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
박정태 팀장.나는 잠깐 미연의 메시지를 바라봤다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팀장님. 김기리입니다.”
“김사원, 지금 어디야?”
“강릉에 와 있습니다.”
“강릉?”
“친구와 여행을 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박팀장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
“제품 결함이 하나 발생했어. 월요일 아침에 바로 보고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현황하고 원인 추정, 재고 상황, 대응계획까지 정리해야 돼.”
예전의 김기리였다면 머리가 하얘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13년 동안 불량, 고객 클레임, 협력사 문제, 재고 격리, 원인 분석, 대책서, 임원 보고를 수도 없이 겪었다.‘고작 이거?’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팀장님. 현재 확보된 자료부터 먼저 확인해서 보고 양식을 만들어놓겠습니다. 현황하고 발생수량, 재고, 원인추정, 임시조치, 향후계획까지 틀을 잡아놓고 내려가서 현물만 확인하면 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게 해놓겠습니다.”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할 수 있겠어?”
“해보겠습니다. 일요일 오전까지는 자료 공유드리겠습니다.”
“그래. 내려올 때 안전운전하고.”
“네, 팀장님.”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는 회식, 인사, 눈치로 점수를 땄다면 이번에는 진짜 업무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
“13년 뒤라면 AI로 만들 텐데.”
하지만 지금은 2013년.
그런 건 없다.‘AI는 없어도 나는 있잖아.’
13년 동안 이런 보고서를 수백 번은 만든 내가.
어떤 문구를 박팀장이 좋아하는지, 어떤 순서로 자료를 배치해야 질문이 덜 나오는지,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미래기술보다 지금 더 쓸모 있는 건 13년짜리 경험이었다.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미연을 만나러 나갔다.***
겨울 바닷가.
미연은 해변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기리 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잠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강릉에는 왜 왔는지, 친구와는 언제부터 알았는지, 회사생활은 어떤지.그러다 미연이 물었다.
“근데 왜 그때 저한테 번호 물어보셨어요?”
예전의 나라면 애매하게 웃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첫눈에 반해서요.”
미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진짜예요.”
“저를 처음 봤는데요?”
“처음 봐도 예쁜 건 알 수 있잖아요.”
미연이 웃었다.
“그런 말 자주 하시죠?”
“아뇨. 아무한테나 번호도 안 물어봅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기분 좋을 때 어떻게 웃는지, 힘들 때 어떤 말을 해줬는지 안다.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할 수는 없다.‘미래에서 당신을 만나봤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첫 데이트가 상담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다음 주에는 제대로 맛있는 거 먹어요.”
“뭐 먹을 건데요?”
“한식 좋아하시죠?”
미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
또.“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느낌이요.”
미연이 웃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다음 주에 제가 맛있는 집 찾아놓겠습니다.”
“기대할게요.”
바닷바람에 미연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첫 번째 삶에서는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렇게 어렵게 했을까.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고, 보고 싶으면 보자고 하면 되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됐는데.이번에는 그러지 말자.
회사에서도, 사람에게도, 사랑에서도.***
숙소로 돌아오니 동팔이는 이미 침대에서 뻗어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을 꺼냈다.동팔이가 눈을 떴다.
“뭐 해……?”
“일.”
“미쳤냐?”
“자.”
“놀러 와서 일해?”
“직장인의 숙명이다.”
“난 절대 저렇게 안 살아야지…….”
동팔이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놀러 갈 때도 노트북을 챙기는 습관.
13년 동안 언제 회사에서 전화가 올지 몰라 몸에 밴 노이로제 같은 습관이었다.나는 파일을 열었다.
1. 문제 발생 개요
2. 대상 제품 및 발생수량 3. 재고 현황 4. 원인 추정 5. 임시 조치사항 6. 추가 확인계획 7. 재발방지대책손이 멈추지 않았다.
표를 만들고, 박팀장이 좋아하던 구성으로 제목을 배치하고, 사진과 현물 결과가 들어갈 위치를 만들고, 수량표와 일정표, 담당자 칸까지 빈칸으로 잡았다.이미 확보된 자료는 먼저 넣었다.
“이 정도면 회사 내려가서 현황만 확인하면 끝인데?”
예전의 나는 보고서 하나에 밤새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13년 차 주임이 신입사원 몸에 들어왔다.
고작 보고서 한 장에 막힐 리가 없었다.***
새벽.
술기운도 거의 가셨다.나는 동팔이를 깨웠다.
“야. 가자.”
“……어딜.”
“집.”
동팔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뭐? 2박 3일이라며.”
