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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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미술관

스무 번째 금을 그은 날, 나는 미술관에 갔다.계획한 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목적 없이 달리다가 덕수궁 돌담길로 접어들었다. 돌담이 끝나는 곳에 미술관이 있었다.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특별전. 인상파 거장전. 해인이 가자고 했던 전시였다. 지난달에 개막했고, 우리는 "주말에 가자" 하고 두 번 미뤘다. 서아를 누구한테 맡기느냐 때문에.돌담길은 해인과 연애할 때 자주 걷던 길이었다. 연인이 이 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해인은 그 말을 알고 일부러 내 손을 잡고 끝까지 걸었다. 헤어지나 안 헤어지나 보자고.현수막 속 그림은 연못 위 수련이었다.현수막 끝이 바람에 말려 올라간 채 멈춰 있었다. 연못의 한쪽 귀퉁이가 접혀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접힌 귀퉁이를 한참 올려다보았다.자전거를 세웠다.미술관 정문 유리문은 잠겨 있었다. 9시 반 개관이었다. 53분에는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나는 문 앞에 한참 서 있다가, 백팩에서 배트를 꺼냈다. 부수기 이후로 늘 들고 다녔다. 지팡이 삼아.유리문을 깨려다 멈췄다.이 문은 깨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휴대폰 매장 유리는 잘만 깼으면서.나는 배트를 도로 백팩에 꽂았다. 손잡이가 지퍼 사이로 삐죽 나왔다. 유리문에 비친 내가 조금 멋쩍어 보였다.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뒤편에 직원 출입구가 있었다. 쇠문이었다. 열쇠 구멍이 있었다. 잠겨 있었다.그 옆 경비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경비실 벽 열쇠함에 열쇠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름표가 붙은. 나는 창문 틈으로 팔을 넣어 '직원 출입구'라고 적힌 열쇠를 떼어 냈다.비상용 열쇠, 마스터키, 경비실 열쇠. 요즘 내가 모으는 것들이었다.열쇠는 차갑고 묵직했다. 톱니 끝이 닳아 둥글었다. 오래 쓴 열쇠였다. 누군가 매일 아침 이걸로 이 문을 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조금 조심스럽게 열쇠를 돌렸다.문이 열렸다.미술관 안은 서늘했다.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림을 비추는 부드러운 노란 빛. 전시실 입구에 작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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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롤러코스터

스물네 번째 금을 긋고, 나는 놀이공원에 갔다.서아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곳이었다. 서아가 세 살이 되면. 회전목마를 태우고, 솜사탕을 사 주고, 해인과 번갈아 서아를 목말 태우고. 연간 회원권이 싸다는 광고를 보고 해인이 "우리 이거 사자" 했었다. 서아가 세 살이 되는 내년 봄에.해인은 그 광고를 사진으로 찍어 나한테 보냈다. 나는 엄지를 치켜든 그림으로 답했다. 그 대화는 지금 까만 휴대폰 안에 있었다. 다시 열어 볼 수 없는 채로.자전거로 두 시간이 걸렸다. 강을 건너고, 언덕을 넘고.언덕길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허벅지가 먼저 지쳤다. 가로수 그늘이 아스팔트 위에 오려 붙인 것처럼 또렷했다. 그늘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늘에서 그늘로 건너가며 걸었다.놀이공원 입구 게이트는 개장 전이라 닫혀 있었다. 10시 개장. 나는 매표소 옆 낮은 울타리를 넘었다.울타리를 넘다가 바짓단이 철사에 걸렸다. 찌익. 무릎 옆이 한 뼘쯤 찢어졌다. 해인이 봤으면 그 바지 얼마 주고 산 건지 아느냐고 했을 것이다. 나는 찢어진 자리를 손으로 한 번 눌러 보고 걸었다.