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30

83 فصول

21화. 거울 앞

책을 열람실 긴 책상 위, 네모난 빛 한가운데 놓았다.한참을 펼치지 못했다.빛이 표지 위에 네모나게 얹혀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가 빛을 받아 더 누렇게 보였다. 나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책을 보기만 했다. 새 불량품을 받아 든 날처럼. 뜯기 전에 겉부터 본다.표지의 붓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네 글자. 한자였다. 첫 글자는 알 것 같았다. 날 일(日). 초등학교 때 한자 급수 시험을 보면서 외운 글자. 둘째 글자는 획이 많아서 모르겠고, 셋째 넷째는 흘려 써서 어디서 끊어지는지도 몰랐다.책은 실로 묶여 있었다. 누런 종이를 반으로 접어 겹치고, 한쪽에 구멍을 네 개 뚫어 실을 꿰었다. 박물관에서 본 옛날 책 모양 그대로였다. 실은 닳아서 한 군데가 끊어질 듯 가늘었다.나는 그 끊어질 듯한 실을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조심스럽게. 서아의 머리카락을 빗길 때처럼. 엉킨 데를 잘못 당기면 서아는 울었다. 해인은 그래서 빗질을 늘 머리끝부터 했다.나는 손을 씻고 왔다. 생수로. 이 책을 더러운 손으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았다.물기를 셔츠 자락에 닦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말렸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기타 굳은살이 박인 자리가 누런 종이에 닿을 때 서걱 소리가 날 것 같았다.그리고 첫 장을 넘겼다.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손끝에 닿는 종이가 얇고 부드러웠다. 찢어질까 봐 숨을 참고 넘겼다.글씨가 빼곡했다.먹빛이 고르지 않았다. 진한 줄이 있고 흐린 줄이 있었다. 행간이 좁았다. 한 장에 최대한 많이 적으려 한 것처럼.세로쓰기였다.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다시 왼쪽 줄로. 먹으로 쓴 붓글씨. 한자와, 한글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한글이 이상했다. 내가 아는 한글인데 내가 아는 한글이 아니었다. 모음 자리에 점이 찍혀 있었다. ㅏ가 아니라 ·에 가까운. 받침이 겹쳐 있었다. 소리 나는 대로 쓴 것 같은데 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다.옛 한글이었다.나는 그 점 하나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붓 끝을 톡 찍어 놓은 점. 가장자리로 먹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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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第三日

해독은 공장 일 같았다.아침에 일어나 씻고, 셔츠를 입고, 밥을 먹고, 창가 대신 휴게실 창 밑에 테이프를 새로 붙여 그림자를 재고. 그다음 열람실 긴 책상에 앉았다. 조선 노트를 펼쳐 놓고, 옆에 옥편, 그 옆에 도서관에서 찾아낸 책들을 쌓았다. 『중세 국어 문법』, 『훈민정음 해례본 풀이』, 『고어 사전』, 『초보자를 위한 한문 강독』.열람실은 아침마다 같은 빛이었다. 높은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긴 책상 끝에 네모나게 떨어져 있었다. 그 네모는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빛 안에 조선 노트를 두면 종이가 너무 하얘서 눈이 시렸다. 빛 밖에 두면 누런 종이가 그늘에 묻혔다. 경계선에 반쯤 걸쳐 두는 게 가장 잘 보였다. 나는 매일 아침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고 앉았다.의자는 앉을 때마다 차가웠다. 한참을 앉아 있어도 데워지지 않았다. 첫날 편의점에서 쥐었던 음료수 캔처럼. 이 세상의 물건은 내 온기를 받아 주지 않았다. 나는 엉덩이 밑에 접은 담요를 깔았다. 그것도 차가웠지만, 덜 딱딱했다.그리고 한 줄씩 했다.방법은 품질관리 때 하던 그대로였다. 모르는 걸 한 번에 다 풀려고 하지 않는다. 쪼갠다. 아는 것부터 확정한다. 확정한 걸 기준으로 모르는 걸 좁힌다.옛 한글이 먼저였다. 한자보다 쉬웠다. 소리글자니까. 『훈민정음 해례본 풀이』 앞쪽에 자모표가 있었다. 아래아는 ㅏ와 ㅗ 사이 어디쯤의 소리. 받침 ㅸ은 ㅂ과 ㅇ 사이. 겹친 자음은 된소리. 나는 그 표를 검은 노트 뒷장에 옮겨 적고 매일 외웠다. 서아에게 한글 자모 카드를 보여 주던 것처럼. 기역, 니은, 아래아.서아는 자모 카드를 좋아했다. 글자를 좋아한 게 아니라 카드를 뒤집는 걸 좋아했다. 이응이 나오면 "동그라미!" 하고 소리쳤다. 기역이 나오면 모른 척하고 다음 장을 뒤집었다. 해인은 그게 벌써 편식이라고 웃었다.아래아는 점 하나였다. 서아였으면 이것도 동그라미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점 옆에 아주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두었다. 외울 때마다 그게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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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조선

