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42 챕터

11화. 부서진 조각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느꼈던 그 안식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대신 폐부 깊숙이 들어차는 것은 지하 4층 특유의 썩은 내와 비릿한 금속성 냄새였다. 나는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천장의 형광등이 파르르 떨리며 낡은 명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손목의 흉터 칩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시스템이 무너져 내린 잔해 위에서 나는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70년의 고통이 주입되었던 그 뇌의 신경망이, 이제는 현실의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스템은 붕괴했다. 최소한 내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1분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고요는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기계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나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콘크리트의 거친 결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나는 살아서 이곳에 돌아왔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본능적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하나까지도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였다. 뇌가 시스템의 강제 동기화에서 벗어나 과부하 상태에 빠진 것일까. 나는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지옥 같은 도살장의 중심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복도 끝, 관리국 지하 4층의 심장부라 불리는 '섹터 제로'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푸르스름한 데이터의 잔광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문턱을 넘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의 시야는 순식간에 뒤틀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서버 랙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수천 개의 유리관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뇌와 신경이 복잡한 전선에 얽힌 채 잠겨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거세된 도살장의 실체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중심부로 다가갔다. 그곳 중앙, 투명한 배양액 속에 가느다란 몸을 담근 한 여자가 보였다. 실험체 0호, 이수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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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공명하는 고통

최진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유리 구슬이 깨지기 직전의 위태로움이 그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목의 흉터 칩이 열을 뿜으며 혈관을 파고드는 듯한 작열감을 선사했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나를 현실에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모니터 속에서는 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는 기억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저것이 그들이 말하는 행복 데이터였다. 사람의 온기가 담긴 기억을 증류하여 투명한 코드로 바꿔버린 뒤, 영생을 탐하는 괴물들에게 영양분으로 제공하는 도살장의 기록. 나는 최진혁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보여? 네가 그토록 찬양하던 시스템의 본질이. 이건 기술이 아니야, 최진혁. 이건 인간이라는 종이 스스로를 잡아먹기 위해 고안해 낸 가장 잔혹한 자폭 장치지. 너희는 행복을 수확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인간의 영혼을 도려내고 그 껍데기에 고통이라는 이름의 쓰레기를 채워 넣은 거잖아. 이제 이 방 안의 모든 기류가 너희의 추악한 밑바닥을 가리키고 있어. 이 화면 너머로 송출되는 진실을 봐. 네가 평생 쌓아 올린 그 거대한 성채가 얼마나 허술한 모래성인지, 지금 당장 똑똑히 확인하란 말이다."최진혁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내 손아귀에 갇힌 그의 고개는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입가에 머금었던 알약의 잔여물이 타액과 섞여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스템에 완벽히 종속되어 있어야 할 그의 뇌파가 지금 극도의 공포로 인해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흉터 칩을 활성화했다.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지옥의 기억들이 칩을 거쳐 시스템의 메인 서버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 찰나,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만 개의 데이터 비트가 비명을 지르며 주변 모니터들을 일제히 붉게 물들였다. 이제 시스템은 나의 고통을 먹고 자라나지 않는다. 내가 시스템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네가 나에게 주입했던 70년의 시간, 그 끔찍한 공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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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잃어버린 찰나

최진혁의 시신이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구축한 완벽한 통제국가, 그 신성한 데이터의 성역이 지금 내 손끝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나의 의식은 흉터 칩을 통해 시스템의 신경망과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다. 서버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과부하된 데이터는 마치 타오르는 용암처럼 내 뇌를 타고 흘렀다. 그 속에는 수천 명의 비극이 뒤섞인 기억의 잔해들이 거친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 손목을 움켜쥐었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이미 내 몸은 고통을 연료로 삼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눈을 부릅떴다. 최진혁이 죽음의 문턱에서 보았던 그 허황된 행복의 조각들을, 내가 지금 여기서 산산조각 내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히 시스템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인간의 존엄을 다시금 데이터의 바닥에서 긁어 올리는, 처절한 해방의 의식이었다.비상등이 붉게 점멸할 때마다 서버실 내부의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백업 서버들이 비명을 지르며 정전기를 뿜어냈다. 나는 흉터 칩이 박힌 손목을 코어 단자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은 희미했다. 이미 나의 감각은 현실의 육체보다 데이터의 회로에 더 깊숙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붕괴를 거부하며 최후의 방어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70년이라는 영겁의 지옥, 그 데이터를 나에게 역류시켜 나라는 존재 자체를 과부하로 태워버리려는 관리국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리국 요원들이 알약을 삼키고 고꾸라진 채, 각자의 뇌 속에서 수확했던 비극의 데이터와 함께 소멸해가는 광경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시스템이 투사하는 강제 환상 속에서 영원히 헤매고 있었다.나는 최진혁의 시신을 가로질러 서버실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금속 바닥의 냉기가 뼈를 깎는 듯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흉터 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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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관리국의 균열

