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상의 뒷면: Chapter 51 - Chapter 60

85 Chapters

51화. 장수

흐르는 물은 비친다.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물시계를 만드는 석 달 스무 날 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세상의 물은 멈춰 있었으니까. 멈춘 물은 유리구슬 같았다. 단단하고, 뿌옇고,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한강도, 분수도, 식판 위 포도알의 물기도.그런데 흐르는 물은 달랐다.물시계가 흐른 지 열이틀째 아침이었다. 나는 녹차를 우리고 나서 늘 하던 대로 대나무 통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잣대의 눈금을 읽으려고. 검은 노트에 적으려고. 한 눈금이 얼마인지 아직 재는 중이었다.맨 위 옹기를 올려다보았다.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그리고 수면에서, 그것을 보았다.내 얼굴 뒤에. 한 걸음. 머리 하나 더 큰. 먹물처럼 번지는 윤곽. 얼굴 자리가 매끈하게 빈.지우는 것.나는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바닥이 바닥을 짚었다. 돌아보았다. 등 뒤는 비어 있었다. 로비, 신간 코너, 소파, 녹차 잔. 아무것도.다시 옹기를 보았다. 올려다보는 각도에서는 수면이 보이지 않았다. 물의 가장자리만.일어서서 수면을 내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뛰었다.삼 년 넘게 나는 비치는 것을 피해 살았다. 거울은 덮고, 유리는 등지고, 화장실 거울엔 수건을, 편의점 유리문엔 방수포를. 멈춘 물은 비추지 않아서 괜찮았다. 이 세상에서 물은 안전했다.내가 그걸 흐르게 만들었다.내 손으로. 석 달 스무 날 걸려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것을 만들었고, 그건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새로운 거울이었다.덮어야 했다.나는 담요를 가지러 휴게실로 뛰어가려다 멈췄다. 옹기를 덮으면. 물 위에 뭔가를 얹으면. 그건 내 손을 떠난 것이 물에 닿는 것이었다. 멈출까. 물이. 흐름이 끊길까.물시계를 깨면 되었다. 옹기 하나만 깨면. 물이 쏟아지고, 공중에 멈추고, 끝.나는 쇠톱을 쥐었다. 받침대 옆에 세워 둔.손이 떨렸다.똑.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 번째 옹기로.똑.나는 쇠톱을 쥔 채로 그 소리를 들었다. 열이틀 동안 매일 밤 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2화. 거울 글씨

그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 첫 손님이었다.물시계 앞이었다. 갑옷 입은 사람이 다녀가고 스무 날쯤 뒤. 나는 녹차를 우리고 나서 맨 위 옹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수면 속 한 걸음 뒤의 그것. 셋을 세고 눈을 돌리려는데, 수면에 다른 것이 비쳤다.내 어깨 옆에. 그것의 반대편에. 사람의 손.손가락이 길고, 손등에 붉은 분필 가루가 묻은.나는 돌아보았다. 천천히.한 사람이 내 옆에 서서, 나와 같이 옹기의 수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긴 붉은 겉옷이었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장밋빛에 가까운 붉은색. 허리를 띠로 묶었다. 어깨에 둥근 모자 같은 것을 비스듬히 얹었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어깨를 넘어 흘러내렸다. 허리춤에 작은 수첩을 가죽끈으로 매달았다.그 사람은 내 쪽으로 눈을 주지 않았다. 물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물이 구멍으로 빠져나가며 가장자리에 만드는 작은 소용돌이를.나는 허리를 숙였다. 영어로 말했다."Good morning. My name is Lee Woojin. I am the one who stays."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우진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사람입니다.)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그 사람의 가슴께, 겉옷의 여밈에 두었다.그 사람이 뭔가를 말했다. 빠르고, 노래하는 듯한 말이었다. 모음이 둥글고 길었다. 끝이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영어가 아니었다. 일본어도, 산스크리트도, 타밀어도 아니었다.나는 일본어로 다시 인사했다. 그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문으로 이름을 적어 보였다. 李宇鎭. 그 사람이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글자의 획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신기한 그림을 보듯이.말이 통하지 않았다.삼 년 넘게 말을 배웠다. 남이 남긴 글을 읽으려고. 누군가를 만나려고.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사람과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나는 조금 막막해졌다.그 사람은 막막해하지 않았다.허리춤의 수첩을 풀었다. 붉은 분필 조각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3화. 어긋남

