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둘이 여기까지 온 게 쉽지 않았던 걸 알아. 내 체면을 봐서 수혁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없겠니?”허자옥의 이 말은 간절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강시연은 침묵했다.이번 일을 겪으면서 진수혁에 대한 증오는 확실히 많이 사라졌지만 곧장 용서할 수는 없었다.과거의 고통과 실망은 분명 존재했고 그녀 마음속의 상처와 슬픔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랐다.잠 못 이루던 밤들 속 그녀는 혼자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강시연은 진짜로 두려웠다.그녀는 진수혁의 진심을 믿을 수는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를 통제할 수 없었다.버림받고 싶지 않고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고 매 순간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다.허자옥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강시연의 손을 살짝 토닥이고서야 천천히 자리를 떴다.곧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환자 분의 가족이세요?”강시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남편입니다.”의사는 곧장 상황을 설명했다.“남편분은 현재 위독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만 이번에 후두부를 크게 다쳐 언제 완전히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 확실치 않습니다. 가족분들께서는 심리적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강시연의 가슴이 갑자기 조여왔다.“깨어날 수 있을까요?”의사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죄송합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환자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는 아닙니다. 환자의 귀에 말을 걸어 주세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가능성도 있습니다.”“제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떠났다.강시연은 조용히 병실로 들어갔다. 모든 처치는 이미 끝나 있었고 진수혁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분명 예전에는 생기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영혼을 잃은 듯 보였다.강시연의 가슴은 복잡했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진수혁의 병상 옆에 앉아 그의 윤곽을 눈으로 더듬으며 가슴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
강시연 자신도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몰랐지만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하며 그대로 달려갔다.다행히 진도현은 아무 일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진도현은 코를 훌쩍이며 머리를 들어 눈앞의 엄마와 할머니를 바라보며 억울하게 말했다.“저 심하은 이모를 봤어요. 마침 아빠도 산 위에 있어서 둘이 산 위에서 만날 줄 알았어요. 아빠를 찾으러 가고 싶었어요. 이모가 나쁜 사람이고 불륜녀라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빠가 나쁜 사람이랑 놀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러면 엄마도 화를 안 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가자마자 심하은 이모가 고모할머니한테 말하는 걸 들었어요. 아빠를 죽일 방법을 찾아서 진한 그룹을 빼앗겠다고요. 저 그때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다가 결국 하은 이모와 고모할머니가 저를 발견했어요...”진도현의 검은 동공 속에는 분명한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는 말하면서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고 분명 방금 겪은 고통에 깊이 빠져 있었다.강시연이 급히 말을 끊었다.“그만 말해. 엄마는 다 알고 있어.”허자옥의 얼굴은 이 순간 극도로 험악해졌다. 그녀 곁에는 따라온 진한 그룹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이용하면서 결국에는 자기 아들까지 해치려 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차올랐다.허자옥은 예전에도 대표 사모님이었기에 남다른 기품이 있었다. 눈을 흘기자 주변 진한 그룹 사람들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몇몇이 내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 알아요. 왜 그룹을 물려받는 거냐고. 하지만 나 허자옥 오늘만큼은 분명히 말할게요.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도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이 말이 나오자 주변 분위기는 더욱 긴장됐다. 모두 눈치만 보고 누가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감히 나서지 못했다.허자옥은 상황을 보고 짜증스레 손을 흔들어 그들을 모두 쫓아냈고 자신은 강시연과 단독으로 이야기했다.“시연아, 수혁의 어머니로서 나는 너에게 분명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예전엔 내가 잘못했어
마음이 엉켜 있었다.갑자기 병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로 수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왔다.선두에는 진수혁의 어머니 허자옥이 있었다. 그녀 뒤에는 진명진도 서 있었다.진명진은 강시연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그녀를 가리키며 호통쳤다.“또 자네군. 우리 진씨 가문이 도대체 몇 대를 망쳤으면 이런 여자를 만나야 하는지! 진짜 재수 없게 시연 씨만 나타나면 좋은 일이 없어요.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산사태를 왜 둘이 마주치냐고. 혹시 사람 좀 잘못 만나서 남편을 못살게 하는 거 아니에요?”날카롭고 신랄한 목소리가 귓가를 찌르자 강시연은 몸이 굳어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분노가 쏟아지는 대로 두었다.하지만 진명진도 말이 길지는 않았다. 허자옥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허자옥은 강시연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괜찮아?”“저...”강시연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진명진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울 줄만 알지 뭐 할 줄 알아요? 우리 진씨 가문의 복을 다 내동댕이쳤네요.”“입 닥쳐요.”허자옥이 단호하게 꾸짖었다.“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런 자연재해는 드물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어린 부부가 이런 일을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거예요. 여기서 더 문제를 만들지 마세요.”그리고 그녀는 강시연에게 계속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의사에게 물어봤는데 처치만 잘하면 수혁이는 괜찮대. 너희는 부부니까 수혁이가 당연히 널 지켜야 했던 거야.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 수혁이가 깨어 있다면 아마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강시연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스쳤다.그때, 진도현이 오지원과 함께 데려왔다.그는 아까 울면서 엄마를 찾으며 소리쳐서 오지원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진도현은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작은 몸이 떨리며 울었다.“엄마, 아빠 괜찮아요?