마지막 장까지 가는 데 두 달이 걸렸다.도서관 벽의 금이 여든 개를 넘었다. 집 벽의 예순 몇 개를 더하면 백사십 몇 개. 반년이 조금 안 됐다. 이 세상에 온 지.금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었다. 휴게실 하얀 벽에. 가끔은 처음부터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세어 보았다. 두 번 세어 같은 수가 나와야 마음이 놓였다. 손가락 끝에 벽의 차가움이 남았다.그동안 필사 씨의 날들을 따라갔다. 한 장, 한 장.필사 씨는 열흘째에 관아 서고로 거처를 옮겼다. 종이와 붓이 있는 곳으로. 나는 그 줄을 읽고 한참 웃었다. 나는 도서관으로 왔다. 오백 년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선택을 했다.해인이 알았으면 웃었을 것이다. 당신은 어디 떨어져도 결국 책상 있는 데를 찾아간다고. 신혼 때 여행을 가서도 나는 숙소 책상부터 확인했다. 해인은 그걸 직업병이라고 불렀다. 필사 씨도 직업병이었을까.스무째 날쯤, 필사 씨도 무언가를 보았다.— 우물 물에 비친 제 얼굴 뒤로 키 큰 것이 서 있다. 낯이 없다. 돌아보니 없다.우물 물. 필사 씨의 세상에는 유리가 없었다. 거울도 귀했다. 대신 우물이 있었고, 물동이가 있었고, 놋그릇이 있었다. 그런 것들에 그게 비쳤다.나는 그 줄을 읽으며 두레박 줄을 당기는 손을 떠올렸다. 물을 길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길을 때마다 물이 거울이 된다. 고개를 돌린 채 줄만 당기는 사람. 나는 거울을 덮고 피해 다니면 됐다. 필사 씨는 목이 마를 때마다 그 앞에 서야 했다.필사 씨는 그걸 이렇게 불렀다.— 影食. 그림자를 먹는 것.영식. 나는 그 두 글자를 옥편에서 찾았다. 그림자 영(影), 먹을 식(食).그림자를 먹는 것.필사 씨도 그림자가 옅어지는 걸 알았다. 나처럼 재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썼다.— 몸을 씻지 아니하고 글을 쓰지 아니한 날에 그림자가 엷고, 影食이 가까이 선다. 갓을 바로 쓰고 먹을 갈면 그림자가 짙어진다.갓을 바로 쓰고 먹을 간다. 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운다. 필사 씨의 점검표였다.그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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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影食

