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금요일 저녁.
SG그룹 인근의 한 삼겹살집.
문을 열자 긴 테이블 두 개와 스무 명 가까운 팀원들이 보였다.
“기리야! 여기 앉아!”
이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
“네, 과장님!”
나는 막내 자리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13년 전의 나는 이 자리에서 엄청나게 긴장했다.
누가 술잔을 주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줄 알았고, 삼겹살을 구우라고 하면 새까맣게 태웠고, 소주도 맥주도 주는 대로 마셨다.그 결과.
화장실. 변기. 기절.그리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첫 회식에서 뻗은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집게를 들었다.
삼겹살을 올리고 핏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린 뒤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었다. 마늘은 가장자리, 김치는 기름 흐르는 방향, 버섯은 타지 않게 옆쪽.이 과장이 감탄했다.
“야, 기리야. 너 고기 좀 구워봤냐?”
“아버지 따라 고깃집을 좀 다녔습니다.”
거짓말이다.
회사 따라 다녔다. 13년 동안.“이야. 신입이 센스가 있네.”
‘1점.’
회사생활은 일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특히 이 시절에는 회식, 인사, 눈치, 술자리, 리액션이 생각보다 컸다.잠시 후 박정태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
“자. 오늘 신입도 들어왔고, 새해도 시작됐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네, 팀장님!”
“올해도 우리 팀 사고 없이 잘해봅시다.”
그러다 갑자기 내 쪽을 바라봤다.
“기리.”
“네!”
“신입 들어왔으니까 건배사 한번 해봐.”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13년 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위하여!’라고 끝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많은 회식과 인터넷에서 쌓인 건배사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회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좋은 회사는 건물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
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올해는 서로 밀어주고, 서로 끌어주고, 우리 팀 모두가 같이 올라가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술잔을 높이 들었다.
“제가 ‘SG!’ 하면 다 같이 ‘위하여!’ 부탁드리겠습니다!”
박팀장이 크게 웃었다.
“좋다!”
“SG!”
“위하여!”
짠—
박수가 쏟아졌다.
“이야!”
“신입 맞아?” “누가 저런 거 가르쳐줬냐?”조 파트장도 웃었다.
“기리 씨, 말 잘하네.”
박팀장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김기리. 자네 신입답지 않은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긴장해서 준비한 말이 생각보다 잘 나온 것 같습니다.”
“좋아. 한잔해.”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박팀장 점수 상승.
팀원 점수 상승. 첫 회식 흑역사 삭제.***
이후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리야. 한잔 받아.”
“김기리 씨, 나하고도 한잔해야지.” “야, 신입! 이쪽도 와!”한 명.
두 명. 세 명.예전의 나는 전부 받아마셨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회식은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이기는 자리가 아니다.
끝까지 멀쩡한 사람이 이기는 자리다.회식 전 숙취해소제를 먹고, 고기를 충분히 먹고, 소주 한 잔을 받으면 물도 마셨다.
맥주를 섞는 것도 피했다.서른아홉까지 회사생활을 하며 얻은 쓸모없는 능력 중 하나.
술 조절.밤 10시가 넘어가자 이 과장 얼굴은 벌써 새빨개졌고, 조 파트장도 말이 많아졌다.
반면 나는 멀쩡했다.
박팀장이 나를 쳐다봤다.
“기리. 술 잘하네?”
“조금 마십니다.”
“조금? 신입이 나보다 더 멀쩡한데?”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팀장님께서 봐주셔서 그렇습니다.”
“말도 잘해.”
문득 생각했다.
‘예전의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하지만 그때는 신입이었다.
사회생활도 처음이었다. 미숙하니까 신입이었던 것이다.경험해봤으니까 지금 잘하는 거다.
실패해봤으니까 안다. 그때의 나를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
회식은 무사히 끝났다.
첫 번째 삶에서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지만 오늘은 내 발로 멀쩡하게 걸었다.
“크으. 이게 13년 차 짬밥이지.”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랐다.
“……미연.”
미연이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3년 뒤였다.
소개팅이었다. 처음부터 서로 호감은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이상하게 진도를 못 뺐다. 괜히 밀고 당기고 상대가 먼저 확신을 보여주길 기다렸다.“3년이라.”
3년을 기다릴 이유가 있나?
지금 미연은 이미 간호사로 일하고 있을 시기다. 어느 병원에서 근무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며칠 뒤 나는 기억 속의 병원 앞에 서 있었다.
로비에 들어가자 간호사와 환자들이 오갔다.
그러던 순간 복도 반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왔다.흰 간호사복.
묶은 머리. 익숙한 눈.“……미연아.”
미연이 내 옆을 지나가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잠깐 걸음을 늦췄다.나는 바로 다가갔다.
“저기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미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 연락처요?”
“네.”
“왜요?”
“마음에 들어서요.”
미연은 내 얼굴을 한번 슬쩍 보더니 고민했다.
“음…… 휴대폰 주세요.”
됐다.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미연이 번호를 입력했다.
휴대전화를 돌려받은 나는 웃었다.“감사합니다. 미연 씨.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네?”
미연의 표정이 굳었다.
“제 이름…….”
아.
맞다. 이름 안 물어봤다.“저희 처음 보는 거 맞죠?”
나는 미연의 명찰을 가리켰다.
“명찰이요. 아까 저도 모르게 봤나 봅니다.”
미연이 자기 명찰을 내려다봤다.
김미연.
“갑자기 이름 불러서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미연이 작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랐어요.”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미연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나는 저장된 번호를 보며 혼자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무려 3년 단축.”
그때 아주 뜬금없이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김동팔.
고등학교 친구.
서른 중후반부터는 함께 여행도 자주 다녔고 가까운 친구가 됐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고집도 셌다.무엇보다 오래된 앙금이 하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김동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중 중심에는 김영기가 있었다. 나와 김영기도 친했지만 어느 날 관계가 틀어졌고, 그 뒤 영기 무리는 나까지 따돌리기 시작했다.어느 날 김영기가 동팔이에게 말했다.
‘김기리랑 놀지 마.’
동팔이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두고 가버렸다.나는 큰 배신감을 느꼈고 결국 동아리까지 탈퇴했다.
지금은 안다.
동팔이도 무서웠을 것이다. 본인 역시 괴롭힘을 당하던 입장이었다.나는 휴대전화 연락처를 뒤졌다.
“이 관계도 다시 해볼 수 있겠네.”
회사도.
연애도. 돈도. 친구도.내가 13년 동안 후회했던 것들을 하나씩 바꿔보는 거다.
김동팔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르—
“여보세요?”
“동팔아.”
“……왜?”
역시.
말투부터 답답하다.나는 피식 웃었다.
“야. 오늘 시간 있냐?”
“……갑자기?”
그래.
김동팔. 너도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자.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