บททั้งหมดของ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บทที่ 61 - บทที่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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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악녀, 옛말을 듣다

악녀 수칙: 새해 인사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한다.내 말이 끝나자 레녹스가 창가에 놓인 찻잔을 옆으로 밀었다. 차는 오래전에 식어 있었다.“그럼 이제 뭘 할 거지.”“일단 자려고요.”“좋은 시작이군.”“대공님도 돌아가서 주무세요. 자정이 지났잖아요.”레녹스는 바로 일어났다. 함께 창밖을 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의자를 빼고 나니 치맛자락이 눌린 자리가 드러났다. 나는 손바닥으로 주름을 폈다.문 앞에 선 레녹스가 돌아봤다.“새해 첫날은 비워 둬.”“왜요?”“별저에서 만찬을 한다.”“초대하시는 거예요, 일정을 정하시는 거예요?”“초대.”대답이 빨랐다. 나는 일부러 잠깐 생각하는 척했다. 갈 생각은 이미 있었지만, 부르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버릇까지 되살릴 필요는 없었다.“음식이 맛있으면요.”“주방에 전하지.”“과자는 너무 달지 않게 해 주세요.”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나는 웃음이 나와서 입술을 눌렀다. 레녹스는 내 표정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그건 요리사와 상의하겠다.”◐1월 1일 저녁, 후작 저택 현관에는 레녹스가 서 있었다.초대받은 쪽은 나인데 찾아온 쪽도 레녹스였다. 북부에서는 손님 맞는 법을 거꾸로 가르치나 보다.“제가 별저로 가기로 하지 않았어요?”“맞아.”“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같이 가려고.”한나는 내 뒤에서 망토 끈을 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을 참는 사람의 어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는 아주 잘 알았다.“한나. 끈만 매.”“네, 아가씨.”대답 끝에 웃음이 조금 샜다.레녹스는 모른 척하며 장갑을 내밀었다. 내 장갑이었다. 외출할 때 쓰는 짙은 보라색 장갑.“현관 탁자에 있더군.”“거기 두고 나오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알아.”장갑을 끼는 동안 레녹스가 내 손을 내려다봤다. 오른손 손바닥을 덮은 천이 굳은살 위에서 조금 당겼다. 나는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저택 안까지 따라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밖에 서 있으니 후작이 들어오라고 했다.”아버지는 정말 쓸데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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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악녀, 이름을 부르다

악녀 수칙: 부르고 싶은 이름은 내가 먼저 부른다.나는 찻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레녹스는 내려놓은 과자를 다시 집지 않았다. 대답은 끝났는데,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식당 저편에서 오웬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꽤 멀리 앉았는데도 잘 들렸다. 그쪽을 돌아보자 오웬은 빵 바구니 안을 살폈다.빵을 고르는 데 저렇게 진지할 필요는 없을 텐데.“저 옛말 때문에 제가 대공님을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죠?”“아니.”“그럼 됐어요.”레녹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그것만 확인하면 되나.”“일단은요.”잔을 들었다. 차는 딱 마시기 좋게 식어 있었다. 한 모금만 마시려다 거의 다 마셨다.레녹스가 물었다.“더 줄까.”“아니요.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창문 너머로 눈이 계속 내렸다. 