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현판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 2화. 두 번째 첫 출근

Share

2화. 두 번째 첫 출근

Author: STARGIL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8 23:38:50

2화. 두 번째 첫 출근

2013년 1월 16일.

SG그룹 입사 첫날.

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만 바라봤다.

2013년 1월 16일.

화면을 껐다.

다시 켰다.

여전히 2013년이었다.

“……말도 안 되는데.”

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달력을 확인했다.

2013년 1월.

책상 위에는 낯익은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몰라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악!”

아프다.

확실히 아팠다.

꿈에서 느끼는 어설픈 통증이 아니었다.

“꿈은 아닌 것 같고…….”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미친.”

거울 속 남자는 서른아홉 살의 내가 아니었다.

1눈 밑에 달라붙어 있던 피로가 사라졌다.

잔주름도 없다.

술과 야근에 찌든 얼굴도 아니었다.

스물여섯.

처음 SG그룹에 입사했을 때의 김기리였다.

나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빽빽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때는 머리도 많았네.”

잠깐 감동했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다.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뒤,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젊었다.

기억 속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

“……엄마?”

“왜? 출근 준비 안 하고 뭐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였다.

2정말로.

13년 전의 엄마.

“엄마.”

“왜 그래?”

“그냥…….”

목이 이상하게 잠겼다.

사고가 나기 전날 밤.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진급도 못 했다.

결혼도 못 했다.

주식은 몇 년째 처박혀 있었다.

괜히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가족들 전화조차 피했다.

그런데 지금.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

“그냥 전화해봤어.”

엄마가 웃었다.

“얘가 오늘 이상하네. 첫 출근이라 긴장돼?”

“응.”

나도 웃었다.

“조금.”

“긴장하지 말고. 회사 가면 인사 잘하고, 모르는 거 있으면 잘 물어보고.”

“응.”

“그리고 밥 잘 챙겨 먹어. 회사 들어갔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3무리하지 말라니.

앞으로의 나는 휴가 중에도 전화를 받게 된다.

주말에도 출근한다.

새벽까지 일을 하고.

심지어 자다가 회사 전화가 울리는 꿈을 꾸게 된다.

엄마는 그걸 아직 모른다.

“엄마.”

“응?”

“건강해야 돼.”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싱겁긴. 얼른 준비해. 첫날부터 늦으면 큰일이다.”

“알겠어.”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돌아왔는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사고가 정말 있었던 건지.

혹시 내가 죽은 건 아닌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지금 살아 있었다.

그것도 13년 전의 몸으로.

“영화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4헛웃음이 나왔다.

회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꼭 며칠씩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겪어보니 의외였다.

생각보다 빨리 받아들여졌다.

어차피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고민해봤자 소용없었다.

꿈이면 꿈인 대로.

환상이면 환상인 대로.

다시 주어진 삶이라면.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자.

나는 거울 속의 스물여섯 살 김기리를 바라봤다.

“좋아.”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다시 해보자.”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성호.

13년 뒤.

나를 회식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깎아내리던 그 팀장.

내 회사생활을 끊임없이 꼬이게 만든 남자.

“장성호…….”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2013년이면 장성호는 아직 팀장이 아니었다.

아마 과장이었을 것이다.

5그리고 나와 크게 부딪친 것도 아직 한참 뒤였다.

“대충 3년 뒤였나.”

이 시절의 장성호는 오히려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능글맞았다.

농담도 잘했다.

후배들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을 잘 걸어주는 선배였다.

술자리 분위기도 잘 띄웠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좋아했다.

장성호는 종종 내게 말했다.

‘기리야. 회사생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때는 그 말이 꽤 멋있게 들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인간이 얼마나 영악한지.

자기 일은 밑으로 떠넘겼다.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가 책임졌다.

성과가 나오면 본인이 가져갔다.

임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부하직원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아랫사람의 작은 실수는 끝까지 기억했다.

반면 자기 실수는 신기할 정도로 다른 사람 책임이 됐다.

무엇보다 사내정치에 능했다.

누가 어느 임원 라인인지.

누가 누구와 술을 마시는지.

누가 다음 인사에서 올라갈지.

그런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다.

