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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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악녀, 호칭을 바꾸다

악녀 수칙: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 할 일은 한다.불꽃이 꺼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따라다니는 게 하고 싶은 일이에요?”“응.”레녹스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손에 든 늑대 인형의 귀가 바람에 접혔다. 고리 던지기에서 열 번이나 실패한 사람이 저런 대답은 한 번에 했다.“취향이 이상하시네요.”“알아.”나는 빈 사과 사탕 막대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버릴 곳을 찾느라 두리번거리자 레녹스도 같은 방향을 봤다.“그것까지 같이 찾으실 필요는 없어요.”“저기.”가판대 옆에 작은 통이 있었다.나는 막대를 버리고 돌아왔다. 레녹스는 그대로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깨가 닿지 않도록 늑대 인형을 안쪽으로 옮긴 채였다.“그 인형, 북부까지 가져가실 거예요?”“가져가야지.”“짐이 되겠는데요.”“작아.”키가 큰 사람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인형을 내려다봤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돌아가는 길에도 레녹스는 내 옆에 있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서는 앞서 걸었고, 길이 넓어지면 다시 보폭을 맞췄다.나는 이제 그 느린 걸음이 어디에 맞춰진 건지 알았다.◐8월 6일 아침, 들판에 나온 레녹스는 평소와 달리 망토를 입고 있었다.“오늘은 안 달리세요?”“곧 떠나야 해.”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쥐었다.“어디로요?”“북부.”말 옆에 매달린 가죽 가방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늘 시간을 재던 물건도 손에 없었다.“일이 생겼어요?”“내가 확인해야 할 게 있어.”“그렇군요.”레녹스가 먹구름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먹구름은 귀를 뒤로 젖혔다. 반갑지 않다는 뜻이었다.레녹스는 더 다가오지 않고 멈췄다.“열흘이면 돌아와.”나는 손바닥에 닿은 고삐를 아래로 당겼다. 길이가 조금 길었다. 아까도 고쳤는데 또 길었다.“제가 안 물어봤는데요.”“말해 두려고.”“잘 다녀오세요, 대공 전하.”레녹스는 바로 말에 오르지 않았다.“오늘도 끝까지 따라오실 거예요?”“출발 전까지는.”“그러면 저기까지만요. 먹구름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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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악녀, 오빠와 싸우다

악녀 수칙: 하지 않은 일까지 내 잘못으로 만들지 않는다.“왜 거기서 멈추세요?”레녹스가 문턱 아래를 내려다봤다. 걸릴 만한 건 없었다. 먹구름이 건초를 씹다 말고 콧김을 뿜었다.“방금.”“늦었다고 했어요.”“그 뒤에.”나는 장갑을 집어 안장 위에 올렸다. 굳이 다시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들었으니까 저러고 있을 테니까.“대공 전하라고 부르기엔 길어서요. 매번 부르다 보면 제 혀가 먼저 지치겠어요.”“대공님.”레녹스가 작게 되풀이했다.“본인 호칭을 직접 부르니까 이상하네요.”“괜찮네.”“그럼 들어오세요. 문 열어 놓으면 벌레 들어와요.”레녹스가 마구간 안으로 들어왔다. 북부 망토 끝에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 나는 물통 옆에 놓인 천을 가리켰다.“어깨에도 먼지 있어요.”레녹스가 손으로 털려다 망토를 벗었다. 내가 천을 집자 바로 손을 내밀었다.“내가 할게.”“먹구름 닦던 거예요.”“알아.”망토를 받아 가는 손이 잠깐 멈췄다. 나는 천을 내밀었다. 손이 닿지는 않았다.레녹스가 어깨를 닦는 동안 먹구름은 건초를 마저 씹었다. 회색 말이 문밖에서 고개를 들이밀자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회색 말도 쉬어야겠어요.”