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더 싫어.”...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도착했는데 갑자기 누군가를 보고 두 사람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노민우가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이 추운 겨울날 위에는 셔츠 하나만 입고 쪼그리고 앉아 강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강하리는 설이기도 해서 당연히 그가 연성에 돌아간 줄 알았다.결국에는 구승훈이 먼저 정적을 깨고 말했다.“가자. 올라가서 말해.”그렇게 노민우는 두 사람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강하리에게 무릎을 꿇었다.그의 모습에 강하리도 깜짝 놀랐다.“민우 씨한테 줄 세뱃돈은 없는데요.”그러자 노민우는 한껏 풀이 죽은 얼굴로 강하리를 올려다보았다.“제발 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 네?”그의 말에 강하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빨리 일어나요. 그리고 이렇게 하루 종일 꿇고 있어도 전 아닌 건 아닌 사람이라서요. 못 믿겠으면 이 사람한테 물어보든지요.”그녀의 말에 노민우가 뒤에 서 있던 구승훈을 바라보자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 눈에는 그저 예쁘기만 해서 난 모르겠다.”순간 노민우는 짜증이 말려와 자기도 모르게 그를 째려봤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노민우에게 물었다.“그럼 우선 연지를 찾아서 뭐 하려는 건지 말해줘요.”그러자 노민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쓴웃음을 짓다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사실 저도 연지가 이번에는 큰마음 먹고 떠났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억지로 제 곁에 붙잡아 둔다고 해서 연지가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런데 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게 어떻게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모질게 저를 버릴 수가 있죠? 제가 여태껏 했던 노력을 봐서라도 일단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요?”가만히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민우 씨 때문에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잖아요. 민우 씨랑 엮이면 분명 여씨 가문의 복수를 불러온다는 사실도 뻔히 알면서 연
낮에 내린 눈때문에 명절 분위가 더욱 무르익어가는 것 같았다.하얗게 쌓인 눈, 그리고 형형색색의 불꽃들과 찬란한 불빛들.폭죽에 불을 붙인뒤 노연정을 안고 뛰어오는 구승훈의 모습과 노연정의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에 강하리도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오색 빛으로 된 폭죽이 하늘에서 팡팡 터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어느새 입가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구승훈은 약간 넋이 나간 채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이때, 노연정이 강하리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핸드폰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아름다운 사진은 영원히 구승훈의 갤러리 안에 저장되었는데 사진 속 강하리는 역시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추워?”구승훈이 묻자 강하리는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답했다.“조금.”말을 마치자마자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오래 서 있었던 탓에 마침 다리도 점점 불편했는데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그녀를 폭 안았다.그리고 노연정마저 자기 롱코트 안으로 가뒀는데 이마저도 노연정은 신났는지 연신 꺄르륵거리며 웃었다.그러나 강하리는 온몸이 굳어진 채 움직일 수 없었다.구승훈도 품 안의 강하리가 경직된 걸 발견하고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하늘에서 또 다른 불꽃 하나가 터지자 구승훈이 그녀에게 말했다.“고생만 시켜서 미안해.”그러자 강하리의 눈초리가 가볍게 떨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구승훈 씨, 저번에도 물었는데 부부란 뭔지 알아?”순간 구승훈이 멈칫하자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불꽃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비록 이제 와서 아무 소용도 없는 말들이지만.”지금 강하리는 하루빨리 몸조리를 잘해서 외교부로 돌아갈 생각뿐이었고 이것이 현재 진태형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피곤해. 이만 돌아가자.”그러자 구승훈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뭐가 소용이 없다는 거야?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강하리는 모든 분풀이를 다 하고 나서야 기진맥진한 상태로 욕조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구승훈이 귀를 가까이 대고 자세하게 듣다가 순간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우리는 지금 부부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까 당신은 나랑 이 고통을 나눌 이유가 없어.”말을 마치고 욕조에 기대어 잠이 든 강하리의 모습에 구승훈은 마음 한쪽이 쓰라려 오는 걸 느꼈다.역시나 그녀는 아직도 구승훈을 원망하고 있었다.아직도 그때 자신을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냈던 걸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고 모든 일을 함께 해결해 나가기로 했으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그러나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구승훈은 결국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그때 그녀가 뛰어내릴 때 잠깐 망설인 것 만 제외하고 말이다.그게 살면서 지금까지 제일 후회되는 일이었고 만약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갔을 것이다.“아파?”강하리가 조심스레 묻자 구승훈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아프다는 소리에 강하리는 다급히 그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놨나 바. 나도...”“아픈 만큼 기분이 좋더라고. 하마터면 널...”역시나 능글거리는 답에는 매가 약이라고 생각하고는 단번에 구승훈의 다리를 걷어찼다.“안 닥쳐?”그러나 구승훈은 이제 피하지도 않고 엄살만 부렸다.“아직 아프다고!”“아파도 싸!”강하리는 그를 한번 째려본 뒤 다시 거실로 향했다.그러나 몇 발짝 옮기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한껏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와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치 애지중지 키워준 딸을 한참 떨어지는 남자에게 시집 보내는 느낌이랄까?그들은 여전히 구승훈을 못마땅해하는 한편, 자기 주장 없이 그에게 자꾸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강하리에게도 화가 나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걸 애써 무시하고는 그들에게
