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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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악녀, 말을 꺼내다

악녀 수칙: 믿어 달라고 할 때는 숨긴 것부터 내놓는다.나는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를 끌어당겼다.펜을 들자 한나가 잉크병 뚜껑을 열어 주었다. 펜촉을 찍고도 한동안 첫 글자를 쓰지 못했다. 말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과 그 말을 하러 오라고 부르는 건 달랐다.“아가씨, 누구에게 보내시게요?”“대공님.”한나는 창가에 놓인 과자 바구니를 돌아보았다.“과자도 같이 보낼까요?”“이번엔 안 보내.”“그럼 빈 바구니라도 돌려받으셔야겠어요. 저번 것을 아직 안 주셨잖아요.”나는 펜을 내려놓고 한나를 보았다.세상이 끝날 이야기를 꺼내려는 사람 앞에서도 바구니는 돌아와야 했다. 그게 조금 좋았다.“맞네. 그것도 적어야겠다.”『12월 1일, 마구간으로 와 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과자 바구니도 가져와 주세요.』다 쓰고 종이를 접었다. 너무 평범한 초대였다.그래도 오라는 말보다 더 적을 수는 없었다. 종이에 처형이라는 글자를 써서 심부름꾼 손에 쥐여 줄 생각은 없었다.한나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답장은 어디로 가져다드릴까요?”“나한테 바로.”“네, 아가씨.”한나가 나가자 나는 펜촉에 남은 잉크를 닦았다. 종이에 묻은 검은 얼룩을 문질렀더니 더 커졌다.쓸데없이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나는 손을 뗐다.이번에는 지우려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전부 보여 주려고 부르는 거였다.◐12월 1일, 마구간으로 가는 길은 얼어 있었다.나는 치맛자락을 조금 걷고 돌 사이를 골라 밟았다. 뒤에서 바구니 손잡이가 작게 삐걱거렸다.돌아보니 레녹스가 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정문에서 기다리신다더니요.”“기다렸다.”“그럼 거기 계셔야죠.”“네가 나왔으니까.”레녹스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내 옆으로 왔다. 털망토 아래로 바구니가 반쯤 가려졌다. 북부 대공과 과자 바구니. 어느 쪽이 잘못 온 건지 모르겠다.“남이 보면 대공님이 제 심부름꾼인 줄 알겠어요.”“바구니는 가져오라고 했잖아.”“맞아요. 시킨 사람은 저네요.”나는 손을 내밀었다. 레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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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악녀, 고아원에 가다

악녀 수칙: 대답이 늦어도 내 할 일은 미루지 않는다.레녹스가 의자 끝을 놓았다.손이 내려가다가 무릎에 닿지 못했다. 손가락이 조금 벌어진 채 멈췄다.나는 기다렸다.먹구름이 칸막이를 코로 밀었다. 나무가 작게 삐걱거렸다. 평소라면 각설탕을 달라는 소리에 레녹스가 주머니부터 찾았을 텐데, 이번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대공님.”레녹스의 입술이 움직였다.“들었다.”목소리가 낮았다. 내 마지막 말을 되풀이하지도, 틀린 게 없냐고 묻지도 않았다.나는 의자 옆에 둔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안에서 장갑이 한쪽으로 쏠렸다.“오늘 여기서 대답하실 필요는 없어요.”레녹스가 나를 보았다.“제가 말씀드린 건 대공님한테 판결을 받으려는 게 아니에요.”그 말까지 하고 일어섰다. 무릎이 조금 굳어 있었다. 먹구름이 내 소매에 코를 댔다.나는 손을 내밀어 콧등을 쓸었다. 레녹스는 의자에 앉은 채였다.“먼저 들어갈게요.”문을 열자 베른이 벽에서 등을 뗐다. 손에 쥔 솔은 이미 깨끗했다.“아가씨, 길이 미끄럽습니다.”“알아요. 천천히 갈게요.”나는 바구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오른손부터 끼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레녹스가 일어서고 있었다.의자가 짚 위에서 조금 밀렸다. 