“진수혁!”강시연은 더 이상 폭발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그녀는 진수혁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자신의 목덜미로 떨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차갑게 떨어질 때마다 마치 무거운 망치로 가슴을 내려치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번져왔고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로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건지 아득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진수혁은 여전히 말을 이어갔다.“시연아,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내 잘못이 컸어. 내가 이기적이었고 어리석었고 심하은의 추악한 본모습조차 구분하지 못했지. 널 너무 많이 울게 했고 실망하게 했고 절망하게 했어. 만약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제발 다시는 나를 만나지 마.”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고 목소리는 점점 더 약해졌다.“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도저히 널 놓을 수가 없어. 가끔 생각해. 내가 이렇게 엉망인 놈이 너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덕분일 거야. 하지만 너한테는 나를 만난 게 가장 불운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널 자유롭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네가 행복할 거라 믿었거든. 그런데... 난 그게 안 돼, 시연아. 난 정말로 널 사랑해. 우리가 떨어져 지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너랑 우리 아들을 생각했어. 정말 너를 데리고 돌아가고 싶어. 우리 셋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 이제 심하은과 장문호 모두 다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해버리고 싶어. 하지만...”그의 말은 점점 끊기며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이미 온몸의 힘이 빠졌음에도 그는 끝까지 그녀를 품 안에 감싸며 폭우와 무게로부터 그녀를 지켜냈다.강시연의 가슴은 먹먹하게 아파졌다.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급히 그의 입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그만 말해요. 제발 그만 말해요. 부탁이에요. 더는 말하지 마요.”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옆에 있던 진도현의 귀에 닿았다.작은 아이는 그제야 눈앞의 상황을 이해했다.그는 아무 생각도 할 겨를 없이 비틀거리며
“진 대표님, 이 한 칼로는 부족해요. 당신이 바꾸려는 건 두 사람의 목숨이에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그 둘의 생명을 바꾸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세 식구 모두 저 아래에서 다시 만나겠죠.”그의 웃음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날카로운 웃음이 강시연의 고막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게 갑자기 결박을 뿌리치고 진수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그때 귀 끝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마치 돌덩이가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남자는 즉각 위험을 감지했다.이곳이 자하산이라는 걸 깨닫자 그는 폭우가 가장 쉽게 불러오는 재앙인 산사태가 떠올랐다.“빌어먹을, 하필 이런 날씨를 만나다니.”위험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버리고 혼자 도망치기로 했다.남자가 떠나자마자 강시연은 곧장 진수혁을 꽉 끌어안고 자기 옷으로 상처 부위를 막았다.진수혁은 이미 기력이 쇠해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시연아, 어서 가. 산사태가 오고 있어. 지금 나가지 않으면 우리 모두 여기서 죽게 돼.”강시연은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이 지경인데 내가 어떻게 혼자 가요?”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진수혁을 부축하며 함께 아들 곁으로 향했다.그때 진도현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그녀는 몸을 굽혀 아이를 등에 업고 한 손으로 진수혁을 붙잡은 채 비틀거리며 남자가 달아난 방향으로 걸어갔다.“이 길로 내려가면 돼요. 내 동료들이 지금 산 아래에 있어요. 우리 반드시 돌아갈 수 있어요.”산사태가 덮치기 전에만 내려가면 이 위험한 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진수혁의 몸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고 폭우는 그의 상처를 계속 덮쳐 더욱 깊은 고통을 가져왔다.비록 치명상을 피했지만 칼은 확실히 그의 몸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는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그는 갑자기 강시연을 밀쳐내며 마지막 힘을 짜냈다.“시연아, 어서 도현이를 데리고
역시나 남자의 얼굴에 잠시 흔들리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하지만 그 표정은 곧 사라졌다.그의 얼굴에 사나운 기색이 번졌고 손에 힘을 주더니 칼날이 진도현의 팔을 깊게 그었다. 아이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아파요!”“아빠, 엄마, 살려주세요.”“도현아.”순식간에 숲속에서 한 가냘픈 여인의 몸이 튀어나와 남자에게 거세게 달려들며 진도현을 구하려 했다.진수혁은 그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 여자는 바로 강시연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자였다.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해 불시에 공격했지만 남자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했다.진수혁이 막기도 전에 강시연은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혀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져졌다.“어디서 튀어나와서 감히 나를 덮쳐요? 내가 이 판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이런 모욕은 처음이네요. 당신 같은 여자한테 사람을 빼앗긴다면 앞으로 어디 가서 체면이 서겠어요?”그는 분노로 강시연의 목을 세게 조르며 그녀와 아이를 동시에 땅에 눌러 붙였다. 그리고 차갑게 고개를 들어 진수혁을 바라봤다.“진 대표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여자가 당신 아내겠죠? 부부 금실이 대단하네요. 어떻게 둘 다 동시에 산으로 올 생각을 했을까요? 근데 덕분에 일이 더 쉬워졌어요. 스스로 걸어 들어오다니 이젠 헛소리 그만해요.”남자가 손에 힘을 주자 강시연의 얼굴에 고통이 뒤덮였다.그는 흥분한 듯 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며 비웃었다.“진 대표님, 시간이 없어요. 선택해요. 진한 그룹을 포기할래요? 아니면 자신을 포기할래? 아니면 아내와 자식을 포기할래요?”“그만. 진한 그룹을 포기한다고요.”그러자 남자는 비열하게 웃으며 말을 바꿨다.“에이, 그건 재미없죠. 생각해 보니까 죽기만 하면 회사는 어차피 우리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요.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본인이 죽든지 마누라랑 애가 죽든지 골라봐요.”“당신...”진수혁은 분노에 치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강시연과 진도현의 처참한 모습을 차마 볼 수조차 없었다. 가슴이 짓눌린 듯 고통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