필사 씨를 보내고 나서 며칠 동안, 나는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도서관은 넓었다. 매일 앉던 열람실 말고는 제대로 들어가 본 곳이 몇 없었다. 나는 층마다 붙은 안내도 앞에 서서 방 이름을 검은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하나씩 가위표를 쳐 나갔다. 불량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때, 라인을 하나씩 세워 가며 찾던 것처럼.조선 노트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 알아야 했다. 필사 씨는 오백 년 전 사람이었다. 필사 씨의 노트는 관아 서고에 있어야 했다. 필사 씨의 멈춘 조선에. 그런데 2026년 서울 구립 도서관 2층 남자 화장실 거울 밑에 있었다.거울 밑에.그게 걸렸다. 왜 하필 거울 밑이었을까.나는 도서관의 모든 거울 앞을 확인하기로 했다. 무서웠지만. 그림자가 1에 가까운 날을 골랐다. 씻고, 셔츠를 입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필사 씨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소리 내어 세 번 부르고. 그리고 거울 앞 바닥만 보기로 했다. 거울에는 눈을 주지 않고.화장실 문을 밀 때마다 숨을 참았다. 타일 바닥이 형광등 빛을 하얗게 되쏘았다. 세면대 위 거울이 눈 가장자리에 걸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의 줄눈만 따라 걸었다. 줄눈이 거울 밑 벽에 닿으면 거기서 멈췄다.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었다. 타일이 차가웠다.1층 여자 화장실. 거울 밑 바닥, 아무것도 없었다.1층 남자 화장실. 없었다.2층 여자 화장실. 없었다.3층, 4층. 장애인 화장실. 직원 화장실. 없었다.층을 옮길 때마다 계단참에서 잠깐 쉬었다. 여러 번 하면 무뎌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문을 하나 밀 때마다 처음처럼 무서웠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계단 난간을 쥐고 내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작게.어린이 자료실 벽에 붙은 커다란 안전 거울. 아이들이 얼굴을 비춰 보며 노는. 그 앞 마루. 없었다.그 거울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그림책을 든 아이들이 여기 앉아 거울에 대고 까꿍을 했을 것이다. 서아도 그랬을 것이다. 서아는 거울 속 자기를 보면 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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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누가 다녀갔다

눈을 뜨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씻지도 않고, 셔츠도 입지 않고. 점검표는 나중이었다. 열람실 창가 자리로.양말 바람으로 계단을 뛰었다. 난간을 잡은 손바닥이 쇠에 쓸렸다. 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울려 내려가지 않고 발밑에서 바로 꺼졌다. 그래서 더 급했다. 내 발소리가 나보다 먼저 가 주지 않았다.수학책은 그대로 있었다. 펼쳐진 채로. 그 위에 내가 남긴 쪽지도.숨이 차서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소리가 귀에 크게 들렸다. 수학책도 쪽지도, 내가 둔 자리에서 한 뼘도 옮겨 가지 않은 것 같았다.그런데 쪽지가 뒤집혀 있었다.내가 놓을 때는 글씨가 위로 오게 놓았다. 확실했다. 지금은 뒷면이 위였다. 그리고 그 뒷면에, 연필 글씨가 있었다.내 글씨가 아니었다. 기울어진 필기체. 영어. 흑연이 선명했다. 방금 쓴 것처럼.글씨는 크고 시원했다. 종이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반대쪽 면에 내 쪽지가 있으니 더 그랬다. 내 글씨는 한 자 한 자 따로 떨어져 서 있었다. 이 사람의 글씨는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나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서 종이가 사각거렸다.— I cannot wait. I only pass through. You are the new one who stays. The one before you knew a way to the others. Read again. — S.R.나는 그걸 읽는 데 한참 걸렸다. 사전을 가져왔다. 한 단어씩.사전은 참고 자료 서가에 있었다. 가지러 가는 동안 쪽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놓으면 없어질 것 같았다. 사전을 넘기는 손가락이 자꾸 헛돌았다. 두세 장씩 한꺼번에 넘어갔다. 다시 돌아가고, 또 넘어가고. 단어 하나를 찾는 데 평소의 두 배가 걸렸다.기다릴 수 없어요. 나는 지나갈 뿐이에요. 당신은 새로 머무는 사람이군요. 당신 전에 있던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가는 길을 알았어요. 다시 읽어 봐요. — S.R.새로 머무는 사람.The new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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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마주 선 거울

