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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9 11:32:59

​소율의 책상에서 발견했던 오래된 포스트잇 메모와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3년 전 만년필.

​그 작은 두 가지 소지품은 도현의 세계관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3년의 오피스 라이프, 그 뒤편에서 한소율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숨죽여 눈물을 삼키고 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깨달았을 때, 도현의 가슴속에는 거대한 죄책감과 참을 수 없는 애정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14일의 계약이 끝나면, 3년의 짝사랑을 미련 없이 태우고 파리로 떠나자.'

​메모지 마지막 줄에 적혀 있던 그 문장은, 도현의 시계를 초조하게 재촉하는 시한부 카운트다운과도 같았다. 남아있는 시간은 불과 사흘. 소율이 진짜로 자신의 곁을 떠나기 전, 도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계약 11일 차, 토요일 아침.

​평소라면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었지만, 도현은 아침 일찍 소율의 오피스텔 앞으로 직접 차를 끌고 찾아왔다.

​소율은 집 앞 골목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도현을 보고 깜짝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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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간의 계약 연애   19화

    ​오전 8시.​오피스텔 공동 현관문이 열리고, 차분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차림의 소율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연차를 낸 날이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서류 가방과 작은 캐리어 하나가 쥐여 있었다.​도현은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한소율!"​거친 도현의 음성에 소율의 걸음이 멈춰 섰다.​소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밤새 차 안에서 지새운 듯 피곤함이 가득한 도현의 얼굴, 헝클어진 머리칼과 구겨진 슈트 차림. 언제나 오만하고 완벽하던 차도현 팀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러나 소율의 눈동자는 서늘할 정도로 덤덤했다. 이미 어제 13일 차에 모든 오해와 상처를 끌어안고 마음을 모질게 잘라낸 뒤였다.​"팀장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뭐 하냐고?"​도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소율의 앞으로 다가왔다. 압도적인 크기의 도현의 그림자가 소율을 덮쳤지만, 소율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사무실에 남겨두고 간 그 메모와 서류는 대체 뭡니까? 왜 멋대로 오해하고 짐을 싸서 나오는 건데요!"​도현의 목소리에 초조함과 억울함이 번져 나왔다.​소율은 가만히 도현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현의 가슴을 서늘하게 베어내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이고 완벽한 미소였다.​"오해라니요, 팀장님. 제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1층 VIP 접견실! 어제 서연주 이사를 만난 건—"​"회장님께서 지정해 주신 정략혼 상대와의 자리였지 않습니까."​소율의 또렷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도현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팀장님. 저는 팀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비난할 자격도, 이유도 없습니다. 당초 우리 계약의 목적은 회장님의 억지 맞선 압박을 피하기 위한 14일간의 위장 연애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14일 차, 계약 만료일입니다."​소율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계약 기간 동안 저는 팀장님의 애인 대행으로서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회장님의 의심을 피했고, 커플

  • 14일간의 계약 연애   18화

    ​한편, 주말 특근 서류 정리를 위해 잠시 1층 로비로 내려왔던 소율은, VIP 접견실 유리를 통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VIP 접견실 안.​고급스러운 소파 상석에는 이혜민 회장이 좌정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우아하게 드레스를 입은 화려한 미모의 여성—서연주 이사—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도현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서자, 서연주 이사가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아주었다.​약간 열린 접견실 문틈 사이로, 이 회장의 서늘하고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도현이 너, 지난번 본가에서 한 대리의 진심을 확인했으니 네 연애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연애와 태성그룹 후계자의 '결혼'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집안의 대사인 정략혼은 한성그룹 서 이사와 치러야 해."​뒤이어 앉아있던 서연주 이사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맞아요, 차 팀장님. 저는 개의치 않아요. 능력 있는 남자 곁에 연애하는 여자 한둘쯤 있는 건 재벌가에서 흔한 일이죠. 한 대리님과의 관계는 결혼 전까지만 적당히 즐기시다 정리해 주세요. 그 정도 사생활은 얼마든지 눈감아드릴 수 있어요."​이 회장 역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서 이사 말이 맞다. 그게 너도, 한 대리도, 태성그룹도 모두 정돈되는 길이다."​그 대화들이 문틈 너머로 소율의 귀에 송곳처럼 파고들었다.​VIP 접견실 유리 너머로, 도현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 회장님과 서연주 이사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소율의 피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가슴이 사정없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아… 결국 회장님이 인정했던 건 가벼운 '연애'였을 뿐이구나. 그리고 차 팀장님도… 결국 재벌가의 정략혼을 피할 수 없어서, 나를 정리할거고...'​소율의 머릿속에서 잔인한 추론이 완성되었다.​도현이 지난 주말 동안 보여주었던 그 일방적인 다정함, "내 진짜 마음이야"라며 손을 잡아주던 그 따뜻한 온도, 그리고 눈빛에 서려 있던 낯선 열기까지.​그 모든 것이 결국 무엇이었단

