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서울 청담동의 한 쇼룸.
한해원은 유리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통유리 너머로 고급스러운 의상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절제된 조명과 넓은 공간, 그리고 옷 한 벌 한 벌을 돋보이게 하는 전시 방식까지.
작은 디자이너 브랜드의 쇼룸이었다. 며칠 전 패턴 수업에서 윤정숙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
“여기 한번 가 봐요. 요즘 신진 디자이너들 중에서 꽤 재미있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말이 떠올라 해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쇼룸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음악이 들려왔다. 해원은 천천히 옷들을 둘러보았다. 단순해 보이는 재킷에도 섬세한 절개선이 숨어 있었고, 실크 블라우스는 움직임에 따라 전혀 다른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한 벌의 원피스 앞에 멈춰 섰다. 짙은 회색 원단으로 만든 미디 드레스였다.
“예쁘다.”
작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그 옷 마음에 드세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백유라였다.
유라는 쇼룸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몸에 꼭 맞는 버건디색 니트 원피스에 높은 굽의 검은색 부츠. 허리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옷의 실루엣이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길게 늘어뜨린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고, 또렷한 눈매와 선명한 입술은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화려했다. 어디에 서 있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어머.”
유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모님 아니세요?”
해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백유라 씨.”
“이런 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유라는 해원이 보고 있던 드레스로 시선을 옮겼다.
“이 브랜드 좋아하세요?”
“오늘 처음 와 봤어요.”
“아, 그러시구나.”
유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여기 디자이너랑 친해서 가끔 들르거든요. 이번 컬렉션도 먼저 보여 주셨고요.”
“그러셨군요.”
“사모님도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해원은 잠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네. 원래 좋아했어요.”
“그렇죠. 여자라면 예쁜 옷 좋아하니까.”
유라의 대답은 가벼웠다. 해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때 쇼룸 직원이 다가왔다.
“유라 님, 안쪽에 준비해 두신 제품 확인하실까요?”
“네. 잠깐만요.”
유라는 직원에게 미소 지은 뒤 다시 해원을 바라보았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잔하실래요?”
해원은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랑요?”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요.”
유라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도겸 씨 이야기도 좀 듣고 싶고요.”
해원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겸 씨. 그녀는 그 호칭을 알고 있었다. 공식 행사에서도 유라는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것도. 하지만 둘만의 대화에서 그 이름을 듣는 것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네. 잠깐은 괜찮아요.”
유라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
쇼룸 안쪽의 작은 라운지. 두 사람 앞에 따뜻한 차가 놓였다. 유라는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사모님은 평소에 뭐 하면서 지내세요?”
“그냥 이것저것요.”
유라는 찻잔을 들었다.
“도겸 씨가 워낙 바쁘셔서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으시겠어요.”
해원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일이 많으시니까요.”
“정말 대단하세요.”
“뭐가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는 거요.”
유라가 미소 지었다.
“저는 못 할 것 같거든요. 남편이 매일 늦게 들어오고 주말에도 일하면.”
해원은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익숙했던 건 아니에요.”
“아.”
“그냥 서로 생활 방식이 다르니까 맞춰 가는 거죠.”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모님은 참 차분하시네요.”
칭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해원은 어쩐지 그 안에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유라가 말을 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도겸 씨가 회사에 나오셨잖아요.”
해원의 손끝이 멈췄다. 지난주 토요일이면, 전시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날 저희 캠페인 회의가 있었거든요.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좀 죄송했어요.”
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주말까지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요.”
해원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유라 씨도 참석하셨나 봐요.”
“네. 제가 이번 시즌 캠페인 모델이니까요.”
“그렇군요.”
“도겸 씨가 워낙 꼼꼼하시잖아요. 사소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셔서.”
유라는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그런 점이 좋더라고요.”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그런 해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 제가 너무 일 얘기만 했죠?”
“아니에요.”
“사모님은 이런 이야기가 조금 지루하실 수도 있겠네요.”
해원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유라가 눈을 깜빡였다.
“네?”
“제가 지루해할 거라고 생각하신 이유요.”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유라는 곧 미소를 지었다.
“그냥 회사 일과는 거리가 있으시니까요.”
“회사 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패션과는 그렇지 않아요.”
해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저도 예전에 디자인을 공부했거든요.”
유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 그러셨어요?”
“네.”
“몰랐네요.”
“그럴 수 있죠.”
해원은 담담하게 웃었다.
“저희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으니까요.”
유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얌전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도겸의 뒤에서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저 무난한 아내. 그런데 생각보다 말끝이 분명했다.
“그럼 사모님도 옷을 만드셨어요?”
“네. 예전에는요.”
“지금은 안 하시고요?”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유라는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 웃었다.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패션 업계가 워낙 치열하잖아요.”
유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재능만 있다고 되는 곳도 아니고요. 인맥이나 자본, 타이밍도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렇겠죠.”
“사모님은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어떤 점이요?”
