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
박정태 팀장.나는 잠깐 미연의 메시지를 바라봤다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팀장님. 김기리입니다.”
“김사원, 지금 어디야?”
“강릉에 와 있습니다.”
“강릉?”
“친구와 여행을 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박팀장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
“제품 결함이 하나 발생했어. 월요일 아침에 바로 보고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현황하고 원인 추정, 재고 상황, 대응계획까지 정리해야 돼.”
예전의 김기리였다면 머리가 하얘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13년 동안 불량, 고객 클레임, 협력사 문제, 재고 격리, 원인 분석, 대책서, 임원 보고를 수도 없이 겪었다.‘고작 이거?’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팀장님. 현재 확보된 자료부터 먼저 확인해서 보고 양식을 만들어놓겠습니다. 현황하고 발생수량, 재고, 원인추정, 임시조치, 향후계획까지 틀을 잡아놓고 내려가서 현물만 확인하면 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게 해놓겠습니다.”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할 수 있겠어?”
“해보겠습니다. 일요일 오전까지는 자료 공유드리겠습니다.”
“그래. 내려올 때 안전운전하고.”
“네, 팀장님.”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는 회식, 인사, 눈치로 점수를 땄다면 이번에는 진짜 업무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
“13년 뒤라면 AI로 만들 텐데.”
하지만 지금은 2013년.
그런 건 없다.‘AI는 없어도 나는 있잖아.’
13년 동안 이런 보고서를 수백 번은 만든 내가.
어떤 문구를 박팀장이 좋아하는지, 어떤 순서로 자료를 배치해야 질문이 덜 나오는지,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미래기술보다 지금 더 쓸모 있는 건 13년짜리 경험이었다.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미연을 만나러 나갔다.***
겨울 바닷가.
미연은 해변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기리 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잠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강릉에는 왜 왔는지, 친구와는 언제부터 알았는지, 회사생활은 어떤지.그러다 미연이 물었다.
“근데 왜 그때 저한테 번호 물어보셨어요?”
예전의 나라면 애매하게 웃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첫눈에 반해서요.”
미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진짜예요.”
“저를 처음 봤는데요?”
“처음 봐도 예쁜 건 알 수 있잖아요.”
미연이 웃었다.
“그런 말 자주 하시죠?”
“아뇨. 아무한테나 번호도 안 물어봅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기분 좋을 때 어떻게 웃는지, 힘들 때 어떤 말을 해줬는지 안다.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할 수는 없다.‘미래에서 당신을 만나봤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첫 데이트가 상담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다음 주에는 제대로 맛있는 거 먹어요.”
“뭐 먹을 건데요?”
“한식 좋아하시죠?”
미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
또.“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느낌이요.”
미연이 웃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다음 주에 제가 맛있는 집 찾아놓겠습니다.”
“기대할게요.”
바닷바람에 미연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첫 번째 삶에서는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렇게 어렵게 했을까.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고, 보고 싶으면 보자고 하면 되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됐는데.이번에는 그러지 말자.
회사에서도, 사람에게도, 사랑에서도.***
숙소로 돌아오니 동팔이는 이미 침대에서 뻗어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을 꺼냈다.동팔이가 눈을 떴다.
“뭐 해……?”
“일.”
“미쳤냐?”
“자.”
“놀러 와서 일해?”
“직장인의 숙명이다.”
“난 절대 저렇게 안 살아야지…….”
동팔이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놀러 갈 때도 노트북을 챙기는 습관.
13년 동안 언제 회사에서 전화가 올지 몰라 몸에 밴 노이로제 같은 습관이었다.나는 파일을 열었다.
1. 문제 발생 개요
2. 대상 제품 및 발생수량 3. 재고 현황 4. 원인 추정 5. 임시 조치사항 6. 추가 확인계획 7. 재발방지대책손이 멈추지 않았다.
표를 만들고, 박팀장이 좋아하던 구성으로 제목을 배치하고, 사진과 현물 결과가 들어갈 위치를 만들고, 수량표와 일정표, 담당자 칸까지 빈칸으로 잡았다.이미 확보된 자료는 먼저 넣었다.
“이 정도면 회사 내려가서 현황만 확인하면 끝인데?”
예전의 나는 보고서 하나에 밤새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13년 차 주임이 신입사원 몸에 들어왔다.
고작 보고서 한 장에 막힐 리가 없었다.***
새벽.
술기운도 거의 가셨다.나는 동팔이를 깨웠다.
“야. 가자.”
“……어딜.”
“집.”
동팔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뭐? 2박 3일이라며.”
“다음에.”
“너 다음에 보자 하면 기약 없는 거라며.”
이 자식, 그걸 기억했네.
“그럼 약속한다. 다음에는 더 좋은 데 간다.”
“어디.”
“해외.”
“네가 돈 내?”
“그래.”
“비행기도?”
“그래.”
잠시 침묵.
“씻고 올게.”
역시 단순하다.
***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었다.
조파트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김사원. 진짜 바로 왔네.”
“상황부터 보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제품 확인.
불량 위치. 발생 수량. 재고 현황. 관련 LOT. 공정 이력.이미 전날 만들어놓은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만 채우면 됐다.
몇 시간 뒤 자료가 완성됐다.
“팀장님. 현황 정리했습니다.”
박팀장은 아무 말 없이 첫 장부터 넘겼다.
한 장.
두 장. 세 장.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박팀장이 나를 올려다봤다.
“김사원. 이거 자네가 만들었어?”
“네.”
“혼자?”
“기존 자료 참고해서 정리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13년 동안 참고했으니까.박팀장이 다시 자료를 넘겼다.
“원인 부분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까 표현 조금 약하게 하고. 재고수량은 정상하고 의심품 분리해서 보여줘. 그리고 첫 장에 임시조치 결과 하나 추가하고.”
“네.”
그게 끝이었다.
박정태 팀장의 보고서 검토가 고작 세 가지 수정으로 끝났다.
박팀장이 자료를 내려놓았다.
“잘했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정리 잘했다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식으로 정리할 줄은 몰랐네.”
“감사합니다.”
“주말에 놀러 갔다가 불러서 기분 나빴을 텐데.”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담당하는 업무인데 당연히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팀장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대답.
책임감.“수정해서 나한테 메일로 보내놔. 그다음에는 퇴근해.”
“알겠습니다.”
박팀장이 지나가며 한마디를 던졌다.
“김기리.”
“네.”
“자네 생각보다 괜찮네.”
박팀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속으로 웃었다.
‘됐다.’
첫 번째 삶에서 몇 달이 걸렸던 박팀장의 신뢰.
이번에는 훨씬 빨랐다.***
수정사항을 모두 반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첫 번째 삶에서는 회사가 나를 끌고 다녔다.
이번에는 내가 회사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다음 주 미연과의 약속.“한식이라…….”
검색창을 열었다.
조용하고 분위기 좋고 음식도 괜찮은 곳. 첫 데이트라 너무 비싸지는 않으면서 성의 없어 보이지 않는 곳.“보고서보다 이게 어렵네.”
그때 문자가 왔다.
미연 : 강릉에서 잠깐 봐서 좋았어요ㅎㅎ 다음 주 기대할게요 :)
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웃었다.
회사 점수 상승.
연애 점수 상승. 친구와의 오래된 오해 해결.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첫 번째 인생과 조금씩 다른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몰랐다.
박정태 팀장의 입에서 나온 ‘김기리, 생각보다 괜찮네’라는 한마디가 곧 장성호 과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