“그래.”“저도 들어갈 거고요.”레녹스가 망토를 팔에 걸쳤다.“같이 가도 되나.”나는 마구간에서 저택으로 난 길을 봤다. 평소에도 걷던 짧은 길이었다.“본관 앞까지만요. 대공님도 쉬세요.”“알았어.”레녹스는 내가 문을 나서자 따라왔다. 내가 걸음을 늦추면 같이 늦췄다. 망토 끝에서 흙이 조금 떨어졌다.나는 그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편지는 잘 받았어요.”“답장도.”“별 내용 없던데요.”“네 건 길었어.”“먹구름이 사고를 많이 쳐서요.”레녹스가 나를 봤다. 왼쪽 귀를 만지지는 않았다.나는 길가에 튀어나온 돌을 피해 걸었다.“다음에 떠나시면 돌아오는 날도 적어 주세요. 오웬 님한테 계속 편지를 맡길 필요는 없고요.”“왜.”“답장 쓸 종이가 많이 들어요.”레녹스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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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악녀, 손을 잡다

악녀 수칙: 고마운 건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도 보여 준다.데릭이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비올레타가?”“가죽이 들뜬 걸 보시고 맡기셨지요. 안쪽 끈도 갈았습니다.”베른이 도구함을 선반 위에 올렸다. 데릭은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가, 엄지로 새 가죽 끝을 눌렀다.나는 문을 밀었다.경첩이 작게 울었다. 데릭이 고개를 들었다.“장갑 가지러 왔어.”창가에 놓인 장갑을 집었다. 낮에 닦아 둔 가죽이 다 말라 있었다. 손목 끈을 안으로 접어 넣는 동안 데릭은 검을 무릎에서 내렸다.“이거…….”“헐거웠잖아.”“알고 있었어?”“눈에 보였으니까.”베른이 빈 물통을 들었다.“저는 물이나 갈아 놓겠습니다.”물을 갈 사람은 낮에도 많았다. 꼭 지금 갈아야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베른이 문밖으로 나가자 마구간이 조용해졌다. 먹구름이 건초를 뜯는 소리만 났다.데릭은 검을 세웠다.“언제 맡겼는데?”“오빠가 신전에 간 날.”“왜 말을 안 했어?”나는 장갑을 포갰다.“원래 자리에 뒀으니까 보면 알 줄 알았어.”데릭이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낮에 쥐고 있던 하얀 손수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낮의 말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비올레타.”“응.”오빠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나는 기다렸다. 먹구름이 칸막이를 코로 밀었다. 데릭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내일 연습 가?”“오후에.”“오전에는?”“먹구름 쉬게 할 거야.”물어볼 게 그거라면 다 답했다.나는 장갑을 들고 문으로 갔다. 데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검집 끝이 의자에 부딪쳤다.돌아보지는 않았다.◐아침에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문 앞까지 왔다가 멀어졌다. 잠시 뒤 다시 가까워졌다.나는 머리끈을 묶고 의자에 앉았다. 거울 한쪽에 문이 비쳤다. 문 아래로 보이는 그림자가 멈춰 있었다.두드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한나가 옷장 문을 닫았다.“도련님이 아까부터 계세요.”“알아.”“뭘 찾으시는 걸까요?”“찾는 게 있으면 물어보겠지.”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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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악녀, 거짓말을 거절하다

