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8화

작가: 최은솔
장남 나신은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덜덜 떨며 연못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진남군의 징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신은 아버지의 핍박에 못 이겨 그 상태로 무릎을 꿇은 채 흘러드는 겨울 아침의 냉기를 오롯이 견뎌야 했다. 그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에 이를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형수는 그의 옆에서 끊임없이 애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 마님과 사촌 여동생인 백지현도 허둥지둥 달려왔다.

“대감님, 이러다 나신이 얼어 죽겠습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힌 뒤 벌을 내리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백씨 마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간절함을 품은 목소리에는 절제된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길고 고운 목덜미에는 하얀 여우털 목도리가 둘려 있었고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진남군은 장남을 아끼고 부인을 사랑했다. 나신은 용모가 수려하고 박식하며 예의를 갖춘 인물이었고 그의 아내는 미모와 품격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이 둘은 진남군의 자랑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패륜아 같은 자식! 대낮부터 누이에게 손을 들다니...”

“징도 두드려야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신이만 잘못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도 날이 몹시 추운 건 사실이니 먼저 옷을 갈아입히시고 다시 훈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백씨 마님은 부드럽게 말하며 사태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녀의 말속에는 책임을 비껴가는 교묘한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공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이 서늘해졌다. 징도 두드려야 소리가 난다고? 그 말은 나정도 잘못이 있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은 아들의 잘못을 덮고 책망의 화살을 나정에게 겨눈 것이었다. 공 아주머니는 예전에 나정이 백씨 마님은 자기만 차별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예민해서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녀가 다른 자식들에게 향한 편애는 너무도 명백했다.

“옷 갈아입고 오너라.”

진남군이 잠시 뜸을 들이다 나신을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나신은 일어서는 순간 매섭게 나정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나정은 노골적인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받아넘겼다.

“큰 오라버니, 왜 그렇게 저를 노려보시는 겁니까? 혹시 아버지한테 벌받은 게 억울한가요?”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나신에게 쏠렸다. 그는 황급히 눈빛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씨 마님은 시선을 나정에게로 옮기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아, 너는 정말 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 대감님께서 너를 예뻐하신다고 해서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것이냐?”

그러고는 다시 나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거라. 바람이 차다.”

그 말에 나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전생에 그녀가 연못에 빠져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을 반 시간 넘게 세워두었고 그로 인해 나정은 고열로 병을 얻었다. 그 끔찍하고 잔인한 기억이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오라버니께서는 진남군 관저의 규율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시는 것 같군요.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가는 길에 날이 선 검을 차고 오다니요.”

그녀의 손에는 나신의 검이 들려 있었다. 무정한 아버지가 민감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나정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장이라면 중요한 곳에 들어설 때는 반드시 무기를 해제해야 한다. 장군의 군막이나 조정, 혹은 어르신을 뵈러 갈 때 무기를 지니는 것은 곧 불경이었다. 진남군 역시 이 규칙을 마음속에 아로새겨 넣고 엄격하게 지켰다. 그는 외출 시 검을 거의 차지 않았고 그 원칙에는 예외가 없었다.

나정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날씨에 맑게 갈라진 검날은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얀 번뜩임을 뿜어냈다. 그 반짝임이 진남군 눈에 정통으로 닿자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외쳤다.

“이 불효 자식!”

이번에는 진남군의 분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그는 규율을 중시했고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들이 누이를 괴롭힌 것쯤은 오라버니의 권위로 그랬을 거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규율을 어기고 조모를 뵈러 가는 날에 몸에 칼을 지닌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릎을 꿇어라!”

그의 음성은 우렁찼고 얼굴은 분노로 들끓었다. 무인으로서의 기백이 뿜어져 나오자 나신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다부진 체격 덕분에 나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동시에 원망했다.

“여기에서 두 시간 반성하거라.”

진남군이 이렇게 명령하자 백씨 마님의 안색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대감님, 제발…”

“다시 한번 사정한다면 부인도 함께 꿇어앉게 될 겁니다.”