“도겸 씨가 있잖아요.”
유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했다.
“태성어패럴 대표님이 남편이신데, 마음만 먹으면 못 하실 일이 없죠.”
해원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시작한다면 결국 남편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뜻. 혹은 그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
해원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지려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저는 제 힘으로 해 보고 싶어요.”
유라의 눈빛이 멈췄다. 해원은 말을 이었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적어도 제가 만든 옷을 보고 사람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
“누구의 아내가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그냥 옷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요.”
유라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해원을 다시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삼십분 가량의 차담 후, 두 사람은 쇼룸 입구에서 헤어졌다.
“오늘 반가웠어요, 사모님.”
유라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해원은 가볍게 악수했다.
“다음에 또 뵈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해원이 먼저 쇼룸을 나섰다. 유라는 유리문 너머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차림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눈에 남았다.
유라는 팔짱을 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날 저녁. 태성어패럴 본사 대표실.
도겸은 최현석이 가져온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대표님, 다음 주 캠페인 촬영 일정은 최종 확정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변경 사항이 생기면 바로 알려 주세요.”
현석이 나가려던 순간,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백유라였다. 도겸은 화면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네, 유라 씨.”
— 도겸 씨. 아직 회사세요?
“네.”
— 역시. 주말에도 일하시더니 오늘도 늦으시네요.
“무슨 일입니까?”
유라는 웃었다.
— 오늘 재미있는 분을 만났거든요.
“누구요?”
— 사모님이요.
도겸의 시선이 서류에서 떨어졌다.
“강해원 씨요?”
— 네. 청담동 쇼룸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렇습니까.”
— 사모님이 디자인 공부하셨다는 거, 저 오늘 처음 알았어요.
도겸은 잠시 말이 없었다.
— 요즘 다시 공부하고 계신다던데요? 도겸 씨는 알고 계셨어요?
도겸은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내려놓았다.
해원이 예전에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결혼 전 그녀가 옷을 만들었다는 것도. 얼마 전 거실에서 오래된 디자인 책을 보고 있던 모습도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 다시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했던 건 알고 있습니다.”
— 아, 그러시구나.
유라는 가볍게 웃었다.
— 사모님이 생각보다 패션에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언젠가 직접 만든 옷도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습니까.”
— 네. 그럼 바쁘실 테니까 끊을게요.
통화가 끝났다. 도겸은 잠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며칠 전 해원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집에 돌아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하루가 괜찮았다고 웃던 얼굴도.
그는 다시 서류를 펼쳤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문장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도겸은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백유라가 창가에 서 있었다.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슬랙스. 긴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읽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도겸을 발견한 유라가 먼저 인사했다.“일찍 오셨군요.”“네. 자료를 조금 더 확인하려고요.”유라는 가볍게 웃었다.“이번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요.”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지난번 협상은 잘 마무리됐다고 들었습니다.”“네. 다행히 저희가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어요.”“고생 많으셨습니다.”유라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대표님한테 그런 말씀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도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성과가 있었으니 당연히 감사드려야죠.”“그렇긴 하죠.”유라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그런데 대표님.”“네.”“저 이번 프로젝트, 정말 잘하고 싶어요.”도겸이 시선을 들었다.“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아니요. 그냥 모델로서가 아니라요.”유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제 이름을 걸고 참여한 일이니까,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의외였다. 그동안 유라는 뛰어난 모델이었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알았고,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능숙했다. 하지만 사업적인 부분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관여한 적은 드물었다.“좋은 자세입니다.”도겸이 말했다.“그런 마음이라면 앞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유라는 미소 지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힘이 나네요.”그녀는 서류를 펼쳤다.“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 볼까요, 대표님?”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유라는 예상보다 훨씬 꼼꼼했다. 해외 캠페인의 광고 문구부터 촬영 콘셉트, 모델의 이미지 활용 방식까지. 실무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 냈고, 몇 가지 대안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도겸은 그녀의 의견을 들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그 방향이 더 낫겠습니다.”“
도겸은 대표실에서 마지막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최현석이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입니다.”“수고하셨습니다.”“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도겸은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십 분. 평소라면 아직 퇴근을 생각할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해원이 떠올랐다. 며칠 전 함께 식사했던 날. 레스토랑에서 웃던 아내의 얼굴. 자신이 코트를 걸쳐 주자 조금 놀란 듯 바라보던 눈빛. 도겸은 잠시 생각하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겠습니다.]잠시 후 답장이 왔다.[네. 기다릴게요.]도겸은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기다릴게요. 익숙한 말이었다. 해원은 언제나 자신을 기다렸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예전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도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최현석이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네, 대표님.”***저녁 일곱 시. 해원은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오셨어요?”“네.”도겸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오늘은 일찍 끝났습니다.”“잘됐네요.”해원은 웃었다.“마침 저녁도 다 됐어요.”도겸은 식탁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국과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오늘은 뭐 하셨습니까?”해원이 잠시 멈췄다.“저요?”“네.”“작업실에 다녀왔어요.”“그렇습니까.”“오늘 드디어 옷 하나를 완성했어요.”해원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직접 만든 겁니까?”“네.”“어떤 옷입니까?”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예전 같았으면 사진부터 보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블라우스예요.”“그렇습니까.”“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완성했다니 축하합니다.”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고마워요.”별것 아닌 말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그 말이 기뻤다. 남편이