  • 14일간의 계약 연애   17화

    소율은 이것이 도현의 진심이라 믿지 않았다. 그저 14일 동안 가짜 연애를 진행하며 순간적인 분위기와 착각에 휩싸인 차도현의 일시적인 이상 열증일 뿐이라고, 자신을 향한 깊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계약 파트너를 향한 최선의 '서비스'이자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세뇌시켰다.​소율은 가만히 도현의 손을 뿌리쳤다.​"팀장님. 착각하지 마십시오."​소율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팀장님이 지금 보여주시는 그 어설픈 다정함이, 저한테는 오히려 더 큰 부담이고 실례입니다. 우리는 14일간의 위장 연애를 마치면 본래의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 그리고 파리 지사 파견 절차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습니다."​소율은 가방에서 정갈하게 봉투에 담긴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태성그룹 유럽 지사(파리) 발령 및 인사 이동 최종 신청서]​"계약 만료일인 14일 차 월요일이 되면, 약속대로 이 신청서에 최종 서명해 주십시오. 그게 제가 이번 위장 연애의 대가로 요구했던 유일한 조건입니다."​도현의 눈빛이 잘게 찢어발겨지는 듯 흔들렸다.​테이블 위에 놓인 그 파리 지사 파견 신청서. 그것은 소율이 자신을 향한 3년의 짝사랑을 깔끔하게 끊어내고 완벽하게 떠나겠다는 통보나 다름없었다.​"정말… 정말 가야겠습니까?"​도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네. 가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난 3년 동안 품어온… 아니, 제 커리어를 위한 가장 올바른 선택입니다."​소율은 '3년 동안 품어온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려다 황급히 고쳐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도현의 귀에는, 소율이 삼킨 그 진짜 말이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왔다.​도현은 가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낡은 만년필을 꽉 쥐었다.​자신이 소율에게 준 상처의 깊이가 너무나 깊었기에, 소율은 도현이 건네는 진심조차 믿지 못하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벽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계약 12일 차, 일요일 밤.​도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서재에 앉아 소율이 내민 파리

  • 14일간의 계약 연애   16화

    ​소율의 책상에서 발견했던 오래된 포스트잇 메모와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3년 전 만년필.​그 작은 두 가지 소지품은 도현의 세계관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3년의 오피스 라이프, 그 뒤편에서 한소율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숨죽여 눈물을 삼키고 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깨달았을 때, 도현의 가슴속에는 거대한 죄책감과 참을 수 없는 애정이 거세게 휘몰아쳤다.​'14일의 계약이 끝나면, 3년의 짝사랑을 미련 없이 태우고 파리로 떠나자.'​메모지 마지막 줄에 적혀 있던 그 문장은, 도현의 시계를 초조하게 재촉하는 시한부 카운트다운과도 같았다. 남아있는 시간은 불과 사흘. 소율이 진짜로 자신의 곁을 떠나기 전, 도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계약 11일 차, 토요일 아침.​평소라면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었지만, 도현은 아침 일찍 소율의 오피스텔 앞으로 직접 차를 끌고 찾아왔다.​소율은 집 앞 골목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도현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트렌치코트 차림의 도현은, 소율을 보자마자 환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회장님 앞이나 감시원들 앞이 아니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오롯이 소율만을 향한 진짜 미소였다.​"팀장님? 주말에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회장님 쪽에서 또 연출 사진을 요구하셨습니까?"​소율의 첫마디는 여전히 '업무'와 '계약'이었다.​도현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계약이라는 감옥에 소율을 가둬두고, 그녀의 입에서 순수한 다정함이 나오는 것조차 막아버린 자신의 업보였다.​"아닙니다. 회장님 때문이 아니에요."​도현이 걸어와 소율의 손에 따뜻한 핫팩과 커피를 쥐여주었다. 도현의 손길은 더 이상 비즈니스용 연기처럼 과시적이거나 위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율이 놀라 도망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다루는 듯한 섬세함이 가득했다.​"오늘 날씨가 차갑습니다. 따뜻하게 입고 나오지 그랬어요."​"네?

