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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오답노트

"이 대리, 한 장만 써 줘."선배가 A4 한 장을 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빈 종이였다. 맨 위에 제목만 인쇄되어 있었다. 신입 사원 품질 교육 — 불량을 보는 눈."다음 달에 신입 셋 들어와. 교육 자료 만드는데, 네 꼭지가 하나 필요해. 요즘 너 불량 보는 거 보면, 자료를 펴기도 전에 알잖아.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한 장으로.""……어떻게 하는 건지요?""그래. 순서대로. 첫째, 둘째, 셋째. 신입들이 따라 할 수 있게."선배는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나는 빈 종이를 보았다.첫째.볼펜을 댔다. 첫째, 도면을 본다. 둘째, 측정값을 본다. 셋째. 셋째에서 손이 멈췄다.셋째에 무엇을 적지. 셋째, 보인다. 그건 순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이는지 나도 몰랐다. 사 년 동안 멈춘 세상에서 무언가가 쌓였고, 돌아오니 보였다. 그 사 년을 한 장에 적을 수는 없었다. 첫째, 멈춘 세상에 사 년 갇힌다. 둘째, 조선 사람의 노트를 해독한다. 셋째, 물시계를 만든다.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오지 않았다.신입 셋. 그 사람들은 나처럼 볼 수 없을 것이다. 나처럼 되려면 나처럼 사 년을 살아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방법으로 보게 될 것이다. 오민재가 부품을 뒤집어 숫자를 찾았듯이.그런데 그 방법을, 나는 한 장에 적어 줄 수 없었다.선배는 순서를 원했다. 따라 할 수 있는 순서.가을도 그랬다. 공책에 적힌 대로 하면 되는 거죠?볼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셋째.셋째에.오후 세 시의 사무실. 프린터가 드르륵 울었다.그 소리가 멀어졌다.교문 앞이었다.똑딱.나는 시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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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운동회

회사 주차장의 은행나무가 노래지기 시작했다.잎끝부터. 연두가 넓어지다가, 어느 아침 보니 가장자리가 노랬다. 그다음 주엔 잎의 절반이. 매일 보면 모르고, 한 주 뒤에 보면 아는.그 사이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막히지 않았다. 아니, 막혀 있었다. 계속. 그런데 그 막힘은 무언가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등에 얹힌 돌처럼, 걸을 때마다 무게만 느껴졌다.빨간 네모. 세 겹.정답 칸.출근 버스 창에 이마를 대고 있으면 그 네모가 떠올랐다. 측정실에서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다가도. 서아의 양말을 신기다가도. 그 칸에 뭐라고 말해 줘야 하지. 그건 칸이 아니라고. 그럼 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그럼 공책대로 하면 되는 거냐고.같은 길을 매일 걸었다. 끝이 보이는 길이었다. 끝에 가면 가을이 다시 묻는 길.토요일은 서아의 가을 운동회였다.어린이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렸다고 했다. 해인은 금요일 밤에 김밥을 쌌다. 여섯 줄. 서아는 김밥 꽁다리만 먹고, 나머지는 해인과 내가 먹을 것이었다. 해인은 늘 그랬다. 꽁다리를 서아 몫으로 따로 모아 두었다.아침. 서아가 노란 조끼를 입었다. 햇살반은 노란 조끼. 등에 숫자 7. 머리에 노란 머리띠. 해인이 머리띠를 씌우자 서아가 벗었다. 해인이 다시 씌우자 또 벗었다. 세 번째에 서아가 머리띠를 목에 걸었다. 목걸이처럼."본인이 좋다는데."내가 말했다. 해인이 웃으며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그 말 좀 그만해."운동장은 시끄러웠다.확성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요를 빠르게 튼. 선생님들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부모들이 이름을 부르고. 솜사탕 기계가 윙 돌았다. 누군가 풍선을 터뜨렸다.나는 한쪽 귀에 주황색 귀마개를 넣었다. 해인이 보고 아무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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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유리창 너머