6회사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장성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질색했다.

실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정치꾼이라고 욕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회사는 친목회가 아니니까.

결국 성과를 내는 사람이 인정받는 게 맞는 거 아닐까.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안다.

성과를 내는 것과.

남의 성과를 빼앗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는 걸.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과장이구나.”

급할 건 없었다.

우리 사이가 틀어진 사건은 3년 뒤다.

지금부터 장성호를 공격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는 지켜볼 수 있으니까.

장성호가 어떻게 사람을 이용하는지.

어떤 라인을 타는지.

누구에게 붙고.

누구를 버리는지.

13년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7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장성호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날 신입사원이.

13년 뒤의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재밌겠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 첫 사수.

여자 선배였다.

사람은 정말 좋았다.

문제는 내가 입사하고 한 달쯤 뒤 결혼 때문에 퇴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수인계는…….

“정말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가셨지.”

웃음이 나왔다.

당시의 나는 죽는 줄 알았다.

전표 하나 처리하는 법도 몰랐다.

시스템 입력 하나에도 진땀을 뺐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13년을 굴렀다.

그 시절 업무 따위는 눈 감고도 한다.

“오히려 너무 잘하면 문제겠네.”

신입사원이 업무 시스템을 능숙하게 다룬다?

그건 그것대로 수상하다.

적당히 헤매야 한다.

8모르는 척도 해야 한다.

딱 이 정도면 좋다.

‘신입인데 눈치가 빠르네.’

‘얘는 좀 센스가 있네.’

그 정도.

그때였다.

문득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미연.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

전 여자친구.

지금 생각하면 좋은 여자였다.

착했고.

순수했고.

무엇보다 힘들 때 내 편을 들어줬다.

그런데 스물여섯 살의 김기리는 그걸 몰랐다.

대기업에 들어갔겠다.

나이도 젊었겠다.

괜히 자신감이 넘쳤다.

이 여자도 한번 만나보고 싶고.

저 여자도 궁금했다.

괜히 미연과 다른 여자들을 비교했다.

간도 봤다.

결국 헤어졌다.

그 뒤에도 몇 번 연애를 했다.

9하지만 서른아홉이 되어서 돌이켜보니.

“미연이만 한 여자도 별로 없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아니.

많이 아쉬웠다.

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그러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다시 봤다.

스물여섯.

젊다.

아주 젊다.

“……그래도.”

나는 턱을 만졌다.

“이번엔 다른 여자들도 좀 만나봐야 하지 않나?”

결국 피식 웃음이 터졌다.

“사람 성격 어디 안 가네.”

회귀했다고 갑자기 성인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미연은 나중에 생각하자.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다짐했다.

이번 생은 다르게 산다.

돈.

연애.

회사생활.

전부 잡는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일단 돈.”

102013년.

돈 벌 기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바로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아.”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로또 번호라도 외워놓을걸.”

회귀물 주인공들은 대체 로또 번호를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나는 지난주 번호도 모른다.

비트코인?

오른다는 건 기억난다.

그런데 정확히 언제 사고 언제 팔아야 하는지는 희미하다.

주식?

13년 동안 그렇게 주식을 했는데.

기억나는 종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처참하게 물렸던 종목뿐이다.

“진짜 쓸모없는 기억력이네.”

그래도 괜찮았다.

큰 흐름은 알고 있다.

어떤 산업이 성장했는지.

어떤 회사가 뜨는지.

부동산이 언제 크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SG그룹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은 상당히 많이 기억한다.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정장을 꺼내 입었다.

넥타이를 맸다.

11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김기리.”

거울 속 스물여섯 살의 내가 나를 바라본다.

“두 번째 회사생활이다.”

그러다 한 사람이 더 떠올랐다.

“아.”

내 얼굴이 굳었다.

현재 팀장.

박정태.

“하필 이때 팀장이 그 인간이었지.”

장성호보다 훨씬 무서웠던 사람.

직원들 사이 별명은 하나였다.

호랑이 박팀장.

겉으로만 보면 점잖았다.

말투도 차분했다.

가끔 웃으면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업무만 시작되면 사람이 달라졌다.

철저한 군대식 문화.

출근은 상사보다 빨라야 한다.

