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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2부 지나가는 이] 흐르는 아침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새벽 여섯 시. 커튼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회색에서 흰색으로. 아주 천천히.나는 누운 채로 그 빛을 보았다. 빛이 벽을 타고 조금씩 내려왔다. 옷장 손잡이에 닿고, 서랍장 모서리에 닿고, 바닥에 떨어진 서아의 머리핀에 닿았다.움직였다.사 년 동안 빛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동쪽 낮은 곳에 박혀서. 베란다 난간 모서리에 걸려서. 나는 그 빛으로 날을 세지 못했다. 그래서 벽에 금을 그었다.지금은 빛이 제 발로 걸어왔다.옆에서 해인이 뒤척였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해인이 내는 소리였다. 그 너머, 서아의 방에서도 소리가 났다. 작은 기침 한 번. 침대 난간에 발이 부딪히는 소리.나는 손목을 들었다.할아버지의 시계. 어젯밤 풀지 않고 잤다. 용두를 쥐었다. 감았다. 하나, 둘, 셋. 스무 번.초침이 12를 지났다. 1을 지났다. 2를.나는 그걸 끝까지 보았다. 한 바퀴. 60초. 초침이 다시 12에 닿았을 때, 입이 먼저 움직였다."돈다. 확인."해인이 눈을 떴다. 한쪽만."……뭘 확인해.""시계.""새벽부터?"해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더듬더듬, 내 팔을 찾아 쥐었다. 잠결에. 쥔 채로 다시 잠들었다.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알람이 울 때까지.오전 7시 40분, 우리 집 부엌은 늘 그렇듯 전쟁이었다.토스터가 틱, 하고 식빵을 뱉었다. 냉장고가 윙 울었다. 위층에서 누가 의자를 끌었다. 창밖에서 쓰레기차가 후진하며 삑삑거렸다. 서아가 아기의자에 앉아 숟가락으로 식판을 두드렸다. 탕, 탕, 탕.소리가 너무 많았다.어제 응급실에서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귀가 따가웠다. 나는 식탁 모서리를 잡고 잠깐 서 있었다."당신 오늘 쉬어."해인이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등을 돌린 채로."회사엔 어제 내가 말했어. 선배님이 월요일까지 나오지 말래. 회의도 미뤘대."휴대폰을 보니 정말 문자가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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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이 대리

월요일 아침, 나는 회사 목걸이를 걸었다.사원증이 달린 파란 줄. 현관 거울 앞에서 그걸 목에 걸고, 셔츠 깃을 한 번 폈다. 해인이 다려 둔 셔츠. 칼라부터."넥타이는?"해인이 식빵을 물고 물었다."우리 팀 안 매.""알아. 그냥 물어본 거야. 당신 오늘 면접 보러 가는 사람 같아서."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그랬다. 첫 출근하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어깨에 힘을 주고.사 년 만의 출근이었다. 아니, 닷새 만의.버스로 사십 분.창가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움직였다. 창밖의 가게들이 뒤로 흘러갔다. 신호에 멈췄다가, 다시 흘러갔다. 나는 이마를 창에 대고 그걸 보았다. 멈췄다가 다시 가는 것. 사 년 동안 한 번도 못 본 것.옆자리 아주머니가 통화를 했다. 뒷자리 학생 둘이 게임 이야기를 했다. 기사님이 라디오를 틀었다. 교통 정보. 어느 대교가 막힌다고.귀가 따가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소리를 하나씩 세었다. 통화. 게임. 라디오. 엔진. 브레이크. 벨. 여섯.여섯까지 세고 나면 조금 나았다.회사 정문. 출입 게이트에 사원증을 댔다. 삑, 하고 초록불이 들어왔다.나는 그 초록불을 잠깐 보았다. 사 년 동안 초록불은 초록인 채로 멈춰 있었다. 이건 켜졌다가, 꺼졌다.3층 품질관리팀.문을 열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몇은 일어섰다."이 대리!""괜찮으세요?""쓰러졌다며, 어떻게 된 거야."나는 한 사람씩 보았다. 