정원 길을 따라 놓인 등불 아래에서 눈송이가 보였다가 사라졌다.따뜻한 식당에 더 앉아 있으면, 쓸데없이 과자를 하나 더 집을 게 뻔했다. 먹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의자를 밀자 레녹스도 일어났다.나는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고 올려다봤다.“정원까지 따라오시게요?”“네가 가는 곳이니까.”“거기 과자 없는데요.”“괜찮아.”저 말은 믿을 만했다. 과자를 앞에 두고도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오웬이 우리 쪽을 봤다.“밖에 눈이 옵니다, 전하.”“봤다.”“영애 망토부터 챙기셔야 합니다.”“내 것도.”“그건 알아서 챙기실 줄 알았습니다.”오웬이 하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 가까이에 있던 하인이 웃음을 누르고 나갔다.나는 레녹스가 남겨 둔 과자 접시를 봤다.“돌아오실 때까지 두라고 할까요?”“돌아오면 먹으면 된다.”“제가 오래 걷고 싶으면요?”“늦게 먹겠지.”이번에는 내가 설득당한 기분이었다.◐현관에서 망토를 입었다.한나가 꼼꼼히 매 줬던 끈을 다시 매려니 끝이 조금 꼬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매듭을 풀었다. 레녹스는 내 옆에서 자기 망토 고리를 채웠다.이번에는 목 아래도 제대로 여몄다.“잘하셨네요.”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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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악녀, 방울을 세다

악녀 수칙: 남이 씌운 검은색은 벗어 버린다.나는 마지막 하인이 사라진 창문을 조금 더 봤다.탁자를 닦겠다던 사람은 천을 두고 갔다. 오웬이 급히 가져간 접시는 다시 창가에 놓여 있었다.“저 접시에 과자 있었어요?”“있었지.”“그럼 오웬은 곧 돌아오겠네요.”레녹스가 창문에서 눈을 뗐다.“추워?”“이제 조금요.”잡은 손은 따뜻했다. 장갑을 쥔 왼손만 시렸다. 내가 장갑을 펴자 레녹스가 오른손을 놓아 줬다.손가락을 끼우는 동안 기다리더니, 다 끼운 손을 다시 내밀어 달라는 듯 손바닥을 폈다.나는 그 위에 손을 올렸다.“안으로 들어갈 때까지예요.”“그래.”현관문이 열렸다. 오웬이 안쪽에 서 있었다. 과자 접시는 들고 있지 않았다.“산책은 잘하셨습니까?”“창문에서 보셨잖아요.”오웬이 문손잡이를 고쳐 쥐었다.“눈이 많이 와서 잘 안 보였습니다.”레녹스의 왼손이 귀로 올라갔다.나는 오웬을 봤다.“안 보였는데 박수는 왜 치셨어요?”“새해를 기뻐했습니다.”레녹스가 귀에서 손을 내렸다.거짓말을 수습하는 솜씨는 여전히 형편없었다.나는 웃으며 문턱을 넘었다. 레녹스가 내 망토에 붙은 눈을 털 때까지 오웬은 문을 잡고 서 있었다.이번에는 어디로도 달아나지 못했다.◐1월 10일 아침, 내 침대 위에는 검은 옷과 보라색 옷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한나는 보라색 소매를 펴고 있었다. 그 옆에 펼친 검은 옷은 목까지 단추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왜 두 벌이에요?”“혹시 검은색을 고르실까 해서요.”“누가?”“재판에 가는 증인은 얌전한 색을 입어야 한다고들 하셔서요.”“아직 재판 날짜도 안 나왔잖아.”한나가 창가 쪽을 봤다.“오늘 왕궁에서 정하신다고 들었어요.”나는 검은 옷의 단추를 만졌다. 작고 둥근 단추가 빈틈없이 달려 있었다. 다 잠그면 숨까지 조심해서 쉬어야 할 것 같았다.전생의 재판에서 입었던 옷도 검었다.얼굴을 창백하게 만든다며 한나가 다른 옷을 권했었다. 그때 나는 거절했다. 얌전하게 보이면 내 말을 들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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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악녀, 증인석에 서다