레녹스는 의자를 바로 놓고 망토 깃을 만졌다. 왼쪽 귀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평소에는 내가 문을 열면 바로 옆으로 왔다.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나는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저택으로 걸었다.◐저녁이 지나도 연락은 없었다.밤에 오웬이 저택으로 왔다. 한나가 안내해 온 오웬은 장갑을 벗지도 않은 채 인사했다.“전하께서 오늘은 혼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나는 책상 위의 잉크병 뚜껑을 닫았다.“어디 계신지는 알아요?”“별저로 돌아오시기는 했습니다. 다만 저도 물러나라고 하셔서요.”“알겠어요.”오웬이 평소보다 오래 서 있었다.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닫은 잉크병과 빈 편지지를 번갈아 보았다.“전하께 전할 말씀이 있으십니까?”“오늘은 없어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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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악녀, 그를 붙잡다

악녀 수칙: 내 곁에 둘 사람은 내가 고른다.나는 레녹스의 접힌 망토 깃을 펴 주었다.털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한 번 더 눌렀는데도 깃이 다시 올라왔다.“이거 계속 접혀 있었어요?”“몰랐다.”“불편했겠네요.”레녹스는 대답 대신 내 가방을 보았다.“무거운가.”“종이밖에 없어요.”담요를 사기 전에는 돈주머니도 제법 묵직했다. 지금은 가방을 대신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할 만큼 무겁지 않았다.레녹스가 내 쪽으로 내밀던 손을 거뒀다.나는 그 손을 보다가 마차로 걸었다. 레녹스가 옆에서 따라왔다. 보폭은 여전히 내 걸음에 맞았다.마차 문 앞에서 이사벨이 모자끈을 만지고 있었다.“나는 여기서 집으로 갈게. 마차를 보내 놨어.”“같이 가도 되는데.”“우리 집은 반대쪽이잖아. 담요 때문에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해.”이사벨이 내 가방을 손끝으로 두드렸다.“그 종이 잘 챙겨. 원장님이 다시 확인해 주셨으니까.”“응. 고마워.”“그 말은 담요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때 했어야지.”“그때는 네가 숨이 차서 못 들었을걸.”이사벨이 웃었다. 그러고는 레녹스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길 건너에 멈춘 마차로 갔다.나는 발판에 한 발을 올렸다.레녹스가 손을 내밀었다. 장갑 낀 손바닥이 위로 향해 있었다.늘 받던 손인데 잠깐 내려다보게 됐다.나는 그 손을 짚고 올라탔다.맞은편에 앉은 레녹스는 문이 닫힌 뒤에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손가락을 펴지도 않았다.마차가 움직였다.“식사는 하셨어요?”“조금.”“얼마나요?”레녹스가 창밖을 보았다가 돌아왔다.“수프를 먹었다.”조금의 뜻을 알아냈다. 다른 것은 안 먹었다는 뜻이었다.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놓았다.“저도 점심을 놓쳤어요. 한나가 데워 준다고 했는데.”“먼저 먹어.”“저택에 가면 먹을 거예요.”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같으면 자연스럽게 같이 먹었을 것이다. 한나는 대공님 몫의 숟가락을 놓으면서 누구도 놀라지 않는 얼굴을 했을 테고.오늘은 레녹스가 그다음 말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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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악녀, 계획을 세우다

