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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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影喰い

엠마네의 공책을 거울 속 서가에 돌려놓으러 간 날, 나는 세 권을 더 빌려 왔다.거울 사이의 길은 이제 익숙했다. 점검표 일곱 칸을 채운 날, 그림자가 1인 날. 담요를 걷고, 초점을 한 겹씩 뒤로 보내고, 차가운 물 한 겹. 초록 복도, 틈, 누런 허공.떠 있는 돌바닥에 설 때마다 나는 먼저 소리를 냈다."다녀왔습니다."……다녀왔습니다. 왔습니다. 습니다.메아리가 대답했다. 그게 좋아서, 매번 했다.집에서도 그랬다. 현관문을 열면 "다녀왔습니다" 하고 먼저 말했다. 서아는 그 소리가 들리면 어디에 있든 달려 나왔다. 양말 신은 발이 거실 바닥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그다음에 서아가 보였다. 여기서는 메아리가 서아 대신 달려 나왔다.엠마네의 공책을 원래 자리에 꽂았다. 선반의 빈자리 옆 대출 쪽지를 떼어 내고, 반납이라고 적었다. 필사 씨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쪽지만 꽂힌 채로.빌려 온 세 권은 이랬다.세로로 쓴 한자 사이사이에 작은 구불구불한 글자가 섞인 노트. 일본 글자였다. 한자는 필사 씨 덕분에 조금 읽을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쪽은 전혀.그리고 필사 씨의 것처럼 한자로만 쓰인 실 묶음. 옛 한글이 없는.그리고 영어 교재로 늘어난 실력으로 조금 읽어 볼 만한, 가죽 표지의 영어 노트. 엠마네보다 훨씬 오래된 영어였다. thou, thee. 사전에 '고어'라고 적혀 있는 단어들.일본어부터 하기로 했다.이유는 단순했다. 한자를 조금은 읽을 수 있었으니까. 모르는 말 속에 아는 글자가 섞여 있으면, 그게 발 디딜 돌이 됐다.도서관 외국어 서가에 일본어 교재도 한 칸이 있었다. 히라가나, 가타카나부터. 오십 개씩, 백 개. 영어 알파벳 스물여섯 개보다 네 배 많았다. 나는 스케치북 새 장에 오십음도를 옮겨 그리고 매일 한 줄씩 외웠다. 아, 이, 우, 에, 오. 카, 키, 쿠, 케, 코.스케치북의 오십음도는 금세 지저분해졌다. 외운 글자에는 연필로 작은 점을 찍었다. 모양이 거의 같은 글자 두 개에는 빨간 볼펜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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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목소리

방심은 좋은 날에 온다.회사에서 배운 말이었다. 불량은 바쁜 날보다 한가한 날에 터진다. 다들 긴장을 놓았을 때. 공정이 잘 돌아간다고 믿을 때.그날은 좋은 날이었다.도서관 벽의 금이 이백오십을 넘었다. 합쳐서 삼백 날을 넘긴 날이었다. 나는 그걸 축하하고 싶었다. 일 년은 아직이었지만, 삼백은 좋은 숫자였다. 벚꽃 씨의 하이쿠를 스무 편째 풀었고, 고어 영어 노트의 첫 장을 읽었다. 점검표 일곱 칸이 한 달째 빠짐없이 찼다. 그림자는 1. 칼로 자른 듯.그래서 나는 밖에 나갔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온 뒤로 바깥은 식량을 구하러만 나갔다. 눈을 반쯤 감고, 유리창을 피해 발끝만 보며.도서관 정문을 나서면서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랬다. 삼백 날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은 파랑.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새것 같았다. 눈이 조금 시렸다.그날은 고개를 들고 걸었다.자전거를 타고 한강까지 달렸다. 바람 없는 길. 해인이 넘어진 자리. 강변 계단에 앉아 멈춘 강물을 보았다. 햇빛이 박힌 물결.물결 하나하나에 빛이 한 점씩 박혀 있었다. 눈이 부셨다. 그런데 반짝이지는 않았다. 반짝임은 깜빡여야 반짝임인데, 그 빛들은 깜빡이지 않았다.연애할 때 해인과 이 강변에 온 적이 있었다. 해인은 강물이 반짝이는 게 꼭 누가 박수를 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여기 강물은 박수를 치다 만 손이었다.기타를 가져왔었다. 거기서 쳤다. C, G, F, Am. 이제 제법 됐다. 곰 세 마리. 반짝반짝 작은 별. 서아가 좋아하던 노래들. 한 곡씩 치고, 따라 불렀다.손끝의 굳은살이 줄을 눌렀다.