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개장 전의 놀이공원. 직원들이 준비하다 멈춘 흔적들이 보였다. 청소 카트가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솜사탕 기계 앞에 설탕 봉지가 뜯긴 채 놓여 있었다. 풍선 장수의 수레에 헬륨 풍선 수십 개가 묶여 떠 있었다. 줄이 팽팽했다. 풍선들은 하늘로 올라가려는 모양 그대로 멈춰 있었다.나는 풍선 하나의 줄을 풀었다.빨간 풍선이 내 손 위로 둥실 떠올랐다. 내 손이 줄을 쥐고 있는 동안은. 손을 폈다. 풍선이 한 뼘 올라가다가, 멈췄다. 내 머리 위 한 뼘에서.나는 그 풍선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날아가지도 않는 풍선. 영원히 내 머리 위에서 기다리는.풍선 표면에 햇빛이 한 점 맺혀 있었다. 고무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줄을 쥐었던 손가락에 가느다란 자국이 남았다. 서아는 풍선을 받으면 꼭 줄을 손목에 감아 달라고 했다. 놓칠까 봐. 그래서 서아는 풍선을 한 번도 놓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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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권태

롤러코스터 꼭대기에서 깬 날부터, 나는 목록을 만들었다.출석부 종이 뒷면이 거의 다 찼다. 그래서 문구점에서 공책을 한 권 가져왔다. 스프링 공책, 표지가 하늘색인. 계산대에 이천 원을 올려놓고. 엽서 이후로 생긴 규칙이었다. 오래 가질 물건은 값을 치른다.하늘색은 서아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서아는 하늘색을 그냥 '하늘'이라고 불렀다. 크레파스 통에서 하늘만 먼저 닳았다. 나는 공책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고 첫 장을 폈다.공책 첫 장에 썼다.— 해 볼 것그리고 적었다. 생각나는 대로.1. 백화점 명품관에서 제일 비싼 시계 차 보기.2. 야구장 마운드에서 공 던지기.3.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의장석에 앉기.4. 남산타워 꼭대기.5. 청와대. (지금은 개방돼 있던가. 상관없다.)6. 방송국 뉴스 스튜디오 앵커석.7. 공항 활주로 한가운데 눕기.8. 한강 다리 난간 위 걷기. (조심해서.)9. 영화관 제일 좋은 자리. (영화는 못 틀겠지만.)10. 해인이랑 가려던 곳 다 가기.열 개를 적고 나니 신이 났다. 롤러코스터 꼭대기에서 느낀 이상한 평온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떨어질 수 없는 세상이라면, 떨어질 걱정 없이 뭐든 해 보자. 그런 마음이었다.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번호를 매기는 게 좋았다. 회사에서 점검표를 만들 때처럼. 칸을 만들고, 순서를 정하고,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것. 그건 내가 잘하는 일이었다.그리고 하나씩 지워 나갔다.지울 때는 볼펜으로 줄을 두 번 그었다. 한 번은 성에 차지 않았다. 두 줄 사이로 글씨가 비쳐 보였다. 한 일은 지워져도 보였다.1번. 백화점 명품관. 유리 진열장 안에 시계가 있었다. 가격표에 동그라미가 여덟 개. 진열장은 잠겨 있었다. 배트로 깼다. 유리 폭포. 시계를 꺼내 찼다. 무거웠다. 초침이 멈춰 있었다. 할아버지 시계처럼. 삼억짜리 시계도 삼십만 원짜리 시계도, 여기서는 똑같이 8시 53분이었다. 나는 명품 시계를 풀어 진열장에 돌려놓고 할아버지 시계를 다시 찼다.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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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소리

