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의 브랜드가 세계를 사로잡았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3 챕터

11화. 웃는 얼굴 뒤의 가시

서울 청담동의 한 쇼룸.한해원은 유리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통유리 너머로 고급스러운 의상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절제된 조명과 넓은 공간, 그리고 옷 한 벌 한 벌을 돋보이게 하는 전시 방식까지.작은 디자이너 브랜드의 쇼룸이었다. 며칠 전 패턴 수업에서 윤정숙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여기 한번 가 봐요. 요즘 신진 디자이너들 중에서 꽤 재미있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그 말이 떠올라 해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쇼룸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음악이 들려왔다. 해원은 천천히 옷들을 둘러보았다. 단순해 보이는 재킷에도 섬세한 절개선이 숨어 있었고, 실크 블라우스는 움직임에 따라 전혀 다른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그녀는 한 벌의 원피스 앞에 멈춰 섰다. 짙은 회색 원단으로 만든 미디 드레스였다.“예쁘다.”작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그 옷 마음에 드세요?”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백유라였다.유라는 쇼룸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몸에 꼭 맞는 버건디색 니트 원피스에 높은 굽의 검은색 부츠. 허리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옷의 실루엣이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길게 늘어뜨린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고, 또렷한 눈매와 선명한 입술은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화려했다. 어디에 서 있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어머.”유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사모님 아니세요?”해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백유라 씨.”“이런 데서 뵐 줄은 몰랐네요.”유라는 해원이 보고 있던 드레스로 시선을 옮겼다.“이 브랜드 좋아하세요?”“오늘 처음 와 봤어요.”“아, 그러시구나.”유라는 부드럽게 웃었다.“저는 여기 디자이너랑 친해서 가끔 들르거든요. 이번 컬렉션도 먼저 보여 주셨고요.”“그러셨군요.”“사모님도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해원은 잠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네. 원래 좋아했어요.”“그렇죠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2화. 당신이 모르는 나의 시간(1)

밤 열 시. 해원은 책상 앞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오늘 쇼룸에서 보았던 옷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느꼈던 인상을 자신만의 선으로 다시 표현하고 있었다. 문득 유라의 말이 떠올랐다. ‘태성어패럴 대표님이 남편이신데, 마음만 먹으면 못 하실 일이 없죠.’ 해원은 연필을 멈췄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도겸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많은 일이 쉬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원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옷을 누군가가 좋아해 주는 것. 그 이유가 오롯이 자신의 디자인 때문이었으면 했다. 해원은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그때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서도겸: 오늘 늦습니다. 먼저 자요.] 해원은 메시지를 읽고 답장을 보냈다. [네. 조심히 들어오세요.] 그리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도겸이 언제 돌아올지 시계를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스케치를 마저 완성하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내렸다. 한편, 같은 시각. 도겸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도착한 짧은 답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문득 궁금해졌다. 해원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다시 시작했다는 디자인 공부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왜. 그 이야기를 자신은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처음 듣게 된 것일까. *** 오전 여덟 시. 서도겸은 식탁에 앉아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한해원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오세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할지, 몇 시쯤 돌아올지 한 번쯤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의 일정이 있었다. 오후에는 패턴 수업이 있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원단 시장에 들를 생각이었다. 해원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겸이 입을 열었다. “오늘 어디 나갈 일 있습니까?” “네. 약속이 있어요.”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3화. 당신이 모르는 나의 시간(2)

해원이 메시지를 확인한 것은 작업실 근처 카페에서였다. 그녀는 원단 봉투를 옆에 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오늘 저녁 일정 있습니까?]해원은 조금 의외라는 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도겸이 먼저 저녁 일정을 묻는 일은 흔치 않았다.[아니요. 특별한 일정은 없어요.]답장은 금방 도착했다.[그럼 같이 식사합시다. 일곱 시쯤 들어가겠습니다.]해원은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네. 기다릴게요.]***저녁 일곱 시 십 분.도겸은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귀가했다. 해원은 식탁에 저녁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오셨어요?”“늦어서 미안합니다.”“아니에요. 얼마 안 늦으셨어요.”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만 오늘은 도겸이 먼저 말을 꺼냈다.“요즘 바쁩니까?”해원이 젓가락을 멈췄다.“저요?”“네.”“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요.”“밖에 나가는 일이 많아진 것 같아서요.”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조금요.”도겸은 물잔을 내려놓았다.“디자인 공부를 다시 한다고 들었습니다.”순간 해원의 손끝이 멈췄다.“...누구한테요?”“백유라 씨가 우연히 만났다고 하더군요.”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까?”“네. 조금씩 다시 해 보고 있어요.”“왜 말하지 않았습니까?”해원은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이 조금 낯설었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예전에는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 도겸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었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아직 별로 이야기할 만한 게 없어서요.”“그렇습니까.”“네. 그냥 공부하는 정도예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해원은 조용히 웃었다.“괜찮아요.”“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아직은 제가 해 보고 싶어요.”그 말에 도겸의 눈빛이 잠시 멈췄다. 해원은 부드럽게 덧붙였다.“나중에 정말 필요해지면 말씀드릴게요.”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4화. 낯선 남편(1)

