요.”“제가 주머니를 열어야 나온다는 걸 아니까요.”베른이 외투 주머니를 손으로 덮었다. 먹구름의 눈이 그 손을 따라갔다.남쪽 들판에는 사람들이 길게 모여 있었다. 평소 연습하던 길 바깥에 줄이 쳐졌고, 반환 지점과 굽은 길마다 깃발이 꽂혔다.관중석 쪽에서는 악사들이 한 곡을 자꾸 처음부터 연주했다. 말들은 그 소리에 귀를 돌렸다. 기수들은 못 들은 척 안장과 고삐만 살폈다.나는 접수 확인서를 한나에게 건넸다.한나는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펼친 채 받아 들었다.“아가씨, 정말 이름을 다 읽어 줬어요.”“안 읽으면 접수를 왜 받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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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악녀, 상을 받다

악녀 수칙: 상은 내 이름으로 받고, 몫은 함께 뛴 사람과 나눈다.“안장에 축하하시면 먹구름이 받겠네요.”내가 말하자 오웬이 천막 안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그쪽은 각설탕으로 받겠다고 할 겁니다.”“그건 베른이 줄 거예요.”레녹스가 의자 앞에서 몸을 낮췄다. 나는 발부터 땅에 대고 어깨에서 손을 뗐다. 앉고 나니 무릎이 늦게 떨렸다.한나가 외투를 펼쳤다.“팔 주세요, 아가씨.”나는 소매에 팔을 넣었다. 장갑을 벗으려는데 손가락 끝이 잘 안 잡혔다.레녹스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벗겨도 돼?”“네. 손목부터요.”레녹스는 장갑 끝을 느슨하게 만든 뒤 천천히 당겼다. 굳은살 위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손도 똑같았다.“아프네.”“따갑긴 해요.”레녹스가 내 손을 펴서 살폈다. 상처가 벌어진 곳은 없었다.나는 천막 바깥을 봤다. 먹구름의 검은 꼬리가 지나갔다. 베른이 아직 말을 걷게 하고 있었다.“먹구름한테 가셔도 돼요. 축하하러.”“여기부터.”오웬이 물잔을 내밀다가 입을 다물었다.나는 물을 마셨다. 레녹스는 내가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대공님.”“응.”“의자 있는데요.”레녹스가 옆의 빈 의자를 봤다.오웬이 그걸 조금 더 가까이 밀었다.“제가 놓았습니다, 전하. 영애 바로 옆에.”그제야 레녹스가 일어났다. 나는 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물은 이미 다 마신 뒤였다.◐11월 16일 아침, 한나가 내 방문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새 장갑이 들어 있었다. 안쪽이 부드럽고 손목이 짧았다.함께 온 쪽지에는 글이 두 줄 적혀 있었다.『어제 것은 말려 둬. 오늘은 이걸 껴.』이름이 없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대공 전하께서 직접 주고 가셨어요.”“가셨어?”“정문에서 기다리신대요.”나는 장갑을 끼우다 말고 창문 쪽을 봤다.“주고 가셨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네.”방문 앞에서는 갔고, 정문에서는 안 갔다.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었다.한나가 내 머리를 묶어 올렸다. 오른손 손바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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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악녀, 오빠에게 말하다