처음엔 몰랐다. 소리가 없다는 게 이렇게 무거운 줄.첫날부터 소리는 없었다. 차 소리, 바람 소리, 사람 소리. 하지만 그때는 다른 게 너무 많았다. 멈춘 비둘기, 떠 있는 커피, 비어 버린 어린이집. 소리가 없다는 건 그 목록의 한 줄일 뿐이었다.한 달쯤 지나서야 소리 없음이 목록에서 빠져나와 나를 덮쳤다.그날도 아침이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후루룩, 소리가 났다. 내 입에서. 젓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 딸깍. 국물을 삼키는 소리, 꿀꺽.그리고 멈추면, 아무것도 없었다.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숨을 참아 보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냉장고 모터도, 시계 초침도, 창밖 차 소리도, 옆집 텔레비전도, 윗집 발소리도, 먼 공사장도, 새소리도, 바람에 창문이 떨리는 소리도.사람 사는 곳에는 늘 소리가 있었다. 너무 늘 있어서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 그게 전부 빠져나간 자리가, 이렇게 컸다.우리 집에도 있었다. 아침마다 계단을 내려가던 해인의 구두 소리. 서아가 숟가락으로 식판을 두드리던 소리. 냉장고가 밤중에 혼자 웅 하고 도는 소리. 들을 때는 몰랐다. 없어지고 나서야 그게 다 소리였다는 걸 알았다.숨을 참은 채로 있자 귓속에서 뭔가가 울리기 시작했다.삐——가늘고 높은 소리. 아주 멀리서, 아니 아주 가까이서. 귀 안쪽 깊은 데서.이명이었다.아무 소리도 없으니까 귀가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거였다. 내 몸이 만든 소리. 그게 이 세상에서 들리는 유일한 바깥 소리 같았다. 바깥이 아닌데도.나는 숨을 내쉬었다. 이명이 조금 물러났다. 숨소리가 그걸 덮었다.그날부터 이명이 떠나지 않았다.처음엔 귀를 후볐다. 새끼손가락으로, 면봉으로. 귀지가 문제인 줄 알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반대쪽 귀를 손바닥으로 톡톡 쳐 보기도 했다. 수영장에서 물 들어간 귀를 털 듯이. 소리는 그대로였다.조용해지면 왔다. 자전거를 멈추면, 공책에 글씨를 쓰다 손을 멈추면, 잠들기 직전에. 삐——. 소리 없는 세상의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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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금

혼잣말이 대답을 하기 시작한 건, 기타를 친 지 열흘쯤 됐을 때였다.그날 나는 부엌에서 달걀을 부치고 있었다. 마트에서 새로 가져온 달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달걀을 깼다. 치익.기름이 튀었다. 손등에 한 방울이 떨어져 따끔했다.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 퍼졌다기보다 프라이팬 위에 둥글게 고여 있었다. 흰자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오그라들었다."노른자 터뜨리지 마."해인의 목소리였다.나는 뒤돌아보았다. 부엌 입구에 아무도 없었다. 식탁에도, 거실에도.그리고 알았다. 그 말을 한 게 나라는 걸. 내 입이, 해인의 말투로, 해인이 늘 하던 말을 한 거였다. 해인은 내가 달걀을 부칠 때마다 노른자 터뜨리지 말라고 했다. 나는 늘 터뜨렸다. 해인은 반숙을 좋아했고 나는 완숙을 좋아했다.프라이팬을 내려다보았다. 노른자가 동그랗게 살아 있었다."……알았어."대답했다. 해인에게. 아니, 나에게.그날 이후로 그런 일이 잦아졌다.처음에는 어쩌다 한 번이었다. 그러다 하루에 몇 번. 목소리는 늘 내가 뭔가를 하던 중에 왔다. 손이 바쁠 때, 머리가 비어 있을 때.자전거를 타다 신호등 앞에서 습관처럼 멈추면, "아빠, 초록 불!" 서아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서아는 신호등을 좋아했다. 초록 불이 켜지면 손뼉을 쳤다. 여기서는 초록 불이 영원히 켜져 있었다. 서아는 영원히 손뼉을 칠 수 있었다.빨래를 개다가 양말 짝을 못 맞추면, "짝짝이도 괜찮아." 해인이었다. 아니, 해인은 짝짝이를 싫어했다. 그건 서아였다. 서아가 짝짝이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서아가 할 말을 해인의 목소리로 내가 한 거였다.뒤섞이기 시작했다.처음엔 좋았다.솔직히, 좋았다. 한 달 넘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소리를 지르면 삼켜지고, 종을 치면 사라지고, 기타를 치면 줄이 멈추는 순간 끝났다. 그런데 이 목소리들은 대답을 했다. 내가 말을 걸면, 돌아왔다. 메아리처럼. 이 세상에 없는 메아리가, 내 안에서.아침에 눈을 떠도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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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씻지 않은 날

