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유서 깊은 플로렌스 백작가에 드리운 갑작스러운 비극.
하나뿐인 아버지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던 날, 라리엘의 세계는 무너졌다.
가문의 몰락과 막대한 채무 앞에 나타난 구원자는 공교롭게도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아르덴 폰 알브릭’ 공작이었다.
하지만 잔인한 조롱을 내뱉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신중하고 따뜻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그의 손길.
가시 돋친 독설 뒤에 숨겨진 지독한 고독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애틋한 눈동자.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묘한 보호 본능은 연기일까, 아니면 속죄일까.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공작이 철저히 숨기려는 진실.
차디찬 겨울의 끝, 두 사람이 마주할 진실은 구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파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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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2화. 별장의 밤(1)해 질 무렵, 의사가 아르덴의 치료를 위해 다시 별장을 찾았다.묵직하고 낡은 가죽 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의사는 능숙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르덴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서걱거리는 가위 소리와 함께 겹겹이 쌓인 하얀 천이 걷히자, 어제보다 가라앉은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의사는 핀셋으로 상처 부위를 꼼꼼히 살피며 소독솜으로 진물을 닦아냈다.아르덴은 턱근육을 잔뜩 비틀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짧은 신음을 이 악물고 삼켰다.그 곁을 지키던 라리엘의 손에도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치료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옆에 서서 꿋꿋이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치료를 마친 의사가 도구들을 정리하며 라리엘을 향해 돌아섰다.“상처 자체는 다행히 잘 아물고 있습니다만, 체온이 평소보다 조금 높군요. 아마 상처로 인한 미열인 듯 보입니다. 오늘 밤에는 열이 갑자기 오르지 않도록 잘 지켜보시고, 수건을 적셔 열을 식혀주셔야 합니다.”라리엘은 의사의 지시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경청했다.아르덴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은 채 그녀와 의사의 대화를 듣고있었다.“완전히 회복하는데는 얼마나 걸리나요?”“겉 상처가 붙고 살이 차오르는 건 앞으로 열흘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만, 겉이 붙었다고 해서 속까지 나은 것은 아니니 그 이후에도 절대 무리하지 않으셔야 합니다.”의사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특히 힘을 주거나 상처 부위가 다시 벌어질 수 있는 행동은 피하셔야 합니다. 완전히 회복해서 문제 없이 일상 생활을 하시려면 최소 3주 정도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라리엘은 그 말을 마음속에 몇 번이나 되뇌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 그리고 삼 주.’ 숫자를 머릿속에 또렷이 새겼다.
Terakhir Diperbarui: 2026-07-05
Chapter: 81화. 진짜 이름시선은 여전히 붉은 불꽃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리엘을 똑바로 보았다. 라리엘은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트리샤가 마른입술을 열어, 며칠 전부터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던 이야기를 꺼냈다.“나는… 제이드 크로이츠의 딸이에요.”정적이 내려앉았다. 라리엘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트리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라리엘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대답했다.“제이드에게 딸이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어요.”트리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대꾸했다.“당연히 그랬겠죠. 꽁꽁 숨겨뒀으니까.”라리엘은 트리샤의 이목구비를 다시금 꼼꼼하게 뜯어보았다.비로소 그녀의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 너머로, 과거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제이드 흔적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의문 조각들이 하나씩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그렇다면 루이즈 씨, 당신이 여기에 있는건… 아르덴, 아니 공작님이 제이드의 행방을 찾는 것과 관련이 있나요?”예상치 못한 질문에 트리샤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그걸 알고 있었어요?”라리엘은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아르덴이 숨기려 했던 그 비밀의 자락을 우연히 쥐게 되었던 순간의 떨림이 되살아났다.“아르덴이 말해준 게 아니에요.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죠. 아르덴은 내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거에요.”라리엘은 숨을 고른 뒤,
Terakhir Diperbarui: 2026-07-05
Chapter: 80화. 상대하기 어려운 여자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공작 부인을 발견한 트리샤는, 예상외의 호출에 대답 대신 그저 어깨를 한번 무심하게 으쓱해 보이고는, 라리엘의 바로 맞은편 옆으로 낡은 목재 의자를 거칠게 끌어와 털썩 앉았다.라리엘은 트리샤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일도 고될 텐데, 공작님이 뜻밖의 부상까지 당하셔서 루이즈씨가 고생이 많아요.”그녀의 걱정스런 말에 트리샤는 라리엘의 깊은 눈동자를 잠시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뒷골목에서 온갖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보며 자라온 트리샤였지만, 눈앞에 앉은 이 라리엘이라는 귀족 여인의 눈만큼은 속내를 도무지 가장 읽어내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다.이 여자를 상대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솔직히 기분 나쁘지 않아요, 부인?”갑작스럽고도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라리엘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큰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뭐가 말이죠?”그녀의 얼굴에는 정말로 상대방의 의도를 추호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순수한 호기심과 의아함 가득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사교계 특유의 고단수 연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눈동자의 떨림이나 피부의 미세한 변화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투명한 태도였다.트리샤는 그 태도에 오히려 자신의 신경이 기분 나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사냥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직설적인 비수를 꽂았다.“공작님이 이 한적하고 외딴 남부 별장에서 외간 여자랑 단둘이 며칠 밤낮을 지내고 있던 거잖아요. 부부 관계도 안 좋은 판국에, 내가 공작님이 몰래 숨겨둔 내연녀고, 우리가 여기서 은밀하게 밀회를 즐기고 있던 거라는 상식적인 의심이나 질투는 눈곱만큼도 안 들어요?”