그 두 사람은 같은 날 왔다.지금까지 손님은 늘 하나였다. 한 사람이 오고, 머물고, 사라지고. 그 다음이 올 때까지 나는 혼자였다. 두 사람이 한 번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몰랐다.아침이었다. 녹차를 우리고, 수면의 그것을 셋까지 보고, 잣대를 읽고. 한 눈금이 얼마인지 이제 알았다. 잠을 기준으로 재 보니, 대략 한 눈금에 한 시간 반. 대나무 통이 다 차면 옹기에 물을 다시 부었다.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점검표 옆에 적혀 있었다.잣대를 읽고 돌아서는데, 로비 소파에 누가 앉아 있었다.신간 코너 옆, 내가 매일 자는 소파. 그 끝에. 다리를 꼬고. 내 녹차 잔을 들여다보며.옷이 이상했다. 몸에 꼭 맞는 짙은 남색의 한 벌. 이음매가 보이지 않았다. 단추도, 지퍼도. 천이 아니라 한 장의 막을 두른 것 같았다.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남색이 조금씩 초록으로 번졌다. 신발은 발 모양 그대로 감싼 얇은 것. 소리가 나지 않을 것 같은.나는 허리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이우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머무는 사람입니다."그 사람이 잔에서 눈을 들었다. 나는 가슴께를 보았다. 남색의 매끈한 면."아, 한국어 하시네. 다행이다."여자의 목소리였다. 빠르고 가벼웠다. 억양이 조금 이상했다. 서울말인데, 끝이 묘하게 짧게 끊겼다. 받침 몇 개가 흐려졌다."저도 한국 사람이에요. 서울. 이런 데가 진짜 있구나.""……어느 때에서 오셨어요?"그 사람이 연도를 말했다. 나는 되물었다.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지금으로부터 백칠십 년쯤 뒤였다.나는 소파 맞은편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그쪽은요?""이천이십육 년이요. 구월의 어느 화요일.""와, 옛날 분이다."그 사람이 웃었다. 악의 없이. 나는 조금 웃었다. 세종 앞에서 내가 옛날 사람이었듯이."그런데 글자는 같네요."그 사람이 신간 코너의 책 한 권을 가리켰다. 표지의 한글."백칠십 년 뒤에도 한글을 써요?""그럼요. 좀 달라지긴 했는데. 받침 몇 개 안 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4화. 누구의 말이 맞나

나는 재기 시작했다.품질관리팀 이 대리의 버릇이었다. 두 사람이 다른 말을 하면, 재 본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숫자가 정한다. 협력사 부장이 치수가 맞다 하고 생산팀 과장이 틀리다 하면, 나는 캘리퍼스를 들고 가서 쟀다. 숫자 앞에서 둘 다 조용해졌다.느린 방인가, 빈 방인가.재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첫째, 해.열람실 동쪽 창에 해가 걸려 있었다. 삼 년 넘게 같은 자리에. 나는 창유리에 붉은 마커로 해의 테두리를 그렸다. 동그랗게. 그리고 그 테두리와 해 사이의 틈을 캘리퍼스로 쟀다. 유리에 대고. 0.00밀리미터.유리에 댄 캘리퍼스 끝이 차가웠다. 나는 눈금을 읽을 때마다 숨을 참았다. 회사에서 들인 버릇이었다. 숨을 쉬면 손이 흔들리고, 손이 흔들리면 끝자리가 달라진다.그리고 물시계로 열 눈금을 기다렸다. 다시 쟀다. 0.00.스무 눈금. 0.00.백 눈금. 나흘 뒤. 0.00.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둘째, 수염.나는 턱의 수염 한 가닥을 골라 끝을 붉은 마커로 칠했다. 그리고 거울 — 아니, 옹기의 수면을 내려다보며 턱에서 칠한 곳까지의 길이를 쟀다. 수면 속의 그것을 셋까지 보고 나서.열 눈금 뒤. 조금 길어졌다. 스무 눈금 뒤. 조금 더.자랐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나는 그 한 가닥을 손끝으로 여러 번 만졌다. 까칠했다. 자란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조금 위로가 됐다. 그리고 곧 다시 재러 갔다.셋째, 물.잣대가 오르는 속도를 쟀다. 한 눈금에 걸리는 시간을, 내 맥박으로. 손목에 손가락을 대고. 매번 달랐다. 조금씩. 내가 뛰고 온 날은 빨랐다. 앉아서 수를 센 날은 느렸다.손목의 맥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손가락을 몇 번이나 옮겼다. 찾고 나면 그 뛰는 게 신기했다. 삼 년 넘게 이 안에서 쉬지 않고 뛰었다.아니, 달라진 건 물이 아니라 내 맥박이었다.그럼 무엇이 무엇을 재는 거지.나는 열흘을 그렇게 보냈다. 재고, 적고, 다시 재고. 검은 노트가 숫자로 가득 찼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5화. 노승

