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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과거를 바꾸는 여행

Author: STARGIL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0 18:58:37

강릉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차창 밖으로 겨울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

조수석에 앉은 동팔이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이 없었다.

휴대전화를 보고, 잠깐 자고, 창밖을 보고, 또 휴대전화를 본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슬쩍 녀석을 쳐다봤다.

‘그래. 이때는 진짜 이랬지.’

서른 중후반이 되어서는 같이 해외여행도 다녔다.

호텔에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동팔이는 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 하나를 세워놓고 사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야, 동팔아.”

“왜?”

“너 나 친구로 생각은 하냐?”

동팔이가 나를 쳐다봤다.

“뭐…… 그렇지?”

“뭐 그렇지는 뭐 그렇지야.”

“그럼 뭐라고 해.”

“근데 넌 친구한테 왜 이렇게 벽을 치냐?”

동팔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내가 뭘.”

“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하고, 그냥 전화했다고 하면 끊는다고 하고.”

“할 말 없잖아.”

“친구끼리는 할 말 없어도 전화하는 거야.”

“왜?”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야. 친구끼리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동팔이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툭 내뱉었다.

“너도 예전에 장난쳤잖아.”

“뭐?”

“여자 소개.”

순간 기억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아.

그 사건.

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동팔이에게 여자 한 명을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지인의 지인.

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동팔이에게 돈까지 빌려달라고 했었다.

나는 황당해서 동팔이에게 말했다.

‘야, 나도 몰랐어.’

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동팔이는 몇 년 동안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를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너 아직도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 소개해준 거라고 생각하냐?”

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야.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

“그때 네가 웃었잖아.”

“웃었다고?”

“몰랐다고 하면서 그냥 넘어갔잖아.”

그제야 이해됐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몰랐으니까, 실수였으니까, 설명했으니 끝난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팔이에게는 아니었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던 녀석.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상처받았던 녀석에게는 그 일도 또 하나의 배신처럼 남았던 거다.

나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팔아.”

“왜.”

“그건 진짜 아니야.”

동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지인의 지인으로 소개받은 사람이었어. 결혼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할 줄은 더더욱 몰랐어.”

“…….”

“내가 너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동팔이가 나를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

“그리고 앞으로는 아무나 소개 안 해줄게. 다음에는 내가 신원조회 수준으로 검증해서 소개해준다.”

동팔이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해.”

“넌 필요해.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까.”

“너도 없잖아.”

“……그건 인정.”

둘 다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지난 삶에서 나는 동팔이에게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느냐고 했지만 정작 그 벽 하나에는 나도 벽돌 한 장쯤 올려놓고 있었다.

***

늦은 오후.

우리는 강릉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과 함께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짠.

“동팔아.”

“왜.”

“너 간호사 꼭 돼라.”

“하려고 공부하는 거잖아.”

“될 거야.”

“너 아까부터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 온다니까.”

사실 알고 있다.

서른두 살 무렵 동팔이는 결국 간호사가 된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꽤 성실하게 일했다.

나는 술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돈도 모으고.”

“돈은 벌면 모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모인다.”

“또 시작이네.”

“재테크도 해야지.”

“난 주식 그런 거 관심 없어.”

“주식만 재테크냐. 적금도 하고, 자산도 만들고, 나중에 집도 사고.”

“귀찮아.”

“그리고 결혼도 하고.”

“그건 더 귀찮아.”

나는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야!”

동팔이는 태연하게 고기를 먹었다.

“내 인생인데 왜 네가 답답해해?”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를 너무 늦게 시작했고, 그만큼 아쉬워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빨리 움직여.”

“이번에는?”

젠장.

“아니.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거짓말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두 번이다.

나는 동팔이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여행도 자주 가고, 돈도 모으고, 사람도 좀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귀찮다니까.”

“내가 소개해줄게.”

동팔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부녀 말고?”

“이 새끼가.”

둘 다 웃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리도 예전에 있었던 앙금 같은 거 다 풀자. 나도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하고, 너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동팔이는 한동안 술잔만 바라봤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알았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둘 다 잘 살자.”

“그래.”

짠.

지난 삶에서는 몇 년이 지나서야 나눴던 대화를 이번에는 훨씬 일찍 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성공이었다.

“내일 통일전망대 가자.”

“멀지 않아?”

“여행 왔으면 돌아다녀야지. 북쪽도 한번 보고.”

“추울 텐데.”

“젊을 때 다니는 거야.”

동팔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너 요즘 왜 자꾸 아저씨처럼 말하냐?”

“……회사 다니면 늙는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은 이미 부장이다.”

***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걸었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러다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미연이?”

