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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삼 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12:21:37

항해사 씨의 마지막 장을 읽은 것은 노승이 다녀가고 한 달쯤 뒤였다.

일 년 반 넘게 미뤄 둔 장이었다.

끝에서 두 장 앞에서 멈춘 별의 표. 그 다음 장의 끝줄은 이미 읽었다. 세종이 처음 "계십니까" 하고 부르던 날 밤에. The stars are the same. I am not. 별은 그대로다. 나는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읽지 못한 게 아니었다. 읽지 않았다. 고어 영어는 이제 웬만큼 읽혔다. 그 장만 펼치지 않았다. 마지막 장이니까. 필사 씨의 마지막 장이 어땠는지 알았으니까. 어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아니한다. 마지막 두 획까지.

항해사 씨의 마지막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노승이 다녀간 뒤로 나는 매일 저녁 두 거울 사이에 앉았다. 점검표 여덟 번째 칸. 이름 없는 칸. 앉아 있다 보면 쥐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가 그 장이었다. 읽지 않으려고 꽉 쥐고 있는.

그날 저녁, 나는 앉았다가 일어나서, 가죽 노트를 펼쳤다.

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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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의 뒷면   87화. 빌려 쓰는 열쇠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 천천히.목욕탕 탈의실. 평상 위의 오답노트. 이건 베끼는 거 아님. 철컥, 하는 소리. 두 팔을 벌리고 선 가을. 회색 외투. 이음매가 없는. 허리의 열쇠 꾸러미. 사슬. 자물쇠 세 개. 입만 웃는 얼굴. 이우진 씨, 하고 내 이름을 되뇌던 목소리. 곧 여기가 제 이름이 될 테니까요.해인은 중간에 한 번도 끊지 않았다. 불량 보고서를 듣는 사람처럼. 다 듣고 나서야 물었다."그 애는. 괜찮아?""괜찮대. 그 사람 짧대. 자기 입으로 그랬대.""짧다는 게 뭔데.""오래 못 있는다는 거야. 아마. 삼 분쯤 있다가 갔어. 자꾸 손목을 봤어. 시계도 없는데."해인이 스톱워치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 초에서 멈춘 숫자를."당신은 그 사람보다 오래 있었어?""응. 십오 분쯤.""그럼 당신이 막아 줄 수는 없어? 다음에 또 오면."나는 대답을 찾았다. 오래."……나는 막힐 때만 가. 언제 갈지 나도 몰라. 그 사람은 또 올 거야. 내가 없는 날에. 가을이 쪽 시간으로 몇 달에 한 번 가는 사람이 뭘 막아.""……""그리고 거기 있어도. 나는 그 애 대신 뭘 해 줄 수가 없어. 오늘도 그랬어. 가을이가 막아섰어. 나는 옆에 섰어. 그게 다였어."해인이 한참 나를 보았다."옆에 섰네.""응.""그럼 된 거 아니야?"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된 건지 몰랐다. 그 사람은 사라졌다. 자물쇠도. 그런데 내가 막아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 시간이 짧아서였다.해인이 책을 집었다. 펴지 않았다."그 사람도 당신처럼 어딘가에서 쓰러졌다 깨는 사람일까. 이 초씩.""……모르겠어."

  • 세상의 뒷면   86화. 열쇠

    엔터를 누르지 못했다.검색창에 한 단어가 떠 있었다. Emma. 커서가 그 끝에서 깜빡였다. 켜졌다가, 꺼졌다가.누르면 무언가가 나올 것이다. 아니면 아무것도 안 나올 것이다.엠마네는 나갔다. 확실했다. 공책의 마지막 장이 반듯했으니까. 그런데 나갔다는 것과 여기 있다는 것은 달랐다. 이쪽 세상 어딘가에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몇 분 쓰러졌다가 깨어나서, 카 시트의 엠마를 안고.만약 없으면.그러면 나 혼자였다. 돌아온 사람은. 사 년을 들고 이쪽으로 건너온 사람은. 도서관 벽의 금을 기억하는 사람은.만약 있으면.그 사람은 무엇을 들고 왔을까. 나처럼 이름 세 개를 매일 쓸까. 수도꼭지를 조금 풀어 둘까. 아내에게 말했을까.어느 쪽이 무서운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무서웠다. 둘 다 알고 싶었다.나 말고도, 있을까.해인이 옆 의자에서 책장을 넘겼다. 아까 또 막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했다. 아니었는데. 아니라고 한 지 오 분도 안 되어서, 나는 그 한 단어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노트북 화면을 반쯤 덮었다. 해인이 아직 몰랐으면 했다. 누구를 찾는지. 찾지 못하면, 해인에게 없는 사람을 하나 더 얹는 일이었다."……해인아."해인이 책을 내렸다."막히는 것 같아."해인이 나를 보았다. 아까는 아니라며,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묻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스톱워치. 엄지를 올렸다."가도 돼. 여기 있을게."나무 사물함. 평상. 고개를 돌린 채 멈춘 선풍기. 바나나우유 냉장고.목욕탕 여탕 탈의실이었다. 양쪽 벽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평상 위에 도시락 가방이 놓여 있었다. 연분홍 누빔. 지퍼가 닫힌. 그 옆에 오답노트 한 권.