그 사람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3층 자료실. 두 거울이 마주 선 곳. 삼 년 전 필사 씨의 노트를 따라 내가 처음 끌어다 세운, 거울 속 거울로 가는 문. 나는 그 방에 한 달에 한 번쯤 들어갔다. 빌린 노트를 돌려주거나 새 노트를 빌리러. 들어갈 때마다 숨을 참았다. 끝없이 겹쳐진 복도 저편에 그것이 서 있을 때가 있었다.그날은 서아의 기록을 새 공책으로 옮겨 적다가, 공책이 모자라 자료실 문구함을 뒤지러 갔다.문을 열자, 그 사람이 있었다.두 거울 사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회색 옷이었다. 오래 빨아 색이 바랜. 그 위에 어깨 한쪽으로 걸친 누런 천.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었다. 머리는 짧게 밀었다. 하얗게 센 짧은 머리. 손목에 나무 염주를 감았다.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고. 엄지 끝이 서로 닿을 듯 말 듯.움직이지 않았다.처음엔 멈춘 사람인 줄 알았다. 이 세상에 사람은 없는데. 그런데 숨이 보였다. 아주 느리게, 어깨가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림자가 있었다. 형광등 아래 짙은.나는 문간에서 허리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이우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머무는 사람입니다."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슴께를 보았다. 누런 천의 기운 자국.한참 기다렸다.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나는 조금 더 가까이 가서, 한 번 더 인사했다. 조금 크게.대답이 없었다.나는 그 자리에 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의 손님은 다 말을 했다. 말이 안 통한 사람도 그림으로 말했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거울을 보았다. 두 거울 사이에 앉은 그 사람이 양쪽으로 끝없이 겹쳐져 있었다. 수십, 수백. 가부좌를 튼 회색 등이 복도 끝까지 줄지어.그리고 거기, 문간에 선 내가. 내 등 뒤 한 걸음에 그것이. 역시 끝없이 겹쳐서.그 사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이니까.나는 하나, 둘, 셋을 셌다. 거울 속 그것을.그리고 물었다."스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6화. 삼 년

항해사 씨의 마지막 장을 읽은 것은 노승이 다녀가고 한 달쯤 뒤였다.일 년 반 넘게 미뤄 둔 장이었다.끝에서 두 장 앞에서 멈춘 별의 표. 그 다음 장의 끝줄은 이미 읽었다. 세종이 처음 "계십니까" 하고 부르던 날 밤에. The stars are the same. I am not. 별은 그대로다. 나는 아니다.그리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었다.읽지 못한 게 아니었다. 읽지 않았다. 고어 영어는 이제 웬만큼 읽혔다. 그 장만 펼치지 않았다. 마지막 장이니까. 필사 씨의 마지막 장이 어땠는지 알았으니까. 어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아니한다. 마지막 두 획까지.항해사 씨의 마지막을 알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노승이 다녀간 뒤로 나는 매일 저녁 두 거울 사이에 앉았다. 점검표 여덟 번째 칸. 이름 없는 칸. 앉아 있다 보면 쥐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가 그 장이었다. 읽지 않으려고 꽉 쥐고 있는.그날 저녁, 나는 앉았다가 일어나서, 가죽 노트를 펼쳤다.마지막 장.글씨가 달랐다. 앞의 장들은 표였다. 숫자와 별 이름, 날짜. 가늘고 곧은 선. 이 장은 편지였다. 글씨가 조금 컸다. 천천히 쓴 것 같았다. 획이 흔들리지 않았다.To whomsoever shall stay after me.나 다음에 머무는 이에게.나는 숨을 멈췄다.I measured the stars for a thousand nights. They did not move. I thought that if I stopped measuring, I should cease to be. So I did not stop.나는 천 밤 동안 별을 쟀다. 별은 움직이지 않았다. 재기를 멈추면 내가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멈추지 않았다.Then one night I stopped. I was weary. I sat upon the deck and did nothing, and looked up.그러다 어느 밤 멈췄다. 지쳐서. 갑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7화. 천오백