다음 주말에 만나기로 한 미연이었다.

그런데 미연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뭐지? 남자친구? 썸남?’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괜히 서운했다.

동팔이가 그쪽을 보더니 말했다.

“옆에 남자 있는데?”

“나도 보여.”

“남자친구인가 보네.”

“야. 너는 위로라는 걸 모르냐?”

“사실을 말한 건데.”

나는 술기운을 빌려 미연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연락처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

남자친구가 아니었구나.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미연 씨.”

미연이 눈을 크게 떴다.

“어? 기리 씨가 여기 웬일이에요?”

“저 친구랑 여행 왔어요.”

나는 동팔이를 가리키고 슬쩍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친구분이신가요?”

미연이 바로 손을 저었다.

“아뇨, 아뇨. 저도 친구랑 놀러 왔는데 방금 연락처를 물어보셔서요.”

속으로 종이 울렸다.

‘그럼 그렇지.’

“번호 주실 거예요?”

미연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웃었다.

“글쎄요. 저희 다음 주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때 기리 씨 보고 결정하려고요.”

‘나한테도 마음 있는 거 맞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어차피 이렇게 만났는데 오늘 같이 한잔하실래요? 저도 친구랑 있고 미연 씨도 친구분이랑 있으니까.”

“친구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당연하죠.”

“제가 물어보고 톡 드릴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동팔이에게 돌아오자 녀석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남자친구 아니야.”

“다행이네. 근데 너랑도 아직 아무 사이 아니잖아.”

“……너 오늘 말이 많다?”

***

숙소로 돌아와 남자 둘이 호텔방 바닥에 앉아 위스키를 열었다.

한 잔.

두 잔.

동팔이는 말했다.

“근데 너 진짜 요즘 좀 이상하다.”

“뭐가?”

“갑자기 여행 가자고 하지 않나. 평소랑 다르잖아.”

“사람이 철들었나 보지.”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연이었다.

미연 : 친구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요 ㅠㅠ 다음 주에 봐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못 온대?”

“응.”

“아쉽겠네.”

“오히려 다행이지. 어장관리 같은 거 아니었잖아.”

동팔이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다.”

“곧 사귈 거야.”

이번에는 좋으면 좋다고 표현할 생각이다.

미연은 회도 좋아했고, 맛있는 것도 좋아했고, 내가 웬만한 농담을 해도 잘 웃어줬다.

‘이번에는 고백도 빨리 해야겠다.’

그때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회사였다.

조현석 파트장.

“네, 파트장님.”

“김사원. 지금 어디야?”

“강릉입니다.”

“강릉? 팀장님이 자네 찾으신다. 문제가 하나 터졌어.”

아.

이 시절.

주말이고 밤이고 상관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는 회사로 달려와야 했다.

“알겠습니다. 새벽에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동팔이가 물었다.

“회사?”

“응. 새벽에 출발하자.”

“여행 왔는데 회사 가냐?”

“이게 2013년 회사원이다.”

그때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미연.

미연 : 친구는 먼저 자고 있어요. 혹시 아직 안 주무시면 잠깐 바람 쐬러 갈래요?

나는 그대로 굳었다.

회사에서는 새벽에 내려오라고 한다.

박팀장은 나를 찾고 있다.

그런데 13년을 돌아와 다시 만난 미연이 지금 나오라고 한다.

“아…… 인생이 갑자기 바빠졌다.”

“왜?”

“회귀했다고 쉬운 게 아니네.”

“뭐?”

“아니다.”

나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

“바람 좀 쐬고 온다.”

“회사 간다며.”

“새벽에.”

“그럼 어디 가는데?”

“인생 2회차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

“뭔데?”

“연애.”

문을 닫으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박정태 팀장.

내 발걸음이 멈췄다.

미연은 밖에서 기다린다.

박팀장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강릉에서 회사까지는 몇 시간이 걸린다.

“젠장.”

