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차창 밖으로 겨울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
조수석에 앉은 동팔이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이 없었다.
휴대전화를 보고, 잠깐 자고, 창밖을 보고, 또 휴대전화를 본다.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슬쩍 녀석을 쳐다봤다.
‘그래. 이때는 진짜 이랬지.’
서른 중후반이 되어서는 같이 해외여행도 다녔다.
호텔에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의 동팔이는 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 하나를 세워놓고 사는 것 같았다.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야, 동팔아.”
“왜?”
“너 나 친구로 생각은 하냐?”
동팔이가 나를 쳐다봤다.
“뭐…… 그렇지?”
“뭐 그렇지는 뭐 그렇지야.”
“그럼 뭐라고 해.”
“근데 넌 친구한테 왜 이렇게 벽을 치냐?”
동팔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내가 뭘.”
“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하고, 그냥 전화했다고 하면 끊는다고 하고.”
“할 말 없잖아.”
“친구끼리는 할 말 없어도 전화하는 거야.”
“왜?”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야. 친구끼리 밥도 먹고, 여행도 가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동팔이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툭 내뱉었다.“너도 예전에 장난쳤잖아.”
“뭐?”
“여자 소개.”
순간 기억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아.
그 사건.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동팔이에게 여자 한 명을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지인의 지인. 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문제는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동팔이에게 돈까지 빌려달라고 했었다.나는 황당해서 동팔이에게 말했다.
‘야, 나도 몰랐어.’
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동팔이는 몇 년 동안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를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설마 너 아직도 내가 일부러 그런 여자 소개해준 거라고 생각하냐?”
동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야.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
“그때 네가 웃었잖아.”
“웃었다고?”
“몰랐다고 하면서 그냥 넘어갔잖아.”
그제야 이해됐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몰랐으니까, 실수였으니까, 설명했으니 끝난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팔이에게는 아니었다.사람을 잘 믿지 못하던 녀석.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상처받았던 녀석에게는 그 일도 또 하나의 배신처럼 남았던 거다.나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팔아.”
“왜.”
“그건 진짜 아니야.”
동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지인의 지인으로 소개받은 사람이었어. 결혼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할 줄은 더더욱 몰랐어.”
“…….”
“내가 너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동팔이가 나를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
“그리고 앞으로는 아무나 소개 안 해줄게. 다음에는 내가 신원조회 수준으로 검증해서 소개해준다.”
동팔이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해.”
“넌 필요해.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까.”
“너도 없잖아.”
“……그건 인정.”
둘 다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지난 삶에서 나는 동팔이에게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느냐고 했지만 정작 그 벽 하나에는 나도 벽돌 한 장쯤 올려놓고 있었다.***
늦은 오후.
우리는 강릉에 도착했다.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과 함께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짠.
“동팔아.”
“왜.”
“너 간호사 꼭 돼라.”
“하려고 공부하는 거잖아.”
“될 거야.”
“너 아까부터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 온다니까.”
사실 알고 있다.
서른두 살 무렵 동팔이는 결국 간호사가 된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꽤 성실하게 일했다.나는 술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돈도 모으고.”
“돈은 벌면 모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모인다.”
“또 시작이네.”
“재테크도 해야지.”
“난 주식 그런 거 관심 없어.”
“주식만 재테크냐. 적금도 하고, 자산도 만들고, 나중에 집도 사고.”
“귀찮아.”
“그리고 결혼도 하고.”
“그건 더 귀찮아.”
나는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야!”
동팔이는 태연하게 고기를 먹었다.
“내 인생인데 왜 네가 답답해해?”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를 너무 늦게 시작했고, 그만큼 아쉬워했다.“그래도 이번에는 좀 빨리 움직여.”
“이번에는?”
젠장.
“아니.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거짓말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두 번이다.나는 동팔이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여행도 자주 가고, 돈도 모으고, 사람도 좀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귀찮다니까.”
“내가 소개해줄게.”
동팔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부녀 말고?”
“이 새끼가.”
둘 다 웃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리도 예전에 있었던 앙금 같은 거 다 풀자. 나도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하고, 너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동팔이는 한동안 술잔만 바라봤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알았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둘 다 잘 살자.”
“그래.”
짠.
지난 삶에서는 몇 년이 지나서야 나눴던 대화를 이번에는 훨씬 일찍 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성공이었다.“내일 통일전망대 가자.”
