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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시간을 거슬러
Auteur: 강시아

제1화

Auteur: 강시아
“서인경, 너는 무고한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간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오늘부로 상왕비의 자리에서 폐하고 평생 안락당에 가둘 것을 명한다. 평생 다시 너와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 네가 죽든 살든 앞으로는 더 이상 관여치 않을 것이다.”

서인경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지며, 사내의 냉랭한 목소리가 반복해서 귓가에 울렸다.

‘내가 무고한 사람을 살해했다니?’

‘상왕비는 또 뭐야?’

“죽은 척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서인경은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날카롭고 매정한 누군가의 시선이었다.

“당장 일어나거라! 억울한 사람을 모함하였으면 사과를 해야지!”

사내는 거칠게 서인경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서인경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이게 소설에서만 보던 타임슬립 빙의?’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녀가 빙의한 상대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과 지혜를 상실해버린 왕비라는 점이었다.

결국 어리석음의 극치가 무엇인지 보여준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평생 안락당에 갇혀 지내다가 우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시점은 상왕비가 폐위되기 3년 전, 즉 그녀가 간사한 꼬드김에 속아 바람난 상왕을 잡으러 다루, 즉,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듣는 곳으로 와서 난동을 부린 직후였다.

그녀는 맹국공의 딸인 맹은영이 자신의 부군인 상왕 연기준에게 꼬리를 쳤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맹은영은 현장에서 기절한 상황이다.

어릴 적부터 지병을 앓은 맹은영에게는 이런 작은 자극도 치명적이었다.

원주인에게 굴욕적인 욕을 들은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후에 결국 세상을 떠났고, 이 사건 직후로 상왕은 그녀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맹국공 가문과 서씨 가문은 앙숙이 되었다.

나중에 서씨 가문이 간신배로 몰렸을 때, 앞장서서 개국공신인 서씨 가문의 탄핵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맹국공이었다.

그리고 깨어나기 전에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던 비정한 말들은 원주인이 죽기 전에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내가 그녀의 얼굴에 화리서(和离书:이혼합의서)를 던지며 했던 말이었다.

“휴.”

서인경이 상처를 후벼파는 그 말을 떠올리자 이 몸에서 강렬한 절망과 비통함이 느껴졌다.

‘21세기 참된 여성으로서 비혼주의를 주장하던 내가 어쩌다가 이런 얼간이의 몸에 빙의된 거지?’

“어휴.”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녀의 연이은 한숨은 연기준의 마지막 인내심마저 날려버렸다.

곧이어 다리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지더니 서인경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게 되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 연기준이 발로 그녀의 다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하고 벌을 받는 게 마땅하거늘. 얼른 사과부터 하거라!”

서인경은 길게 심호흡하며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은 상왕을 철없는 사고뭉치 왕비를 잘못 들여 뒷수습하기 바쁜 피해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경은 그가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어야지 진정으로 연모하는 단은설과 혼인할 수 있으니까.

‘망할 남정네, 이 원한은 꼭 기억해 두마.’

“맹 소저, 내가 요사한 자의 이간질에 속아 소저를 오해한 것 같군. 내 이리 사과하지.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네!”

깔끔한 사과와 함께 서인경은 고개를 푹 숙였고, 사람들은 경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존귀한 상왕비께서 세가의 딸에게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다니!

하지만 서인경은 그런 시선들을 일일이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온 이상, 어떻게든 그 비극은 막아야 해. 철따구니 없는 원주인이 친 사고도 내가 수습할 수밖에.’

한편, 연기준의 눈가에도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게야? 당장 왕부로 꺼지지 못할까!”

서인경은 자신을 대하는 사내의 태도에 굉장히 화가 났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쪽이고 꺼져야 할 사람도 그쪽이야. 내가 그쪽만 아니었으면 맹 소저를 오해하고 이렇게 비굴하게 사과할 일도 없었다고. 그러니 꺼질 테면 그쪽이 꺼지든가!”

연기준과 사람들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상왕비가 누굴 욕하는 게 흔한 일이긴 하지만, 상왕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욕을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왕의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

어쨌거나 연기준과 서인경의 연이은 사과로 맹은영의 기분도 한결 편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약을 먹은 후, 어느정도 기력을 회복한 그녀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서인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세요. 존귀하신 왕비께서 어찌 저에게 무릎을 꿇으십니까?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서인경은 대수롭지 않게 무릎을 툭툭 털었다.

“괜찮네. 소저가 화가 풀렸으면 된 거지. 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좀 했네. 이렇게 어여쁜 처자가 상왕 같이 똥 씹은 표정만 하고 다니는 사내에게 마음을 주었을 리가 없지.”

연기준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도 빠른 태세 변화에 맹은영 본인도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워낙 귀족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서인경이라 접근조차 하기 싫었던 맹은영이었다.

“상왕비께선 앞으로 누군가를 비난하실 때 사실관계를 잘 알아보고 하셨으면 좋겠군요.”

서인경은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저가 날 안 믿어줄 것을 알지만 돌아간 이후로 음식을 유의해서 드시게. 누군가 소저를 해하려 하고 있으니.”

맹은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당신….”

서인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였으면 이렇게 소저에게 말해줄 이유가 없지.”

원주인의 기억을 통해 서인경은 맹은영이 단순히 화병으로 죽은 게 아님을 추측해냈다.

이는 단씨 가문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행한 짓이었다.

원주인은 죽는 순간까지 그것도 모르고 엄한 죄를 뒤집어쓴 채 숨이 끊어졌다.

맹은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은영이 돌아가고 더 이상 구경거리가 없게 되자, 사람들도 각자 흩어졌다.

서인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던 때, 검은 인영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

연기준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참 잘생기긴 했는데… 사람이 정이 없어. 원주인은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남자 때문에 망가진 거야?’

서인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준비를 해주십시오.”

다루 안으로 들어서던 단은설이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인경아, 자꾸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마. 한낱 여인인 네가 어찌 먼저 이혼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단은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주변 시선들이 또다시 서인경에게로 쏟아졌다.

상왕비가 이혼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혼사는 그녀가 가문의 공적을 내세워 억지로 받아낸 것이었다.

심지어는 상왕이 아니면 죽겠다고 하던 그녀가 갑자기 이혼을 주장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또 그녀가 꿍꿍이를 꾸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기준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멈칫하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내가 네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서인경은 한심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왕야께선 단은설과 혼인하고 싶어하시니, 제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어드리겠다는 말씀인었사온데,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요?”

그 말을 들은 연기준은 인상을 확 찌푸렸고 단은설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인경아, 그런 헛소리는 하는 게 아니야. 나와 왕야 사이는 결백해.”

서인경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 입꼬리나 내리고 그런 말을 하지.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가 매일 상왕부에 들락거리면서 결백을 주장하는 꼴이라니.”

단은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억울한 척했다.

“인경아, 난 네가 보고 싶어서 상왕부에 들른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날 오해하면 안 되지.”

서인경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다른 사람은 오해해도 되고 너는 안 된다? 애초에 맹 소저와 상왕이 이 다루에서 밀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 너였어. 너 아니었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빠른 시간 안에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단은설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서인경이 그 사실을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떠벌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예전의 서인경이라면 절대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인경아… 어찌 날… 그런 식으로 모함할 수 있어? 난 동생인 널 진심으로 돕고 싶었는데.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기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단은설은 마치 큰 상처라도 받은 양,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원주인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급히 사과를 했겠지만 서인경은 그저 이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서씨고 너는 단씨야. 난 존귀한 상왕비고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호국공신이시지. 일개 상인의 딸인 네가 내 언니 행세를 하다니, 참으로 우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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