악녀 수칙: 남이 원하는 말이라도 사실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나는 장갑을 벗다 말고 데릭을 봤다.오빠는 검을 옆으로 내렸다. 고맙다는 말이 나오자 손잡이를 만지던 손도 멈췄다.“잘 맞아?”“응. 전보다.”“그럼 됐어.”장갑을 마저 벗었다. 데릭이 현관문을 열어 줬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따라왔다.“비올레타.”나는 문턱에서 멈췄다.“어제 말은…….”오빠가 검집 끝을 내려다봤다.“너한테 먼저 물었어야 했어.”“응.”“성녀님 말만 듣고 온 건 잘못했어.”나는 장갑 두 짝을 포갰다. 손가락 부분이 아직 조금 따뜻했다.“다음엔 먼저 물어.”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가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그날은 사과하라는 말을 다시 듣지 않았다.◐8월 20일 아침, 한나가 승마복 위에 흰 봉투를 올려놓았다.“후작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세요.”봉투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겉면에는 왕실 문장이 찍혀 있었다.“내 앞으로 온 거야?”“아니요. 후작님 앞으로 왔는데, 아가씨께 보여 드리라고 하셨어요.”나는 봉투를 집었다. 안에는 신전 봉사 행사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참석자들이 모일 날짜 아래로 빛의 성녀를 기리는 말이 길게 적혀 있었다.도움이 필요한 사람보다 성녀 이름이 더 많이 나왔다.“답장을 쓰래?”“서재로 오시래요. 오후에요.”“지금은 아니고?”“오전에는 손님이 계세요.”나는 초대장을 다시 접었다. 승마복은 따로 의자에 놓았다.한나가 내 손을 보더니 작은 연고 통을 가져왔다.“어제 여기 쓸리셨죠?”“조금.”“베른 아저씨가 오늘은 꼭 바르라고 하셨어요.”오른손 손바닥에 연고가 닿았다. 고삐 굳은살 바로 옆이었다.한나는 손톱에 묻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 조금씩 폈다.“서재에 가실 때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셔야겠죠?”“말 타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아가씨.”“알았어. 갈아입을게.”한나가 그제야 연고 통을 닫았다.나는 초대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흰 종이 한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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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악녀, 반지를 보다

악녀 수칙: 축복을 받을 때도 눈은 뜨고 있는다.나는 책상 위에 남은 초대장을 집었다.아버지는 치워 둔 편지지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펜도 받침 위에 그대로였다.“신전에 보낼 물품은 집사에게 물어봐라.”“제가 가져가면 되는 거죠?”“수량을 확인하고 네 이름으로 전달해라. 가문에서 보낸 물건이다.”“받는 사람이 확인할 수 있게 목록도 가져갈게요.”아버지가 나를 봤다.“그건 집사가 챙길 거다.”“저도 보고 갈게요.”빗 하나가 하녀를 도둑으로 만들 뻔했다. 상자 여러 개를 보내면서 목록을 남에게만 맡길 생각은 없었다.나는 초대장을 접었다. 아버지는 손을 뻗어 종이 모서리를 눌러 주려다 거뒀다.“옷은 갖춰 입고.”“봉사하러 가는 데도요?”“신전이다.”물건 나르는 데 신전이 무슨 상관인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은 체면이었다.서재 밖으로 나오자 한나가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쟁반도 없었다.“편지 쓰셨어요?”“안 써.”한나의 어깨가 내려갔다.“행사는 가실 거고요?”“응. 물건을 전달하러.”나는 초대장을 건넸다. 한나는 날짜부터 확인했다.“8월 28일이네요. 그날 입으실 옷 꺼내 둘게요.”“소매가 덜 걸리는 걸로.”한나가 잠깐 나를 봤다.“물건 직접 나르시려고요?”“가 봐야 알지.”“그럼 장갑도 두 켤레 챙길게요.”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가장 빨리 알아듣는 사람은 역시 한나였다.◐8월 28일, 신전 앞에는 마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계단 양옆으로 흰 천이 걸렸다. 높은 기둥 사이에서는 일꾼들이 줄자를 당기고 있었다. 바닥에 놓인 긴 나무판을 피해 내리니 이사벨이 부채를 흔들었다.“비올라! 여기야.”빨간 곱슬머리 위에 작은 모자가 얹혀 있었다. 이사벨은 내 뒤의 상자를 보고 부채를 접었다.“너도 많이 가져왔네.”“천이랑 비누야. 너는?”“담요. 어머니가 수량을 세 번이나 세셨어.”“받는 쪽에서 한 번 더 세면 되겠네.”“나도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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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악녀, 레녹스에게 묻다