준비하는 데 열흘이 걸렸다.열흘은 짧지 않았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았다. 필사 씨는 두려워 오래 있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두려워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준비하고 싶었다.거울부터 구해야 했다. 필사 씨는 동헌의 큰 구리거울 둘을 옮겼다고 했다. 사람 키만 한 거울. 나도 그만한 걸 찾아야 했다.도서관 화장실 거울은 벽에 붙박이였다. 떼어 낼 수 없었다. 어린이 자료실 안전 거울은 너무 작았다.그래도 한 번은 확인했다. 눈은 타일 바닥에 두고, 손만 올려 거울 테두리를 더듬었다. 벽과 거울 사이에 손톱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손끝에 닿는 유리가 차가워서 금방 손을 내렸다.나는 동네 가구점에 갔다. 눈을 반쯤 감고. 전신 거울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손으로 더듬어 거울 뒷면을 찾았다. 나무 틀. 뒷면이 거울 쪽으로 가지 않게 끌어안고, 뒷걸음질로 가게를 나왔다.가게 안에는 가구 냄새가 고여 있었다. 새 나무와 니스 냄새. 눈을 감으니 냄새가 더 짙었다. 해인과 신혼집 가구를 보러 다니던 날이 떠올랐다. 해인은 소파마다 앉아 보았고, 나는 가격표마다 뒤집어 보았다. 결국 제일 싼 식탁을 샀다. 서아가 그 식탁 모서리에 이마를 박고 운 날, 나는 모서리마다 스펀지를 붙였다.두 개를 옮기는 데 하루씩 걸렸다. 자전거에 수레를 연결해 싣고, 거울 면이 하늘을 보게 눕히고, 그 위에 담요를 덮고. 도서관까지 끌었다. 계단으로 3층까지 올렸다. 혼자서. 거울 면이 내 쪽으로 돌지 않게 계속 틀어 가며.수레 바퀴가 아스팔트 틈에 걸릴 때마다 거울이 덜컹거렸다. 그때마다 자전거를 세우고 담요 위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깨지면 처음부터 다시였다. 멈춘 버스와 택시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페달을 밟는 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만 뒤에 끌려왔다.3층 자료실 한쪽, 서가를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거울 두 개를 담요를 덮은 채 마주 세웠다. 한 걸음 반 거리를 두고.한 걸음 반은 발로 재었다. 두 거울 사이에 서서 팔을 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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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거울 속 거울

한참 울고 나서, 나는 일어나 둘러보았다.떠 있는 돌바닥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가장자리 너머는 누런 허공이었다. 아래로 끝이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바닥 끝을 붙잡고 내려다보았다. 서가 조각들이 저 아래에도, 그 아래에도 떠 있었다. 아래로 갈수록 빛이 어두워졌다.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바닥 끝의 돌은 거칠었다. 모서리가 오래 깎인 것처럼 둥글게 닳아 있었다. 붙잡은 손바닥이 차갑게 저렸다. 아래에서 바람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끝없는 허공인데도 공기가 가만히 고여 있었다.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떨어지긴 할까. 조금 전 틈을 지날 때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떠 있었다. 이곳의 규칙은 바깥과 다른 것 같았다. 메아리가 있는 것처럼.나는 가장자리에서 물러났다.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돌바닥 한가운데까지 와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무릎에 돌바닥 자국이 붉게 찍혀 있었다.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얼얼했다.돌바닥 한쪽에 서가 하나가 서 있었다. 이 섬에 붙어 있는 유일한 서가. 반쯤 부서졌지만 선반 세 칸은 멀쩡했다. 그 선반에 책들이 꽂혀 있었다.아니, 책이 아니었다. 노트들이었다.나는 다가갔다. 손을 씻지 못한 게 걸렸다. 생수로 손을 헹궜다. 물이 돌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져서, 고였다. 멈추지 않고. 이곳에서는 내 손을 떠난 물도 흘렀다.고인 물에 누런 빛이 비쳤다. 나는 얼른 눈을 돌렸다. 물은 거울이 된다. 필사 씨의 우물처럼. 한참 있다가 곁눈으로만 보았다. 빛만 비쳐 있었다. 다른 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물웅덩이를 등지고 섰다.선반에 노트가 스무 권쯤 꽂혀 있었다. 모양이 제각각이었다.실로 묶은 누런 종이 묶음. 필사 씨의 것과 비슷한. 가죽 표지를 끈으로 감은 두꺼운 공책. 얇은 양피지를 말아 묶은 두루마리. 대나무 쪽을 엮은 것. 종이가 아니라 나무껍질 같은 것에 쓴 것. 그리고 스프링 공책. 요즘 것 같은. 표지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가죽 표지를 감은 끈이 삭아 있었다.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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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인벤토리