관리국 지하 4층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스템의 붕괴는 요란한 폭발음보다 더 끔찍한 정적을 동반했다. 벽면을 가득 채우던 중앙 서버의 푸른 조명이 핏빛으로 점멸하다가 이내 하나둘씩 꺼져 나갔다. 서버실 한가운데 놓인 캡슐 안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손목의 흉터 칩은 이미 회색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내 신경망을 파고들던 고주파의 지릿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낯선 평온만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곧이어 비명소리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요원들의 비명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 고장 난 기계가 뱉어내는 쇳소리에 가까웠다. 그들이 복용한 동기화 알약이 시스템과 함께 붕괴하며, 요원들의 뇌 속 데이터를 강제로 끄집어내고 있었다.“강한결!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당장 연결을 복구해!” 최진혁 관리국장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서버실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차가운 가면을 잃고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비상용 단말기가 쥐어져 있었지만, 화면은 무력한 검은색으로 점멸할 뿐이었다. 그는 시스템에 자신의 뇌를 완전히 종속시킨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관리국의 중앙 서버가 멈추자 그와 연결된 신경계도 함께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기어오며 짐승처럼 헐떡였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완벽한 통제국가는,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건… 이건 계산에 없었어. 시스템은 붕괴하면 안 된다. 모든 데이터는 섹터 제로로 이전되어야 한단 말이다!” 최진혁은 이제 자신의 목소리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핏줄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며 단말기에 코드를 입력하려 했지만, 손가락은 마비된 것처럼 덜덜 떨렸다. 그는 관리국의 국장이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가 으스러질 때 함께 갈려 나가는 부품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고통을 보며 묘한 해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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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배신자의 최후

시스템이 붕괴하는 비명 소리가 귀를 찢을 듯 고막을 파고들었다. 금속이 뒤틀리고 회로가 타들어 가는 기괴한 고주파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리국이라는 거대한 도살장이 내지르는 최후의 절규이자, 수만 개의 영혼이 데이터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해방의 서곡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망막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파편들은 내가 지금 섹터 제로의 심장부, 그 파괴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 손목에 박힌 흉터 칩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과열되어, 살을 파고들며 뼈까지 녹여내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망이 타버린 자리에 찾아온 것은 압도적인 무감각이었다. 나는 그 무감각 속에서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관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김 팀장, 현상 유지를 신조로 삼아 타인의 고통을 밑거름 삼아 자신의 지위를 견고히 다져온 그 가련한 부품 말이다.김 팀장은 유리 벽 너머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버실의 붕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늘 애지중지하던 홀로그램 모니터들은 이미 정지 화면처럼 멈춰 섰고, 그 위로 붉은색 경고등만이 섬뜩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관리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고,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을 거세하는 행위가 정당한 질서라고 확신했던 자의 최후는 그토록 초라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더듬었다. 요원들이 복용하던 동기화 알약이 뒤늦게 부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이 셧다운되면서 데이터의 흐름이 역류하고, 그 알약은 이제 그들의 뇌를 직접 갉아먹는 독으로 변해 있었다. 김 팀장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뒤집히며 그 안에서 새까만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데이터로 변환되어 추출되지 못한, 순수한 인간의 공포였다."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강한결! 시스템이 멈추면 우리 모두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이러는 건가?"김 팀장이 비명을 지르며 유리 벽을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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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저항의 시작