악녀 수칙: 내 말을 남의 입에 맡기지 않는다.클로에가 손을 폈다.금이 간 방울이 옷깃 아래로 내려갔다. 하얀 손가락이 천을 끌어 올리더니 목걸이를 가렸다.나는 마차 창에서 몸을 뗐다.“봤어요?”“봤다.”레녹스도 창밖에서 눈을 거뒀다.“깨진 건 아니죠?”“아직은.”나는 장갑 끝을 눌렀다. 조금 전까지 방울이 보이던 창가에는 클로에의 어깨만 남아 있었다.금이 갔다고 효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걸 확인하겠다고 지금 신전 문을 두드릴 수도 없었다.“기록에 적어 둬야겠어요.”레녹스가 서류 가방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연필부터 건넸다.마차가 움직이기 전에 날짜를 적었다.『1월 10일. 신전 창가. 은방울 셋 중 둘이 거의 검었고, 그중 하나에 금이 감.』내가 본 것만 적었다.레녹스가 종이를 받아 읽었다.“재판 준비 기록에 넣겠다.”“제가 직접 적었다는 것도요.”“그래.”마차가 출발하자 신전 창이 뒤로 밀려났다. 나는 더 보려고 몸을 돌리지 않았다.한나가 다리고 있을 보라색 옷이 생각났다.아직 입을 날이 남아 있었다.◐2월 5일 아침, 한나는 그 옷의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소매에는 접힌 자국 하나 없었다. 한나는 이미 매끈한 어깨를 한 번 더 쓸고 물러섰다.“너도 입고 올 거지?”“네. 아래에서 갈아입으려고요.”“다리미는 내려놓고 가.”탁자 위에 세워 둔 다리미를 보자 한나가 손을 뒤로 감췄다.“조금만 더 하려고 했어요.”“지금도 좋아. 네가 늦으면 이사벨이 여기까지 올라올 거야.”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부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나 이미 올라왔어.”이사벨이 문을 열었다. 오늘은 편지 봉투 대신 방청권을 들고 있었다.한나는 다리미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그럼 금방 갈아입고 올게요.”한나가 나가자 이사벨이 방청권을 펼쳐 보였다. 끝에 찍힌 왕실 도장이 선명했다.“네 아버지와 오빠는 함께 앉고, 한나는 내 옆이야.”“네가 자리까지 정했어?”“신청할 때 붙여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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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악녀, 반지를 빼앗다

악녀 수칙: 숨기는 손부터 확인한다.“신성 모독입니다.”브루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의자가 뒤로 밀렸다. 클로에는 목걸이를 잡은 채 나를 봤다. 눈가에 남은 물기는 닦지도 않았다.“축성식에서 내려진 성물입니다. 영애의 의심만으로 성녀의 몸에서 떼어 낼 수는 없습니다.”나는 증인석에 그대로 서 있었다.“몸이 아니라 목걸이를 확인해 달라고 했어요.”“성녀께서 받으신 성물을 모욕하는 것이 곧 성녀를 모욕하는 일입니다.”“그럼 확인해서 문제가 없다고 하면 되겠네요.”브루노가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대답은 왕에게 했다.“폐하. 신전에도 지켜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왕은 목걸이를 보고 있었다.레녹스가 탁자 위의 서류를 덮었다.“그래서 왕실에 확인 절차를 요청했다.”오웬이 재판관석 옆으로 다가왔다. 품에 안은 나무 상자를 시종에게 건넸다. 시종은 왕 앞에 상자를 올려놓지 않고, 먼저 기록관의 탁자에 내려놓았다.브루노의 손이 움직였다.오른손으로 왼손의 반지 하나를 덮었다. 손등 전체를 감싼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만 가렸다.나는 그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레녹스가 말했다.“신전 아래 공방에서 확보한 물건이다. 가져온 곳과 옮긴 사람의 이름은 기록에 있다.”“공방이라면 신전의 장식품을 만드는 곳이겠지요.”“그곳이 신전의 공방인 것은 인정하나?”브루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신전에는 여러 물품을 만드는 곳이 있습니다. 대신관인 제가 모든 작업을 알 수는 없습니다.”“질문한 것만 답해라.”“신전의 공방일 수는 있습니다.”기록관의 펜이 움직였다.레녹스는 상자를 열도록 손짓했다.작은 거푸집들이 천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반지 모양이었고, 다른 하나에는 둥근 홈이 파여 있었다. 홈 아래로 가느다란 선이 이어졌다.방울을 만들 때 쇳물이 들어가는 길이었다.브루노가 가린 손가락의 반지에 새겨진 것도 이 방울이었다.“증인에게도 보여 줘라.”시종이 상자를 들고 왔다.나는 거푸집에 손대지 않았다. 증인석 앞에 놓인 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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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악녀, 진실을 듣다