S.R.의 노트는 노트가 아니었다. 편지 묶음이었다.종이는 얇고 누르스름했다. 반으로 접힌 자국이 여러 번 겹쳐 있었다. 몇 번이고 접었다 편 종이였다. 끈은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한 번 잡아당기자 스르르 풀렸다.몇 장 되지 않는 종이에, 짧은 글이 여러 개. 날짜가 없었다. 대신 글마다 첫머리에 같은 말이 붙어 있었다.To the one who stays.머무는 이에게.나는 그 짧은 말을 한참 보았다.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머무는 것. 반년 동안 내가 한 일은 그것뿐이었다.한 장에 하나씩. 쓴 날이 다른 것 같았다. 잉크 색이 조금씩 달랐고, 어떤 건 연필이었다. 글씨의 기울기도 조금씩 달랐다. 어떤 건 차분하고, 어떤 건 급했다.종이를 코에 가까이 대 보았다. 연필 흑연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교실 냄새였다. 시험지를 받아 들던 아침의 냄새.나는 돌바닥에 앉아 첫 장부터 읽었다. 사전이 없어서 아는 단어만 이어 붙였다. 모르는 단어는 검은 노트에 베껴 두었다. 나중에 찾으려고.사전이 없으니 머릿속을 뒤졌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파란 표지. 단어장을 반으로 접어 뜻을 가리고 외우던 버스 안.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다. 남은 건 조각들이었다. 나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이어 붙였다. 틀린 데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어 붙였다.첫 번째 편지.— To the one who stays. I pass through here when I am close to something. I do not know why. I see things here before I can prove them. Maybe you are the same.머무는 이에게. 나는 무언가에 가까워질 때 이곳을 지나간다. 왜인지는 모른다. 나는 여기서, 증명하기 전에 먼저 본다. 어쩌면 당신도 그럴지 모른다.무언가에 가까워질 때.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무엇에 가까워진다는 걸까. S.R.은 그걸 설명하지 않았다.그 줄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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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사전