악녀 수칙: 싸우기 전에 내 편이 설 자리를 만든다.내가 잡은 망토 소매가 걸음에 따라 조금씩 당겨졌다.레녹스는 팔을 빼지 않았다. 대신 등을 반대 손으로 옮겼다. 내가 붙잡은 쪽이 조금 내려왔다.“이렇게 가면 안 불편하세요?”“괜찮다.”“저택까지만이에요. 현관 안에서까지 잡고 있으면 한나가 옷을 못 벗겨 줘요.”“알아.”나는 소매를 놓지 않고 걸었다.현관 불빛이 보일 때쯤 눈이 장갑 위에 다시 쌓였다. 레녹스가 그 손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안으로 들어가.”“대공님도 따뜻한 데로 가세요.”“그러지.”나는 현관 앞에서 손을 뗐다. 망토에 주름이 남았다.레녹스가 등을 하인에게 건네고도 그 주름은 펴지 않았다.◐12월 5일, 나는 종이를 한 아름 들고 방을 나섰다.위에는 고아원 원장이 써 준 확인서, 아래에는 독살 미수 조사 때문에 받은 문서가 있었다. 맨 아래 종이가 자꾸 흘러내렸다.한나가 급히 밑을 받쳤다.“끈으로 묶어 드릴까요?”“응접실까지만 가면 돼.”“거기까지 가시는 동안 세 장은 흘리실 것 같은데요.”맞는 말이라 반박하지 못했다.한나가 서랍에서 끈을 가져오는 사이, 복도 끝에 레녹스가 나타났다. 북부 망토는 벗었고 장갑만 한 손에 들고 있었다.“내가 들까.”“문만 열어 주세요.”레녹스가 먼저 가서 응접실 문을 열었다.나는 종이를 안고 문턱을 넘었다. 레녹스가 따라 들어오다가 바닥을 보고 몸을 숙였다.한 장이 기어이 떨어졌다.“아직 두 장 남았네요.”“무엇이.”“한나가 세 장쯤 흘릴 거라고 했거든요.”레녹스가 주운 종이를 맨 위에 올렸다.“맞히게 할 필요는 없지.”뒤따라온 한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웃음을 참을 때의 얼굴이었다.나는 탁자에 종이를 내려놓았다.“오늘은 저 종이도 좀 괴롭힐 거야. 차는 가장자리로 놔 줘.”“그럼 과자도 가장자리에 놓을게요.”한나는 레녹스 앞에는 설탕 그릇을 두었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레녹스 역시 아무 설명 없이 그릇을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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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악녀, 그날을 듣다

악녀 수칙: 지나간 잘못과 지금 내민 손을 한자리에 놓지 않는다.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레녹스가 종이 아래쪽을 눌렀다.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끝이 들썩인 탓이었다.나는 펜을 내려놓고 첫 줄을 다시 읽었다. 신전 하녀를 먼저 빼낸다. 쓸 때는 짧았는데, 해낼 일을 붙이니 종이가 금세 모자랐다.“방은 따뜻한 곳으로 주세요.”“그러지.”“문도 안에서 잠글 수 있어야 해요.”레녹스가 나를 보았다.“우리가 보호한다고 해 놓고 마음대로 들어가면 곤란하잖아요.”“노크부터 하겠다.”나는 그 아래에 문단속이라고 적었다.레녹스는 더 보태지 않았다. 대신 잉크가 손에 묻지 않도록 종이를 누르던 손가락을 옆으로 옮겼다.“오늘은 여기까지 할래요.”“알았다.”나는 펜촉을 닦았다. 레녹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책상 옆에 멈췄다.“비올라.”“네.”회색 눈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 닫혔다.“손에 잉크가 묻었다.”오른손 옆면이 검었다.나는 손을 뒤집어 보고 헝겊을 가져왔다. 문으로 향하는 레녹스의 어깨가 평소보다 조금 낮아 보였다.묻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의 걸음이었다.나는 불러 세우지 않았다.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준 사람에게, 그 정도 시간은 줄 수 있었다.◐12월 10일 아침에는 마구간 물통 가장자리가 얼었다.베른이 얼음을 걷어 내는 동안 나는 먹구름의 앞다리를 살폈다. 검은 다리에 손을 대자 먹구름이 고개를 숙여 내 등 냄새를 맡았다.“손 시리다고 네 배 밑에 넣을 생각은 없어.”먹구름이 코로 내 어깨를 밀었다.말은 내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걸 몰랐다. 아니면 알아도 상관하지 않거나.베른이 물통을 내려놓았다.“오늘은 길이 미끄럽습니다. 들판에는 나가지 마세요.”“앞마당만 걸을게요.”“그것도 해가 조금 더 오른 뒤에요.”“네.”우승했다고 얼음까지 잘 달리는 건 아니었다. 나는 먹구름의 다리를 놓고 일어섰다.문 앞에 회색 망토가 있었다.레녹스는 마구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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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악녀, 하녀를 빼내다