이번 생도 회사와 연애를 동시에 잡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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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7화. 이번에는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월요일.주말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보고는 무사히 끝났다.다행히 임원 보고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박정태 팀장은 아침 회의를 마치며 말했다.“주말에 다들 고생했어. 특히 김사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고생 많았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쏠렸다.“아닙니다, 팀장님.”별것 아닌 한마디.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이런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다.박정태.이 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그 사람이 공개적으로 신입사원을 칭찬했다.13년 전의 나는 몰랐다.그저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다.천만의 말씀.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내가 일을 잘한다고 알고 있느냐도 중요하다.‘시작은 좋네.’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돈.***통장 잔액을 확인한 나는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다.“……하.”적다.너무 적다.사회초년생.월급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귀엽다.자취방 월세, 관리비, 통신비, 식비, 보험, 각종 생활비.다 빼면 얼마 남지 않는다.그리고 이 시절의 나는 돈을 받으면 받는 대로 썼다.친구 만나면 내가 사고, 술 먹으면 내가 계산했다.대기업 들어갔다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야, 내가 살게.’그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나보다 집안 좋은 녀석도 있었고 부모님 집에서 살며 월세도 안 내는 친구도 있었는데, 자취하던 내가 밥을 샀다.왜?대기업 다니니까.“가스라이팅 제대로 당했네.”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다.내가 스스로 했다.이번에는 안 한다.친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하지만 내 미래를 깎아가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13년을 살아보니 안다.밥을 백 번 산다고 남는 친구가 있고, 한 번도 사지 않아도 끝까지 남는 친구가 있다.반대로 내가 계속 베풀 때만 옆에 있는 사람도 있다.이번에는 구분한다.쓸 곳에는 쓰고, 모을 돈은 모은다.“일단 종잣돈부터.”큰 투자 기회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나는 메모장을 열었다.월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6화. 신입사원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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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3화. 신입사원이 회식을 너무 잘한다

    금요일 저녁.SG그룹 인근의 한 삼겹살집.문을 열자 긴 테이블 두 개와 스무 명 가까운 팀원들이 보였다.“기리야! 여기 앉아!”이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네, 과장님!”나는 막내 자리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13년 전의 나는 이 자리에서 엄청나게 긴장했다.누가 술잔을 주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줄 알았고, 삼겹살을 구우라고 하면 새까맣게 태웠고, 소주도 맥주도 주는 대로 마셨다.그 결과.화장실.변기.기절.그리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첫 회식에서 뻗은 놈’이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나는 집게를 들었다.삼겹살을 올리고 핏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린 뒤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었다.마늘은 가장자리, 김치는 기름 흐르는 방향, 버섯은 타지 않게 옆쪽.이 과장이 감탄했다.“야, 기리야. 너 고기 좀 구워봤냐?”“아버지 따라 고깃집을 좀 다녔습니다.”거짓말이다.회사 따라 다녔다.13년 동안.“이야. 신입이 센스가 있네.”‘1점.’회사생활은 일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었다.특히 이 시절에는 회식, 인사, 눈치, 술자리, 리액션이 생각보다 컸다.잠시 후 박정태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자. 오늘 신입도 들어왔고, 새해도 시작됐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네, 팀장님!”“올해도 우리 팀 사고 없이 잘해봅시다.”그러다 갑자기 내 쪽을 바라봤다.“기리.”“네!”“신입 들어왔으니까 건배사 한번 해봐.”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13년 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하여!’라고 끝냈다.하지만 이번에는 수많은 회식과 인터넷에서 쌓인 건배사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회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좋은 회사는 건물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2화. 두 번째 첫 출근

    2화. 두 번째 첫 출근2013년 1월 16일.SG그룹 입사 첫날.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만 바라봤다.2013년 1월 16일.화면을 껐다.다시 켰다.여전히 2013년이었다.“……말도 안 되는데.”고개를 들어 벽에 붙은 달력을 확인했다.2013년 1월.책상 위에는 낯익은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몰라 볼을 세게 꼬집었다.“아악!”아프다.확실히 아팠다.꿈에서 느끼는 어설픈 통증이 아니었다.“꿈은 아닌 것 같고…….”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그대로 굳었다.“미친.”거울 속 남자는 서른아홉 살의 내가 아니었다.1눈 밑에 달라붙어 있던 피로가 사라졌다.잔주름도 없다.술과 야근에 찌든 얼굴도 아니었다.스물여섯.처음 SG그룹에 입사했을 때의 김기리였다.나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손가락 사이로 빽빽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와…….”감탄이 절로 나왔다.“이때는 머리도 많았네.”잠깐 감동했다.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다.“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나는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가장 먼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뚜르르르.몇 번의 신호음 뒤,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소리가 젊었다.기억 속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엄마?”“왜? 출근 준비 안 하고 뭐 하니?”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였다.2정말로.13년 전의 엄마.“엄마.”“왜 그래?”“그냥…….”목이 이상하게 잠겼다.사고가 나기 전날 밤.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나는 받지 않았다.진급도 못 했다.결혼도 못 했다.주식은 몇 년째 처박혀 있었다.괜히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가족들 전화조차 피했다.그런데 지금.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그냥 전화해봤어.”엄마가 웃었다.“얘가 오늘 이상하네. 첫 출근이라 긴장돼?”“응.”나도 웃었다.“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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