악녀 수칙: 내 눈물은 내가 이긴 뒤에 쓴다.클로에의 손이 목걸이에서 떨어졌다.레녹스는 왼쪽 귀를 누른 채 기록관을 봤다.“방금 말을 그대로 적어라.”펜 끝이 종이 위를 달렸다. 브루노가 입을 열려 하자 왕이 먼저 손을 들었다.“대신관의 반지는 돌려주지 마시오. 목걸이도 지금부터 왕실이 맡겠소.”“폐하, 성녀의 몸에 손을 대는 일입니다.”“목걸이를 맡겠다고 했소.”왕이 의자 팔걸이를 짚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물건과 진술을 다시 확인하고, 내일 심문을 이어 가시오.”클로에는 고개를 젓다가 멈췄다. 왕실 시녀가 빈 상자를 들고 다가왔기 때문이었다.레녹스가 말했다.“지금 억지로 잡아당기지 마라. 걸쇠부터 확인해.”클로에가 방울을 쥔 손을 펴지 않았다.시녀는 뒤로 돌아가 목걸이 걸쇠를 살폈다. 클로에가 목을 움츠리자 손을 거두고 기다렸다. 기사들은 출입문 앞에 섰다.도망갈 길은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목을 붙잡지도 않았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쪽으로 걸었다.문 앞에 이르자 긴 그림자가 옆에 붙었다. 레녹스였다.“귀는요?”“가라앉았다.”왼쪽 귓바퀴가 붉었다. 귀걸이는 제대로 걸려 있었다. 나는 손을 올리려다 내렸다. 지금 만져서 좋아질 것도 없었다.“그럼 물 마시고 쉬세요.”“너는?”“집에 가서 잘 거예요. 내일도 와야 하니까.”레녹스가 내 걸음을 따라왔다.“마차까지.”“재판관이 증인 마차까지 따라와도 돼요?”“재판은 끝났다.”문밖에서 오웬이 서류를 끌어안았다.“오늘 재판만 끝났습니다, 전하.”“알아.”나는 문턱을 넘으며 치맛자락을 들었다. 레녹스는 내 옷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열린 문을 더 밀어 주었다.◐2월 6일 아침, 한나는 다려 둔 보라색 옷을 다시 펼쳤다.어제 입었던 옷이었다. 치맛단에 묻은 먼지가 사라져 있었다.“다른 옷으로 바꾸셔도 돼요.”“이걸로 해.”한나가 옷깃을 여미다가 내 얼굴을 봤다.“잘 주무셨어요?”“중간에 한 번 깼어. 다시 잤고.”“저도요.”한나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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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악녀, 사과를 받다

악녀 수칙: 제대로 건네는 사과는 끝까지 듣는다.레녹스가 기록관 쪽을 돌아봤다.나는 손수건을 쥔 채 급히 소매를 잡았다.“그걸 정말 판결문에 쓰라는 건 아니에요.”“따로 적으면 되나.”“제가 기억할게요.”내가 이겼다는 말까지 남에게 맡길 필요는 없었다. 판결문에는 내 이름과 결백이 적혔다. 그거면 됐다.레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매를 놓자 손을 내밀었다.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무릎은 멀쩡했다. 한참 앉아 있었더니 치마만 눌려 있었다.한나가 뒤에서 치맛단을 펴 주었다.“아가씨, 이제 집에 가요.”“그래. 너 낮잠 자야지.”한나가 손수건으로 코끝을 눌렀다.“아직 기억하고 계셨어요?”“깨우지 말라고 해 둔다고 했잖아.”내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문으로 걸어가자 레녹스도 옆에 붙었다. 복도에는 재판장을 나온 사람들이 서 있었다. 누군가는 내게 허리를 숙였고, 누군가는 길을 비켰다.나는 보라색 치맛자락을 들고 그 사이를 걸었다.계단 앞에서 레녹스가 먼저 바깥을 봤다. 마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손수건은 빨아서 돌려드릴게요.”“천천히 줘.”“돌려드리기 싫어서 미루는 건 아니에요.”“알아.”레녹스는 내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보다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따라 내려오자 바람이 부는 쪽에 섰다.눈물 닦는 데 쓴 천 한 장 때문에 또 만날 구실이 생겼다.이미 구실 없이 잘도 오는 사람이지만.◐2월 10일 아침, 한나가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그 위에는 왕실 문장이 찍힌 봉투와 깨끗하게 접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왕궁에서 보냈어요. 