천오백 번째 금은 아침에 그었다.늘 그렇듯이. 눈을 뜨고, 휴게실 벽 앞에 서서, 연필로. 곰돌이 머리 위에 그은 첫 금부터 여기까지. 집 거실 벽에 예순몇 개, 도서관 휴게실 벽에 천사백 개 남짓. 다섯 개씩 묶어 비스듬히 그은 줄이 벽 한 면을 다 채우고 옆 벽으로 넘어가 있었다.천오백.연필 끝이 뭉툭했다. 벽에 금을 긋느라 닳은 연필이 몇 자루였는지 모른다.나는 연필을 쥔 채 그 숫자를 오래 보았다.사 년 하고 한 달쯤. 서아는 여섯 살이 되었을 것이다. 저쪽에서 시간이 흐른다면. 여자의 말대로 느린 방이라면 서아는 아직 두 살이고, 남자의 말대로 빈 방이라면 서아는 몇 살도 아니다. 판정 보류.그래도 나는 여섯 살의 서아를 그려 보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한 해 앞둔. 키가 백십 센티미터쯤. 앞니가 하나 흔들리는. 신발을 한 짝 벗는 버릇은 없어졌을까. 찍찍이 대신 끈 달린 운동화를 신을까.그려지지 않았다.두 살의 서아는 또렷했다. 곰 양말을 머리에 쓴, 유리에 코를 붙인. 여섯 살의 서아는 뿌옜다. 모르는 아이였다.그게 슬펐다. 그래도 슬픈 채로 두었다. 가짜로 그리지 않았다. 흉내 내지 않는다.그날 아침은 조금 특별하게 보내기로 했다.녹차를 두 잔 우렸다. 한 잔은 나, 한 잔은 로비 탁자 위에. 누구든 오면 드시라고. 세종의 흰 찻잔에.찻잎이 풀리는 걸 오래 보았다. 사 년 동안 우린 녹차가 몇 잔일까. 세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오늘은 재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사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 검은 노트 스무 권을 로비 탁자 위에 전부 쌓았다. 기록 1부터 기록 20까지. 비품 창고 박스에 있던 스무 권이 이제 전부 찼다. 스무 권이 탁자 위에서 내 허리 높이까지 올라왔다.그 옆에 서아의 기록. 일곱 권.첫 권의 글씨는 크고 삐뚤었다. 뒤로 갈수록 작고 촘촘해졌다.그 옆에 규칙 목록. 열다섯 줄.점검표. 여덟 칸.사 년이 탁자 하나 위에 있었다.나는 소파에 앉아 그걸 바라보며 녹차를 마셨다. 맛이 없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8화. 이름

첫 장에는 세 줄이 있었다.사 년 전의 내 글씨였다. 도서관에 온 지 열흘째, 비품 창고에서 이 노트를 처음 꺼낸 날. 볼펜으로. 꾹꾹 눌러서. 종이 뒷면에 자국이 날 만큼.이서아윤해인이우진그리고 각 이름 옆에 작게, 그날의 내가 붙인 말.— 애기 곰— 엄마 곰— 아빠 곰곰 세 마리. 서아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 너무 귀여워. 서아는 '으쓱 으쓱'에서 어깨를 한쪽만 들썩였다. 양쪽을 한꺼번에 못 해서.그 노래를 하루에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른다. 목욕할 때, 기저귀 갈 때, 잠들기 전에. 서아는 아빠 곰 대목에서 꼭 내 배를 두드렸다. 해인이 옆에서 웃었다. 사실이잖아.나는 그 세 줄을 내려다보았다.맨 위의 이름을 읽었다. 눈으로.이서아.알았다. 서아다. 곰 양말. 유리에 붙인 코. 찍. 냥이 출근. 이 이름은 서아의 것이었다. 의심할 것이 없었다.두 번째.윤해인.해인이다. 동글동글한 글씨. 사랑해 뒤의 (진짜임). 커피를 다 안 마시고 나가는. 이 이름도 해인의 것이었다.세 번째.이우진.아무것도 오지 않았다.글자였다. 이, 우, 진. 읽을 수 있었다. 아빠 곰. 그것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세 글자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끈이 끊어진 연처럼. 글자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나는 누구지.그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 년 동안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아니, 떠오를 필요가 없던.나는 로비 소파에 앉아 노트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종이 뒷면에 볼펜 자국이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쓸면 세 이름이 거꾸로 만져졌다. 사 년 전의 내가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등 뒤에 그것이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온도 없는 무언가가 등에 닿아 있었다.그것이 가져간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이름은 여기 있었다. 벽에, 노트에, 세종의 화선지에. 글자는 가져가지 못한다. 규칙 12.그것이 가져간 것은 이름과 나 사이의 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59화. 앞