얼굴을. 눈을 내리지 않고. 창가 주임님의 동그란 안경. 옆 팀 과장님의 넥타이 핀. 입구 쪽 자리에서 누가 들고 있는 컵라면. 전부 사 년 전에 매일 보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괜찮아요. 검사 다 정상이래요."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한 사람씩."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사무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누군가 웃었다. 이 대리 왜 이렇게 공손해졌어, 하고.내 자리로 갔다.창가에서 세 번째. 모니터, 키보드, 캘리퍼스 케이스, 다 먹은 사탕 봉지. 모니터 옆에 노란 포스트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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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소리가 너무 많다

"우진 씨. 이거 당신이야?"다음 날 아침, 해인이 개수대 앞에서 물었다. 수도꼭지를 가리키며.똑.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스테인리스 개수대 바닥에 작게 부딪혔다."응.""웬일이야. 칠 년 동안 나한테 꼭지 꽉 잠그라고 잔소리하던 사람이.""그냥.""또 그냥."해인이 꼭지에 손을 뻗었다. 잠그려고. 나도 모르게 그 손목을 잡았다.해인이 멈췄다. 나를 보았다."……놔둬 줄래?""물 새잖아.""조금만. 한 방울씩만."해인은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손을 거뒀다. 그리고 컵을 하나 꺼내 꼭지 아래 받쳐 놓았다."그럼 받아서 화분 줘. 버리지 말고.""응."똑.컵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스테인리스보다 둥근 소리. 옹기에 떨어지던 소리에 조금 더 가까운.그 주 내내 소리가 너무 많았다.회사에서는 프린터가 문제였다. 복도 끝 공용 프린터가 종이를 뱉을 때마다 드르륵, 하고 긁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에 매번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소리였다. 오민재는 그 옆자리에서 이어폰도 없이 엑셀을 했다.점심시간 구내식당은 더 했다. 식판 부딪히는 소리. 수저 떨어지는 소리. 백 명이 한꺼번에 떠드는 소리. 벽에 걸린 텔레비전의 뉴스. 나는 식판을 들고 들어갔다가, 그대로 돌아 나왔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서 옥상에 올라가 먹었다.옥상엔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 멀리 도로의 차 소리. 그 정도는 괜찮았다.나는 삼각김밥 비닐을 뜯으며 웃었다. 멈춘 세상에서 삼각김밥 비닐을 처음 뜯던 날이 생각났다. 1번, 2번, 3번. 순서대로 당기면 김이 찢어지지 않는다. 그걸 몰라서 매번 김을 찢었다. 거기엔 순서를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여기엔 비닐에 그려져 있었다. 원래부터.수요일 오후, 선배가 내 책상에 작은 봉지 하나를 던졌다.주황색 스펀지 귀마개. 공장 현장에서 쓰는 것. 한 봉지에 두 쌍."프린터 돌아갈 때마다 네 어깨가 올라가더라. 보는 내가 불편해.""……티 났어요?""사흘째 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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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나마스카람

탐비.전화 너머의 할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타밀어로 동생. 나이 든 사람이 젊은 남자를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말. 사전에서는 «남동생, 또는 손아래 남자에 대한 친근한 호칭»이라고 되어 있었다. 사 년 동안 사전으로만 알던 말.그 말이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나를 향해서."……목요일에 병원 가요. 재검이 있어서."내가 말했다. 아들이 반가워했다. 자기 아버지도 그날 외래 진료가 있다고. 그럼 그날 병원 1층 카페에서 뵙자고.