운동회 뒤로 나는 서재에 오래 앉지 않았다.남색 책을 서랍에 넣었다. 이면지는 회사에 도로 가져갔다. 저녁엔 서아와 블록을 쌓고, 서아를 씻기고, 서아가 잠들 때까지 곰 세 마리를 불렀다. 으쓱 으쓱에서 서아는 여전히 한쪽 어깨만 들썩였다.막히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막힘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서아가 옆에 있을 때는 무언가를 끝까지 붙들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이 깊어지려 하면 고개를 들어 서아를 보았다. 서아가 거기 있는지. 확인.해인은 그걸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밤에 내가 서재 앞을 지나쳐 안방으로 곧장 들어오면, 해인이 이불을 한쪽 들어 주었다. 들어오라고.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났다. 회사 은행잎이 다 노래졌다. 몇 장은 떨어져 주차장 바닥에 붙었다. 비가 오면 미끄러웠다.새벽 세 시에 서아가 울었다.악을 쓰는 울음이 아니었다. 자다가 무언가에 놀라서, 반쯤 깬 채로 흐느끼는. 나는 먼저 깼다. 해인은 모로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해인은 깊이 잤다. 분기 마감이라고 했다.서아 방에 들어갔다. 서아가 침대 난간을 붙잡고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반쯤 감고."아빠……""응. 아빠 여기 있어.""아빠 거기 있어?"운동회 다음 날 아침 거실에서 서아가 한 말이었다. 아빠 거기 있어. 서아 뛴다. 그 말이 꿈속까지 따라간 모양이었다."응. 여기 있어. 서아 옆에."나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았다. 난간 사이로 손을 넣어 서아의 등을 토닥였다. 해인이 하는 것처럼. 천천히. 하나, 둘.서아가 다시 누웠다. 내 손가락 하나를 꼭 쥐고.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숨이 길어졌다. 새근, 새근.잠들었다.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서아가 쥐고 있었으니까. 나는 바닥에 앉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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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틀린 답

가을이 창을 보았다.하나.가을의 등이 굳었다. 카디건 어깨가 딱딱하게 올라갔다.둘.가을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창유리를 보고 있었다. 햇빛에 옅게 씻긴 교실. 칠판. 책상들. 그리고 자기 등 뒤에 선, 얼굴 자리가 빈 것.셋.가을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작게. 몇 걸음 앞에서 삼켜지는 목소리로."……열넷. 두려움은 앞에 세워 둔다. 도망친 자의 등 뒤가 가장 넓은 전장.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앞에 세워 두는 것이다. 그 옆으로 걸어갈 수 있다."외우고 있었다.내 공책의 문장이었다. 갑옷을 입은 그 사람이 정문 유리 앞에서 해 준 말을, 내가 받아 적은. 가을은 그걸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등 뒤에 그것을 둔 채로."넷. 다섯."가을이 셌다. 내가 셋을 세던 것처럼. 옹기 수면 앞에서 다섯까지, 일곱까지 세던 것처럼. 그것도 공책에 적어 두었다."여섯. 일곱……"일곱에서 목소리가 끊어졌다.가을이 창에서 눈을 뗐다. 몸을 홱 돌려 교실 안쪽을 보았다. 칠판 쪽. 창을 등지는 쪽. 유리 속 그것이 보이지 않는 쪽.그리고 나를 보았다."……다 했는데요."가을의 얼굴이 하얬다. 입술이 떨렸다."다 했는데 왜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백 일이에요."가을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져도 몇 걸음 앞에서 삼켜졌다. 그래서 가을은 더 크게 말했다."씻는다, 입는다, 먹는다, 적는다, 말한다, 기억한다, 배운다, 두 거울 사이에 앉는다. 여덟 칸. 백 일 동안 하루도 안 빠졌어요. 하나도 안 틀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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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너의 칸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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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개선안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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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한 교수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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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국밥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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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불가에 온 늑대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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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짖는 소리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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