진남군은 그 말만 남긴 채 소매를 털며 돌아섰다. 그는 곧장 조모의 처소로 향했다. 백씨 마님은 추위에 얼굴이 파래진 장남을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다시 나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정은 자신의 어머니와 똑닮은 눈매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둘 다 세상에 다시는 없을 미인이라 불릴 만했고 나긋나긋한 눈빛에는 언제나 은은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고운 눈동자에 담긴 감정까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정아, 이번에는 너무했구나.”

백씨 마님은 처음으로 딸에게 날을 세웠다.

“저 아이는 네 오라버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독하게 굴 수가 있단 말이냐?”

나정은 마치 놀란 듯 아주 부드럽게 입술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저더러 독하다고 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말투, 눈빛, 몸짓 하나하나까지 전부 백씨 마님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그녀는 순간 울컥하여 말문이 막혔고 한순간 입안에 피가 고이는 듯했다.

“그럼… 어머니는 절 정말 미워하시는 거네요. 어머니 마음속에는 큰 오라버니와 지현이밖에 없나 보군요.”

나정은 조용히, 하지만 선명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랑 준이한테는 항상 냉정하게 대하셨잖아요. 누가 보면 지현이랑 오라버니만 어머니 친자식인 줄 알겠어요.”

나정은 최대한 순진한 척, 억울한 척했지만 그녀가 겨둔 칼끝은 너무도 날카롭게 백씨 마님의 심장을 찔렀다. 마님은 매섭게 나정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나직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 그런가요, 어머니?”

그 말 한마디에 백씨 마님은 목덜미까지 서늘해졌고 온몸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어 오싹해지기까지 했다.

“헛소리 말거라. 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의심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남매들 싸움을 말리면 나만 손해이니 나는 이제 신경을 끌 것이다. 그러니 다들 알아서들 하거라.”

그녀는 눈가가 붉어지더니 중얼거렸다.

“어머니 없이 자란 지현이가 안쓰러워 내가 좀 더 챙겨준 것이다. 그것 때문에 네가 질투할 줄은 몰랐어. 그리고 정아. 내 너를 낳을 때 과다출혈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아는 것이냐? 반 년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단 말이다. 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 말을 들은 나정의 표정은 잔잔했으나 마음 한편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서 심장을 눌렀다. 나정은 열일곱이 된 처녀였지만 아직도 엄마의 사랑을 원했고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삶을 건너 죽음의 저편까지 갔다 돌아온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녀는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모든 걸 내어주어도 끝내 보상받지 못하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이미 본인의 심장을 다 베어내며 백씨 마님이 자신을 낳아 준 은혜를 갚았다. 그러니 나정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더 이상 빚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조용히 조모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서는 조모 역시 진남군을 타이르듯 나직이 말했다.

“반 시진만 벌하거라. 곧 설이 다가오는 데 병이라도 걸리면 네 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지 않느냐?”

나정은 옆에서 조용히 조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정을 아끼고 사랑해 줬지만 그녀가 가장 마음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씨 집안의 적장손 나신이었다. 세상 이치란 대개 그러한 법이다. 적통의 장손은 가문의 이름을 잇는 뿌리였기에 조모의 눈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신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가문에서 멀어졌다. 전생에 그는 조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진상을 은폐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들은 덩굴과 같았다. 튼튼한 나무에 몸을 의탁하다 끝내는 그 나무를 휘감아 조이며 스스로 줄기를 대신하려 한다. 덩굴이 높이 오르려면 결국 뿌리를 짓밟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덩굴을 키워준 건 다름 아닌 나정의 헌신이었다.

“가서 시간을 재어보거라. 반 시진이 지나면 들여보내도 좋다.”

진남군이 담담하게 명을 내리자 한 하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오늘 아침, 조모에게 문안을 드리러 온 집안 식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모두가 그 길목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연못가에 흠뻑 젖은 채 무릎 꿇고 있는 장남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며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미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속삭이 듯 말했다.