씻는 건 일이었다.물이 나오지 않으니까. 샤워 한 번 하려면 생수를 스무 병은 따야 했다. 마트에서 생수를 날라 12층까지 올리고, 욕실에서 한 병씩 따서 머리에 붓고. 차가운 물을. 데우려면 냄비에 붓고 가스에 올리고 기다렸다가 욕실까지 날라야 했다.처음 한 달은 그걸 매일 했다. 해인이 늘 말했으니까. 사람은 씻어야 사람이라고. 해인은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씻고 잤다. 술에 취해 들어온 날도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았다.찬물이 정수리에 닿으면 숨이 턱 막혔다. 어깨가 저절로 올라갔다. 욕실 타일은 맨발로 서 있기 힘들 만큼 차가웠다. 그래도 했다. 해인이 보면 잘했다고 할 것 같아서.그러다 이틀에 한 번이 됐다.사흘에 한 번이 됐다.어느 날 문득 알았다. 마지막으로 씻은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는 걸.공책을 펼쳤다. 날마다 한 줄씩 적던 공책. 거슬러 올라가며 '씻음'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없었다. 한 장 넘기고, 또 한 장. 여섯 장을 넘겨서야 있었다. 서른여덟. — 씻음. 머리까지.종이를 넘기는 손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내 글씨가 낯설었다. 뒤로 갈수록 글씨가 작아지고 삐뚤어졌다. 줄을 벗어난 날도 있었다. 한 줄도 없는 날도 있었다.지금은 마흔다섯 번째 금 근처였다. 금이 몇 개인지 이제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근처였다.벽 앞에 가서 다시 셌다. 마흔넷, 마흔다섯, 마흔여섯. 셀 때마다 달랐다. 몇 개는 서로 너무 붙어 있어서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었다.일주일.일주일 동안 씻지 않았다. 몰랐다. 냄새를 맡지 못했으니까. 바람이 없는 세상에서 냄새는 멀리 가지 않았다. 내 냄새는 내 몸에 딱 붙어서, 내가 맡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옷도 같았다. 회색 후드 티. 언제부터 입었는지 몰랐다. 소매가 까맣게 때가 탔다. 무릎이 나온 운동복 바지. 양말은 한쪽에 구멍이 났다.후드 소매를 코에 대 보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났다. 그게 더 이상했다. 냄새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그 냄새가 되어 있었다.나는 욕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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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그림자

확인 필요.그 네 글자가 공책 위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삼 년 동안 불량 보고서 맨 끝에 수백 번 쓴 말이었다. 원인 불명, 추가 확인 필요. 그리고 확인은 늘 내 몫이었다.그래서 확인하기로 했다.회사에서 불량 판정은 늘 기준 시료와 나란히 놓고 했다. 눈으로 대충 보면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 같은 사람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게 본다. 기준이 있어야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 수 있었다.기준이 필요했다. 매일 같은 자리, 같은 빛, 같은 자세. 거실 창가, 첫날 해를 쟀던 자리가 좋았다. 영원한 아침 햇살이 늘 같은 각도로 들어왔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었다. 빛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실험하기엔 완벽한 조건이었다.바닥에 마스킹 테이프로 발자국 두 개를 붙였다. 매일 거기 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떨어지는 마루 위에 테이프로 눈금을 그었다. 머리끝, 어깨, 손끝이 닿는 자리.테이프는 공구함에 있었다. 이사 올 때 해인이 가구 자리를 표시하던 테이프였다. 