사흘 뒤, 나는 도서관을 나섰다.왜 그날이었는지는 모른다. 두 거울 사이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을 때,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디로인지도. 사 년 동안 한 번도 돌아가지 않은 곳.아침에 점검표를 채웠다. 여덟 칸. 녹차를 두 잔 우렸다. 한 잔은 세종의 흰 찻잔에 담아 로비 탁자 위에 두었다.물시계의 맨 위 옹기에 물을 가득 부었다. 여섯 병. 대나무 통은 비워 두었다. 잣대가 바닥에서 다시 오르도록. 내가 없어도 흐르도록.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등 뒤의 그것. 셋까지 셌다. 넷, 다섯. 일곱에서 허리를 숙였다.휴게실 벽 앞에 섰다. 천오백네 번째 금을 긋고, 그 옆에 이름을 썼다. 이우진. 끝까지. 벽 한가운데 세종의 네모난 세 글자에 허리를 숙였다.검은 노트 스무 권은 휴게실 책상에 가지런히 두었다. 서아의 기록 일곱 권도.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가져갈 수 있는지 몰랐고, 가져가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적은 것은 남는다. 귀양 간 선비가 그랬다.가져간 것은 셋이었다. 셔츠 안 가슴께의 분홍 토끼 실내화 한 짝. 손목의 할아버지 시계. 셔츠 주머니의 가족사진.도서관 정문을 밀고 나왔다.사 년 만에 걷는 길이었다. 도서관에서 우리 동네까지. 자전거로 오갔던 길을, 걸어서.발바닥에 아스팔트가 딱딱했다. 도서관 바닥과 달랐다. 운동화 밑창이 많이 닳아 있었다. 사 년 동안 계단을 오르내린 만큼.멈춘 거리는 그대로였다. 공중의 비둘기. 기울어진 커피 컵. 초록불의 신호등. 운전석이 빈 버스. 사 년 동안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내가 달라졌다.사 년 전 이 길을 처음 걸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무서웠다. 유리가, 소리 없음이, 사람 없음이. 지금은 유리 앞을 지날 때마다 셋을 셌다. 그것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나는 걸었다. 그것을 등에 붙인 채로.한강 다리를 건넜다. 차선 한가운데로. 강물이 은빛으로 굳어 있었다. 유람선의 물보라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저 아래 둔치 어딘가에 해인이 자전거를 배우다 넘어진 자리가 있었다.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60화. 6분

소리가 너무 많았다.그게 처음이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사방에서 소리가 쏟아졌다. 사이렌. 발소리. 바퀴 굴러가는 소리. 누군가 부르는 소리. 전화벨. 기계가 삑삑 우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멀리서 아기가 우는 소리.나는 그 소리들에 짓눌려 숨을 쉬지 못했다.사 년 동안 내 숨소리와 물시계 소리밖에 없던 귀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명이 들리지 않았다. 삐—— 소리가 들어설 틈이 없었다."환자분, 들리세요? 이우진 씨?"누군가 나를 불렀다.이우진 씨.나는 눈을 떴다.흰 천장. 형광등. 켜진. 그런데 깜빡였다. 아주 미세하게. 형광등이 깜빡이는 걸 처음 본 사람처럼 나는 그걸 한참 올려다보았다."이우진 씨, 여기 병원이에요. 괜찮으세요?"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내 얼굴 위로 몸을 숙였다. 마스크. 그 위의 눈.얼굴이었다.나는 그 얼굴을 보았다. 눈을 내리지 않고. 사 년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다른 사람의 얼굴. 속눈썹. 눈가의 작은 점. 피곤해서 조금 붉어진 흰자위. 눈을 깜빡이는.눈물이 났다. 멈출 수 없이."어, 어디 아프세요? 선생님!"아프지 않았다. 아무 데도.나중에 들었다.8시 53분에 어린이집 앞 골목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선 채로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무너졌다고. 옆을 지나던 편의점 직원이 달려와 신고했다. 구급차가 오는 동안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 뛰어나와 나를 흔들었다.의식이 없었던 시간은 6분.8시 59분에 내가 눈을 떴다고 했다. 골목 바닥에서. 누운 채로 하늘을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고. 원장 선생님은 그게 외국어 같았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로 구급차 안에서 다시 잠들었다."6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에요." 의사가 말했다. 응급실 침대 옆에서. 태블릿의 화면을 넘기며. "그런데 검사에서 아무것도 안 나와요. 뇌 사진도 깨끗하고, 혈관도 괜찮고, 심장도요. 혹시 요즘 머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PREV
1
...
45678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