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보세요?”
김동팔.
고등학교 친구. 그리고 지금은 아직 간호학과 학생이다.“야, 동팔아.”
“왜 전화했어?”
……그래.
이 말투였다.“어. 그냥 해봤지.”
“그럼 끊는다.”
“야!”
“왜?”
“왜 바로 끊어?”
“할 말 없잖아.”
맞다.
이게 김동팔이었다.“야, 뭐 하냐?”
“그냥.” “오늘 뭐 할 건데?” “몰라.” “밥은?” “먹겠지.”대화가 안 된다.
‘몰라.’
‘피곤해.’ ‘바빠.’ ‘내가 알아서 뭐 하게.’ ‘너랑 상관없어.’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인간.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단순히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동팔이는 학창 시절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사람을 믿었다가 상처받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적이 되는 경험을 반복했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그때의 나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답답하다고만 생각했다.“야. 오늘 시간 되냐?”
“왜?”
“한번 보자.”
“귀찮아.”
“밥 사줄게.”
“다음에 보자.”
김동팔의 ‘다음에 보자’는 약속이 아니다.
번역하면 ‘당분간 볼 생각 없음’이다.나는 바로 승부수를 던졌다.
“뷔페 사준다.”
잠깐 조용해졌다.
“……무슨 뷔페?”
‘걸렸다.’
“고기뷔페.”
“어디?”
나는 웃었다.
“너 진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뭐가.”
“아니다.”
잠시 고민하던 동팔이가 말했다.
“그럼…… 갈게.”
역시 사람을 움직이려면 정확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특히 김동팔은.***
저녁.
고기뷔페.내 앞의 스물여섯 살 김동팔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통통했다. 아니, 많이 통통했다.나는 녀석의 배를 슬쩍 봤다.
“야. 너 살 좀 빼라.”
“내가 왜?”
“건강해야지.”
“건강한데.”
“여자친구는 안 만들 거야?”
“귀찮아.”
“결혼은?”
“몰라.”
“돈은?”
“없어.”
“주식은?”
“관심 없어.”
“부동산은?”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돼?”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너 인생에 관심이 있긴 하냐?”
동팔이는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살아지겠지.”
참 명언이다.
“동팔아. 넌 나중에 간호사 될 거지?”
“아마.”
“아마가 아니라 될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이 그래.”
사실 알고 있다.
동팔이는 서른두 살쯤 결국 간호사가 된다. 늦었지만 꽤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잡는다.문제는 그 전까지다.
재테크도, 사람 만나는 것도, 연애도 모두 귀찮아했다.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았다.
동팔이는 설명으로 바뀌는 인간이 아니었다. 직접 보고 느끼고 본인이 납득해야 움직였다.‘그래서 여행이었지.’
우리가 가까워진 계기도 여행이었다.
낯선 곳에 가면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야. 여행 가자.”
동팔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강릉.”
“왜?”
“바다 보고. 고기 먹고. 놀고.”
“공부해야 돼.”
“2박 3일.”
“귀찮아.”
“차는 내가 렌트한다.”
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몸만 와.”
“돈은?”
“내가 낸다.”
“숙소도?”
“내가.”
“밥도?”
“내가.”
동팔이가 잠시 생각했다.
“음…….”
“‘생각해볼게’ 하지 마라. 네가 생각해본다고 하면 백날 첫날이다.”
“뭔 소리야.”
“그냥 가.”
나는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공부 힘든 거 안다.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고 밖에 나가는 것도 싫고. 근데 계속 방 안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동팔이가 나를 바라봤다.
“왜 갑자기 나한테 잘해줘?”
그 질문에 잠깐 말이 막혔다.
13년 뒤 우리는 꽤 친해진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닌다. 그 시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동팔이는 모른다.“친구니까.”
“…….”
“내가 직장인인데 학생한테 밥도 좀 사주고 그러는 거지.”
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강릉은 생각해볼게.”
나는 웃었다.
‘반은 넘어왔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동팔이의 여동생 김동희.
그리고 내가 동희에게 소개해준 친구 이재희.순간 기분이 싸늘해졌다.
“이 새끼…….”
내 인생에서 정말 미안했던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재희가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인지 몰랐다. 겉으로는 멀쩡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동희에게 소개해줬다.하지만 나중에는 다단계에 빠졌고 거짓말도 늘었고, 결국 동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내가 소개하지만 않았어도.’
이번에는 다르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절대. 이번에는 절대 소개 안 한다.”
기회가 된다면 아예 이재희가 동희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처음 회귀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 인생만 생각했다.
진급, 돈, 여자, 장성호에게 복수하는 것.그런데 하나씩 기억이 돌아올수록 바꾸고 싶은 일이 늘어났다.
엄마. 조 파트장. 미연. 동팔이. 동희.내가 모든 걸 바꿀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알면서 가만히 있는 건 더 싫었다.***
며칠이 흘렀다.
회사에서는 별다른 사고 없이 적응해갔다. 사수에게는 적당히 모르는 척했다. 누가 알려주면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수는 하지 않았다.박팀장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김기리.”
“네, 팀장님.”
“자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
“감사합니다.”
속으로만 웃었다.
‘13년 했으니까요.’
미연과도 연락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문자 몇 개, 그다음에는 짧은 통화. 좋으면 좋다고 표현했다. 미연도 싫어하지 않았다.결국 다음 주말 우리는 밥을 먹기로 했다.
“이것도 3년 단축.”
회사생활 순항.
미연 순항.그리고 마지막 하나.
김동팔.***
주말 아침.
렌터카 회사 앞.잠시 후 저 멀리서 동팔이가 걸어왔다.
백팩 하나, 트레이닝복, 그리고 여행을 가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야!”
“피곤하다.”
“시작부터?”
“어제 늦게 잤어.”
“왜?”
“유튜브 봤어.”
“공부한다며.”
“어제는 안 했어.”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뭐가?”
“김동팔 계몽 프로젝트.”
“뭔 소리야?”
“앞으로 알게 될 거다.”
“이상한 짓 하지 마.”
“타.”
내비게이션 목적지는 강릉.
동팔이가 창밖을 보며 물었다.
“근데 갑자기 왜 강릉이야?”
나는 씩 웃었다.
“친구야.”
“왜.”
“오늘부터 네 인생 좀 바꿔보자.”
동팔이가 바로 대답했다.
“싫어.”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귀찮아.”
“야!”
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나는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잊고 있었다.이 여행에서 김동팔의 인생뿐 아니라 내 두 번째 인생에도 영향을 줄 한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을.
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