영어는 중학교 삼 년, 고등학교 삼 년, 대학 교양 두 학기를 배웠다.그리고 거의 다 잊었다.잊은 건 단어만이 아니었다. 문장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하는지부터 몰랐다. 남은 건 품질 규격서에 나오는 약어 몇 개와 커피 전문점 메뉴판의 단어들뿐이었다.입사 시험 때 토익 점수를 겨우 맞췄다. 해외 협력사와 메일을 주고받을 때는 번역기를 돌렸다. 해인은 영어를 잘했다. 영업팀이라 외국 바이어를 상대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면 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영어로 인사하며 놀렸다. "Hi, honey. Did you miss me?" 나는 "미스 유 투" 하고 한국말처럼 대답했다.그 영어를, 처음부터 다시.해인이 옆에 있었으면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틀릴 때마다 웃으면서. 나는 그 웃음을 들으려고 일부러 더 틀렸을지도 모른다.도서관 외국어 서가에 영어 교재가 한 칸 가득이었다. 기초 문법, 중급 독해, 단어장, 회화책. 나는 기초 문법부터 뽑았다. 표지에 '왕초보도 30일이면'이라고 적혀 있었다.책등이 딱딱했다.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은 새 책이었다. 펼치자 풀 냄새가 났다. 첫 장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나에게 30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나는 그 문구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서른 날. 벽에 금 서른 개. 그건 이미 몇 번이나 그었다. 웃음소리는 몇 걸음 앞에서 사라졌다.방법은 필사 씨의 노트를 해독할 때와 같았다. 쪼갠다. 아는 것부터 확정한다. 하지만 이번엔 교재가 있었다. 누군가 이미 쪼개 놓은 순서. 나는 그 순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교재 첫 장에 이름 쓰는 칸이 있었다. 나는 거기 이름을 적었다. 이우진. 도서관 책에 이름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적었다.1과. 인칭대명사. I, you, he, she.나는 그 네 단어를 소리 내어 읽었다. 아이, 유, 히, 쉬. 목소리가 몇 걸음 안에서 사라졌다. 괜찮았다. 한 번 더. 아이, 유, 히, 쉬.해인의 발음을 따라 해 보았다. Hi, honey. 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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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머무는 자에게

엠마네의 공책을 끝까지 읽는 데 넉 달이 걸렸다.영어 사전은 그사이 두 권째가 됐다. 첫 권은 손때가 올라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다. 자주 찾는 쪽마다 볼펜으로 밑줄을 그었더니, 책을 옆에서 보면 종이 끝이 줄무늬처럼 거뭇했다.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펴고, 뜻을 찾아 공책 여백에 적고, 다시 엠마네의 문장으로 돌아갔다. 한 줄을 읽는 데 열 번씩 사전을 편 날도 있었다. 엠마네의 글씨체에도 익숙해졌다. 소문자 g의 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는 버릇. 처음엔 그 꼬리 때문에 아랫줄 글자를 잘못 읽었다.도서관 벽의 금이 이백을 넘었다. 집 벽까지 더하면 이백육십 남짓. 필사 씨가 버틴 날수를 넘었다.그걸 알아챈 날, 나는 휴게실 벽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필사 씨는 이백오십 날쯤에서 날짜를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이백육십 날. 날짜는 헷갈리지 않았다. 매일 아침 금을 긋고, 이름을 쓰고, 점검표 일곱 칸에 동그라미를 쳤다.나는 금들을 처음부터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다시 세었다. 두 번 세었다. 두 번 다 같았다. 연필 자국이 손끝에 까맣게 묻어났다.필사 씨가 넘지 못한 선을, 나는 넘었다.기쁘지 않았다. 필사 씨에게 미안했다. 그날은 필사 씨의 노트를 펼쳐 첫 장을 다시 읽었다. 第一日. 해가 지지 아니하니. 그리고 필사 씨에게 절을 했다. S.R.이 그랬던 것처럼. 말 없이.엠마네는 필사 씨와 다른 길을 갔다.처음 몇 달은 비슷했다. 헤매고, 부수고, 호텔에 가고. 엠마네는 시카고의 가장 높은 빌딩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썼다. 계단으로 백몇 층을. 사흘 걸렸다고. 거기서 미시간 호수를 내려다보았다고. 호수가 유리처럼 멈춰 있었다고.나는 우리 아파트 12층을 오를 때도 10층 계단참에서 한 번 쉬었다. 엠마네는 백몇 층을 사흘에 걸쳐 올랐다. 계단참마다 주저앉아 숨을 고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꼭대기에 가면 뭔가 보일 거라고 믿었을까.그리고 엠마네도 거울 속의 그것을 보았다.— There's something in the mi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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