정적은 예고 없이 깨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안식을 기다리던 내 귓가에 들려온 것은 심장 박동도, 바람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계가 강제로 재부팅 되며 내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전자음이었다. 소멸했어야 할 흉터 칩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며 손목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나는 경악하며 눈을 떴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죽음의 평온함이 아닌, 푸른색 데이터의 잔상이 일렁이는 지하 4층의 차가운 천장이었다. 시스템은 죽지 않았다. 내가 쏟아부은 70년의 지옥 데이터조차 이 거대한 도살장의 연산 속도를 일시적으로 늦췄을 뿐, 근본적인 연결 고리를 끊어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온몸의 신경을 긁어댔다.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발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관리국의 시스템이 나를 다시 포획한 것이다. 흉터 칩은 여전히 뜨거웠고, 시스템은 내 고통을 연료 삼아 다시 가동되고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구두 굽 소리, 서지우였다. 그녀는 관리국의 통제실 너머에서 늘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자였다. 나는 그녀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경계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곁으로 다가와 서늘한 손길로 내 손목의 칩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빛은 내가 알던 차가운 데이터 분석관의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억눌러왔던 울분과 아주 오래된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서지우가 주머니에서 작은 단말기를 꺼내 내 흉터 칩 근처에 가져다 댔다. 스파크가 튀며 칩의 과부하가 일시적으로 멈췄다. 나는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네가 왜 여길….” 내 질문에 지우는 대답 대신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단순히 동료를 구하려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절벽 끝에 선 사람이, 함께 추락할 운명임을 직감하고 보내는 마지막 연대였다. 그녀는 내 흉터 칩에 연결된 케이블을 자신의 단말기에 직접 연결하며 짧게 속삭였다. “기억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훔쳐내야 할 때예요. 그들이 당신에게 강제로 주입했던 그 모든 지옥의 파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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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최진혁의 비밀

어둠이 걷힌 자리에는 피비린내와 타는 전기 회로의 악취만이 비릿하게 고여 있었다. 흩날리는 데이터의 잔해들이 마치 잿가루처럼 내 눈앞을 부유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는 웅성거림은 먼 파도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내 의식은 서서히 차가운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안식이 비로소 손끝에 닿으려는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낚아채 흔들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억지로 시야를 확보하자 서지우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굳은살이 박인 그대로였고, 그 안에는 데이터 패드가 아닌 권총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총구는 나를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귓가에 입을 바짝 갖다 대고 무언가를 절박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우리가 부순 시스템의 파편보다 더 짙은 공포와 연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도왔던 이유가 단지 부모님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음을,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증명하고 있었다."강한결, 눈 감지 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최진혁이 도망쳤어. 아니, 그는 도망친 게 아니야. 자신의 본거지인 섹터 제로의 가장 깊은 곳, 그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거야. 우리가 이 모든 시스템을 붕괴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최진혁은 처음부터 이 붕괴를 예견하고 있었어. 아니, 오히려 이 파괴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놈은 시스템의 데이터가 완전히 휘발되기 전에, 자신의 가장 은밀한 사유 재산으로 숨어들었어. 그곳은 일반적인 네트워크와는 연결이 끊긴, 오직 놈의 뇌파와만 동기화되는 별도의 벙커야. 놈을 지금 잡지 못하면, 이 모든 희생은 그저 데이터의 이동 경로를 청소해 준 꼴이 되고 말아. 한결아, 네가 가진 마스터 키, 그 흉터 칩의 잔류 에너지가 아직 필요해. 놈의 심장 속에 박힌 동기화 알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잖아. 놈은 지금 시스템의 파멸을 자신의 영생으로 치환하려 하고 있어."서지우의 말은 내 의식을 강제로 현실의 고통 속으로 끌어당겼다. 흉터 칩이 박힌 손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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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지우의 선택

최진혁의 의식이 붕괴하며 쏟아져 나온 데이터의 파편들이 마치 검은 눈보라처럼 섹터 제로의 공간을 메웠다. 나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지만, 내 몸은 이미 강한결이라는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 상태였다. 수천 명의 희생자가 겪었던 죽음의 순간, 그 서늘한 공포와 차가운 절망이 혈관 대신 흐르는 데이터 회로를 타고 끊임없이 역류했다. 최진혁의 뇌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면서 발생한 연쇄적인 전자기 충격이 흉터 칩을 통해 내 신경계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나는 벽을 짚고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폐로 들어오는 것은 산소가 아닌 차가운 연산 장치의 냉기뿐이었다.멀리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정적을 깨고 다가오는 그 소리는 너무도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우였다. 그녀는 관리국 요원들의 통신망을 마비시키는 전자기 펄스 발생기를 들고, 연기가 자욱한 서버실 입구에 서 있었다. 지우의 눈은 평소의 차갑고 이성적인 빛을 잃은 채,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안에서 어떤 지옥이 꿈틀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자신의 부모님이 갇혀 있을 데이터의 감옥을 향해, 마지막 희망을 품고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한결 씨, 정말 성공한 건가요?"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내 손목에 박힌 흉터 칩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과, 바닥에 널브러져 생명 반응을 잃어가는 최진혁의 시신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나의 흔들리는 자아를 파고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핏줄이 터져 나오는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시스템의 셧다운은 시작되었지만, 관리국이 마지막 수단으로 설계해 둔 데이터 역류 프로토콜은 여전히 나의 뇌를 갉아먹고 있었다. 모든 서버를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으면, 이 고통은 결국 세상 밖으로 퍼져 나갈 터였다.지우는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듯, 주저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 어깨를 붙잡으려다 말고,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주파 진동에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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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영겁의 틈 속으로