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는 F코드 한 번에 손가락이 얼얼했다. 이제는 아프지 않았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앉아, 볼펜을 쥘 때도 손끝에 느껴졌다.그리고 서아의 목소리로 불렀다.내 입에서 서아의 목소리가 나왔다. 오랜만이었다. 진짜 해인, 진짜 서아 목록을 만든 뒤로 그 목소리들은 조용해졌다. 내가 막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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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되찾기

밤새 — 밤이라고 부를 수 없는 밤새 — 나는 적었다.서아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소리 없이, 글자로.휴게실 블라인드는 끝까지 내려져 있었다. 그 틈으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책상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빛줄기 아래서 적었다.처음엔 순서가 없었다. 떠오르는 대로. 4월 12일 오전 6시 40분. 3.2킬로. 지 애비 닮았다. 신생아실 유리 너머 흐린 얼굴. 처음 뒤집은 날은 거실 매트 위였고 해인이 동영상을 찍다가 폰을 떨어뜨렸다. 이유식 첫 숟가락을 뱉었다. 브로콜리를 싫어했다. 바나나를 좋아했다. 돌잔치에서 판사봉을 잡았다. 어머니가 부자 되겠다고 했는데 판사봉은 부자가 아니라고 해인이 정정했다. 첫걸음은 소파에서 식탁까지 다섯 걸음. 첫 말은 "맘마". 둘째 말은 "아빠"였다고 나는 우겼고 해인은 "빠빠"였다고 했다.적다 보니 순서가 생겼다. 달별로. 주별로. 적을수록 더 떠올랐다. 기억이 기억을 불렀다. 그림자 실험 때 공책 스무 장을 채우던 날처럼.손목이 저렸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인 자리가 볼펜에 눌려 아팠다. 멈추지 않았다.볼펜 잉크가 한 번 다 떨어졌다. 마지막 몇 글자가 긁힌 자국만 남기고 하얗게 나왔다. 나는 반납대 서랍에서 새 볼펜을 찾아, 긁힌 자국 위에 다시 덧써 넣었다. 한 글자도 흐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적은 걸 세어 보니 노트 한 권의 절반이었다. 백오십 쪽.서아의 두 해가 백오십 쪽이었다.많은 걸까, 적은 걸까. 해인이었다면 더 많이 적었을 것이다. 해인은 서아가 먹은 이유식 양까지 수첩에 적어 두던 사람이었다. 몇 숟가락, 몇 시. 나는 그 수첩을 들여다보며 너무 꼼꼼하다고 놀렸다. 지금은 그 수첩이 너무 갖고 싶었다.나는 그걸 읽었다. 처음부터. 소리 내어. 내 목소리로.내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밤새 한마디도 하지 않은 목이었다. 첫 줄에서 목이 잠겨 기침을 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읽었다. 천천히. 한 줄 한 줄, 서아를 부르듯이.— 서아는 "찍" 할 때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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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일 년

삼백육십오 번째 금을 긋던 날, 나는 집에 갔다.도서관 벽의 금과 집 벽의 금을 더한 숫자였다. 집 벽의 예순 몇 개가 정확하지 않았으니까, 이 날짜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틀렸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나는 오늘을 일 년으로 정했다.일 년.이 세상에 온 지.서아는 저쪽 세상에서 지금도 두 살일 것이다. 8시 53분의 두 살. 나만 일 년을 먹었다.아니. 저쪽 세상의 시간이 흐르는지 멈췄는지 나는 몰랐다. 엠마네는 나갔다고 했지만, 나가서 엠마가 몇 살이었는지는 적지 않았다.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채로 사는 법. 그것도 일 년 동안 배운 것 중 하나였다.아침에 도서관을 나섰다. 자전거로 십오 분. 유리창 앞에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요즘은 눈을 완전히 감지 않았다. 점검표 일곱 칸을 채운 날에는, 멀리 흐린 게 보여도 계속 페달을 밟았다. 