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80

80 فصول

71화. 악녀, 성에 들어가다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눈치부터 내려놓는다.나는 고삐를 조금 당겼다. 먹구름이 눈 덮인 고개 아래로 발을 옮겼다. 멀리서는 작아 보였던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높아졌다.레녹스가 내 옆에서 속도를 늦췄다.“추운가.”“코끝은요.”대답하자마자 레녹스의 손이 망토 끈으로 갔다.“그걸 벗어 주지는 마세요. 제 것도 충분히 두꺼워요.”손이 멈췄다. 대신 레녹스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말을 옮겼다.나는 그쪽을 한번 보고 앞을 봤다. 가라고 하지는 않았다.성문 앞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레녹스를 보고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문을 열라는 짧은 외침 뒤에 문짝이 움직였다.“돌아오셨습니까.”“그래.”“안쪽 길에 얼음이 남았습니다. 천천히 들어오십시오.”기사는 나를 보고도 같은 말을 했다.“영애도 말에서 내리실 때 발밑을 보십시오.”“알려 줘서 고마워요.”기사는 고개를 한번 더 숙였다. 그것으로 인사가 끝났다.수도였다면 먼 길을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부터 시작해 내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까지 떠들었을 것이다. 여기에선 얼음을 밟지 말라는 말이 먼저였다.쓸모 있는 인사였다.성 안뜰에는 눈을 치운 길이 나 있었다. 삽을 든 사람들이 옆으로 비켰다. 창문마다 걸린 두꺼운 천 사이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먹구름은 낯선 바닥에 코를 가까이 대더니 콧김을 뿜었다.“너도 마음에 들어?”먹구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줬다면 왕국 경주보다 더 큰 구경거리가 됐겠지.먼저 도착한 마차에서 오웬이 내렸다. 한나가 뒤따라 내리며 치맛자락을 털었다. 데릭은 마차 옆에 묶어 둔 검을 확인하고 있었다.“전하, 마구간은 준비됐고 손님 방도 데워 뒀습니다.”“잘했다.”“이번에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시겠지요?”레녹스는 내 쪽을 봤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두드렸다.“마구간부터 볼래요.”오웬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럼 전하도 마구간이시겠군요.”“그래.”예측이 쉬운 대공이었다.◐나는 낮은 발판을 밟고 말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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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악녀, 눈썰매를 타다

악녀 수칙: 놀고 싶은 날에는 잘 노는 것부터 한다.빛 띠가 움직일 때마다 레녹스의 장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저거 보고 길을 찾기도 해요?”“길은 아래를 보고 찾는다.”“아, 그렇겠네요.”쓸데없이 멋있는 대답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레녹스가 짧게 웃었다. 나는 잡은 손을 흔들어 놓고 다시 하늘을 봤다. 보랏빛이 옅어지는 자리로 초록빛이 길게 퍼졌다.아래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성벽 계단 입구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전하, 오래 계실 겁니까?”오웬이었다.“왜.”“계단 문을 열어 두니 복도가 춥습니다.”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내려가요. 저희 구경 때문에 성 사람들이 얼겠어요.”레녹스가 먼저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손은 놓지 않았다.복도에 닿자 한나가 내 코끝을 보고 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으며 창밖을 한번 더 봤다.북쪽에는 구경할 것이 많았다.◐며칠 뒤 아침, 나는 한나가 펼쳐 놓은 치마 대신 바지를 집었다.한나가 옷을 든 채 물었다.“오늘도 말을 타세요?”“눈썰매를 타려고.”“그 뒤에는요?”“얼음 낚시.”한나는 치마를 접어 넣었다.“그 뒤에는 시장에도 가신다면서요.”“응.”“점심은 언제 드세요?”좋은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일만 적었더니 먹는 일이 빠졌다.“시장 가기 전에. 너도 같이 갈래?”“저는 오웬 님하고 마차로 내려갈게요. 썰매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억지로 태우지는 않을게.”한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두꺼운 양말을 가져왔다.문밖으로 나가니 레녹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털망토에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일은요?”“끝냈다.”뒤에서 오웬이 종이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정확히는 오늘 오전에 결재할 일을 끝내셨습니다.”“전부 끝낸 건 아니군요.”“영지 일이 전부 끝나는 날이 오면 제가 먼저 썰매를 타겠습니다.”레녹스는 오웬의 종이 맨 위를 짚었다.“오후에 보겠다.”“예. 오후에는 성으로 돌아오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나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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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악녀, 오웬을 돕다

악녀 수칙: 남의 고백을 대신 해 주지는 않는다.나는 과자 밑에 받친 종이를 내려다봤다. 설탕 부스러기가 꽤 쌓여 있었다.“제 옆에서는 잘 안 만지세요.”할머니가 레녹스의 왼쪽 귀를 봤다. 은 귀걸이는 그대로였다.“그럼 자주 같이 오시오.”“과자를 사러요?”“겸사겸사.”할머니는 남은 과자를 덮으며 웃었다.레녹스가 내가 든 종이 끝을 접어 줬다. 바람에 부스러기가 날리지 않게 양쪽을 눌렀다.“다 먹었나.”“네. 더 드실 거예요?”“오늘은 됐다.”할머니가 손을 멈췄다.“그 말도 처음 듣는군.”나는 레녹스를 올려다봤다. 레녹스는 빈 종이를 가판 옆 바구니에 넣고 내 손에 들린 나무 말을 받았다.“돌아가자. 손이 차다.”“과자를 덜 드실 만큼 걱정할 일은 아닌데요.”“장갑을 갈아 끼웠어도 오래 있었다.”맞는 말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레녹스는 내 걸음에 맞춰 시장을 빠져나갔다. 과자 가판 앞에서는 참 잘 멈추던 사람이 내가 걷기 시작하면 한 번도 뒤처지지 않았다.◐3월 12일 아침, 오웬은 식당 문 앞에서 소매를 털고 있었다.털어 낼 먼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쪽을 털고, 반대쪽을 털었다. 문 안을 한번 보고 다시 옷깃을 만졌다.나는 복도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췄다.레녹스도 내 옆에 멈췄다.“왜 저래요?”“아침부터 저랬다.”“일이 밀렸어요?”“서류는 제대로 가져왔다.”그럼 일 때문은 아니었다.오웬이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요리사가 나왔다. 앞치마를 두른 채 빈 접시를 들고 있었다.오웬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떨어졌다.“오늘 빵이 아주 좋았습니다.”“아직 식사 안 하셨잖아요.”“냄새가 좋다는 뜻입니다.”요리사는 접시를 고쳐 들었다.“그럼 따뜻할 때 드세요. 곧 식습니다.”“예. 그러겠습니다.”오웬이 옆으로 비켰다. 요리사가 지나가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나는 레녹스의 소매를 당겼다.“알겠네요.”“뭘.”“빵 냄새가 좋은 건 맞겠지만, 빵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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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악녀, 아버지 편지를 받다

