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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편의 첫사랑이 돌아왔다

Autor: 복순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10-28 13:36:18

강신혁의 커다란 손이 옷자락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무심코 그녀의 허리춤과 어깨 언저리에 넓게 퍼진, 울퉁불퉁하고 흉측한 화상 흉터에 닿고 말았다.

낯선 감촉에 강신혁의 온몸이 흠칫 굳었다.

눈에 어렸던 취기가 순식간에 가시고, 눈빛이 또렷해졌다. 몸 아래 깔린 그녀의 핏기 가신 얼굴을 보자 그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셔츠를 가다듬었다.

엄청난 수치심과 절망이 그녀를 덮쳤다.

이서하는 눈물을 삼키며 허둥지둥 일어나 옷깃을 여몄다. 그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저……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짜 내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른쪽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렸고, 두어 걸음도 떼기 전에 바닥에 쿵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서하야!"

강신혁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요!"

그녀는 그의 손을 피했다. 이를 악물고 휘청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절뚝거리며 침실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허공에 뻗은 그의 손이 멈칫하더니, 끝내 힘없이 내려갔다.

침실은 어두웠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았고, 눈물이 소리 없이 툭툭 떨어졌다.

또 도망치고 말았다. 며칠 전 욕실 문 앞에서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었던 것이다.

6년 전, 스물한 살의 이서하는 모두가 주목하는 신예 모델이었다.

그해 그녀는 한 연회에서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강신혁과 재회했다.

그 재회는 미처 다 접지 못했던 그녀의 마음에 다시 한 번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호텔 화재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녀는 떨어지는 무거운 물체에 깔릴 뻔한 강신혁을 밀쳐 냈고, 대신 자신이 불길에 삼켜졌다.

다리와 어깨에 넓은 범위의 화상을 입었다.

한때 동경하던 미래와는 그렇게 작별했다.

세간에서는 그녀가 한성그룹 후계자에게 분수도 모르고 매달렸다고만 여겼고, 강신혁이 하필 저런 쓸모없는 사람에게 발목을 잡혔다며 혀를 찼다.

훗날 강신혁은 그녀에게 풍족한 생활을 마련해 주었고, 치료를 주선했으며, 일상까지 살뜰히 챙겨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야박하게 군 적이 없었다.

단 하나, 사랑만은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서하는 끝내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충분히 긴 시간이 있다면, 언제고 그가 자신을 한 번쯤은 더 바라봐 주지 않을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넘어진 데 안 아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결혼기념일이잖아. 선물은 거실 탁자 위에 놔뒀어."

이서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해마다 결혼기념일이면 그는 그녀에게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한 벌씩 선물했다.

그녀도 한때는 모델이었다. 예쁜 옷을 좋아했고,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는 것을 좋아했고, 관객의 박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첫 번째 드레스를 받았을 때, 그녀는 오랫동안 기뻐했다.

어쩌면 신혁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친 뒤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치마를 입지 않았다.

허리춤과 어깨의 화상 흉터 때문에 남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 오른쪽 다리에 남은 후유증 탓에 예전처럼 자유롭게 걷지도 못했다.

그렇게 드레스들은 한 벌 한 벌 드레스룸에 걸렸다.

그녀는 그것이 그의 격려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씻고 나와 널찍한 침대 반대편에 누웠다.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 각자 한쪽씩을 차지하고 잠을 청했다.

이서하는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일함 속 해외 패션 스쿨의 합격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오늘 밤 그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신혁 씨, 저 해외에서 쇼 기획 공부를 하고 싶어요. 신혁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제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더 이상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강신혁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거울 앞에 섰다.

김 이모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오자 그가 담담하게 당부했다.

"오늘 저녁에 그룹 접대가 있어요. 사모님께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 줘요."

안방 문 앞에 이르러 그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 위의 사람은 등을 돌린 채 곤히 잠든 듯했다.

그는 몇 초간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났다.

평소 그녀는 늘 일찍 일어나 그를 위해 아침을 차리고, 그가 다 먹을 때까지 곁에서 챙겼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이서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몸을 돌려 옆자리 베개를 만져 보았다. 간밤의 눈물에 흠뻑 젖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습관처럼 SNS를 열었다.

알고리즘이 정확하게 인기 영상 하나를 첫 화면에 띄웠다.

권나영이 어젯밤 올린 귀국 환영 파티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강신혁의 목소리였다.

낮고 묵직해서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가, 다정하게 받아 주는 듯한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권나영의 어리광에 대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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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년간 사랑받지 못한 아내   11. 당신을 구한 대가

    강신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이서하의 손목을 와락 붙잡았다.“너는 나영이 좀 본받으면 안 돼? 네가 나영이를 밀쳐서 다쳤잖아. 그런데 사과 한마디 없이 지금 어딜 가겠다는 거야?”“놔.”“먼저 나영이한테 사과해.”그는 고집스럽게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마치 이서하가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눈앞의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나영이가 다쳤는데 사과 한마디도 못 하겠어? 네 꼴을 좀 봐! 나영이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거야? 왜 맨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데?”이서하는 문득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랫동안 좋아해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6년 전, 그녀는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뒤로는 그날의 사고를 입에 올리지 않고, 몸에 남은 흉터를 내세워 그에게 무언가를 보상해 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가 이 결혼을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심지어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좋은 점을 알아봐 주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바로 지금, 그녀는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자신 혼자만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다는 것을.다른 여자를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강신혁을 바라보던 이서하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끝내 접었다.“강신혁.”그녀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신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가 계속 변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하지만 이서하는 그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후회해.”강신혁은 순간 멈칫했다.“뭐?”“널 구한 걸 후회해.”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예전에는 네 목숨을 구하다가 다쳤어도, 몸에 이런 흉터가 남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난 한 번도 이 흉터로 널 붙잡아 두려 한 적 없어. 네가 내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로