전화를 끊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해인이 나를 보았다."누구야?""응급실 옆 침대 할아버지. 아드님.""아, 그 인도 할아버지?""응.""뭐래?""고맙대. 목요일에 보재."해인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목요일? 당신 재검 날이잖아.""응. 거기서 보기로 했어.""나도 갈래.""당신 회사……""반차 쓴다고 했잖아. 첫날에. 기억 안 나?"기억났다. 안 하면 나 반차 쓰고 달려간다. 해인은 그 말을 그날부터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날 밤, 서재에서 검은 수첩을 펼쳤다. 넷째 장에 타밀 글자를 적어 보았다. 둥글고, 고리가 많은. 사 년 동안 화이트보드 앞에서 베끼던 글자.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고리가 닫히는 자리, 꼬리가 올라가는 자리.탐비.적고 나서 소리 내어 읽었다. 아주 작게. 해인이 깨지 않게.그 말을 적는 건 처음이었다. 사 년 동안 나를 그렇게 부를 사람이 없었으니까. 사전 속의 말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누군가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목요일 아침, 병원.응급실이 아니라 본관 신경과 외래였다. 그런데도 소리는 비슷했다. 번호표 호출음. 딩동, 23번 환자분. 휠체어 바퀴. 누군가의 기침. 대기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건강 프로그램. 나는 귀마개를 한쪽만 넣었다. 선배가 준 주황색.해인이 그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잡았다."이우진 님."진료실에 들어갔다. 응급실의 그 의사가 아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 의사. 모니터에 내 머리 사진이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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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당신 누구야

나는 해인의 맞은편에 앉았다.식탁 위 불 하나. 주황빛. 그 아래 해인의 휴대폰. 화면에 파일 세 개가 떠 있었다.녹음 1. 녹음 2. 녹음 3.날짜와 시각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돌아온 다음 날 밤, 새벽 두 시 십사 분. 두 번째는 그다음 주 수요일 새벽 세 시. 세 번째는 지난 월요일, 새벽 한 시 오십 분."당신 잠꼬대해."해인이 말했다. 휴대폰을 보면서. 나를 보지 않고."원래도 가끔 했어. 회의 자료 어쩌고, 불량률 어쩌고. 알지? 그거 내가 놀렸잖아. 자면서도 일한다고.""응.""근데 이번엔 달라."해인이 휴대폰 옆에 놓인 컵을 만지작거렸다. 물이 반쯤 든. 마시지는 않았다."당신 퇴원한 다음 날. 새벽에 깼는데 당신이 말을 하고 있었어. 천장 보고 누워서. 눈은 감고. 처음엔 또 회사 꿈 꾸나 보다 했어. 근데 한국말이 아니었어."해인이 컵을 내려놓았다."당신 어깨를 흔들까 하다가, 못 했어.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잠꼬대는 원래 웅얼웅얼하잖아. 당신은 누구한테 말하는 것 같았어. 앞에 누가 앉아 있는 것처럼. 그래서 녹음 버튼을 눌렀어. 아침에 들려주고 놀리려고. 당신 자면서 외국어 한다고."해인이 웃으려다 말았다."아침에 못 들려줬어. 당신이 식빵 먹으면서 눈 감고 있는 거 보고. 그냥 못 들려줬어."해인이 첫 번째 파일을 눌렀다.처음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에어컨 바람. 이불 스치는 소리. 해인의 숨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휴대폰을 내 얼굴 가까이 댄 모양이었다.그리고 목소리가 나왔다.내 목소리였다.낮고, 조금 잠긴. 그런데 또렷했다. 잠꼬대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했다."……消そうとするな。"나는 숨을 멈췄다."岩になれ。あなたの、蝉だ。"해인이 정지를 눌렀다."일본어 맞지?"나는 대답하지 못했다."나 대학 때 교양으로 일 년 배웠어. 다 까먹었는데, 이게 일본어라는 건 알아. 번역 앱에 넣어 봤어. 지우려고 하지 마라. 바위가 되어라. 당신의 매미다."해인이 나를 보았다."매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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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다른 아침