악녀 수칙: 내게 온 허락은 내가 쓸 곳을 정한다.“그럼 아직은 안 물을게요.”나는 망토 끝에서 손을 뗐다.레녹스는 접은 과자 종이를 옆에 내려놓았다. 종이 안에서 남은 부스러기가 작게 움직였다.“궁금하지 않나.”“궁금해요. 그래도 아직 아니라고 하셨잖아요.”궁금한 것과 당장 대답을 받아야 하는 건 달랐다. 남의 고백에는 참을성이 좋던 내가 내 일이라고 달라지면 좀 우스웠다.레녹스가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 묻은 설탕을 보고 자기 손수건을 꺼냈다.“여기.”나는 손수건을 받아 엄지 끝을 닦았다.“그 말 하실 때도 과자 챙겨 오세요.”“왜.”“기다리는 동안 먹게요.”레녹스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나는 깨끗해진 손을 돌려 보여 준 뒤 손수건을 접었다. 돌려주려 하자 레녹스가 고개를 저었다.“가지고 있어라.”“손수건까지 기다려야 해요?”“그건 지금 가져도 된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레녹스는 내가 일어설 때까지 옆에 앉아 있었다.◐3월 18일, 한나는 내 앞에 봉투 두 개를 내려놓았다.나는 목에 두를 천을 고르던 손을 멈췄다. 하나에는 에버린가의 인장이, 다른 하나에는 이사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수도에서 함께 왔어요.”“아버지 편지는 언제부터 이렇게 얇아졌지?”예전에는 종이가 얇아도 할 말은 많았다. 치마 길이와 식탁에서의 말투, 누구에게 먼저 인사해야 하는지까지. 이미 들은 말을 편지로 다시 받는 것도 재주였다.한나는 봉투를 빛에 비춰 보려다가 내려놓았다.“먼저 열어 보셔야 알죠.”맞는 말이었다.나는 편지칼로 봉투 윗부분을 잘랐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북부의 추위가 아직 심하다고 들었다. 몸을 상하게 하지는 말아라. 데릭에게도 소식을 보내라고 전해라.』여기까지는 아버지다웠다. 딸의 안부를 묻다가 아들의 편지까지 챙겼다.그 아래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그게 네 수칙이라며.』나는 종이를 가까이 가져왔다.글씨는 아버지 것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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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악녀, 먹구름과 달리다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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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악녀, 청혼을 받다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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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악녀, 수도로 돌아가다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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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악녀, 드레스를 고르다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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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악녀, 전날 밤을 보내다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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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악녀, 결혼하다

악녀 수칙: 서약할 때는 손을 숨기지 않는다.덮어 둔 수첩 위로 햇빛이 들었다.나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표지를 만졌다. 어젯밤 끼워 둔 쪽지 끝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마지막 장도 아직 비어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응.”한나가 문을 열었다. 양팔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제보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빗을 쥔 손은 멀쩡했다.“오늘은 잘 빗을 수 있겠어?”“네. 안 울 거예요.”“그건 해 보고 말해.”한나는 웃으면서 드레스를 의자에 펼쳤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을 열었다. 저택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하인들이 마지막 상자를 실었고, 데릭은 현관 계단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다. 턱이 말끔했다.잘 깎았네. 결혼식에 늦게 온 데다 수염까지 남아 있었으면 두고두고 말했을 것이다.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앉았다.한나가 머리를 빗어 올렸다. 핀을 꽂을 때마다 어디가 당기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접시에 놓인 브로치를 집었다.“이건 네가 달아 줘.”한나가 두 손으로 받았다.“식이 끝나면 바로 떼어 드릴게요.”“급하게 떼지는 말고. 옷에 구멍 난다.”드레스 가슴께에 브로치가 달렸다. 한나는 핀을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옷감을 가볍게 눌렀다.어머니의 면사포는 마지막이었다.상자에서 꺼냈을 때는 길어 보이더니 머리에 얹자 등 뒤로 고르게 떨어졌다. 한나가 끝을 펴 주는 동안 나는 왼손의 은반지를 만졌다.“장갑은요?”“서약할 때 벗을 거야.”“지금은 끼실 거죠?”“응. 고삐 잡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한나가 장갑을 내밀었다.오른손을 넣기 전에 손바닥을 한번 폈다. 굳은살 위로 아침빛이 닿았다. 새삼 문지르지는 않았다.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화장대 위 수첩은 작은 가방에 넣었다.한나가 문을 열고,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아버지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내 옷을 보고는 콧수염 아래 입술을 다물었다. 한나가 뒤에서 면사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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