손수건은 제가 같이 가져왔고요.”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왕실 서기관의 반듯한 글씨가 먼저 보였다. 브루노에 대한 심문이 끝났고, 최종 처분이 내려졌다는 통지였다. 오늘 왕궁에서 내게 직접 전할 말이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또 보라색으로 준비할까요?”한나가 옷장 문을 열었다.“그래. 어제는 안 입었으니까.”“소매 안쪽도 다려 뒀어요.”나는 손수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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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악녀, 필립을 보내다

악녀 수칙: 떠나는 사람의 짐까지 대신 들지는 않는다.데릭이 뒤로 보냈던 손을 풀었다.“됐다는 게, 더는 듣기 싫다는 뜻이냐?”“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안다는 뜻이야.”“그건 안다.”“그럼 다음에 안 하면 돼.”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비키지 않아서 나는 응접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나 과자 먹으러 가도 돼?”“대공 전하가 기다리시는 거 아니고?”“과자도 기다려.”문을 열자 레녹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탁자 가운데 있던 접시는 거의 비어 있었다. 다행히 내 몫으로 보이는 과자 몇 개가 작은 접시에 따로 놓여 있었다.“남겨 두셨네요.”“네가 먹는다고 해서.”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단 과자가 있을 거라고는 했다.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빼 주었다. 나는 앉아서 남은 과자를 집었다. 데릭은 문간에 서 있다가 한나에게 찻잔을 하나 더 부탁했다.누구도 서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나는 과자를 씹었다. 가장자리까지 바삭했다.◐2월 15일, 한나가 어제 받은 꽃을 창가에서 조금 옮겼다.“여기는 햇볕이 너무 세요.”“겨울인데도?”“꽃은 사람이랑 다르니까요.”레녹스가 보낸 꽃이었다. 생일에는 내가 고른 음식을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겠다고 했더니 꽃만 먼저 왔다. 사람은 그 뒤에 왔다.꽃병 아래 놓인 쪽지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내일도 와도 되나.』어제 돌아갈 때 오늘도 오셔도 된다고 답했다. 꽃을 보고 대답한 건 아니었다. 꽃이 없어도 올 사람이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한나가 꽃병을 내려놓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하인이 방문객을 알렸다.필립이었다.나는 책상 위에 펼쳐 둔 경주 규정을 덮었다. 이제는 참가 자격을 따지려고 읽는 게 아니었다. 다음에 말을 타러 나갈 때 쓸 연습 거리를 고르던 중이었다.“혼자 오셨어?”“수행원들은 현관에 기다리고 있습니다.”“응접실로 모셔.”한나가 나를 돌아봤다.“옷 갈아입으실까요?”나는 소매를 봤다. 아침에 입은 보라색 옷이었다. 구겨지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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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악녀, 수도원에 가다