“다음에.”
“너 다음에 보자 하면 기약 없는 거라며.”
이 자식, 그걸 기억했네.
“그럼 약속한다. 다음에는 더 좋은 데 간다.”
“어디.”
“해외.”
“네가 돈 내?”
“그래.”
“비행기도?”
“그래.”
잠시 침묵.
“씻고 올게.”
역시 단순하다.
***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었다.
조파트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김사원. 진짜 바로 왔네.”
“상황부터 보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제품 확인.
불량 위치. 발생 수량. 재고 현황. 관련 LOT. 공정 이력.이미 전날 만들어놓은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만 채우면 됐다.
몇 시간 뒤 자료가 완성됐다.
“팀장님. 현황 정리했습니다.”
박팀장은 아무 말 없이 첫 장부터 넘겼다.
한 장.
두 장. 세 장.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박팀장이 나를 올려다봤다.
“김사원. 이거 자네가 만들었어?”
“네.”
“혼자?”
“기존 자료 참고해서 정리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13년 동안 참고했으니까.박팀장이 다시 자료를 넘겼다.
“원인 부분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까 표현 조금 약하게 하고. 재고수량은 정상하고 의심품 분리해서 보여줘. 그리고 첫 장에 임시조치 결과 하나 추가하고.”
“네.”
그게 끝이었다.
박정태 팀장의 보고서 검토가 고작 세 가지 수정으로 끝났다.
박팀장이 자료를 내려놓았다.
“잘했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정리 잘했다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식으로 정리할 줄은 몰랐네.”
“감사합니다.”
“주말에 놀러 갔다가 불러서 기분 나빴을 텐데.”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담당하는 업무인데 당연히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팀장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대답.
책임감.“수정해서 나한테 메일로 보내놔. 그다음에는 퇴근해.”
“알겠습니다.”
박팀장이 지나가며 한마디를 던졌다.
“김기리.”
“네.”
“자네 생각보다 괜찮네.”
박팀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속으로 웃었다.
‘됐다.’
첫 번째 삶에서 몇 달이 걸렸던 박팀장의 신뢰.
이번에는 훨씬 빨랐다.***
수정사항을 모두 반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첫 번째 삶에서는 회사가 나를 끌고 다녔다.
이번에는 내가 회사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다음 주 미연과의 약속.“한식이라…….”
검색창을 열었다.
조용하고 분위기 좋고 음식도 괜찮은 곳. 첫 데이트라 너무 비싸지는 않으면서 성의 없어 보이지 않는 곳.“보고서보다 이게 어렵네.”
그때 문자가 왔다.
미연 : 강릉에서 잠깐 봐서 좋았어요ㅎㅎ 다음 주 기대할게요 :)
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웃었다.
회사 점수 상승.
연애 점수 상승. 친구와의 오래된 오해 해결.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첫 번째 인생과 조금씩 다른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몰랐다.
박정태 팀장의 입에서 나온 ‘김기리, 생각보다 괜찮네’라는 한마디가 곧 장성호 과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월요일.주말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보고는 무사히 끝났다.다행히 임원 보고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박정태 팀장은 아침 회의를 마치며 말했다.“주말에 다들 고생했어. 특히 김사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고생 많았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쏠렸다.“아닙니다, 팀장님.”별것 아닌 한마디.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이런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다.박정태.이 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그 사람이 공개적으로 신입사원을 칭찬했다.13년 전의 나는 몰랐다.그저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다.천만의 말씀.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내가 일을 잘한다고 알고 있느냐도 중요하다.‘시작은 좋네.’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돈.***통장 잔액을 확인한 나는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다.“……하.”적다.너무 적다.사회초년생.월급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귀엽다.자취방 월세, 관리비, 통신비, 식비, 보험, 각종 생활비.다 빼면 얼마 남지 않는다.그리고 이 시절의 나는 돈을 받으면 받는 대로 썼다.친구 만나면 내가 사고, 술 먹으면 내가 계산했다.대기업 들어갔다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야, 내가 살게.’그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나보다 집안 좋은 녀석도 있었고 부모님 집에서 살며 월세도 안 내는 친구도 있었는데, 자취하던 내가 밥을 샀다.왜?대기업 다니니까.“가스라이팅 제대로 당했네.”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다.내가 스스로 했다.이번에는 안 한다.친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하지만 내 미래를 깎아가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13년을 살아보니 안다.밥을 백 번 산다고 남는 친구가 있고, 한 번도 사지 않아도 끝까지 남는 친구가 있다.반대로 내가 계속 베풀 때만 옆에 있는 사람도 있다.이번에는 구분한다.쓸 곳에는 쓰고, 모을 돈은 모은다.“일단 종잣돈부터.”큰 투자 기회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나는 메모장을 열었다.월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박정태 팀장.나는 잠깐 미연의 메시지를 바라봤다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팀장님. 김기리입니다.”“김사원, 지금 어디야?”“강릉에 와 있습니다.”“강릉?”“친구와 여행을 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박팀장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제품 결함이 하나 발생했어. 월요일 아침에 바로 보고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현황하고 원인 추정, 재고 상황, 대응계획까지 정리해야 돼.”