해인이 들어간 뒤에도 나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주황빛 아래. 해인이 끄지 않고 간 불.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방금 전에 해인 앞에서 입도 열지 못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만했다. 사 년 동안 무언가를 본 날이면 늘 그랬다. 떨리는 건 나중이었다. 먼저 적었다.서재에 가서 검은 수첩을 가져왔다. 볼펜도.다섯째 장을 펼쳤다.맨 위에 적었다.— 첫 번째. 목요일 밤 10시 41분. 식탁.그리고 그 아래, 한 줄씩. 품질관리팀에서 불량 보고서를 쓰던 순서대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얼마나.— 들어간 때: 해인이 «당신 누구야» 물었을 때. 대답 못 함. 막힘.— 들어가는 느낌: 천둥 없음. 식은땀 없음. 돌아보지 않음. 불이 꺼지듯, 그냥.— 머문 시간: 10초. (할아버지 시계로 셈.)— 현실에서: 1~2초. 해인이 봄. «눈이 없었어.»거기까지 적고 멈췄다.시계로 셈.그 줄을 오래 보았다.사 년 동안 이 시계는 8시 53분이었다. 초침은 12와 1 사이. 매일 아침 용두를 스무 번 감았다. 감기기는 했다. 돌지는 않았다. 그 세상의 것이 되어서. 내가 그 세상에 머무는 사람이어서.오늘은 돌았다. 그 공기 속에서. 열 번.나는 한 줄을 더 적었다.— 내 것은 흐른다. 거기서도.그리고 괄호를 쳤다.— (그 사람의 찻잔처럼. 그 사람의 녹차가 식어도 굳지 않던 것처럼.)그 도서관 로비. 신간 코너 옆 탁자에 놓여 있던 흰 사기 찻잔. 연한 녹차에서 김이 흔들리며 흩어지던. 그분의 것은 흘렀다. 그 멈춘 세상에서. 지나가는 이의 것이라서.오늘은 내가 지나가는 이였다.— 본 것.거기서 펜이 멈췄다.본 것을 적으려면, 다시 보아야 했다.나는 눈을 감았다.사 년 동안 익힌 일이었다. 서아의 목소리를 잃고 나서, 기억을 글자로 옮기는 법. 떠오르는 대로 적지 않는다. 한 자리에 서서, 둘러본다. 왼쪽부터. 가까운 데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을 하나씩 짚는다. 캘리퍼스로 재듯이.비탈길.나는 거기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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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막히는 법

회사 일로는 막히지 않았다.다음 주 화요일, 3번 캐비티 금형이 수리를 마치고 돌아왔다. 시험 사출. 오민재가 샘플 서른 개를 박스에 담아 측정실로 들고 왔다. 들뜬 얼굴로."대리님, 같이 재요."나는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샘플 서른 개. 은색 하우징 커버. 안쪽 귀퉁이에 돋을새김 숫자.보였다.재기 전에. 3번은 이제 괜찮았다. 대신 1번 쪽이 아주 조금, 0.01쯤, 반대로 기울어 있었다. 금형을 고치면서 균형이 옮겨 간 것이다. 공차 안이었다. 문제는 없었다. 다만 몇 달 뒤에 다시 볼 일이 생길 것이다.나는 캘리퍼스를 들었다. 영점을 맞췄다. 오민재와 나란히 앉아 한 개씩 쟀다. 오민재가 부르고, 내가 적었다. 서른 개."3번 괜찮아요! 다 공차 안이에요!""응. 확인.""대리님, 근데요."오민재가 표를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밀어 올리고."1번이 조금…… 아주 조금 올라간 것 같은데. 이것도 봐야 돼요?"나는 오민재를 보았다.찾았다. 혼자서."응. 봐야 돼. 지금 말고, 석 달 뒤에. 적어 둬."오민재가 수첩을 꺼내 적었다. 석 달 뒤, 1번. 그리고 그 아래 줄을 그었다. 두 번.오민재는 그 두 줄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찾은 걸 자기 손으로 적은 두 줄. 나는 그 옆모습을 보며 선배의 말을 생각했다. 불량 찾는 놈 만드는 거.측정실을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건 막힌 게 아니었다. 사 년 전이었다면 반나절을 붙들고 있었을 일이었다. 지금은 박스 뚜껑을 여는 순간 끝났다.막히지 않았다.집에서도 막히지 않았다.해인이 서재에 밀어 둔 서아의 퍼즐. 백 조각짜리 공룡 그림. 