  • 세상의 뒷면   85화. 강가 씨의 노트

    목욕탕은 시장 뒷골목에 있었다.낡은 삼 층 건물. 입구 위에 붉은 온천 표시. 굴뚝. 유리문에 금색 글씨로 영업시간. 새벽 다섯 시부터.가을이 문을 밀었다.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소리가 몇 걸음 앞에서 삼켜졌다.카운터에 아무도 없었다. 작은 창구 너머에 수건이 개어져 쌓여 있었다. 그 옆에 요금표. 어른, 어린이. 그 아래 누군가 볼펜으로 적어 둔 메모. 사장님 오늘 병원, 열쇠는 서랍."여기 사장님은 엄마 계모임 친구예요. 제가 어릴 때 엄마랑 맨날 왔어요. 일요일마다."가을이 카운터 창구 안의 수건 더미를 보았다."엄마는 일요일에만 가게를 오후에 열었어요. 오전엔 저 데리고 여기 왔어요. 탕에 넣어 놓고, 불리고, 때 밀고. 엄마 손이 엄청 세요. 이태리타월로 등을 밀면 제가 아프다고 소리 질렀어요. 그럼 엄마가 그랬어요. 가만있어라, 다 벗겨지면 새 사람 된다."가을이 웃었다. 코로."초등학교 졸업하고는 안 왔어요. 혼자 씻는다고. 엄마가 좀 서운해했어요."가을은 카운터 앞을 지나며 창구 너머 수건 한 장을 집었다. 계산대에 동전 하나를 놓았다. 반듯하게."지난주에 씻으러 왔어요. 생수 들고. 탕 물은 안 흐르니까. 아저씨 공책에 욕조에 생수 부어서 씻었다고 써 있어서. 그러다 탈의실에서 거울을 봤어요. 양쪽 벽에. 어릴 때는 몰랐어요. 거울이 마주 보고 있는 줄. 엄마 등만 봤으니까."가을이 잠깐 말을 멈췄다."……엄마 등이 넓었어요. 그땐."가을이 카운터 옆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여탕, 남탕. 가을이 멈췄다. 나를 돌아보았다."……거울은 여탕 탈의실에 있어요.""아.""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근데 좀 이상하죠."가을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 세상의 뒷면   84화. 아저씨도 막히네

    시장이었다.반투명한 지붕. 형광등. 공중에 굳은 생선 가게의 물줄기. 어묵 냄비 위에 멈춘 김.그리고 통로 끝에서 흐르는 김.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 이제는 길을 알았다.돼지국밥 가게 앞. 가마솥 하나에서 김이 올라가고 있었다. 가을은 솥 앞에 없었다. 가게 안쪽,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도마를 올려놓고 대파를 썰고 있었다. 탁, 탁, 탁. 붉은 앞치마. 걷어 올린 카디건 소매.칼질이 서툴렀다. 대파가 제각각의 두께로 잘렸다. 가을은 그걸 한 번 들여다보고, 얇은 것과 두꺼운 것을 따로 모았다. 그리고 다시 썰었다.가게 벽의 못에 도시락 가방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 못이 하나 더 박혀 있었다. 거기 오답노트가 걸려 있었다. 끈을 달아서. 표지에 매직으로 크게. 5.가을이 고개를 들었다."우진 아저씨."칼을 내려놓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고, 허리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오셨어요. 요즘 자주 오시네요.""……그런가요.""저번엔 교문에 십 초 오셨죠? 쪽지 위치가 조금 틀어져 있었어요. 제가 붙인 거랑."나는 웃었다. 가을은 그걸 확인한 것이다. 돌아와서, 교문 기둥의 쪽지가 몇 밀리 틀어진 걸."바람도 없는데 틀어져 있으면, 누가 온 거잖아요.""……내가 손댄 기억이 없는데.""그럼 읽다가 숨 쉬셨나 보죠. 아저씨 숨은 흐르니까."가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솥으로 가서 뚜껑을 열었다. 김이 피어올랐다. 흘러서."아직 십 분은 더 끓여야 돼요. 한 바퀴 도실래요?""한 바퀴요?""시장이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가을이 앞치마를 입은 채로 가게를 나섰다. 도시락 가방은 못에 걸어 둔 채로. 처음이