밥은 빨리 먹어야 한다.

보고서는 간결해야 한다.

오타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사가 남아 있는데 부하가 먼저 퇴근하는 것도 싫어했다.

무엇보다 회식을 좋아했다.

12정말 지독하게 좋아했다.

예전의 나는 박팀장만 보면 얼어붙었다.

그 앞에서 보고하려고 하면 말이 꼬였다.

질문 하나만 들어와도 머리가 하얘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공략법이 너무 단순하잖아.”

나는 웃었다.

인사 크게.

출근 빠르게.

보고 정확하게.

일 깔끔하게.

회식 참석.

밥 빨리 먹기.

술잔 비면 채우기.

싫다고 티 내지 않기.

군대식 인간에게는 군대식으로 맞춰주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장성호가 유독 잘 따르던 선배.

바로 박정태 팀장이었다.

“그래.”

퍼즐이 조금씩 맞아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내 회사생활은 장성호와 크게 싸운 3년 뒤부터 꼬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이때부터.

아주 조금씩.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던 걸지도 모른다.

13그렇다면 이번에는.

시작부터 바꾸면 된다.

SG그룹 정문 앞.

나는 한참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13년 동안 거의 매일 드나들었던 곳.

지긋지긋했던 곳.

꿈에서까지 나왔던 곳.

그런데 다시 보니 묘하게 반가웠다.

“진짜 돌아왔네.”

사원증을 단말기에 댔다.

삑.

출입문이 열렸다.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복도.

구내식당으로 이어지는 통로.

벽에 붙어 있던 옛 회사 슬로건.

하나하나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에는 그렇게 싫었던 것들이 지금은 조금 그리워 보였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나를 바라봤다.

14“어? 기리 씨 왔어요?”

내 사수였다.

젊었다.

정말 젊었다.

나는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13년 뒤에는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사이가 됐던 사람.

그런데 지금은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사수가 웃었다.

“아침부터 목소리 좋네요.”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과장.

조 파트장.

잊고 있었던 얼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이 과장님.’

그땐 잔소리가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 보니 반갑다.

그리고 조현석 파트장.

내 시선이 잠시 멈췄다.

‘조 파트장님…….’

몇 년 뒤.

조 파트장은 암 진단을 받는다.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고.

회사에서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15그저 회사 선배였다.

잔소리하는 파트장.

일을 시키는 상사.

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건강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때는 이렇게 건강했었구나.’

사람들은 회사 안에서 서로를 미워한다.

누가 평가를 잘 받았는지.

누가 승진했는지.

누가 누구 라인을 탔는지.

그런 걸로 질투하고.

싸우고.

상처받는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13년의 시간을 한 번 살아보고 돌아오니.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사람은 결국 늙는다.

아프기도 한다.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회사에 목숨을 걸었을까.

“기리 씨?”

사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바로 그때.

16사무실 안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기리.”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개를 돌렸다.

박정태 팀장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저 얼굴만 보고도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13년 동안 팀장도 상대했다.

임원도 상대했다.

고객사도.

협력사도.

화난 사람도.

말도 안 통하는 사람도.

수없이 상대했다.

박팀장 정도면?

‘할 만하지.’

나는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배에 힘을 줬다.

“반갑습니다, 팀장님!”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울렸다.

주변 사람들이 슬쩍 나를 쳐다봤다.

박팀장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잠시 후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기리 왔는가.”

“네, 팀장님!”

17박팀장이 피식 웃었다.

“목소리 하나는 좋네.”

‘좋아.’

나는 속으로 웃었다.

첫 점수.

회귀 2회차.

이 정도는 쉽다.

박팀장이 손짓했다.

“이따가 시간 되면 차 한잔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아.’

박팀장은 차를 무척 좋아했다.

녹차.

보이차.

둥굴레차.

이름도 모르는 차까지.

뭔 차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지.

그때는 팀장이 불러서 차를 마시자고 하면 괜히 긴장부터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박팀장에게 차 한잔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시간이 아니다.

사람을 관찰하는 시간이다.

말투.

태도.

성격.

18신입사원이 어떤 인간인지 슬쩍 떠보는 자리.

‘좋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맞춰주지.’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회식.