예전의 김기리였다면 머리가 하얘졌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13년 동안 불량, 고객 클레임, 협력사 문제, 재고 격리, 원인 분석, 대책서, 임원 보고를 수도 없이 겪었다.‘고작 이거?’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팀장님. 현재 확보된 자료부터 먼저 확인해서 보고 양식을 만들어놓겠습니다. 현황하고 발생수량, 재고, 원인추정, 임시조치, 향후계획까지 틀을 잡아놓고 내려가서 현물만 확인하면 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게 해놓겠습니다.”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할 수 있겠어?”“해보겠습니다. 일요일 오전까지는 자료 공유드리겠습니다.”“그래. 내려올 때 안전운전하고.”“네, 팀장님.”전화를 끊었다.지금까지는 회식, 인사, 눈치로 점수를 땄다면 이번에는 진짜 업무다.그런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13년 뒤라면 AI로 만들 텐데.”하지만 지금은 2013년.그런 건 없다.‘AI는 없어도 나는 있잖아.’13년 동안 이런 보고서를 수백 번은 만든 내가.어떤 문구를 박팀장이 좋아하는지, 어떤 순서로 자료를 배치해야 질문이 덜 나오는지,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미래기술보다 지금 더 쓸모 있는 건 13년짜리 경험이었다.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미연을 만나러 나갔다.***겨울 바닷가.미연은 해변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기리 씨.”“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잠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강릉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차창 밖으로 겨울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조수석에 앉은 동팔이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이 없었다.휴대전화를 보고, 잠깐 자고, 창밖을 보고, 또 휴대전화를 본다.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슬쩍 녀석을 쳐다봤다.‘그래. 이때는 진짜 이랬지.’서른 중후반이 되어서는 같이 해외여행도 다녔다.호텔에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의 동팔이는 달랐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 하나를 세워놓고 사는 것 같았다.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야, 동팔아.”“왜?”“너 나 친구로 생각은 하냐?”동팔이가 나를 쳐다봤다.“뭐…… 그렇지?”“뭐 그렇지는 뭐 그렇지야.”“그럼 뭐라고 해.”“근데 넌 친구한테 왜 이렇게 벽을 치냐?”동팔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내가 뭘.”“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하고, 그냥 전화했다고 하면 끊는다고 하고.”“할 말 없잖아.”“친구끼리는 할 말 없어도 전화하는 거야.”“왜?”“…….”나는 할 말을 잃었다.“야. 친구끼리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동팔이가 잠시 침묵했다.그러더니 툭 내뱉었다.“너도 예전에 장난쳤잖아.”“뭐?”“여자 소개.”순간 기억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아.그 사건.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동팔이에게 여자 한 명을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정확히는 지인의 지인.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문제는 나중에 알게 됐다.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심지어 동팔이에게 돈까지 빌려달라고 했었다.나는 황당해서 동팔이에게 말했다.‘야, 나도 몰랐어.’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그런데 동팔이는 몇 년 동안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를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설마 너 아직도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 소개해준 거라고 생각하냐?”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야.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그때 네가 웃었잖아.”“웃었
“여보세요?”김동팔.고등학교 친구.그리고 지금은 아직 간호학과 학생이다.“야, 동팔아.”“왜 전화했어?”……그래.이 말투였다.“어. 그냥 해봤지.”“그럼 끊는다.”“야!”“왜?”“왜 바로 끊어?”“할 말 없잖아.”맞다.이게 김동팔이었다.“야, 뭐 하냐?”“그냥.”“오늘 뭐 할 건데?”“몰라.”“밥은?”“먹겠지.”대화가 안 된다.‘몰라.’‘피곤해.’‘바빠.’‘내가 알아서 뭐 하게.’‘너랑 상관없어.’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인간.지금 생각하면 그게 단순히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동팔이는 학창 시절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사람을 믿었다가 상처받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적이 되는 경험을 반복했다.가까워지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그때의 나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그저 답답하다고만 생각했다.“야. 오늘 시간 되냐?”“왜?”“한번 보자.”“귀찮아.”“밥 사줄게.”“다음에 보자.”김동팔의 ‘다음에 보자’는 약속이 아니다.번역하면 ‘당분간 볼 생각 없음’이다.나는 바로 승부수를 던졌다.“뷔페 사준다.”잠깐 조용해졌다.“……무슨 뷔페?”‘걸렸다.’“고기뷔페.”“어디?”나는 웃었다.“너 진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뭐가.”“아니다.”잠시 고민하던 동팔이가 말했다.“그럼…… 갈게.”역시 사람을 움직이려면 정확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특히 김동팔은.***저녁.고기뷔페.내 앞의 스물여섯 살 김동팔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조금 통통했다.아니, 많이 통통했다.나는 녀석의 배를 슬쩍 봤다.“야. 너 살 좀 빼라.”“내가 왜?”“건강해야지.”“건강한데.”“여자친구는 안 만들 거야?”“귀찮아.”“결혼은?”“몰라.”“돈은?”“없어.”“주식은?”“관심 없어.”“부동산은?”“그걸 내가 왜 알아야 돼?”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 인생에 관심이 있긴 하냐?”동팔이는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살아지겠지.