서아는 아직 못 하고, 해인은 귀찮아하던. 나는 저녁에 그걸 거실 바닥에 쏟았다. 조각이 보였다. 모서리, 가장자리, 초록 조각은 공룡 등, 파란 조각은 하늘. 십 분 만에 끝났다.서아가 옆에서 박수를 쳤다. 해인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퍼즐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책장에서 해인의 스도쿠 책을 꺼냈다. 해인이 출장 갈 때 기차에서 푸는.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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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교문

하나.나는 교문 앞에 서 있었다.철문은 초록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녹이 슨 자리가 갈색으로. 반쯤 열린 문짝 하나가 바닥의 레일 위에 비스듬히 멈춰 있었다. 누군가 밀다 만 것처럼.둘.공기가 고여 있었다. 차가운 모양이었다. 차갑지는 않았다. 사 년 동안 그랬듯이, 온도가 없는 온도.셋.입김들.바로 눈앞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얀 덩어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주먹만 한 것, 그보다 작은 것, 길게 늘어진 것. 조금씩 다른 높이로. 여기 사람이 서 있었다. 저기도. 저 낮은 건 아이였을까. 동생 손을 잡고 나온 누나. 저 높은 건 아빠였을까.그 가운데 하나가 유난히 컸다. 길게 뻗어 나온. 입을 크게 벌리고 무언가를 외친 사람의 입김처럼. 교문 안쪽을 향해서.넷. 다섯.나는 그 입김을 지나쳤다. 손대지 않았다.그리고 교문 기둥을 보았다.회색 돌기둥이었다. 내 키보다 조금 높은. 윗부분에 학교 이름이 새겨진 돌판이 붙어 있을 자리였다. 현수막 끝자락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펄럭이다 만 모양으로.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여섯.기둥의 아래쪽, 내 허리께에.하얀 선이 있었다.분필이었다. 세로로 그은 짧은 선. 하나, 둘, 셋.그리고 넷째. 앞의 셋보다 조금 흐린. 손에 힘이 덜 들어간. 긋다가 망설인 것처럼, 중간에서 한 번 끊겼다 이어진.일곱. 여덟.나는 그 선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금이었다.우리 집 거실 벽, 서아 키 눈금 옆 곰돌이 머리 위에 그었던 것. 연필로. 한 번 자면 하루. 금 두 개, 금 다섯 개, 금 열여섯 개. 그리고 서른한 개인지 서른두 개인지 헷갈리던 날. 금을 빼먹은 다음 날 아침.누군가 여기 금을 긋고 있었다.아홉. 열.기둥 발치, 발목 높이쯤에 종이 한 장이 떠 있었다.떨어지다가 멈춘 모양이었다. 한쪽 귀퉁이가 아래로 기울어서. 바닥에 닿기 한 뼘 전에. 금을 긋다가 손에서 놓친 것처럼.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았다.줄이 그어진 공책 한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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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답장

열이틀이 지났다.그동안 나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밤마다 서재에 앉았다. 남색 책. 이면지. 길 끝. 아무것도 없는 자리.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알고 싶었다. 여전히. 그런데 그날 밤처럼 멈추지는 않았다.같은 자리에서 두 번 막히는 건, 처음 막히는 것과 달랐다. 처음엔 벽이 벽인 줄 몰랐다. 두 번째엔 알았다. 여기가 끝이구나. 알고 서 있는 벽 앞에서는, 무언가가 멈추지 않았다.선배 말대로 한 시 전에는 잤다. 해인이 스탠드를 끄러 왔다. 매일 밤.그리고 매일 밤 생각했다. 바닥에 누운 쪽지. 접힌 채로.아침마다 수첩을 펼쳤다. 여섯째 장이 뜯긴 자리. 스프링에 걸린 종이 조각 몇 개. 그걸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거기 있었다는 증거. 내가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회사에서는 창밖의 은행나무를 보았다. 잎끝의 연두가 조금 넓어져 있었다. 하루에 한 뼘씩은 아니었다. 