소파는 여기, 서아 침대는 여기. 그때 붙였다 뗀 자국이 아직 마루 몇 군데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발자국 두 개는 내 발보다 조금 크게 붙였다. 매일 발끝을 테이프 앞 선에 맞추기로 했다. 공장 검사대처럼. 기준이 흔들리면 측정도 흔들린다.그리고 서아의 스케치북을 가져왔다. 크레파스와 함께 거실 서랍에 있던 것. 서아가 동그라미 몇 개를 그려 놓은 첫 장을 넘기고, 둘째 장부터 썼다.첫 장의 동그라미들은 크기가 다 달랐다. 크레파스를 꽉 쥐고 힘을 줘서 종이가 조금 찢어진 데도 있었다. 서아는 이게 엄마고 이게 아빠라고 했었다. 나는 그 장을 조심해서 넘겼다.매일 그 자리에 서서, 그림자의 가장자리를 관찰하고, 등급을 매겼다.1 — 칼로 자른 듯 또렷함.2 — 조금 번짐.3 — 먹물처럼 풀림.4 — 가장자리가 안 보임.5 — 모르겠음.5는 없기를 바랐다.첫날, 씻고 셔츠를 입은 다음 날. 2.처음 적는 숫자라 한참 망설였다. 1이라고 쓰고 싶었다. 그런데 손끝 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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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유리문

점검표를 만든 지 열하루째 되던 날, 나는 동그라미를 두 개 빼먹었다.적는다, 말한다.그 열흘은 나쁘지 않았다. 아침마다 창가 테이프 위에 서서 그림자를 재고, 스케치북 점검표 여섯 칸에 동그라미를 쳤다. 씻는다, 동그라미. 입는다, 동그라미. 먹는다, 적는다, 말한다, 기억한다. 동그라미 여섯 개가 한 줄로 늘어서면 이상하게 뿌듯했다. 회사에서 불량률 영 퍼센트 보고서를 올리던 날처럼. 그림자는 1과 2 사이를 오갔다. 해인에게 편지를 열 통 썼다. 기타로 F 코드를 잡는 데 성공했다. 서아를 위해 곰 세 마리를 C와 G와 F로 칠 수 있게 됐다. 조금 틀렸지만.아침마다 테이프 위에 발끝을 맞추고 서면 마루가 발바닥에 서늘했다. 그림자를 재고 나서 동그라미를 쳤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좋았다. 서아에게 곰 세 마리를 쳐 줄 때는 소파 쪽을 보고 쳤다. 서아가 늘 앉던 쪽이었다.열하루째 아침에 그게 끊겼다.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오늘은 안 되겠다는 걸. 몸이 무거웠다. 머리가 멍했다. 천장의 빛줄기를 보는데, 그 빛줄기가 너무 지겨워서 눈물이 났다. 육십 번째 아침. 아니, 예순 몇 번째. 똑같은 빛줄기.이불 속이 따뜻했다. 나가기 싫었다. 베개 옆에 둔 서아의 실내화를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거기 있었다. 그걸 쥐고 조금 더 누워 있었다.씻고, 입고, 먹었다. 몸의 세 칸은 채웠다. 억지로. 그리고 공책을 펴다가 덮었다. 쓸 게 없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또 적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기타도 치지 않았다. 혼잣말도 하지 않았다. 해인의 목소리도 서아의 목소리도 떠들지 않았다. 조용했다.셔츠 단추를 채우다 말았다. 단추가 자꾸 손가락을 피했다. 나는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편했다. 그게 문제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이명만 있었다. 삐——.나는 식탁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식탁 위 포도가 싱싱했다. 해인의 머그잔이 제자리에 있었다. 모든 게 어제와 같았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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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도서관