악녀 수칙: 듣고 싶은 대답이 무서워도 질문은 한다.은잔 받침에 손가락이 걸렸다.나는 손을 조금 옮겨 잡았다. 오웬은 말을 마친 뒤에도 연회장 구석을 보고 있었다.“그 아이가 저라는 말도 했어요?”“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그럼 들은 말 그대로 기억해 주세요. 앞뒤에 다른 말이 있었는지도요.”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레녹스는 내 손에 들린 은잔을 봤다.“놓을까.”“아니요. 가져갈 거예요.”오늘 받은 상이었다. 대신관이 무슨 말을 했든 이걸 왕궁에 두고 갈 이유는 없었다.레녹스가 잔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건네지 않자 손을 거두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같이 가.”“원래 같이 가실 생각이었잖아요.”“응.”대답이 너무 빨랐다.나는 은잔을 품 쪽으로 당겼다. 오웬이 먼저 문을 열었다. 한나는 바깥에서 내 외투를 펼쳐 들고 있었다.“아가씨, 팔 주세요.”외투 소매에 팔을 넣는데 잔이 걸렸다. 레녹스가 이번에는 물었다.“잠깐 들고 있어도 돼?”“돌려주셔야 해요.”“알아.”외투를 입고 나자 은잔이 바로 돌아왔다. 레녹스는 받침을 내 손에 얹은 뒤 손가락이 제대로 닿았는지 보고 놓았다.복도 끝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던 데릭이 우리 쪽을 돌아봤다.“먼저 가려고?”“응. 다리가 좀 당겨.”“마차까지 같이 가자.”데릭이 다가오다 레녹스를 보고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내 왼쪽에는 대공, 오른쪽에는 오빠가 섰다. 한나는 뒤에서 치맛자락이 밟히지 않게 잡았다.은잔 하나 들고 나가는 데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알아.”레녹스가 대답했다.“계단에서는 천천히 가.”데릭이 덧붙였다.둘이 나를 앞에 두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왕궁 문을 넘으며 한숨을 쉬었다.“먹구름도 이렇게 여럿이 데리고 다니지는 않는데.”데릭이 내 손의 잔을 보고 웃었다.“걔는 다리가 넷이잖아.”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11월 22일, 데릭은 저녁 식탁을 작은 식당에 차려 달라고 했다.한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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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악녀, 경고를 듣다

악녀 수칙: 지켜 준다는 말에도 싫은 건 싫다고 한다.데릭이 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줄일게.”“안 마신다고는 안 하네.”“못 지킬 말은 안 하려고.”나는 난간에 다시 손을 얹었다. 데릭이 작은 식당 쪽을 돌아보더니 지나가던 시종에게 술병도 치워 달라고 했다.잔만 치우고 병은 남길 줄 알았는데.“그럼 됐어.”나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데릭은 내가 복도를 돌아설 때까지 아래에 서 있었다.방 앞에는 한나가 기다리고 있었다.“차 드릴까요?”“물로 줘.”한나는 내 얼굴을 보다가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나는 드레스 소매의 단추부터 풀었다. 콩도 없는 식탁에서 오래 앉아 있었을 뿐인데 손끝이 조금 무거웠다.책상 위에는 왕궁에서 가져온 은잔이 놓여 있었다.나는 받침에 앉은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오웬이 연회장 구석을 보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이제 그 아이를 끝내야겠군요.이름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그래서 마음대로 내 이름을 끼워 넣어 대신관을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 얘기가 아닐 거라며 잘 자는 재주도 없었다.한나가 물잔을 내려놓았다.“커튼 닫을까요?”“응. 내일 아침에는 평소대로 깨워 줘.”“마구간 가시려고요?”“먹구름이 기다리니까.”한나는 웃으며 커튼을 당겼다.나는 은잔을 제자리에 놓았다. 왕에게 받은 상까지 서랍에 숨길 필요는 없었다.◐11월 28일, 발트하임 별저의 응접실에는 난로가 켜져 있었다.나는 외투를 벗어 의자 등에 걸었다. 한나는 내 옆에 앉았고, 오웬은 창가에 서서 접힌 종이를 펴고 있었다.레녹스는 먼저 내게 찻잔을 내밀지 않았다.“물?”“따뜻한 걸로요.”레녹스가 시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곧 김이 조금 나는 물이 내 앞에 놓였다.나는 잔을 감싸 쥐었다.“기억난 게 더 있어요?”오웬이 종이를 내려다봤다.“연회장에서 말씀드린 뒤, 제가 들은 순서를 적었습니다. 앞에 오간 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요.”“들려주세요.”오웬은 종이에서 시선을 들었다.“성녀가 먼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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