“큰 언니가 대단하긴 하네요. 도련님을 저리 만든 걸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둘째 마님의 마음은 조금 복잡해졌다. 자기 식구도 아닌 한낱 외가의 처녀 하나 때문에 어떻게 일이 이 지경까지 올 수 있는 것일까? 그 아이는 얼굴이 예쁘고 재력이 있고 체세에 능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남이지 않는가? 그래서일까? 그 아이가 웃을 때면 어딘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둘째 마님 역시 그 아이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지울 수 없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백지현은 단순히 유능하다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존재했다. 그리고 둘째 마님은 문득 생각했다. 그녀가 품속에 숨긴 칼날은 과연 누구를 향하게 될 것인가?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100화

    “네가 그 일을 그리 신경 쓸 줄은 몰랐구나.”태비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아무런 얘기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내려졌으니 그러죠.”공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대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주상께서 예부에 교지를 작성하라고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비밀에 부치라고 했어. 네가 모르고 있었던 건 옹성대군의 혼처에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으니 굳이 얘기를 안 한 게지.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졌을까? 나정이 때문이니?”공주는 한참 침묵하더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그래서 성사되었나요? 옹성대군은 동의했나요?”만약 옹성대군이 원하지 않는다면 교지가 내려진다고 한들 그가 알아서 혼사를 없던 일로 만들 것이다.어쩌면 나정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가홍 장공주는 그 상황이 되면 나서서 상황을 무마하고 나정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어 자신의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도 있었다.“물론이지. 진성대군 부인이 세상을 뜨면서 원래는 4월에 내리려던 교지를 그 녀석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3월 초순으로 앞당긴 게야.”대비가 웃으며 말했다.물론 재촉이라기 보다는 그저 주상을 찾아와 3월 초순에 교지를 내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었다.진남군의 딸이면 권력 가문도 아니니 주상 전하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옹성대군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주상 전하였기에 대비와 상의 후에 바로 진행되었다.물론 주상의 뜻을 알고는 있지만 대비는 그래도 나정을 예뻐하니 일이 빨리 추진되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다.가홍 장공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옹성대군이… 정말 이 일에 동의했단 말입니까? 대비께서도요?”“나야 당연히 동의하지. 나정이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걸.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오싹한데 그 아이는 참으로 용감했어.”공주는 조바심이 났다.‘그럼 내 아들은요?’날이 밝자마자 장공주에게 빨리 대비께 찾아가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성화를 부리던 배영이었다.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너는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9화

    나정이 이런 식으로 신분 역전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여씨 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여운탁은 무릎이 아픈 것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탄탄대로를 잃은 것때문인지, 아니면 나정이 시집을 잘 가서 배가 아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좀 닥치세요!”여씨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이… 이런 후레자식이!”분노한 여씨 부인이 소리쳤다.“나가라고요!”여운탁이 소리쳤다.나정과 사주단자를 교환하지 않은 것을 오늘이 있기 전까지는 다행으로 알고 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백지현을 정실로 들일 수 있는 것에 한껏 들떠 있었다.어차피 나정과는 구두 약속이라 굳이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속박에서 풀려나 하늘로 날아오른 사람이 자신이 아닌 나정이 될 줄이야!그에게 내려진 철기장군이란 칭호는 옹성대군의 권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나정이 득세하면서 자랑스럽게 느껴지던 칭호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여운탁의 자랑거리는 하루아침에 우스개로 전락한 것이다.이게 그가 분노한 가장 큰 이유였다.아무나 득세할 수 있지만 신변 사람이 자신을 초월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가까운 사람이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었다.같은 무장 출신인데 나씨 가문은 작위를 받았고 혼인을 약속했던 죽마고우는 대군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성공은 그가 이루어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여운탁은 증오심이 일었다.뻘겋게 부은 무릎을 보고 있자니 증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나신은 여운탁보다 부상이 심각했다.의원은 뼈는 다치지 않았다고 했지만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느낌에 피까지 토했다.“어사대로 가서 고발할 것입니다!”나신이 말했다.백씨는 간곡하게 아들을 말렸다.“명문 귀족가의 도련님들도 옹성대군에게 맞고 가만히 있는데 어사대가 무슨 수로 그런 분에게 뭐라 하겠니?”“분해도 참아, 신아. 옹성대군이 네 처남이 되면 넌 횡재한 거야.”나신도 알고는 있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8화