악녀 수칙: 내 편을 데려올 때는 돌아갈 길부터 마련한다.“그 말, 하녀 앞에서도 해 주세요.”레녹스가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이번엔 틀리지 않는다는 말?”“귀가 조용해도, 시끄러워도 듣겠다는 말이요.”마구간에서 나온 바람이 발목을 훑었다. 나는 장갑 끝을 당기며 앞마당 쪽으로 걸었다.레녹스가 나란히 따라왔다.“해 주겠다.”“겁이 나서 말을 못 할 수도 있어요.”“기다리지.”“대공님이 가만히 보고만 계시면 더 무서울 수도 있고요.”레녹스가 나를 보았다.나는 그 얼굴을 잠깐 살폈다. 북부의 얼음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건 아니었다.“조금 덜 굳어 계세요.”“어떻게.”“그건 저도 모르겠네요.”레녹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 정도면 됐다. 적어도 사람을 데려와 놓고 심문부터 하지는 않을 얼굴이었다.◐12월 14일, 한나는 내 망토 안쪽 끈을 두 번 묶었다.“한 번이면 돼.”“마차에서 풀릴 수도 있잖아요.”“두 번 묶으면 내가 못 풀 수도 있고.”한나가 매듭을 내려다봤다. 잠깐 고민하더니 한 번 풀고, 끝을 길게 남겼다.나는 탁자 위에 놓인 장갑을 집었다. 그 옆에는 천으로 싼 빵이 있었다.“이건?”“따뜻한 방에 가도 배가 고프면 더 서럽잖아요.”작은 꾸러미가 하나 더 있었다. 깨끗한 양말이었다.나는 두 꾸러미를 가방에 넣었다.“네 것도 챙겼어?”“저는 저택에 있잖아요.”“그럼 내 몫에서 먹어.”한나가 웃었다. 망토 깃을 마지막으로 펴 주고 한 걸음 물러났다.문밖에는 데릭이 서 있었다. 허리의 검은 평소와 같았지만, 장갑을 꼈다 벗었다 하고 있었다.“왜 그러고 있어?”“손이 둔해지나 확인했다.”“오늘 검을 쓸 일은 없어야 해.”“안다.”오빠가 장갑을 벗어 허리띠에 끼웠다.신전 기사들을 붙잡고 말을 나누는 역할이었다. 나는 오빠가 검 이야기라면 오래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다만 듣는 사람도 그만큼 오래 버틸지는 오늘 확인해야 했다.계단 아래에서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렸다.“비올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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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악녀, 브루노에게 불려 가다

악녀 수칙: 불려 갈 때는 돌아올 시간을 정해 둔다.“작년 봄이라고요?”하녀가 물그릇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때는 성녀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대신관님을 도우러 오는 분이라고만 들었어요.”나는 레녹스를 보았다. 왼쪽 귀에 손이 가지 않았다.“잔에 넣은 게 무엇인지는 알아요?”하녀가 고개를 저었다.“작은 종이를 접어서 가지고 계셨어요. 안에 있던 걸 털어 넣으셨어요. 저는 물을 나르다가 봤고요.”“그럼 모르는 건 그대로 두죠.”하녀가 나를 보았다.“모르는 걸 알아내려고 온 게 아니에요. 본 걸 말하러 온 거잖아요.”물그릇이 탁자에 내려왔다. 바닥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레녹스가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오늘 다 말할 필요는 없다.”“잊어버릴까 봐요.”“적어 두겠다. 네가 읽고 고칠 수 있게.”나는 문밖의 오웬을 불렀다.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자 하녀가 앞치마 대신 치맛자락을 잡았다.“제 이름도 적나요?”“밖에 내놓을 종이가 아니에요.”나는 탁자에 놓인 빵 꾸러미를 하녀 쪽으로 밀었다.“누가 읽을지부터 알려 줄게요. 그다음에 정해요.”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하녀는 조금 남은 빵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천의 모서리를 반듯하게 접었다. 이번에는 손이 덜 떨렸다.◐12월 17일 아침, 한나가 은쟁반에 봉투를 올려 가져왔다.나는 장갑을 끼다 말고 봉투부터 들었다.빛의 신전 인장이 붙어 있었다. 봉투를 뒤집으니 내 이름이 지나치게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이럴 때는 글씨가 얌전할수록 내용이 못됐다.