아마 오늘이었나.

아니면 며칠 뒤였나.

이 시절에는 회식이 너무 많아서 날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첫 회식만큼은 기억난다.

왜냐하면.

“……나 그때 뻗었었지.”

정확히는 처참하게 뻗었다.

신입사원의 패기를 보여주겠답시고 선배들이 주는 술을 전부 받아 마셨다.

소주.

맥주.

폭탄주.

또 소주.

그 결과.

첫 회식에서 화장실을 붙잡고 인생을 반성했다.

다음 날에는 사무실의 웃음거리가 됐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나는 양손을 내려다봤다.

13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식장을 누볐던가.

19소주.

맥주.

폭탄주.

삼겹살.

소고기.

회.

닭갈비.

족발.

수많은 고기와 술을 거치며 내 몸에는 회사원의 기술이 새겨졌다.

고기 굽기.

상사 잔 확인하기.

적절한 타이밍에 물 마시기.

술 센 척하지 않기.

술 취한 척하면서 속도 조절하기.

상사가 했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웃어주기.

완벽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박팀장.’

이번에는 예전의 신입사원 김기리가 아니다.

13년 동안 회식장을 버틴 남자다.

주량 만렙.

고기 굽기 만렙.

눈치 만렙.

그 모든 경험치를 가진 신입사원이.

지금 SG그룹에 다시 입사했다.

20“이번 회사생활…….”

나는 자리로 걸어가며 조용히 웃었다.

“생각보다 재밌겠는데?”

2화 끝

21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7화. 이번에는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월요일.주말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보고는 무사히 끝났다.다행히 임원 보고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박정태 팀장은 아침 회의를 마치며 말했다.“주말에 다들 고생했어. 특히 김사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고생 많았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쏠렸다.“아닙니다, 팀장님.”별것 아닌 한마디.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이런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다.박정태.이 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그 사람이 공개적으로 신입사원을 칭찬했다.13년 전의 나는 몰랐다.그저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다.천만의 말씀.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내가 일을 잘한다고 알고 있느냐도 중요하다.‘시작은 좋네.’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돈.***통장 잔액을 확인한 나는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다.“……하.”적다.너무 적다.사회초년생.월급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귀엽다.자취방 월세, 관리비, 통신비, 식비, 보험, 각종 생활비.다 빼면 얼마 남지 않는다.그리고 이 시절의 나는 돈을 받으면 받는 대로 썼다.친구 만나면 내가 사고, 술 먹으면 내가 계산했다.대기업 들어갔다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야, 내가 살게.’그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나보다 집안 좋은 녀석도 있었고 부모님 집에서 살며 월세도 안 내는 친구도 있었는데, 자취하던 내가 밥을 샀다.왜?대기업 다니니까.“가스라이팅 제대로 당했네.”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다.내가 스스로 했다.이번에는 안 한다.친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하지만 내 미래를 깎아가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13년을 살아보니 안다.밥을 백 번 산다고 남는 친구가 있고, 한 번도 사지 않아도 끝까지 남는 친구가 있다.반대로 내가 계속 베풀 때만 옆에 있는 사람도 있다.이번에는 구분한다.쓸 곳에는 쓰고, 모을 돈은 모은다.“일단 종잣돈부터.”큰 투자 기회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나는 메모장을 열었다.월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6화. 신입사원의 보고서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박정태 팀장.나는 잠깐 미연의 메시지를 바라봤다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팀장님. 김기리입니다.”“김사원, 지금 어디야?”“강릉에 와 있습니다.”“강릉?”“친구와 여행을 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박팀장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제품 결함이 하나 발생했어. 월요일 아침에 바로 보고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현황하고 원인 추정, 재고 상황, 대응계획까지 정리해야 돼.”예전의 김기리였다면 머리가 하얘졌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13년 동안 불량, 고객 클레임, 협력사 문제, 재고 격리, 원인 분석, 대책서, 임원 보고를 수도 없이 겪었다.‘고작 이거?’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팀장님. 현재 확보된 자료부터 먼저 확인해서 보고 양식을 만들어놓겠습니다. 현황하고 발생수량, 재고, 원인추정, 임시조치, 향후계획까지 틀을 잡아놓고 내려가서 현물만 확인하면 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게 해놓겠습니다.”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할 수 있겠어?”“해보겠습니다. 일요일 오전까지는 자료 공유드리겠습니다.”“그래. 내려올 때 안전운전하고.”“네, 팀장님.”전화를 끊었다.지금까지는 회식, 인사, 눈치로 점수를 땄다면 이번에는 진짜 업무다.그런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13년 뒤라면 AI로 만들 텐데.”하지만 지금은 2013년.그런 건 없다.‘AI는 없어도 나는 있잖아.’13년 동안 이런 보고서를 수백 번은 만든 내가.어떤 문구를 박팀장이 좋아하는지, 어떤 순서로 자료를 배치해야 질문이 덜 나오는지,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미래기술보다 지금 더 쓸모 있는 건 13년짜리 경험이었다.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미연을 만나러 나갔다.***겨울 바닷가.미연은 해변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기리 씨.”“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잠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5화. 과거를 바꾸는 여행