그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걸 몸이 알았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백팩이 무거웠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챙긴 것들이었다. 달걀판은 수건으로 감싸 맨 위에 얹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엉덩이를 들고 천천히. 달걀 하나 깨지는 게 그날은 큰일이었다.아파트 108동. 12층까지 계단. 10층 계단참에서 쉬지 않았다. 일 년 동안 다리가 튼튼해졌다. 해인이 말한 튼튼한 애는 아니지만, 튼튼한 애의 아빠는 됐다.1201호. 목에 건 열쇠로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 집 냄새가 났다. 해인이 쓰던 섬유유연제 냄새에 서아 로션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일 년 전과 같은 냄새였다. 나는 현관에 선 채로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집은 그대로였다.천을 뒤집어쓴 가구들. 담요 덮인 텔레비전. 식탁 위 서아 식판의 샤인머스캣 세 알. 싱싱했다. 일 년 전 그대로. 곰 양말, 해인의 머그잔. 안방 베개 위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나는 샤인머스캣 한 알을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단단했다. 껍질에 맺힌 물기까지 그대로였다. 서아는 이걸 반으로 잘라 줘야 먹었다. 통째로 주면 목에 걸린다고, 해인은 늘 가위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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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산스크리트

가로줄 위에 글자가 매달린 가죽 노트는, 일 년 넘게 휴게실 선반에 꽂혀만 있었다.거울 속 서가에서 두 번째로 빌려 온 노트였다. 엠마네의 영어 공책과 함께. 영어가 급했고, 일본어가 그다음이었다. 이 노트는 늘 순서가 밀렸다.그래도 가끔 꺼내 보았다. 읽지 못하면서. 그냥 보려고.가죽 표지는 손에 쥐면 부드러웠다. 오래 손때가 탄 가죽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속의 판지가 조금 드러나 있었다. 나는 읽지도 못하는 쪽을 펴 놓고 손가락으로 가로줄을 따라가 보곤 했다. 줄은 끊기지 않고 한 줄 끝까지 이어졌다.아름다웠다.한 줄마다 위에 가로줄이 곧게 그어져 있었다. 빨랫줄처럼. 그 줄에 글자들이 매달려 있었다. 동그라미, 갈고리, 꼬리. 줄 위로 삐죽 올라간 점과 곡선. 줄 아래로 늘어진 고리. 한 글자 한 글자가 제각각인데, 한 줄로 이어 놓으면 하나의 무늬 같았다.일 년을 맞은 다음 날, 나는 그 노트를 책상 한가운데 놓았다.책상부터 치웠다. 벚꽃 씨의 노트와 일본어 교재는 왼쪽 끝에, 영어 사전은 오른쪽 끝에. 가운데를 비우니 책상이 넓어 보였다. 연필을 새로 깎았다. 사각사각, 나무 깎이는 냄새가 올라왔다.지우개도 하나 옆에 두었다. 그러다 그 지우개를 한참 보고, 서랍에 도로 넣었다. 틀린 글자는 줄을 그어 두기로 했다.이제 이 노트 차례였다.도서관 외국어 서가에서 힌디어 교재를 찾았다. 한 권뿐이었다. '기초 힌디어'. 표지가 바랬다. 대출 기록 카드를 보니 마지막으로 빌려 간 게 몇 년 전이었다. 이 도서관에서 힌디어를 배우려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첫 장에 글자표가 있었다. 데바나가리. 가로줄 위에 매달린 글자들의 이름이었다.모음 열몇 개, 자음 서른몇 개. 그리고 모음이 자음에 붙을 때 모양이 바뀌었다. 왼쪽에 붙기도 하고, 오른쪽에, 위에, 아래에. 자음끼리 겹치면 또 다른 모양이 됐다.나는 글자표를 복사지에 크게 옮겨 휴게실 벽에 붙였다. 이름들이 적힌 벽 맞은편에. 아침에 눈을 뜨면 그 표가 먼저 보였다. 양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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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수