한 칸씩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제와 달랐다. 흐르는 것은 그렇게 흘렀다. 매일 보면 모르고, 열흘 뒤에 보면 아는.거기 은행잎은 어떨까. 샛노란 채로 떠 있을 것이다. 한 장도 떨어지지 않고.오민재가 물었다. 대리님 요즘 창밖에 뭐 있어요? 나는 은행나무, 라고 했다. 오민재가 창밖을 한참 보더니, 아직 초록인데요, 했다. 응. 아직 초록이야.토요일 오후.비가 왔다. 여름의 끝물 비. 베란다 창에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다 모여서, 굵어져서, 떨어졌다.서아가 거실 바닥에서 블록을 쌓다가, 해인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사진첩을 열었다. 요즘 서아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였다. 자기 사진 보기."서아 아기!"서아가 화면을 내밀었다. 해인이 옆에서 들여다보고 웃었다."아, 이거. 한강 갔을 때다. 작년 가을."동영상이었다. 해인이 재생을 눌렀다.한강 둔치. 잔디밭. 돗자리. 가을 햇빛. 화면이 흔들렸다. 해인이 찍고 있었다. 화면 가운데 서아가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기저귀 찬 엉덩이가 통통한. 돗자리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비틀비틀.화면 오른쪽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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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송가을

천천히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그 줄이 나흘 동안 따라다녔다.출근 버스에서. 측정실에서. 서아의 머리를 감길 때. 샴푸 거품이 서아의 눈에 들어갈까 봐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 줄을 읽고 있었다. 공책에 적힌 대로 하면 천천히 하는 거예요?수첩 여덟째 장에 답을 적어 보았다.— 서두르지 마라.줄을 그었다. 그건 명령이었다. 천천히 하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꾼 것뿐이었다.— 네가 편한 속도로.줄을 그었다. 그 아이는 편한 속도가 뭔지 몰라서 물은 것이었다.— 공책은 참고만 해라.줄을 그었다. 참고만. 어디까지가 참고인지 그 아이가 어떻게 알까. 나도 몰랐다.— 괜찮아질 거다.줄을 그었다. 그건 앞날이었다. 모르는 앞날.— 나도 처음엔 몰랐다.그 줄에서 오래 멈췄다. 줄을 긋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다음을 잇지도 못했다. 처음엔 몰랐다. 그래서, 그다음엔 알았나. 무엇을 알았나. 천천히가 뭔지. 나는 그걸 누구에게 배웠나.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다.사 년 동안 나는 빨랐다가, 무너졌다가, 치웠다가, 또 빨랐다가. 그게 천천히였는지는 모른다. 지나고 보니 사 년이었을 뿐이다.그걸 어떻게 가르치지.수요일 새벽 다섯 시.알람보다 한참 먼저 눈이 떠졌다. 해인은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이불을 발로 차 낸 채로. 나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 거실로 나왔다.베란다 문을 열었다.서늘했다.처음이었다. 돌아온 뒤로. 새벽 공기가 팔뚝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매미가 울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풀벌레가 울었다. 찌르르, 찌르르. 가늘게.여름이 가고 있었다.나는 베란다 바닥에 앉았다. 해인의 이름 모를 화분 옆에. 무릎에 수첩을 펴고. 여덟째 장. 줄이 그어진 다섯 줄, 그리고 긋지 않은 한 줄.— 나도 처음엔 몰랐다.하늘이 회색에서 흰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동쪽 아파트 옥상 너머가 조금씩 밝아졌다.사 년 동안 해는 동쪽 낮은 곳에 박혀 있었다. 뜨지도 지지도 않고. 그 아이의 해도 그럴 것이다. 늦가을 아침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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