    강릉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차창 밖으로 겨울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조수석에 앉은 동팔이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이 없었다.휴대전화를 보고, 잠깐 자고, 창밖을 보고, 또 휴대전화를 본다.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슬쩍 녀석을 쳐다봤다.‘그래. 이때는 진짜 이랬지.’서른 중후반이 되어서는 같이 해외여행도 다녔다.호텔에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의 동팔이는 달랐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 하나를 세워놓고 사는 것 같았다.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야, 동팔아.”“왜?”“너 나 친구로 생각은 하냐?”동팔이가 나를 쳐다봤다.“뭐…… 그렇지?”“뭐 그렇지는 뭐 그렇지야.”“그럼 뭐라고 해.”“근데 넌 친구한테 왜 이렇게 벽을 치냐?”동팔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내가 뭘.”“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하고, 그냥 전화했다고 하면 끊는다고 하고.”“할 말 없잖아.”“친구끼리는 할 말 없어도 전화하는 거야.”“왜?”“…….”나는 할 말을 잃었다.“야. 친구끼리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동팔이가 잠시 침묵했다.그러더니 툭 내뱉었다.“너도 예전에 장난쳤잖아.”“뭐?”“여자 소개.”순간 기억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아.그 사건.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동팔이에게 여자 한 명을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정확히는 지인의 지인.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문제는 나중에 알게 됐다.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심지어 동팔이에게 돈까지 빌려달라고 했었다.나는 황당해서 동팔이에게 말했다.‘야, 나도 몰랐어.’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그런데 동팔이는 몇 년 동안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를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설마 너 아직도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 소개해준 거라고 생각하냐?”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야.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그때 네가 웃었잖아.”“웃었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4화. 동팔이 계몽 프로젝트

    “여보세요?”김동팔.고등학교 친구.그리고 지금은 아직 간호학과 학생이다.“야, 동팔아.”“왜 전화했어?”……그래.이 말투였다.“어. 그냥 해봤지.”“그럼 끊는다.”“야!”“왜?”“왜 바로 끊어?”“할 말 없잖아.”맞다.이게 김동팔이었다.“야, 뭐 하냐?”“그냥.”“오늘 뭐 할 건데?”“몰라.”“밥은?”“먹겠지.”대화가 안 된다.‘몰라.’‘피곤해.’‘바빠.’‘내가 알아서 뭐 하게.’‘너랑 상관없어.’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인간.지금 생각하면 그게 단순히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동팔이는 학창 시절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사람을 믿었다가 상처받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적이 되는 경험을 반복했다.가까워지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그때의 나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그저 답답하다고만 생각했다.“야. 오늘 시간 되냐?”“왜?”“한번 보자.”“귀찮아.”“밥 사줄게.”“다음에 보자.”김동팔의 ‘다음에 보자’는 약속이 아니다.번역하면 ‘당분간 볼 생각 없음’이다.나는 바로 승부수를 던졌다.“뷔페 사준다.”잠깐 조용해졌다.“……무슨 뷔페?”‘걸렸다.’“고기뷔페.”“어디?”나는 웃었다.“너 진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뭐가.”“아니다.”잠시 고민하던 동팔이가 말했다.“그럼…… 갈게.”역시 사람을 움직이려면 정확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특히 김동팔은.***저녁.고기뷔페.내 앞의 스물여섯 살 김동팔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조금 통통했다.아니, 많이 통통했다.나는 녀석의 배를 슬쩍 봤다.“야. 너 살 좀 빼라.”“내가 왜?”“건강해야지.”“건강한데.”“여자친구는 안 만들 거야?”“귀찮아.”“결혼은?”“몰라.”“돈은?”“없어.”“주식은?”“관심 없어.”“부동산은?”“그걸 내가 왜 알아야 돼?”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너 인생에 관심이 있긴 하냐?”동팔이는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살아지겠지.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3화. 신입사원이 회식을 너무 잘한다