S.R.의 수식은 화이트보드에 그대로 있었다.일 년 넘게. 내가 지우지 않았으니까. 도서관 열람실 한쪽 벽, '독서 모임 매주 토요일 2시' 위에 겹쳐 적힌 검은 마커 글씨. 숫자와 기호와 둥근 글자.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나다녔다. 볼 때마다 이상했다. 영어는 읽게 됐다. 일본어도 조금, 산스크리트도 첫걸음은 뗐다. 그런데 저 칠판의 수식은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숫자는 알았다. 1, 2, 3. 더하기, 빼기, 등호. 그런데 그 사이에 낯선 기호들이 있었다. 길쭉한 S 같은 것. 시그마라고 부르는 그리스 글자. 뿌리 모양. 무한대를 뜻하는 누운 8자.고등학교 때 배운 것 같았다. 수능 이후로 다 잊었다. 품질관리 일은 통계를 썼지만, 엑셀이 다 해 줬다. 나는 버튼만 눌렀다.해인이 떠올랐다. 해인은 숫자에 밝았다. 마트 영수증을 받으면 계산대 앞에서 암산으로 합계를 맞춰 보았다. 틀린 적이 없었다. 나는 옆에서 서아를 안고 기다리며, 그 옆모습이 좋다고 생각했다. 해인이라면 저 칠판 앞에서 나보다 빨랐을 것이다.강가 씨의 말을 떠올렸다. 매일 하나의 말을 배우겠다.수학도 말이었다. 숫자와 기호로 된 말.나는 수학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로 했다.그날 서가에서 연필 한 다스를 가져왔다. 새 연필 열두 자루를 책상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서아의 크레파스 상자를 처음 열었을 때처럼, 괜히 설렜다.도서관 학습 서가에 초등 수학부터 대학 수학까지 다 있었다. 참고서, 문제집, 교과서. 나는 중학교 1학년 수학책부터 뽑았다. 부끄럽지 않았다. 아무도 안 봤으니까. 봤어도 상관없었다.책마다 앞 몇 장만 손때가 묻어 있었다. 누군가 시작했다가 그만둔 자국. 나는 그 손때 뒤로 넘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정수와 유리수. 방정식. 함수. 중학교 삼 년 치를 한 달에 끝냈다. 생각보다 기억나는 게 많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항할 때 부호를 바꾸는 것, 괄호를 풀 때 분배하는 것.문제는 휴게실 책상에서 풀었다. 연습장은 복사실에서 가져온 종이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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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몸부림

무너지는 건 한 번에 오지 않았다.일 년 반쯤이었다. 금이 오백을 넘었을 무렵. 아무 일도 없었다. 지우는 것이 가까이 온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노트에서 끔찍한 걸 읽은 것도 아니었다. 점검표는 채워졌고, 그림자는 1이었다.그냥,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모든 게 똑같았다.천장의 빛줄기. 휴게실 벽의 이름들과 금들. 선반의 노트들. 창밖의 영원한 아침. 오백 번째 똑같은 아침.베개 옆의 분홍 실내화도 그대로였다. 조선 노트 옆. 토끼 얼굴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나는 누운 채로 그 토끼와 눈을 맞췄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오늘은 그 얼굴마저 조금 멀어 보였다.나는 일어나서 씻었다. 셔츠를 입었다. 밥을 먹었다. 열람실로 내려가 벚꽃 씨의 하이쿠를 폈다. 한 편을 풀었다. 산스크리트 단어 하나를 외웠다. 수를 하나 쪼갰다. 기타를 쳤다. 이름을 썼다.다 했다. 일곱 칸.동그라미 일곱 개. 볼펜을 쥔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한 달 전, 두 달 전의 동그라미와 똑같이 반듯했다. 나는 그 반듯함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확인하고 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동그라미만 남아 있었다.그리고 저녁이라고 부르는 때가 됐을 때, 나는 열람실 바닥에 누웠다.누운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다리에 힘이 빠졌다.바닥이 등을 받쳤다. 서늘했다. 먼지 냄새가 났다. 나는 양손을 바닥에 붙였다. 매끈했다. 느껴지는데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천장을 보았다. 열람실 천장은 높았다.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 켜진 채로 멈춘. 오백 날 동안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그 형광등들이 갑자기 견딜 수 없었다.빛이 너무 고르게 떨어졌다. 윙윙거리는 소리라도 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회사 사무실 형광등은 늘 조금씩 떨렸다. 창가 끝자리 하나는 깜빡거려서 누군가 관리실에 전화를 해야 했다. 그 깜빡임이 짜증스러웠다. 지금은 그게 그리웠다.일어나서 서가에서 두꺼운 사전을 뽑아 들었다. 형광등을 향해 던졌다.닿지 않았다. 너무 높았다. 사전이 내 손을 떠나 공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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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이 년