해원이 그의 손길을 피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도겸은 분명히 느꼈다.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올 줄 알았던 아내가 오히려 몸을 멀리했다는 것을.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해원 씨?”어둠 속에서 해원이 천천히 돌아누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가까운 거리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 해원의 얼굴이 보였다. 베개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 잠옷의 목선을 따라 드러난 가느다란 쇄골, 긴장한 듯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도겸은 순간 시선을 멈췄다. 아내였다. 삼 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여자.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바라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왜 그럽니까?”그가 낮게 물었다. 해원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도겸에게서는 방금 샤워를 마친 듯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체온이 이불 아래로 전해졌다. 익숙한 향기였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껴졌던 온기였다.그런데 지금은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었다. 그의 손길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던 손길이었다.결혼 초에는 해원이 먼저 그의 품을 찾았다. 늦게 돌아온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잠들기 전에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도겸이 책을 읽고 있으면 슬그머니 그의 팔 안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도겸은 가끔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고, 입술이 이마에 닿던 밤들. 해원은 그 시간이 좋았다. 말수가 적은 남편이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으니까.하지만 도겸은 점점 바빠졌다. 피곤하다며 먼저 잠드는 날이 늘었고, 해원이 그의 품을 찾으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등을 돌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이해했다. 그다음에는 조금 서운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일이 부끄러워졌다. 마치 혼자서만 남편의 애정을 구걸하는 사람 같아서.그렇게 해원은 조금씩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도겸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일 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5화. 낯선 남편(2)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해원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방금 전 도겸의 손길이 아직도 허리께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사실 조금은 기뻤다. 오랜만에 남편이 먼저 다가와 주었다는 사실이. 하지만 동시에 서운했다. 왜 오늘이었을까. 왜 하필 술을 마시고 돌아온 밤이었을까. 평소에는 자신을 바라볼 시간조차 없던 사람이.그녀는 이불 끝을 조용히 움켜쥐었다.‘술기운 때문이겠지.’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해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자신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남편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봐 주는 것. 자신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 그런 사소한 관심이었다.하지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도겸 역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해원이 자신의 손길을 피했다. 결혼한 지 삼 년. 그녀가 먼저 자신을 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그동안 부부관계가 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회사 일이 바빴고, 집에 돌아오면 늘 피곤했다. 해원은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었다. 적어도 도겸은 그렇게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그녀는 말했다.‘너무 오랜만이잖아요.’도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정말 그랬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품에 안았던 밤이 언제였는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동안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해원이 먼저 불만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는 뜻일까.도겸은 다시 눈을 떴다. 옆에서는 해원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런데 조금 전과 달리 쉽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도겸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다음 날 아침.해원이 눈을 떴을 때 도겸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난 뒤였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남편의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6화. 남편 옆에 선 여자

미팅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도겸은 마지막 보고서를 덮었다.“오늘 논의한 내용대로 진행해 주세요. 수정안은 최 실장님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네.”유라는 서류를 정리하다 문득 물었다.“도겸 씨,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무슨 일입니까?”“제가 참석하는 브랜드 행사요. 태성어패럴에서도 관계자 몇 분 오시잖아요.”“확인해 봐야겠습니다.”“가능하면 도겸 씨도 오셨으면 좋겠어요.”유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이번 캠페인에 중요한 자리니까요.”도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일정 확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기다릴게요.”유라는 웃었다.그의 대답은 언제나 비슷했다. 가능하다고도, 불가능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라는 알고 있었다. 서도겸은 업무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결국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점을 이용하면 됐다.***같은 날 오후. 해원은 윤정숙의 작업실에서 첫 번째 블라우스를 완성하고 있었다.“해원 씨, 마지막 단추만 달면 되겠네요.”정숙이 말했다.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늘을 움직였다.연회색 원단으로 만든 블라우스였다. 과하지 않은 볼륨의 소매와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선이 특징이었다. 마지막 단추를 단 뒤 해원은 옷을 마네킹에 걸었다.정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어머.”해원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때요?”“예쁜데요?”정숙은 옷의 옆선을 살펴보았다.“특히 이 부분이 좋아요. 허리선을 너무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실루엣이 살아 있네요.”해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요?”“네. 첫 작품치고 아주 잘했어요.”해원은 마네킹 앞에 섰다. 오랜만에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옷이었다.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 봉제선이 조금 고르지 못한 곳도 있었고, 소매 끝은 한 번 더 수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만든 옷이었다.“사진 찍어도 될까요?”“그럼요.”해원은 휴대전화를 꺼내 옷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민지에게 사진을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7화. 내가 한번 빼앗아 볼까