  • 14일간의 계약 연애   15화

    ​[202X년 X월 X일. TF팀 첫 출근 날.][차도현 팀장님께 처음으로 건네받은 만년필. 내 이름을 처음 불러주신 날.][닿지 않아도 좋은 사람. 이 마음은 이 필통 속에만 묻어두자.]​그 밑으로 지난 3년간의 날짜와 함께 짧은 문장들이 가끔 적혀 있었다.​[202X년 O월 O일. 팀장님이 건네주신 아메리카노. 오늘 처음으로 내 기안서가 통과되었다.][202X년 △월 △일. 독설 뒤에 팀원들을 챙기시는 따뜻함을 또 보았다. 욕심내지 말자. 그저 가장 완벽한 부하직원으로 곁에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그리고 가장 최근에 적힌, 눈물자국이 옅게 번져 있는 마지막 문장.​[계약 1일 차. 14일간의 가짜 연애.][나를 가장 사사로운 감정 없는 사람이라 믿고 제안한 그의 눈빛. 슬프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이 14일이 지나면, 3년의 짝사랑을 미련 없이 태우고 파리로 떠나자.]​스르륵-​메모지를 쥐고 있던 도현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려나갔다.​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통째로 후려맞은 것 같은 지독한 충격이 도현의 온몸을 덮쳤다.​소율이 자신을 향해 보여주었던 그 완벽한 부하직원의 가면, 선을 긋는 단호함, 회장님 앞에서 내뱉었던 사소한 습관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주말 산책로와 펜트하우스에서 자신의 스친 손길에 떨던 그 모든 행동들의 실체가 단 한순간에 명확한 그림으로 완성되었다.​소율은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비즈니스 대행을 위해 조사한 것도 아니었다.​소율은 3년 동안.바로 그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차도현을 홀로 짝사랑해 오고 있었다.​자신이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일절 품지 않을 가장 깔끔한 부하직원'이라며 자랑스럽게 계약 연애를 제안했던 바로 그 한소율이, 자신을 향한 사랑을 숨기기 위해 매 순간 피눈물을 흘리며 그 잔인한 계약서에 서명했던 것이었다.​"아…."​도현의 입에서 짓눌린 탄성이 새어 나왔다.​가슴 한구석이 칼로 베여나가는 듯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자신이 얼마나 거대하고 잔인한 짓을 저질렀

  • 14일간의 계약 연애   14화

    ​"말해요, 소율 씨.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겁니까?"​차 안을 짓누르던 도현의 낮고 조급한 음성은 여전히 소율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전날 밤 9일 차 본가 식사 자리 직후, 소율은 끝까지 "부하직원으로서 상사를 관찰한 것뿐"이라며 차갑게 선을 긋고 내렸다. 하지만 도현의 가슴속에 일어난 커다란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율이 보여준 그 눈빛과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섬세한 관찰력은,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영역을 완전히 뛰어넘어 있었다.​그리고 맞이한 금요일, 계약 10일 차.​사옥 18층 기획본부는 주말을 앞두고 유럽 신규 사업 이사회 제출 서류의 막바지 검토로 폭풍 전야와 같았다.​"팀장님, 3차 보완 데이터 출력물입니다. 유럽 파견 인력 배치안과 현지 법인 설립 예산서 함께 묶어 두었습니다."​소율이 정갈하게 정리된 두툼한 서류 봉투를 도현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소율의 얼굴은 평소처럼 단정하고 침착했다. 어제 차 안에서 도현이 던진 날 선 추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완벽한 오피스 모드로 돌아와 있었다.​도현은 서류를 받아 들며 소율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부하직원으로서 상사를 관찰한 것뿐이다.'​소율은 그렇게 말했지만, 도현의 머릿속에는 회장님 앞에서 도현의 섭식 습관과 스트레스 반응, 심지어 독설 뒤에 숨겨진 진심까지 따뜻하게 대변하던 소율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알겠습니다. 확인 후 부르죠. 한 대리, 오늘 야근입니까?"​"네, 팀장님. 현지 법률 검토 건으로 법무팀 서류 백업이 남아있습니다. 9시 전후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그래요. 수고해요."​소율은 깍듯하게 목인사를 건넨 뒤 팀장실을 나갔다.​오후 8시 40분.​사무실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고, TF팀 구역에는 소율의 자리에만 작은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소율은 잠시 법무팀에 최종 확인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도현은 팀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소율의 책상 위에는 다 쓴 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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