Terakhir Diperbarui: 2026-07-04
Chapter: 79화. 추적트리샤는 그의 내면을 지배한 그 공포를 정확하게 꿰뚫을 칼날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당장 가서 탈레스 씨에게 전해요. 남작님이 이 사태에 대해 직접 면담을 강력하게 요청하신다고. 사과를 하든, 보상을 논의하든 얼굴 보고 직접 끝내야겠다고 하시니까.”“그, 그건 정말 힘들 거요! 탈레스 님은 우리 같은 하급 행동대원들의 말 한마디에 쉽게 움직이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만만한 분이 아니…….”“그럼 당신 대가리가 먼저 날아가겠군.”트리샤가 허리춤에서 무심하게 단검을 꺼내 손톱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요. 남작님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분이 아니거든요. 내일까지 확답이 없으면 우린 우리식으로 움직일 거에요. 알겠어요?”협박에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랄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여관을 나섰다.여관 안의 어두운 테이블에 홀로 남겨진 랄프는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와 떨림을 어떻게든 씻어내려는 듯, 앞에 놓인 독한 독주를 거칠게 손으로 쥐고 연거푸 목구멍으로 들이켰다.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랄프가 마침내 여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검은 그림자가 은밀히 뒤쫓기 시작했다.랄프는 여관 뒤편의 허름한 헛간 쪽으로 비틀거리며 향하더니, 문 앞에서 무언가를 경계하듯 주위를 잔뜩 찌푸린 눈으로 잠깐 훑어보았다.그리고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서야, 낡은 목재 헛간 안으로 슥 들어갔다.‘헛간?’커다란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그의 기이한 행적을 지켜보던 트리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선지에 미간
Terakhir Diperbarui: 2026-07-04
Chapter: 78화. 지난 밤의 회상조금 전, 아르덴의 침실 문을 닫고 나온 트리샤는 소매와 옷자락에 허옇게 묻은 산길의 흙먼지를 무심하게 털어냈다.예상은 충분히 했지만, 역시나 가시방석이 따로 없는 불편하고 숨 막히는 자리였다.별장 안은 이른 시간답게 조용했다.그녀는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오며, 불과 몇 분 전 마당에서 목격했던 풍경부터 머릿속으로 다시금 천천히 떠올렸다.별장 앞마당에 나란히 세워진 마차와 말들. 겉보기에 장식이 요란하거나 과하지는 않았지만, 마차의 중앙과 말의 가죽 마구에 새겨진 정교한 문장은 단번에 신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묵직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전날 밤, 전갈을 보낼 때 ‘공작이 도적에게 습격을 당해 깊은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굳이 덧붙인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혼자서 녹스의 꼬리를 추적하고 공작의 뒤치다꺼리까지 감당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벅차고 위태로웠기에 저지른 충동적인 일종의 보험이었다.그렇기에 공작저에서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이든, 호위 병력이든 이쪽으로 급파될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하지만 공작 부인이 직접 올 줄이야.”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그녀는 다시금 루이즈 연기를 해야했다. 막상 가짜 신분을 연기하며 눈치 빠른 귀족 부인 앞에서 이것저것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변명하고 비위를 맞춰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고개가 절로 저어질 만큼 귀찮고 까다롭게 느껴졌다.게다가 하필이면 공작이 끔찍이도 싫어한다던 공작 부인을 제 손으로 직접 불러들인 꼴이 되었으니, 잠시 후 마주할 그의 서늘한 눈빛이 얼마나 더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조금 전 방문을 열고 공작을 마주했을 때, 트리샤의 불길한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공작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는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Terakhir Diperbarui: 2026-07-03
Chapter: 77화. 너무 부려먹는거 아니야?먼저 거즈가 밀리지 않도록 손등으로 가볍게 눌렀다. 긴장된 그의 근육이 손길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굳었다가, 이내 천천히 힘을 풀었다.그 변화가 고스란히 손끝에 느껴져, 그녀는 무심코 숨을 들이마셨다.붕대의 끝을 잡아 어깨 위에서 한 바퀴 감았다.너무 느슨하면 의미가 없고, 너무 조이면 아플 것이 분명했다. 라리엘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힘을 조절했다.어깨를 한 번 감은 뒤 붕대를 가슴 쪽으로 내리고는 그녀가 잠시 손을 멈췄다.상처를 지지하려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조금만 참아.”낮게 말한 뒤, 라리엘은 그의 앞으로 반 발짝 다가섰다. 몸을 숙여 붕대를 당기며 그의 몸을 반쯤 감싸 안는 자세가 되었다.팔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단련된 몸에,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아르덴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의 가슴팍으로 떨어지는 라리엘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가볍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그녀가 붕대를 가슴 둘레로 한 바퀴 감아 올리고, 다시 어깨 쪽으로 올렸다.“아프면 말해.”아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이번엔 조금 더 단단하게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천을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했다.마지막으로 고정하기 위해 매듭을 지어야 했다.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매듭의 위치를 가늠하던 라리엘은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숨을 멈췄다. 단단히 다져진 근육 아래에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스쳤다.짧은 침묵 후에 라리엘이 급히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애써 숨을 가다듬으며 붕대를 묶었지만, 손끝이
Terakhir Diperbarui: 2026-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