태성어패럴 본사 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해외 캠페인 계약서의 수정 조항이 띄워져 있었다. 백유라는 차분하게 서류를 넘겼다.“문제는 이 부분이에요.”그녀가 화면을 가리켰다.“현지 에이전시에서 제 초상권 사용 범위를 변경했어요. 기존에는 아시아 지역 광고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번 수정안에는 유럽 온라인 플랫폼까지 포함되어 있거든요.”홍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약 조건을 확대하려는 것 같습니다.”“단순한 확대가 아니에요.”유라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이대로 계약하면 제 이미지가 다른 브랜드의 프로모션에도 간접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어요.”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겸이 물었다.“대안이 있습니까?”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네.”그녀는 준비해 온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초상권 사용 범위를 지역이 아니라 매체별로 제한하는 거예요. 그러면 태성은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고, 저도 이미지 사용을 관리할 수 있어요.”도겸은 자료를 살폈다.“현지 에이전시가 받아들이겠습니까?”“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유라는 미소 지었다.“제가 직접 협의할게요.”홍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상대 측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그 부분도 생각했어요.”유라는 또 다른 자료를 내밀었다.“제가 유럽 일정 중에 진행하기로 했던 개인 화보가 있거든요. 그 촬영을 태성 캠페인과 연계하면 추가 제작비를 줄일 수 있어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개인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겁니까?”“네.”“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유라는 고개를 저었다.“필요해요. 이번 캠페인은 저한테도 중요하니까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차분하게 덧붙였다.“저도 태성의 얼굴로 계약한 사람이잖아요. 제 역할은 제대로 해야죠.”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유라는 오늘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고, 불필요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일곱 시. 도겸이 예약한 곳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해원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 창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기 예쁘네요.”“마음에 듭니까?”“네.”도겸은 메뉴판을 펼쳤다.“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도겸 씨는요?”“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그럼 제가 골라도 돼요?”“물론입니다.”해원은 메뉴판을 살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조금 설렜다. 도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물었다.“디자인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해원이 고개를 들었다.“네. 재미있어요.”“그렇습니까.”“요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좋아했습니까?”해원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네. 정말 좋아했어요.”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전 해원이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속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해원의 눈빛이 밝아졌다.“정말요?”“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네.”해원은 작게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좋네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였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현석이었다.“네, 최 실장님.”—대표님,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하실 일이 생겼습니다.“무슨 일입니까?”—백유라 씨가 참여하는 해외 캠페인 계약 건입니다. 현지 에이전시에서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도겸의 표정이 굳었다.“계약서 보내 주세요.”—네. 그런데 백유라 씨 측
백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서도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앞으로 제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제 아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유라는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도겸 씨.”—네.“혹시 화나셨어요?”—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사모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요.”—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원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만나실 필요는 없겠죠.유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사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유라 씨와 저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업무로 만나는 사이. 유라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함께 해외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둘이서 축하한 적도 있었다. 도겸은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라는 자신만큼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작 한해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유라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알겠어요.”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모님께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겸 씨.”—말씀하세요.유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저희 사이도 괜히 오해받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 회의 때 뵐게요, 대표님.”통화가 끝났다. 유라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대표님.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업무적인 관계로 돌아가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유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좋아요, 서도겸 씨.”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선을 지키고 싶다면...”잠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호텔 라운지.백유라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여기예요.”“안녕하세요.”“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해원은 맞은편에 앉았다. 유라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만큼 단정했다.“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그런가요?”“네. 요즘 디자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죠?”해원은 조금 놀랐다.“기억하고 계셨네요.”“그럼요. 사모님이 직접 옷을 만드신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거든요.”유라는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도겸 씨도 알고 계세요?”“네.”“아, 말씀하셨구나.”해원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유라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 유라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도겸 씨가 사모님 이야기 잘 안 하시거든요.”해원의 손이 멈췄다.“그러세요?”“네. 워낙 사적인 이야기 안 하는 분이잖아요.”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저랑은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시지만요.”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어제 사진 보셨어요?”“...네.”“아휴, 댓글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유라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사람들이 도겸 씨랑 저를 자꾸 엮더라고요.”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사모님, 저 때문에 불편하셨어요?”그 질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업무 때문에 함께하신 거잖아요.”“그렇죠.”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요. 도겸 씨가 워낙 표현이 없는 분이라 사모님이 오해하실까 봐.”해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제가 오해할 일이 있나요?”유라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