    약을 먹고 잠들었던 노부인은 얼마 안 지나 잠에서 깼다.옆에는 심복 어멈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나정이는… 앞으로도 잘 될 것이야.”노부인은 교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어멈도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큰 아가씨는 용기 있는 분이고 복도 많은 분이니 이제부터는 탄탄대로를 걷게 되겠지요.”노부인은 눈시울을 붉혔다.“이 행운이 오기까지 너무 힘든 날들을 겪었어.”아무도 그녀가 옹성대군의 부인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우리 가문에도 약간의 희망이 생겨났구나.”노부인이 말했다.“자식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갈 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마님.”노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둘째는 근래 승진이 너무 느려. 무예와 병법, 용맹함을 따지면 절대 형에게 뒤처질 아이가 아닌데.”어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둘째 나리 얘기는 왜 갑자기 꺼내십니까?”“여운탁은 고작 스무 살에 종3품 철기장군이 되었는데 둘째는 나이 사십인데도 고작 종사품에 머물러 있으니.”어멈의 생각은 달랐다. 종사품 무장이라도 대단한 거라 생각했다.아무나 다 자식 덕을 봐서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무나 어린 나이에 재능을 꽃피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무관의 입지는 문관을 따라갈 수가 없지. 종4품이라고는 하지만 한양성에서는 그저 수많은 관직 중 하나에 불과하니 언제 고개 들고 당당히 살 수 있을까?”어멈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노부인께 물었다.“왜 갑자기 둘째 도련님 걱정을 하십니까? 저희에게는 대감 나리가 있잖아요? 대감 나리는 작위를 받으셨고 큰 공자는 똑똑하고 이미 문관이 되었으니 조금만 더 지나면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입니다.”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럴수록 어멈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 집안에 우리 사람이 얼마나 남았지?”노부인은 한숨을 쉬었다.“감히 서재에서 나정이에게 몽둥이를 들려고 했어. 추화가 달려와서 고하지 않았으면 우린 아무것도 몰랐겠지.”“큰 부인께서 살림을 잘하시지 않습니까? 그래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7화