예상대로였다.『성녀를 해치려 한 혐의에 관한 조사를 마무리하고자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출석을 명한다. 12월 17일 오후, 빛의 신전 대신관 집무실. 정당한 사유 없는 불응은 조사 거부로 기록한다.』한나가 내 손에서 종이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오늘 오라고 오늘 보냈어요?”“준비할 시간을 주기 싫었나 보네.”“옷이라도 미리 알려 줬으면 좋았잖아요.”한나는 옷장 문을 열었다. 걸려 있던 드레스들을 살피다가 장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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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악녀, 반지를 빼다

악녀 수칙: 거절을 막는 손부터 살핀다.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브루노의 손을 보았다.은방울 무늬가 새겨진 반지가 문 쪽을 향해 있었다.“다음에 무엇을 요구하실 건데요?”“영애께 필요한 것을요.”“제가 필요한지는 제가 정하겠어요.”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사제가 몸을 비켰다. 브루노는 더 부르지 않았다.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자 안내대 옆 의자에서 레녹스가 일어났다. 결국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웬이 그 옆에서 빈 의자를 치웠다.“끝났나.”“오늘 것은요.”레녹스가 내 손부터 보았다.“서약서에는 서명 안 했어요. 기록을 읽었다는 것만 적었고요.”“차는.”“안 마셨어요.”오웬이 안내대 앞으로 갔다. 나오는 시각을 적어 달라는 말을 듣고 사제가 다시 책을 폈다.나는 레녹스 가까이 가서 목소리를 낮췄다.“브루노 방에 은방울이 일곱 개 있었어요. 반지에도 그 무늬가 있고요.”레녹스의 시선이 내가 나온 복도로 향했다.“기억하나.”“네. 잊기 전에 그려야겠어요.”“종이를 가져오겠다.”오웬이 가방을 열려 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여기 말고요.”벽 너머에 브루노가 있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건 들켜도 됐지만, 무엇을 그리는지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았다.레녹스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어디로 갈까.”“집으로요. 오늘은 돌아오는 시간을 정해 뒀거든요.”“같이 가지.”내가 계단을 내려가자 망토 끝이 옆에서 따라 내려왔다.나는 마차 문 앞에서 멈췄다.“오늘은 신전 문까지만 따라오실 줄 알았는데요.”“이미 나왔으니까.”틀린 말은 아니었다.◐12월 18일 아침, 탁자에는 내가 그린 은방울이 일곱 개 놓여 있었다.종이는 한 장이었다. 그림이 일곱 개라는 뜻이었다. 하나씩 따로 그렸는데도 그 구분부터 설명해야 할 판이었다.한나가 따뜻한 물을 가져오다가 종이 앞에서 멈췄다.“이건…….”“방울이야.”“아, 그렇군요.”한나는 물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림을 뒤집어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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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악녀, 구해지다

악녀 수칙: 원하지 않는 목적지에는 내 발로 가지 않는다.낯선 마부가 가리개 쪽으로 손을 뻗었다.나는 먼저 창에서 물러났다. 손이 빈 곳을 짚고 내려갔다.“우리 집 마부는 어디 있어요?”대답 대신 마차 옆에서 발소리가 났다.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나는 무릎 위의 종이 묶음을 망토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붙잡았다.밖에서 당기는 힘에 손목이 꺾였다.“문 여십시오, 영애.”“누군지부터 말하세요.”“신전에서 왔습니다.”“신전은 남의 마부 자리를 빼앗아서 사람을 부르나요?”문틈으로 장갑 낀 손이 들어왔다. 나는 손을 놓고 맞은편 좌석으로 물러났다. 문이 열리자 회색 외투를 입은 남자가 발판에 한 발을 걸쳤다.