“멀지 않아?”
“여행 왔으면 돌아다녀야지. 북쪽도 한번 보고.”
“추울 텐데.”
“젊을 때 다니는 거야.”
동팔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너 요즘 왜 자꾸 아저씨처럼 말하냐?”
“……회사 다니면 늙는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은 이미 부장이다.”
***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걸었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그러다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미연이?”
다음 주말에 만나기로 한 미연이었다.
그런데 미연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뭐지? 남자친구? 썸남?’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괜히 서운했다.
동팔이가 그쪽을 보더니 말했다.
“옆에 남자 있는데?”
“나도 보여.”
“남자친구인가 보네.”
“야. 너는 위로라는 걸 모르냐?”
“사실을 말한 건데.”
나는 술기운을 빌려 미연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연락처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
남자친구가 아니었구나.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미연 씨.”
미연이 눈을 크게 떴다.
“어? 기리 씨가 여기 웬일이에요?”
“저 친구랑 여행 왔어요.”
나는 동팔이를 가리키고 슬쩍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친구분이신가요?”
미연이 바로 손을 저었다.
“아뇨, 아뇨. 저도 친구랑 놀러 왔는데 방금 연락처를 물어보셔서요.”
속으로 종이 울렸다.
‘그럼 그렇지.’
“번호 주실 거예요?”
미연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웃었다.
“글쎄요. 저희 다음 주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때 기리 씨 보고 결정하려고요.”
‘나한테도 마음 있는 거 맞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어차피 이렇게 만났는데 오늘 같이 한잔하실래요? 저도 친구랑 있고 미연 씨도 친구분이랑 있으니까.”
“친구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당연하죠.”
“제가 물어보고 톡 드릴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동팔이에게 돌아오자 녀석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남자친구 아니야.”
“다행이네. 근데 너랑도 아직 아무 사이 아니잖아.”
“……너 오늘 말이 많다?”
***
숙소로 돌아와 남자 둘이 호텔방 바닥에 앉아 위스키를 열었다.
한 잔.
두 잔.동팔이는 말했다.
“근데 너 진짜 요즘 좀 이상하다.”
“뭐가?”
“갑자기 여행 가자고 하지 않나. 평소랑 다르잖아.”
“사람이 철들었나 보지.”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연이었다.미연 : 친구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요 ㅠㅠ 다음 주에 봐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못 온대?”
“응.”
“아쉽겠네.”
“오히려 다행이지. 어장관리 같은 거 아니었잖아.”
동팔이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다.”
“곧 사귈 거야.”
이번에는 좋으면 좋다고 표현할 생각이다.
미연은 회도 좋아했고, 맛있는 것도 좋아했고, 내가 웬만한 농담을 해도 잘 웃어줬다.‘이번에는 고백도 빨리 해야겠다.’
그때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회사였다.조현석 파트장.
“네, 파트장님.”
“김사원. 지금 어디야?”
“강릉입니다.”
“강릉? 팀장님이 자네 찾으신다. 문제가 하나 터졌어.”
아.
이 시절. 주말이고 밤이고 상관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는 회사로 달려와야 했다.“알겠습니다. 새벽에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동팔이가 물었다.
“회사?”
“응. 새벽에 출발하자.”
“여행 왔는데 회사 가냐?”
“이게 2013년 회사원이다.”
그때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미연.
미연 : 친구는 먼저 자고 있어요. 혹시 아직 안 주무시면 잠깐 바람 쐬러 갈래요?
나는 그대로 굳었다.
회사에서는 새벽에 내려오라고 한다.
박팀장은 나를 찾고 있다. 그런데 13년을 돌아와 다시 만난 미연이 지금 나오라고 한다.“아…… 인생이 갑자기 바빠졌다.”
“왜?”
“회귀했다고 쉬운 게 아니네.”
“뭐?”
“아니다.”
나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
“바람 좀 쐬고 온다.”
“회사 간다며.”
“새벽에.”
“그럼 어디 가는데?”
“인생 2회차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
“뭔데?”
“연애.”
문을 닫으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박정태 팀장.
내 발걸음이 멈췄다.
미연은 밖에서 기다린다.
박팀장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강릉에서 회사까지는 몇 시간이 걸린다.“젠장.”
이번 생도 회사와 연애를 동시에 잡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다.
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