밤 열한 시. 도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해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오셨어요?”“네.”“행사는 잘 다녀오셨어요?”도겸이 잠시 멈췄다.“알고 있었습니까?”“사진을 봤어요.”“아.”도겸은 넥타이를 풀었다.“협찬사 행사였습니다.”“네. 알아요.”해원은 책을 덮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백유라 씨랑 많이 친하세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오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그렇군요.”“왜 묻습니까?”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 두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괜한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업무상 자주 만날 뿐입니다.”“...네.”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며칠 전 자신을 끌어안으려던 남편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사진 속에서 백유라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있던 모습도.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예민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한편, 같은 시각.백유라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SNS에 올린 사진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그녀는 댓글을 하나씩 읽었다. 그러다 문득 해원의 얼굴이 떠올랐다.청담동 쇼룸에서 만났던 여자.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던 모습.‘저는 제 힘으로 해 보고 싶어요.’유라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한해원 씨.”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생각보다 재미있어지겠는데.”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처음에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서도겸이 선택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자신이 그토록 가까워지고 싶었던 남자의 곁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듯 서 있는 여자. 그 자리가 문득 거슬리기 시작했다.유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걸었다.‘그렇게 당연하게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30
더 보기

18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호텔 라운지.백유라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여기예요.”“안녕하세요.”“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해원은 맞은편에 앉았다. 유라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만큼 단정했다.“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그런가요?”“네. 요즘 디자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죠?”해원은 조금 놀랐다.“기억하고 계셨네요.”“그럼요. 사모님이 직접 옷을 만드신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거든요.”유라는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도겸 씨도 알고 계세요?”“네.”“아, 말씀하셨구나.”해원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유라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 유라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도겸 씨가 사모님 이야기 잘 안 하시거든요.”해원의 손이 멈췄다.“그러세요?”“네. 워낙 사적인 이야기 안 하는 분이잖아요.”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저랑은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시지만요.”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어제 사진 보셨어요?”“...네.”“아휴, 댓글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유라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사람들이 도겸 씨랑 저를 자꾸 엮더라고요.”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사모님, 저 때문에 불편하셨어요?”그 질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업무 때문에 함께하신 거잖아요.”“그렇죠.”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요. 도겸 씨가 워낙 표현이 없는 분이라 사모님이 오해하실까 봐.”해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제가 오해할 일이 있나요?”유라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1-01
더 보기

19화. 선을 지키는 여자

백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서도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앞으로 제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제 아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유라는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도겸 씨.”—네.“혹시 화나셨어요?”—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사모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요.”—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원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만나실 필요는 없겠죠.유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사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유라 씨와 저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업무로 만나는 사이. 유라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함께 해외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둘이서 축하한 적도 있었다. 도겸은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라는 자신만큼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작 한해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유라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알겠어요.”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모님께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겸 씨.”—말씀하세요.유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저희 사이도 괜히 오해받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 회의 때 뵐게요, 대표님.”통화가 끝났다. 유라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대표님.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업무적인 관계로 돌아가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유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좋아요, 서도겸 씨.”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선을 지키고 싶다면...”잠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1-01
더 보기

20화. 당신이 지키겠다는 그 선

저녁 일곱 시. 도겸이 예약한 곳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해원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 창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기 예쁘네요.”“마음에 듭니까?”“네.”도겸은 메뉴판을 펼쳤다.“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도겸 씨는요?”“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그럼 제가 골라도 돼요?”“물론입니다.”해원은 메뉴판을 살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조금 설렜다. 도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물었다.“디자인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해원이 고개를 들었다.“네. 재미있어요.”“그렇습니까.”“요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좋아했습니까?”해원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네. 정말 좋아했어요.”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전 해원이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속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해원의 눈빛이 밝아졌다.“정말요?”“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네.”해원은 작게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좋네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였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현석이었다.“네, 최 실장님.”—대표님,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하실 일이 생겼습니다.“무슨 일입니까?”—백유라 씨가 참여하는 해외 캠페인 계약 건입니다. 현지 에이전시에서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도겸의 표정이 굳었다.“계약서 보내 주세요.”—네. 그런데 백유라 씨 측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1-01
더 보기
이전
123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