겉에는 아무 표식도 없었다. 벌어진 외투 안쪽에 신전 사제들이 차는 흰 끈이 보였다.“대신관께서 기다리십니다.”“오늘은 만나기로 한 적 없어요.”“확인할 것이 남았습니다.”“그럼 소환장을 보내세요.”남자가 마차 안을 훑었다. 내 무릎보다 망토 아래 불룩한 곳에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나는 종이 묶음을 더 깊이 당겼다.“들고 계신 것도 가져가셔야 합니다.”“제 종이예요.”“그래서 함께 모시려는 겁니다.”별로 잘 숨기지도 않았다. 나와 종이를 같은 값으로 치는 모양이었다.남자가 안으로 올라오려 했다. 나는 좌석 끝에 발을 올렸다.“타지 마세요.”남자는 멈추지 않았다.나는 구두 밑창으로 문을 밀었다. 남자가 급히 발판에서 내려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바깥 손잡이를 붙들었다.마차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큰길로 나가지 말고 지하 출입구로 돌려. 이쪽 문은 네가 잡아.”신전 지하였다.나는 목 앞의 망토 끈을 만졌다. 레녹스가 묶어 준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종이를 가슴에 붙여 넣고 망토를 여몄다.말고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마차가 다시 출발하려고 흔들렸다.나는 반대쪽 문손잡이를 눌렀다.열리지 않았다.밖에 걸어 둔 빗장이 있었다. 문을 조금 밀자 나무가 걸린 소리가 났다. 창 아래로 보이는 길은 좁았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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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악녀, 그날을 넘기다

악녀 수칙: 끝날 때까지 내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레녹스가 나를 담요 깔린 의자에 내려놓았다.오른발은 바닥에 닿지 않게 작은 발판에 올렸다. 의원이 구두 끈을 풀자 한나가 옆에서 가위를 들고 기다렸다.“자르지 않아도 됩니다.”의원의 말에 한나가 가위를 내려놓았다.내 구두보다 한나의 손이 먼저 살아났다. 손잡이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안쪽이 하얬다.레녹스는 의자 옆에 서 있었다.“대공님도 앉으세요. 제 발목은 앉아서 봐도 똑같아요.”“여기가 잘 보인다.”“의원께서는 잘 안 보이시겠는데요.”레녹스가 바로 옆으로 비켰다.나는 한나가 끌어 온 의자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레녹스가 앉고 나서야 의원이 내 발목을 살폈다.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당분간 말을 타지 말라는 말에는 이상이 많았다.“걷는 것도 줄이십시오.”“마구간까지는요?”“줄이십시오.”한나가 내 앞에 두 손을 모았다.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 편인지 알 만했다.나는 의원이 감아 주는 붕대를 내려다봤다. 종이 묶음은 한나가 올려 둔 탁자 위에 있었다. 구겨진 모서리만 빼면 멀쩡했다.레녹스의 시선도 그곳으로 갔다.“종이는 별저로 가져가 주세요. 한나가 말려 놨으니까요.”“네 것은.”“제가 그린 건 저도 기억해요. 대공님이 기록과 맞춰 보셔야죠.”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의원이 발판 높이를 고치는 동안 나는 창을 봤다. 유리 너머로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12월 20일까지 이틀이 남아 있었다.◐한나가 커튼을 걷었을 때 나는 이미 깨어 있었다.“아가씨, 오늘은 죽 말고 빵을 드셔도 된대요.”“의원이?”“아니요. 제가요.”“발목을 다치면 빵도 못 먹는 줄 알았네.”한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웃었다.쟁반에는 따뜻한 빵과 버터, 잘게 썬 배가 있었다. 내가 늘 남기던 묽은 죽은 없었다.침대 옆에 쟁반을 놓은 한나가 달력을 바로 세웠다.12월 20일이었다.나는 배 한 조각을 집었다. 차가운 즙이 혀에 닿았다.“오늘 저녁도 네가 정했어?”“주방장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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