  • 세상의 뒷면   83화. 문을 열어 둔다

    노란 포스트잇이었다.서재 문 손잡이 바로 위, 문짝 한가운데에. 네 귀퉁이를 꾹꾹 눌러서. 해인이 냉장고에 붙이던 것과 같은 크기.동글동글한 글씨.— 믿는 건 모르겠어.— 근데 당신이 사 년을 혼자 있었다면, 이제 혼자 있지 마.그 아래 줄을 한 칸 띄우고, 번호를 매겨서.— 1. 서재 문은 닫지 않는다.— 2. 막히는 것 같으면 부른다. 옆방이니까.— 3. 다녀오면 다녀왔다고 말한다.— (진짜임)나는 복도에 서서 그 포스트잇을 오래 보았다.복도 끝 안방에서 해인이 서아를 재우는 소리가 들렸다. 곰 세 마리. 해인의 음정은 늘 조금 낮았다. 서아가 으쓱 으쓱 부분에서 깔깔 웃었다. 열이 내린 지 하루 만에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막히는 것 같으면 부른다.막힘은 예고하고 오지 않았다. 식탁에서, 서재에서, 결승선 뒤에서, 서아의 침대 옆에서. 무언가를 끝까지 붙들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그런데 그 어느 순간 전에, 붙들고 있는 시간이 있었다. 분명히. 서른세 번째 장 앞에서 한참. 서아 손가락을 쥔 채로 한참. 그 한참 동안 나는 늘 혼자였다. 문이 열려 있어도.해인은 그 한참을 달라고 했다.나는 포스트잇을 떼지 않았다. 손끝으로 네 귀퉁이를 한 번 더 눌렀다. 잘 붙어 있는지. 확인.그리고 서재 책상에서 포스트잇을 한 장 꺼냈다. 각진 글씨로 적었다. 꾹꾹 눌러서.— 1. 알겠습니다.— 2. 알겠습니다. (막히는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미안합니다.)— 3. 알겠습니다.— (확인)해인의 포스트잇 바로 아래에 붙였다. 노란 것 두 장이 위

  • 세상의 뒷면   82화. 사 년

    "8시 53분이었어."내가 말했다. 아주 낮게. 서아의 머리 너머로.해인이 나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쯤 보이는 얼굴로."어린이집 앞. 서아가 유리에 손바닥 붙이고 들어간 다음. 골목 나와서 세 걸음, 네 걸음. 머릿속에서 쿵 소리가 났어. 천둥 같은. 그리고 무서웠어. 이유 없이.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돌아봤어."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로."아무도 없었어. 원장 선생님도, 아이들도, 길에 있던 사람들도. 비둘기가 공중에 멈춰 있었어. 누가 떨어뜨린 커피가 쏟아지다가 굳어 있었어. 소리가 없었어. 내 숨소리 말고는."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의 이마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세상이 멈춰 있었어. 8시 53분에. 나만 빼고."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해인이 말했다. 하나도 빼지 말고. 그런데 사 년은 하나도 빼지 않고 말하기엔 너무 길었다. 천오백 날. 그 하루하루를 다 말하면, 서아가 깨고, 해가 뜨고, 다시 질 것이다.그래서 순서대로 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불량 보고서를 쓰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집에 갔다고 했다. 도어락이 안 열려서 비상키로. 식탁에 식빵 봉지가 그대로 있었다고. 서아 식판에 밥풀이.해인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벽에 금을 그었다고 했다. 거실 벽. 서아 키 눈금 옆에. 곰돌이 머리 위에. 잠을 한 번 자면 하루라고 정하고."……곰돌이 머리 위에."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실 벽에 그 곰돌이 스티커가 있었다. 서아 돌 때 해인이 붙인."응. 거기. 금 하나, 둘. 처음엔 셌어.""몇 개까지.""집 벽엔 육십 몇 개. 그다음엔 도서관 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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