"부모님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계신 게 아니었어."내 읊조림은 새벽 공기에 흩어졌다. 하지만 감상은 짧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진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관리국이 붕괴하며 발생하는 데이터의 비명 소리였다. 수십 년간 억눌려 있던 수만 명의 비극적 기억이 일시에 방출되며 현실의 물리 법칙마저 뒤틀고 있었다. 흉터 칩이 삽입된 손목이 불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미친 듯이 박동했다. 나는 서둘러 칩을 확인했다. 지우가 건네준 메모리 칩과 흉터 칩이 닿아 불꽃 같은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0과 1의 숫자들로 박제되었던 영혼들이, 다시금 육체의 감각을 되찾으려는 발버둥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관리국은 무너졌지만, 시스템의 잔해 속에 갇힌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이곳의 틈새를 배회하고 있었다."이대로 끝나는 게 아니야. 더 깊은 곳에 아직 놈들의 심장이 남아있어."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관리국의 거대한 외벽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지하 4층 섹터 제로를 향한 입구가 억지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차가운 기계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공허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시간이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 같았다. 최진혁이 설계한 그 끔찍한 연산 장치가, 완전히 파괴되기 전 최후의 방어 프로토콜을 가동한 것이다. 시스템 붕괴 시 모든 고통 데이터를 나라는 유일한 데이터 수신기에게 집중시키는 함정. 그들은 내가 살아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겪었던 70년의 지옥 같은 시간, 그 환상이 다시금 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나는 흉터 칩을 꽉 쥐고 다시 그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강한결, 멈춰! 거기로 가면 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어디선가 들려온 환청 같기도, 아니면 아직 지하에 갇혀 있는 누군가의 절규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흉터 칩을 통해 전달되는 데이터의 흐름이 내 뇌의 신경망과 거칠게 충돌했다. 관리국의 모든 비극적 데이터가 내 흉터 칩을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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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무한의 시간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진 것은 금속성 냄새와 함께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 나쁜 작열감이었다. 그 붕괴 속에서 나는 분명히 죽음을 맞이했으나, 지금 내 앞에는 다시 그 익숙한 백색 타일이 펼쳐져 있었다. 관리국 지하 4층, 모든 기억이 데이터로 분해되고 영혼의 밀도가 측정되던 그 도살장의 시작점. 내 손목에 흉터 칩이 삽입되던 바로 그 1분의 영겁이 다시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3년 전, 그저 평범한 구조대원이었던 내가 관리국에 끌려와 처음으로 마주했던, 핏물조차 고이지 않는 매끄러운 절개선.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시스템과 나를 강제로 결합하는 안테나였다. 흉터 칩이 살을 파고들며 뇌신경과 연결되는 그 짧은 찰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70년의 지옥이 다시 내 정신을 유린하려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실험체 001번, 의식 각성 확인되었습니다."기계음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황을 직시했다. 박철웅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시스템의 충직한 사냥개이자, 내 고통을 연료 삼아 영생을 설계하는 관리국의 하수인이었다. 그의 손에는 흉터 칩을 제어하는 마스터 키가 들려 있었다. 이전의 루프에서 그가 내 손목에 칩을 박아 넣던 그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굴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내 손목에 박힌 그 저주스러운 칩이, 사실은 이 거대한 시스템의 심장을 멈추게 할 유일한 독극물이라는 사실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70년이라는 데이터의 무게를 견뎌낸 정신은 더 이상 관리국이 휘두르는 고주파와 통증에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박철웅의 손끝을 응시했다."박철웅, 당신은 알고 있나? 당신이 매일 복용하는 그 알약이 당신의 뇌를 시스템에 종속시키는 족쇄라는 것을."나의 말에 박철웅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며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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