    “앞으로 바빠지겠구나. 저택엔 너를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할머니도 계시고 둘째 숙모와 형수도 계시잖아요.”나정은 조모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저를 도와주는 사람도 많아요.”노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나정아, 착한 우리 아가. 네가 고생 많았다.”이때, 진남군이 의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의원이 진료를 보는 틈을 타 나정과 진남군은 바깥으로 나왔다.“나정아….”진남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정을 불렀다.“아버지,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할머니 상태는 좀 어떠니?”진남군이 물었다.“에둘러 말하지 말고 본론을 말씀하시라고요.”나정이 답했다.진남군은 그제야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말했다.“나정아, 아비는 네가 잘돼서 너무 기쁘구나. 네가 가문을 일으켜주는 복덕이야.”“당연하지요. 안 그랬으면 고작 삼품 장군부였던 우리가 어떻게 신분 역전하고 작위를 받았겠어요?”나정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고 진남군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뻘겋게 달아올랐다.“그래, 네 말이 맞지. 이 작위는 네 덕분에 받은 것이니까.”“당연한 말씀을요. 제가 칼에 가슴을 찔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대비마마를 구하지 않았으면 작위가 내려졌을까요? 아버지, 그런데 그 얘기를 꺼낼 때 왜 그렇게 주저하시나요?”“혹여 제가 칼을 맞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능력으로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나정은 곧장 정곡을 찔렀고 진남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어쩌면 아버지는 제가 소양에서 죽었더라면, 저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면 모든 공로는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런데 제가 돌아와서 진실을 마주하기가 불편하셨던 거 아닌가요?”진남군은 말문이 막혔다.분노가 치밀고 아비의 위엄을 내세워 호되게 꾸짖고 싶었다.어찌 이리도 아비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 것인가.나정은 그의 딸이고 그의 생사마저 아비의 손에 달렸거늘, 공로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그는 점점 그런 쪽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6화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나정의 머리와 이마를 촉촉하게 적셨다.진남군은 곧바로 집안 사람들을 대열을 갖추게 하고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예부상서가 내관을 대신해 교지를 읊었다.“짐이 명하노니, 진남군의 장녀 나정은 명문가에서 자라 품성이 단정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헌신할 절개까지 갖추었으니, 그 마음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옹성대군의 부인으로 책봉하고자 하노라. 모든 예식과 절차는 예부와 내무부에서 공동으로 준비할 것이며 길일을 택하여 식을 올리도록 하거라.”“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나정은 가장 먼저 큰절을 올리며 교지를 받았다.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진남군과 부인 백씨의 표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유독 노부인만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예부상서가 나정에게 다가오더니 공손히 말했다.“감축드립니다, 대군 부인. 소신은 이만 전하께 돌아가 봐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나이다.”“살펴 가세요, 대감.”나정이 말했다.소하겸은 나정의 곁으로 다가가 좌중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히 말했다.“다들 일어나거라.”말을 마친 그는 다시 나정에게 고개를 돌렸다.“교지가 내려질 거란 말을 들고 예물을 준비해 왔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주는 것이니 굳이 혼수에 추가해서 가져올 것 없이 네 개인 재산으로 쓰면 돼.”나정이 감사를 표하려는데 진남군이 앞으로 나서며 끼어들었다.“대군, 소신은 이게 무슨…”그는 말까지 버벅이고 있었다.나정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소양에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네요.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합니다.”진남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무슨 일로 소양에 돌아가려는 거지?”옹성대군이 물었다.“사람을 시켜 예물을 네 처소로 들여갈 수 있게 안내하거라.”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군 관저의 관리인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예물 상자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리인이 그들을 문기당으로 안내했다.그 외에 아무도 감히 제 자리에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5화

    노부인이 처음 백지현을 보았을 때 느꼈던 호감은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백지현은 백씨도 닮고 나신도 닮았으니 말이다.순간 몰려든 생각에 노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할머니, 화는 건강에 안 좋습니다.”나정이 노부인을 부축하며 말했다.그러자 노부인은 애써 표정을 숨겼다. 아직은 나정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이런 못돼 먹은 것들이라고!”그리고 그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여운탁은 시종에게서 우산을 받아들고 와서 백지현의 옆에 섰다.“오늘은 저를 봐서 이만 조용히 넘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부인, 신이는 누구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그저 서재에서 얘기를 나눴을 뿐입니다.”“여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노부인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운탁이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어찌 이리 막무가내일 수가! 전하께 찾아가서 고할 것입니다. 노부인, 저는 곧 옹성대군의 휘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신이는 제 친우이기도 하니 앞날이 창창해지겠지요. 헌데 어찌 이리 장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십니까?”그가 옹성대군의 이름을 내세우자 노부인은 덜컥 겁이 났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여봐라, 철기 장군을 대문 밖으로 모시거라. 이건 우리 집안일이야.”잠시 후 소식을 들은 진남군과 백씨, 그리고 여운탁의 어머니인 여씨 부인이 부랴부랴 도착했다.진남군은 안색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보고 나신과 나정을 혼냈다.“너희가 말싸움을 벌인 일로 할머니까지 끌어들여?”말을 마친 그는 나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너는 점점 무법천지가 되어가는구나. 오늘 매를 들지 않고서는 그냥은 못 넘어가겠어. 대체 이런 사소한 일에 왜 할머니까지 끌어들인 거니?”“나정이 잘못이 아니네, 대감. 오라비인 나신이 손님들 있는 앞에서 문을 닫아걸고 제 동생에게 매를 들려고 했어!”“손뼉도 부딪쳐야 한다고 나정이가 너무 예의 없이 굴었겠지요. 제 어미도 안중에 없는 애인데 오라버니는 오죽하시겠습니까? 분명 나정이가 신이를 먼저 도발했을 겁니다.”진남군이 말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