다음 날 아침,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책들을 하나씩 내렸다.사다리를 가져왔다. 서가 높은 칸의 책을 꺼낼 때 쓰는 이동식 사다리. 그걸 밀고 다니며, 열람실 허공에 멈춰 있는 책들 아래 세웠다. 올라가서 손을 뻗었다. 사전이 손에 닿았다. 내 손에 들어오자 사전은 그냥 무거운 책이 됐다. 품에 안고 내려왔다.옥편. 문법책. 고어 사전. 수학 교과서.책마다 멈춘 자리가 달랐다. 옥편은 창 쪽으로, 문법책은 서가 쪽으로 조금 더 멀리. 내가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가 허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제의 나를 한 권씩 붙잡아 내리는 기분이었다.사전 모서리가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던질 때 어딘가 부딪힌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 눌러 폈다.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눌렀다.하나씩 내려서 서가의 원래 자리에 꽂았다. 책등의 청구기호를 확인하며. 어제 내가 던진 순서의 반대로.넘어진 의자들을 일으켰다. 책상 밑으로 가지런히 밀어 넣었다.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드르륵 소리를 냈다. 어제 넘어뜨릴 때는 쾅 소리가 났던 의자였다. 같은 의자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나는 의자를 하나 밀어 넣을 때마다 등받이를 한 번씩 쓸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바닥을 쓸었다.빗자루는 청소 도구함에 있었다. 쓸 때마다 사락, 사락,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몇 걸음 앞에서 사라졌다. 쓸고 난 자리만 조금 밝아 보였다.그 일을 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다 하고 나니 열람실이 원래대로였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아니.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래서 치웠다.내가 어지른 건 내가 치운다. 휴대폰 매장 앞에서 유리 조각을 쓸어 담던 날처럼.그러고 나서 휴게실로 올라가 씻었다. 오래. 생수를 서른 병 데워서. 머리를 두 번 감았다. 손톱을 깎았다. 수염을 밀었다. 거울 대신 손끝으로 더듬어 가며.가스 불꽃이 푸르게 흔들렸다. 내가 켠 불이라서 흔들렸다. 나는 냄비 앞에 쪼그려 앉아 그 불꽃을 오래 보았다. 어제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오늘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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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계십니까

발소리는 그 뒤로도 가끔 들렸다.아주 드물게. 한 달에 한 번쯤. 잠들기 직전이거나, 열람실에서 하이쿠를 풀다가 문득 손을 멈췄을 때. 아래층 어딘가에서. 혹은 위층에서. 사박, 사박. 누군가 천천히 걷는.그때마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거나 뛰어 올라갔다. 아무도 없었다. 서가 사이도, 화장실도, 어린이 자료실도. 발자국도 없었다. 먼지 위에 내 발자국만.계단 난간을 붙잡고 돌 때마다 손바닥이 쓸렸다. 층계참에 서서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건 내 숨소리뿐이었다. 헐떡이는 숨이 몇 걸음 앞에서 사라지고, 다시 헐떡이고.기분 탓이었다. 이명처럼. 