강하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창밖이 훤해져 있었다.폭신한 이불 속에 누워 잠깐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밖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그러나 겨우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증조할아버지까지, 다들 무슨 일로 오셨어요?”그러자 심준호가 그녀에게 웬 열쇠 꾸러미를 던져주며 말했다.“네가 전에 차 갖고 싶다고 했잖아. 자, 새해 선물.”심예진도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설인데 당연히 가족끼리 같이 보내야지. 네가 오기 불편할 것 같아서 우리가 왔지?”“몸은 좀 괜찮아?”백아영이 걱정스레 묻자 강하리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많이 좋아졌어요.”“내가 얼마나 놀랐다고, 너도 참... 분명 천천히 치료받아도 되는 걸 꼭 이렇게 사람을 괴롭힌다니까?”그러자 강하리는 고개를 수그리고 답했다.“못 기다리겠어요, 할머니.”진태형이 지금 잡혀가서 심문받고 있을 텐데 어떻게 천천히 회복되기만을 손 놓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이때, 백아영이 말했다.“사실 할머니가 도와...”“할머니, 이건 제 책임이니 제가 직접 해결해 볼래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백아영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그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강하리는 백아영과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구승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발견하고 두리번거리던 이때, 갑자기 주방에서 그가 앞치마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구승훈은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 소매를 팔 가운데까지 가지런히 걷어 올려 튼튼한 팔뚝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그리고 팔뚝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깨났어?”구승훈은 뜨거운 뚝배기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곧바로 강하리 쪽으로 다가왔다.“어디 아픈 곳은 없어?”그러나 강하리는 대답 대신 그의 팔뚝에 남은 이빨 자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몸 곳곳에도 상처가 남
“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강하리는 얼굴이 창백한 나머지 핏기 하나도 없었고 이렇게 추운 날인데도 이마에 땀방울까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구승훈은 냉큼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땀을 닦아주다가 문득 뒤따라 나오는 연휘정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하리한테 직접 물어봐. 천천히 몸조리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못살게 구는구나.”그의 말에 구승훈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원래 연휘정이 강하리를 위해 재활 계획을 세워뒀다는 걸 구승훈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보아하니 강하리가 그 계획대로 치료하기를 거부한 것이다.구승훈은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는 강하리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뭐가 그리 급해?”그러자 강하리는 여전히 핏기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답했다.“난 급해.”구승훈은 어이없는 나머지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강하리, 넌 날 전혀 믿지 않는구나?”자신을 못 믿으니까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회복시키려는 것이고 모든 걸 스스로 하겠다는 거라고 생각했다.강하리는 그의 손가락을 힘겹게 하나씩 풀며 답했다.“아파. 승훈 씨,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어.”구승훈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화도 나고 안쓰럽기도 했다.하여 어쩔 수 없이 강하리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준 뒤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구승훈의 옷을 꽉 잡고 눈을 지그시 감았지만 이상하게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그 모습에 구승훈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아프면 그냥 날 물어.”그러나 강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정주현이 냉큼 달려오더니 강하리의 상태를 보고 결국에는 화를 냈다.“두 사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면 재밌어요?”하지만 구승훈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강하리를 일단 차에 태운 뒤에 다시 고개를 돌려 정주현에게 물었다.“할아버지한테 혹시 통증을 완화할 방법이 없는지나 물어봐 줘.”그러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주현이 봉투 하나를 그에게 던져줬다.“외
강하리는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구승훈과 함께 별장을 떠났다.구승훈은 원래 강하리가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연휘정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게다가 선물도 준비해서 말이다.얼마 후.구승훈은 연휘정의 문 앞에서 서서 안절부절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자꾸만 강하리가 오늘 큰 사고라도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는 길에 아무리 물어도 그녀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순간 구승훈은 이런 게 자업자득인가 싶었다.예전에 그도 강하리에게 모든 걸 잘 털어놓지 않았는데 사실 타이밍을 놓쳤을 때가 많았다.그러나 지금 강하리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겠다는 게 눈에 훤히 보여 답답해 미칠 지경이였다.심지어 연휘정도 그더러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얼굴이 왜 그래?”이때, 정주현이 밖에서부터 연미숙을 부축하며 들어왔다가 얼굴이 한껏 어두워져 있는 구승훈을 발견했다.“누가 보면 우리 할아버지한테 빚 받으러 온 줄 알겠다?”구승훈은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다시 옆에 서 있는 연미숙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여전히 귀부인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정신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석방된 후 석연란의 일이 폭로될 때까지 그녀는 줄곧 구승훈의 감시를 받아왔다.하여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연미숙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가 이내 괜찮은 척 인사를 건넸다.“구 대표.”그러자 구승훈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여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연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주현은 그녀를 다시 부축해서 밖에 어느 매화나무 아래에 앉혔다.눈은 이미 그쳤는데 매화 가지에 눈이 소복이 쌓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연미숙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매화나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정주현은 그녀에게 담요 하나를 걸쳐준 뒤 자리를 떴다.이때, 구승훈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미친 척 연기하는 것도 이제 힘들죠?”순간 연미숙은 자기도 모르게 손이 살짝 떨렸지만 못 들은 척, 계속 매화나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