그 뒤로 나는 비치는 것들을 세기 시작했다.유리창, 거울, 꺼진 텔레비전 화면, 자동차 창문, 사이드미러, 스테인리스 냄비 바닥, 숟가락 뒷면, 물이 고인 대야,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휴대폰의 검은 화면.세상은 비치는 것투성이였다.집 안만 해도 서른 개가 넘었다. 욕실 거울, 현관 거울, 안방 화장대 거울, 거실 텔레비전, 베란다 통유리, 전자레인지 문, 냉장고 문, 식탁 유리, 액자 유리, 서아 방 창문. 스테인리스 냄비들. 해인의 손거울.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덮었다. 수건으로, 이불로, 종이로. 텔레비전에는 담요를 씌웠다. 베란다 통유리에는 암막 커튼을 쳤다. 식탁 유리는 들어서 베란다에 세워 벽 쪽을 보게 했다. 해인의 손거울은 서랍 깊숙이 넣었다.욕실 거울에는 이미 수건이 걸려 있었다. 현관 거울에는 해인의 겨울 목도리를 둘렀다. 전자레인지 문에는 달력을 한 장 찢어 붙였다. 냄비들은 엎어 놓았다. 숟가락은 서랍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덮고 나니 집이 이상해졌다. 모든 게 천을 뒤집어쓴 집. 이사 가는 날 같기도 하고, 장례식 날 같기도 했다.천 아래 모서리들이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집 안이 조금 어두워졌다. 암막 커튼 틈으로 빛줄기 하나만 새어 들어왔다. 나는 그 빛줄기를 따라 걸었다. 거실 창가 테이프 자리까지는 커튼을 반 뼘 걷어 두었다. 그림자는 재야 했으니까.그래도 그게 나았다.그 뒤로 사흘은 그게 보이지 않았다. 점검표 여섯 칸을 다 채웠다. 그림자는 2. 편의점에는 가지 않았다. 컵라면이 떨어져도.편의점 대신 집에 남은 것들로 먹었다. 통조림, 찬장 구석의 누룽지, 서아 간식 서랍의 쌀과자. 쌀과자는 봉지 안에서 반쯤 부스러져 있었다. 서아가 들고 다니며 쥐었다 놓았다 한 봉지였다.나흘째, 쌀이 떨어졌다.마트에 가야 했다. 마트까지 칠 분. 그 칠 분 동안 상가 유리창이 몇 개인지 나는 이미 세어 두었다. 스물세 개. 마트 안에는 셀 수도 없었다. 냉장 진열대 유리문만 수십 개였다.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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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노트

도서관에 온 지 열흘째, 나는 제대로 된 기록을 시작하기로 했다.지금까지 쓴 건 기록이 아니었다. 출석부 뒷면, 하늘색 스프링 공책, 서아의 스케치북. 여기저기 흩어진 메모들. 날짜도 들쭉날쭉하고, 쓴 날보다 안 쓴 날이 많았다. 불량 보고서로 치면 반려감이었다.출석부 종이는 접힌 자리가 닳아 글씨가 번져 있었다. 하늘색 공책은 스프링이 휘었다. 스케치북 뒷장은 그래프와 점검표와 크레파스 그림이 뒤섞여 있었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기록이었다. 나도 가끔 못 알아봤다.도서관에는 종이가 끝도 없었다. 사무실 비품 창고에서 두꺼운 양장 노트를 찾았다. 검은 표지, 삼백 쪽, 줄이 그어진. 회계 장부로 쓰려고 사 둔 것 같았다. 스무 권이 박스째 쌓여 있었다.박스 테이프를 뜯자 새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표지는 인조가죽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서늘하고 매끈했다. 처음 펼치자 제본이 빳빳하게 버티다가 쩍, 하고 벌어졌다.한 권을 꺼냈다. 매점 계산대에 삼천 원을 놓았다. 값을 치르는 규칙.열람실 긴 책상에 앉았다. 창이 높은 곳에 있어서 빛이 위에서 비스듬히 떨어졌다. 책상 위에 네모난 빛이 누워 있었다. 그 빛 한가운데 노트를 펼쳤다.빛 속에 먼지가 떠 있었다. 수백 개의 작은 점이 제자리에 매달려 반짝였다. 손을 넣어 휘저으면 내 손가락 둘레만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멈췄다. 노트 첫 장은 새하얬다. 종이가 빛을 받아 눈이 조금 시렸다.첫 장.노트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종이가 매끄러웠다. 첫 장에 무엇을 쓰느냐가 이 노트의 얼굴이 될 것 같았다.무엇을 먼저 써야 할지 몰라서 한참 연필을 들고만 있었다.연필 끝을 깎았다. 커터 칼로. 나무 부스러기가 책상에 떨어졌다. 흑연 냄새가 났다. 회사에서 도면에 치수를 적을 때 쓰던 연필과 같은 냄새였다.그러다 썼다.연필심이 종이를 누르는 감촉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이서아.서아의 이름이었다. 첫 줄에.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이 먼저 썼다.그 아래.— 윤해인.— 이우진.세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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