귀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소리.그래도 들릴 때마다 뛰었다. 뛰지 않으면, 그게 정말 누군가였을 때 놓칠 것 같았다. 헛걸음이 백 번이어도 괜찮았다. 한 번을 놓치는 것보다는.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검은 노트에 적었다.— 발소리 들림. 가 보면 없음. 이명의 변형으로 추정. 확인 필요.확인 필요. 이 년 넘게 쓴 말이었다. 이제는 그 말이 조금 우스웠다. 이 세상에서 확인된 게 몇 개나 됐나. 규칙 열두 줄. 그중 11번은 여전히 조각이었다.이 년하고도 두 달쯤 지난 날이었다.그날도 아침은 똑같이 시작됐다. 씻고, 셔츠를 입고, 창가 테이프 위에 섰다. 그림자는 1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그날 나는 항해사 씨의 노트 마지막 두 장을 풀고 있었다. 이 년 동안 미뤄 둔 두 장. 별의 높이를 적은 표가 끝나고, 짧은 글이 이어지는 장. 고어 영어가 흘림체로 적혀 있어서 한 줄에 하루씩 걸렸다.항해사 씨의 잉크는 갈색으로 바래 있었다. 글자의 꼬리가 길게 휘어 다음 글자와 엉켰다. 나는 한 글자씩 연필로 옮겨 적으며 풀었다. 비슷하게 생긴 글자가 많아서 사전을 몇 번이고 뒤졌다. 틀리게 읽은 줄은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적었다.첫 번째 장의 마지막 줄이 막 풀렸다.— The stars are the same. I am not.별들은 같다. 나는 같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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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붉은 비단

그 사람은 열이틀 뒤에 다시 왔다.그동안 나는 로비에서 살았다. 휴게실의 짐을 반쯤 내려와 신간 코너 옆 소파에 자리를 폈다. 찻잔이 놓인 탁자 옆에. 찻잔은 치우지 않았다. 식은 차가 담긴 채로 그대로 두었다. 그 사람이 돌아오면 자기 잔이 있는 걸 볼 수 있게.짐이라고 해 봐야 많지 않았다. 검은 노트 몇 권, 서아의 기록, 칫솔, 수건, 생수 한 상자, 이불 하나. 소파 팔걸이에 셔츠를 걸어 두었다. 휴게실 벽의 이름들은 가져올 수 없어서, 아침마다 올라가 쓰고 내려왔다.로비는 유리가 많았다. 정문 유리문, 큰 창 두 개, 신간 진열장의 유리. 이 년 동안 피해 다닌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자고 먹었다. 점검표 일곱 칸을 매일 빈틈없이 채웠다. 그림자가 1이어야 했다. 1보다 더 짙어야 했다. 그 사람을 만나려면 여기 있어야 했고, 여기 있으려면 지우는 것이 멀어야 했다.유리에는 가끔 멀리 흐린 것이 보였다. 정문 유리 저 끝, 바깥 거리 어딘가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그럴 때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빛 속에 서서 그림자를 확인했다. 1이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소파로 돌아갔다. 유리 쪽은 보지 않고 찻잔 쪽을 보았다. 식은 차의 수면이 창빛을 받아 조금 반짝였다.열이틀 동안 발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밤마다 귀를 기울였다. 이명이 너무 커서 잠이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삐——. 그 소리 너머에서 사박, 하는 소리를 찾았다. 찾으려 할수록 들리지 않았다. 서아가 잠들었는지 보려고 방문 앞에서 숨소리를 엿듣던 밤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들으려 하면 안 들렸다.그리고 열사흘째 아침.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있었다. 로비 화장실에서 생수로. 거울은 덮여 있었다. 얼굴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로비로 나왔다.물이 차가웠다. 데우지 않은 생수였다. 얼굴에 물을 끼얹을 때마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수건에서 소파 냄새가 났다. 열흘 넘게 로비에서 지낸 냄새.그리고 소리를 들었다.사박.발소리. 멀지 않은. 로비 저쪽, 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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