악녀 수칙: 마지막 인사에 용서까지 챙겨 갈 필요는 없다.나는 레녹스의 손을 한 번 더 잡았다가 놓았다.“장갑 가져오는 동안 여기 계세요.”“복도까지만 가면 안 되나.”“여기요.”레녹스는 현관 옆 의자에 앉았다. 망토 자락이 의자 밖으로 흘러내렸다.한나가 계단을 올라가며 뒤를 돌아봤다. 나도 돌아봤다.정말 앉아 있었다.“그렇게 보면 못 기다릴 것 같군.”“기다리시는 거 보고 있어요.”“장갑은 위에 있다.”맞는 말이었다. 나는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장갑을 찾아 내려왔을 때도 레녹스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내가 손을 넣다가 안감을 조금 밀어 버리자 입을 열었다.“안 들어가면 한번 봐야지.”“그 말은 언제 들으셨어요?”“아까.”남의 잔소리를 잘도 챙겼다.나는 장갑을 벗어 안감을 폈다. 레녹스가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마구간으로 가는 동안에도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2월 20일 아침, 나는 장갑 안쪽을 먼저 확인했다.오늘은 먹구름을 타러 가는 날이 아니었다.빛의 신전에서 마차가 떠나는 날이었다. 클로에는 수도를 벗어나 먼 수도원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성녀라는 이름도, 하얀 옷을 입고 왕궁을 드나들던 자리도 더는 클로에의 것이 아니었다.한나가 내 망토 끈을 펴 주었다.“정말 만나실 거예요?”“응.”“안 만나셔도 되는데요.”“알아.”한나의 손이 끈 위에서 멈췄다.“보고 오고 싶어.”나는 묶인 매듭을 손끝으로 눌렀다.“내가 가만히 있으면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가는 건 아니야.”한나가 고개를 들었다.“이제는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그러니까 가는 거야.”전에는 클로에를 만나기 전에 할 말을 골랐다. 어떤 말은 오해받을까 봐 빼고, 어떤 말은 화를 낼까 봐 삼켰다.오늘은 고르지 않았다.싫은 말이 나오면 싫다고 할 생각이었다. 듣고 싶은 말이 없으면 그냥 돌아오면 됐다.한나가 작은 꾸러미를 들었다. 천 사이로 두툼한 담요 끝이 보였다.“마차에서 쓰게?”“네. 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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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악녀, 북쪽으로 가다

악녀 수칙: 가 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갈 준비부터 한다.“북쪽.”레녹스가 말했다.나는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신전 앞에서 우리 마차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았다. 북쪽은 몇 걸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지금요?”“준비는 해야지.”“그럼 일단 집에 가요. 한나가 오늘 저녁 먹을 때까지 마차에 있어야 하는 줄 알겠어요.”한나가 접은 천을 주머니에 더 깊이 밀어 넣었다.“북쪽이면 발트하임이요?”“그래.”레녹스가 나를 봤다.“와 줬으면 한다.”나는 마차에 오르려다 멈췄다.초대는 많이 받아 봤다. 꼭 와야 한다는 말이나, 안 오면 사람들이 서운해할 거라는 말이 대개 함께 왔다.레녹스는 덧붙이지 않았다. 내 손이 아직 마차 손잡이에 닿지 않은 걸 보고 기다렸다.“먹구름도 갈 수 있어요?”“마구간이 있다.”“한나도요.”“방도 있다.”한나가 내 옆에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저도요?”“혼자 두고 가면 네가 내 장갑 걱정만 할 것 같아서.”“그건 같이 가도 할 건데요.”그렇겠지. 아주 믿음직한 대답이었다.나는 레녹스에게 다시 물었다.“눈이 많이 쌓여 있어요?”“아직은.”“말을 탈 수 있을 만큼요?”“길을 골라야 한다. 내가 안내하겠다.”북부의 눈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듣기만 했던 곳이었다. 눈이 많고, 추위가 길고, 대공의 성은 바람까지 무뚝뚝하다는 곳.그중 마지막 말은 가 본 사람이 한 말인지도 의심스러웠다.“가고 싶어요.”레녹스가 마차 문을 잡았다.“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해요. 짐도 싸고요.”“기다리겠다.”나는 발판에 한 발을 올렸다가 돌아봤다.“초대는 저택에서도 할 수 있었잖아요.”“네가 어디로 갈지 물어서.”정말 질문에 답만 한 모양이었다.나는 마차에 앉았다. 레녹스가 맞은편에 앉고, 한나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신전이 창밖으로 밀려났다.나는 돌아보는 대신 한나에게 물었다.“두꺼운 양말이 몇 켤레 있지?”◐아버지는 여행 이야기를 듣고 펜을 내려놓았다.레녹스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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