금요일 저녁.SG그룹 인근의 한 삼겹살집.문을 열자 긴 테이블 두 개와 스무 명 가까운 팀원들이 보였다.“기리야! 여기 앉아!”이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네, 과장님!”나는 막내 자리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13년 전의 나는 이 자리에서 엄청나게 긴장했다.누가 술잔을 주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줄 알았고, 삼겹살을 구우라고 하면 새까맣게 태웠고, 소주도 맥주도 주는 대로 마셨다.그 결과.화장실.변기.기절.그리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첫 회식에서 뻗은 놈’이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나는 집게를 들었다.삼겹살을 올리고 핏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린 뒤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었다.마늘은 가장자리, 김치는 기름 흐르는 방향, 버섯은 타지 않게 옆쪽.이 과장이 감탄했다.“야, 기리야. 너 고기 좀 구워봤냐?”“아버지 따라 고깃집을 좀 다녔습니다.”거짓말이다.회사 따라 다녔다.13년 동안.“이야. 신입이 센스가 있네.”‘1점.’회사생활은 일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었다.특히 이 시절에는 회식, 인사, 눈치, 술자리, 리액션이 생각보다 컸다.잠시 후 박정태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자. 오늘 신입도 들어왔고, 새해도 시작됐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네, 팀장님!”“올해도 우리 팀 사고 없이 잘해봅시다.”그러다 갑자기 내 쪽을 바라봤다.“기리.”“네!”“신입 들어왔으니까 건배사 한번 해봐.”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13년 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하여!’라고 끝냈다.하지만 이번에는 수많은 회식과 인터넷에서 쌓인 건배사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회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좋은 회사는 건물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2화. 두 번째 첫 출근2013년 1월 16일.SG그룹 입사 첫날.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만 바라봤다.2013년 1월 16일.화면을 껐다.다시 켰다.여전히 2013년이었다.“……말도 안 되는데.”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달력을 확인했다.2013년 1월.책상 위에는 낯익은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몰라 볼을 세게 꼬집었다.“아악!”아프다.확실히 아팠다.꿈에서 느끼는 어설픈 통증이 아니었다.“꿈은 아닌 것 같고…….”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그대로 굳었다.“미친.”거울 속 남자는 서른아홉 살의 내가 아니었다.1눈 밑에 달라붙어 있던 피로가 사라졌다.잔주름도 없다.술과 야근에 찌든 얼굴도 아니었다.스물여섯.처음 SG그룹에 입사했을 때의 김기리였다.나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손가락 사이로 빽빽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와…….”감탄이 절로 나왔다.“이때는 머리도 많았네.”잠깐 감동했다.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다.“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나는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가장 먼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뚜르르르.몇 번의 신호음 뒤,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소리가 젊었다.기억 속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엄마?”“왜? 출근 준비 안 하고 뭐 하니?”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였다.2정말로.13년 전의 엄마.“엄마.”“왜 그래?”“그냥…….”목이 이상하게 잠겼다.사고가 나기 전날 밤.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나는 받지 않았다.진급도 못 했다.결혼도 못 했다.주식은 몇 년째 처박혀 있었다.괜히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가족들 전화조차 피했다.그런데 지금.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그냥 전화해봤어.”엄마가 웃었다.“얘가 오늘 이상하네. 첫 출근이라 긴장돼?”“응.”나도 웃었다.“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