    금요일 저녁.SG그룹 인근의 한 삼겹살집.문을 열자 긴 테이블 두 개와 스무 명 가까운 팀원들이 보였다.“기리야! 여기 앉아!”이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네, 과장님!”나는 막내 자리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13년 전의 나는 이 자리에서 엄청나게 긴장했다.누가 술잔을 주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줄 알았고, 삼겹살을 구우라고 하면 새까맣게 태웠고, 소주도 맥주도 주는 대로 마셨다.그 결과.화장실.변기.기절.그리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첫 회식에서 뻗은 놈’이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나는 집게를 들었다.삼겹살을 올리고 핏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린 뒤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었다.마늘은 가장자리, 김치는 기름 흐르는 방향, 버섯은 타지 않게 옆쪽.이 과장이 감탄했다.“야, 기리야. 너 고기 좀 구워봤냐?”“아버지 따라 고깃집을 좀 다녔습니다.”거짓말이다.회사 따라 다녔다.13년 동안.“이야. 신입이 센스가 있네.”‘1점.’회사생활은 일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었다.특히 이 시절에는 회식, 인사, 눈치, 술자리, 리액션이 생각보다 컸다.잠시 후 박정태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자. 오늘 신입도 들어왔고, 새해도 시작됐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네, 팀장님!”“올해도 우리 팀 사고 없이 잘해봅시다.”그러다 갑자기 내 쪽을 바라봤다.“기리.”“네!”“신입 들어왔으니까 건배사 한번 해봐.”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13년 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하여!’라고 끝냈다.하지만 이번에는 수많은 회식과 인터넷에서 쌓인 건배사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회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좋은 회사는 건물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2화. 두 번째 첫 출근

    2화. 두 번째 첫 출근2013년 1월 16일.SG그룹 입사 첫날.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만 바라봤다.2013년 1월 16일.화면을 껐다.다시 켰다.여전히 2013년이었다.“……말도 안 되는데.”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달력을 확인했다.2013년 1월.책상 위에는 낯익은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몰라 볼을 세게 꼬집었다.“아악!”아프다.확실히 아팠다.꿈에서 느끼는 어설픈 통증이 아니었다.“꿈은 아닌 것 같고…….”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그대로 굳었다.“미친.”거울 속 남자는 서른아홉 살의 내가 아니었다.1눈 밑에 달라붙어 있던 피로가 사라졌다.잔주름도 없다.술과 야근에 찌든 얼굴도 아니었다.스물여섯.처음 SG그룹에 입사했을 때의 김기리였다.나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손가락 사이로 빽빽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와…….”감탄이 절로 나왔다.“이때는 머리도 많았네.”잠깐 감동했다.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다.“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나는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가장 먼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뚜르르르.몇 번의 신호음 뒤,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소리가 젊었다.기억 속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엄마?”“왜? 출근 준비 안 하고 뭐 하니?”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였다.2정말로.13년 전의 엄마.“엄마.”“왜 그래?”“그냥…….”목이 이상하게 잠겼다.사고가 나기 전날 밤.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나는 받지 않았다.진급도 못 했다.결혼도 못 했다.주식은 몇 년째 처박혀 있었다.괜히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가족들 전화조차 피했다.그런데 지금.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그냥 전화해봤어.”엄마가 웃었다.“얘가 오늘 이상하네. 첫 출근이라 긴장돼?”“응.”나도 웃었다.“조금.”“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