악녀 수칙: 모르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 묻는다.나는 문 앞에서 돌아섰다.브루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모양이었다.“그럼 대신관님은 어떻게 사시는데요?”반지 낀 손이 멈췄다.“무슨 뜻입니까?”“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고 하셨잖아요. 대신관님은 직접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시고요?”나는 회랑에 쌓인 상자를 가리켰다.“아까 보니 어린 시종들이 무거운 것도 나르던데요.”브루노가 문밖을 봤다. 시종 둘이 담요 상자 양쪽을 잡고 있었다.“신전의 일은 각자의 몫이 있습니다.”“그럼 얼굴보다 맡은 일이 중요하겠네요.”나는 고개를 숙였다.“먼저 가 볼게요.”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회랑으로 나오니 레녹스가 서류를 접었다. 이사벨은 부채를 찾았는지 손잡이로 제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왜 늦었어?”“대신관님이 얼굴 이야기를 하셔서.”“얼굴?”“내 얼굴에 할 말이 많으신가 봐.”이사벨이 축복을 받던 방 쪽을 봤다. 나는 먼저 상자 옆에 세워 둔 주머니를 들었다.레녹스가 내 옆으로 왔다.“무슨 말을 들었어.”“사람은 생긴 대로 산대요.”회색 눈이 열린 문으로 향했다.나는 레녹스의 소매 끝을 가볍게 당겼다.“대공님은 그대로 믿지 마세요. 그럼 평생 눈밭에서 얼음만 드셔야 하니까.”이사벨이 부채를 급하게 폈다.레녹스는 나를 내려다봤다.“얼음은 안 먹어.”“그러니까 틀린 말이죠.”나는 계단 쪽으로 걸었다. 레녹스도 옆에서 걸었다.장갑 안쪽에 땀이 배어 있었다. 아까 본 반지 무늬가 자꾸 떠올랐다. 그렇다고 신전 한복판에서 목걸이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대공님.”“응.”“나중에 물어볼 게 있어요.”레녹스가 걸음을 늦췄다.“지금은?”“여기 말고요.”“알았어.”무엇을 물을 거냐고 재촉하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 내려설 때까지 레녹스는 내 옆에 있었다.◐9월 5일 아침, 먹구름은 연습을 마치고도 얌전히 서 있지 않았다.베른이 고삐를 받자마자 내 주머니에 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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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악녀, 연습 기록을 깨다

악녀 수칙: 이길 수 있을 때는 사양하지 않는다.레녹스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나는 벗어 둔 장갑을 다시 꼈다. 손목 단추가 한 번에 잠겼다.“그렇게 보시면 돼요.”“지금처럼?”“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듣고요.”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한나가 마차 문을 열어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레녹스도 옆으로 내려왔다가 마차 앞에서 멈췄다.“오늘은 안 따라오시는 거예요.”“마차까지는 괜찮다며.”“그건 맞죠.”말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꼭 자기한테 유리한 부분까지.마차에 오르기 전에 돌아보니 레녹스가 서고에서 가져온 종이를 들고 있었다. 내가 그린 방울이 바깥으로 보였다.“그거 접어서 넣으세요.”“왜.”“누가 보면 제가 순무 공부하러 온 줄 알겠어요.”레녹스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접힌 자국이 생기지 않았다.나는 더 말하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9월 12일, 베른은 연습장 출발선에 선 내 장화를 한참 살폈다.“등자가 조금 길지 않습니까?”“어제랑 같아요.”“어제도 길었을 수 있지요.”“그제도 같았어요.”베른이 등자 끈을 당겨 보았다. 구멍 위치를 확인하고서야 손을 놓았다.이번에는 안장 아래로 손을 넣었다.먹구름이 귀를 뒤로 돌렸다. 아침부터 몸 여기저기를 만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베른, 배대끈은 제가 확인했어요.”“풀리는 건 한순간입니다.”“그래서 아까 다시 확인하셨잖아요.”베른은 대답 대신 끈을 한 번 더 눌렀다.왕국 경주까지 두 달 남짓이었다. 내 장비를 살피는 베른의 손길은 갈수록 길어졌다. 이러다 경주 날에는 안장을 풀었다가 다시 얹겠다고 할지도 몰랐다.레녹스가 회색 말을 타고 옆으로 왔다.먹구름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회색 말의 콧잔등 가까이 코를 뻗더니 짧게 숨을 뿜었다.“인사 좀 곱게 해.”먹구름이 앞발로 땅을 긁었다.레녹스의 회색 말은 가만히 서 있었다. 저쪽은 기수도 말도 말수가 적었다.오웬이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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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악녀, 관례에 맞서다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선은 어디에 적혔는지부터 묻는다.클로에가 창문에서 물러났다.하얀 소매가 사라지고, 창틀에 걸린 얇은 천만 흔들렸다. 나는 봉투를 고쳐 끼웠다.“뭘 봐?”레녹스가 열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제 이름을 보는 사람이요.”“많네.”“그러게요. 이름 올리는 데는 종이 한 장이면 되는데.”이름을 보는 데는 저렇게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한나가 게시판을 한 번 더 돌아봤다. 내 이름에 손가락을 대려던 사람이 손을 거두자, 그제야 내 옆으로 왔다.“아가씨, 접수증은 제가 챙길까요?”“내가 들고 있을게.”봉투 입구를 접었다. 종이 끝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손바닥으로 눌렀다.레녹스는 내가 마차로 향하자 나란히 걸었다.“이제 집에 가요.”“알아.”“별저는 저쪽인데요.”“마차까지.”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레녹스가 마차 문을 열었다. 올라타고 돌아보니 레녹스가 봉투 아래쪽을 받쳐 주고 있었다. 내 손에서 빼앗지는 않았다.종이가 구겨지지 않게.나는 무릎 위에 봉투를 놓았다.“고마워요.”레녹스가 손을 거뒀다.광장 쪽에서는 여전히 내 이름을 읽는 소리가 났다.◐9월 15일 아침, 경주 관리 위원회에서 사람이 왔다.한나는 봉투를 받아 들고 내 방까지 빠르게 걸어왔다. 문을 닫기도 전에 물었다.“아가씨, 또 서류가 필요한가 봐요.”“열어 봐야 알겠지.”봉투 안에는 얇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기수 자격 재검토를 위해 경주 관리 위원회에 출석할 것. 참석 전까지 참가 확정을 보류함.』나는 맨 아래 도장을 봤다. 접수증에 찍힌 도장과 다르지 않았다.“잘 받았다고 전해 줘.”한나가 종이를 내려다봤다.“이미 접수해 줬잖아요.”“그래서 취소하려면 다시 불러야겠지.”“취소요?”“확정 보류라고 적혀 있어. 왜 보류했는지는 가서 물어봐야 하고.”나는 서랍에서 원문을 베낀 종이를 꺼냈다.기록관의 도장이 있는 자리부터 살폈다. 접수실에 가져갔다가 돌려받은 그대로였다. 모서리가 조금 닳았지만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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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악녀, 목걸이를 보다

악녀 수칙: 예쁜 것을 볼 때는 뒤집어서도 본다.레녹스가 위원회 문을 돌아봤다.“들었겠네.”“들으라고 했어요.”나는 봉투를 팔 안쪽에 더 깊이 끼웠다. 안에서 종이가 조금 바스락거렸다.한나가 계단 아래에서 마차 문을 열었다. 레녹스는 내가 올라탈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대공님은 다른 마차잖아요.”“가는 곳은 하나고.”“제가 들판 말고 집으로 가면요?”“옷 갈아입는다며.”틀린 말은 없었다. 따라오는 데도 저렇게 근거가 확실한 사람이었다.나는 마차에 올라 봉투를 무릎 위에 놓았다.오늘은 이 종이를 서랍에 넣고, 고삐를 잡을 수 있었다.◐9월 21일에는 고삐 대신 장갑을 끼웠다.한나는 내 오른손 장갑을 당기다가 손바닥 쪽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굳은살 위로 봉제선이 닿지 않게 하려는 손질이었다.“이렇게 하면 덜 불편하세요?”“응. 고마워.”“오늘은 오래 앉아 계셔야 한대요.”“말 위에서 오래 앉는 건 괜찮은데.”“신전 의자는 움직이지 않잖아요.”“그게 문제지.”한나가 웃다가 탁자에 놓인 초대장을 봤다.흰 종이에 은빛 무늬가 찍혀 있었다. 축성식이라는 글자 아래에는 에버린 후작가의 자리가 적혔다.나는 장갑 낀 손으로 초대장을 집었다.축성식.그 글자를 엄지로 가려 봤다. 가린다고 날짜가 바뀌지는 않았다.전생에도 오늘이었다. 클로에가 제단 앞에 서고, 브루노가 목걸이를 걸어 주던 날.나는 그때 약혼자 옆에 앉아 있었다. 필립은 클로에가 기도할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내게는 허리를 좀 더 곧게 펴라고 했다.이번에는 내 허리를 봐 줄 약혼자가 없었다.없어도 잘 펴졌다.“머리 장식은 이걸로 할까요?”한나가 검은 리본과 작은 은 장식을 내밀었다.“리본만.”“장식도 잘 어울리는데요.”“오늘은 머리에 무거운 걸 올리고 싶지 않아.”한나가 은 장식을 내려놓았다. 이유를 더 묻지 않았다.현관에는 아버지의 마차가 먼저 준비돼 있었다. 아버지는 집사가 내민 장갑을 받으며 내 옷차림을 살폈다.짙은 보라색 드레스였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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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악녀, 믿음을 받다

악녀 수칙: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먼저 고개 숙이지 않는다.나는 잡은 손에 힘을 줬다.레녹스가 제단 쪽을 다시 봤다. 클로에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슴 앞의 은방울도 함께 움직였다.“한 번도요?”“응.”“아까 그 말에도요?”레녹스가 나를 봤다.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클로에는 나를 볼 때마다 입술을 웃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눈까지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다.레녹스도 본 적이 있었다.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이사벨이 우리 사이를 살피다가 접은 부채로 옆 통로를 가리켰다.“일단 나가자. 뒤에서 기다리셔.”우리 뒤에 몇 사람이 멈춰 있었다. 나는 레녹스의 손을 놓으려 했다.레녹스가 먼저 손가락을 폈다.“밖에서 얘기하자.”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통로로 나왔다.제단 옆에서 브루노가 클로에에게 뭔가 말했다. 클로에는 목걸이에 손을 얹고 웃었다.나는 그 손이 내려갈 때까지 봤다.◐신전 계단 아래에는 한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내려오자 한나가 마차 문을 열었다. 이사벨은 자기 마차 쪽으로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비올라, 장갑 벗으면 손부터 펴.”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봤다.또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응.”이사벨은 더 묻지 않았다. 부채를 한 번 흔들고 마차에 올랐다.레녹스가 내 마차 앞에 섰다.“오늘은 집에 갈 거지?”“네.”“그럼 거기까지.”오웬이 뒤에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전하, 저희 마차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알아.”“마부도 압니다. 에버린 저택이 어디인지.”“그것도 알아.”나는 마차 발판에 한 발을 올리다 말고 돌아봤다.“대공님. 저택까지 오셔도 오늘은 이야기할 게 없어요.”레녹스가 내 손을 봤다.“그럼 내일.”“내일은 연습할 거예요.”“마구간으로 갈게.”말을 잘 듣기는 했다. 날짜까지 늘려서 듣는 게 문제였다.나는 마차에 올랐다.한나가 맞은편에 앉고 문이 닫혔다. 창밖으로 레녹스가 자기 마차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귀걸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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