  • 6년간 사랑받지 못한 아내   10. 그의 품 안의 사모님

    이서하는 휴대폰에 뜬 메시지를 못 본 척했다. 최 감독과 여유롭게 개인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 주 리허설 현장에 가서 돕기로 약속까지 마친 뒤에야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1층 로비를 막 나서자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이서하가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물빛 푸른 그림자가 한발 앞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권나영이 하이힐을 신고 다가왔다. 얼굴에는 어느새 억울하고 가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서하의 팔을 붙잡더니, 듣기만 해도 역겨울 만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서하 언니, 아까 안에서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화내지 마세요…… 신혁 오빠도 탓하지 마시고요. 오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권나영은 이서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그룹 사업에 지장이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부부인 걸 그냥 묵인한 거고요…… 언니는 이해해 주실 거죠, 서하 언니?”말하는 동안 권나영은 별생각 없다는 듯 치맛자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무심코” 이서하의 옷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울퉁불퉁한 흉터를 스쳤다.순간, 구역질 나는 혐오감이 신경을 타고 터져 나왔다. 이서하는 속이 격하게 뒤집혔고, 눈빛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났다.“손대지 마!”이서하는 차갑게 팔을 뿌리쳤다. 본능적으로 권나영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 했다.힘도 거의 주지 않았다. 그런데 권나영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으로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나영아!”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강신혁이 성큼성큼 달려와, 낯빛이 시퍼렇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진 권나영을 와락 품에 안았다.권나영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듯 강신혁의 품에 웅크렸다. 눈물은 말 그대로 뚝뚝 떨어졌고, 그녀는 손목을 문지르며 흐느꼈다.“신혁 오빠…… 서하 언니 탓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 못 버티고 넘어진 거예요…… 서하 언니

  • 6년간 사랑받지 못한 아내   9. 숨길 수 없는 불안

    “아! 스미스 씨!”권나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이서하의 말을 억지로 끊어 버렸다.그녀는 허둥지둥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더니, 다음 순간 마치 손이 미끄러진 것처럼 와인 반 잔이 하늘색 고급 맞춤 드레스 위로 쏟아졌다.진한 와인이 순식간에 치맛자락을 적시며 눈에 띄게 붉은 얼룩으로 번져 나갔다.“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주의했네요!”권나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냅킨을 집어 들고 얼룩을 닦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말까지 더듬거렸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신혁 오빠, 우리 중요한 회의에 가야 하잖아요! 거기 일이 급해서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날게요!”입으로는 사과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치맛자락을 문질렀다.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괜찮아요. 어서 닦아요.”최 감독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친절하게 냅킨을 건넸다.권나영은 일단 이서하의 말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하지만 이서하가 정말 말을 이으려 했다면, 누가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까?테이블 맞은편에서 강신혁은 와인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장이라도 잔을 깨뜨릴 기세였다.그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이서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당황과 경고, 그리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애원이 뒤섞여 있었다.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그는 그녀에게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흥.이서하는 찻잔을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모금 마셨다.그저 평소 높은 곳에서 군림하던 두 사람이 얼마나 추한 꼴을 보일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최 감독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흥미롭게 물었다.“참, 서하야. 너 결혼했니? 남자 친구는 있고?”“네, 결혼한 지 벌써 6년 됐어요.”이서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제 남편도 강 씨예요.”그 말이 떨어지자 맞은편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숨소리마저 멎은 듯했다.

  • 6년간 사랑받지 못한 아내   8. 당신의 아내는 누구인가

    이서하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권나영은 자연스럽게 ‘강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였고, 강신혁마저 입을 열어 부인하지 않았다.이서하의 입가에 자조적인 냉소가 번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반걸음 물러난 뒤, 역겨운 광경에서 멀어지려 몸을 돌렸다.“서하야? 서하 맞니?”그때, 등 뒤에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카리스마가 넘치는 중년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쁨이 가득했다.최 감독이었다.과거 이서하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녀를 정상급 패션쇼 무대에 세워 준 사람이 바로 최 감독이었다. 이서하가 가장 빛나던 시절에도 그녀의 재능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세상에, 정말 너구나!”최 감독은 이서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줄 알았잖아! 그 사고 이후로…… 너, 괜찮았어?”오랜만에 받는 따뜻한 걱정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밀려들었다.이서하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사고 이후, 한때 자랑스러워했던 그녀의 커리어는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흉터와 다리를 저는 후유증은 그녀가 마주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그녀는 좁은 세상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과거의 모든 사람과 조금씩 연락을 끊었다.익숙한 사람들을 더는 만나지 않으면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것은 결코 몸에 남은 상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이서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허리를 폈다.“감독님, 오랜만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저는

  • 6년간 사랑받지 못한 아내   7. 선물의 진짜 주인

    “강신혁, 우리 이혼해요.”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 앞에서 이서하는 여전히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했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을 삼킨 것처럼 목 안이 따끔거렸다.맞은편에서 강신혁이 소고기를 썰던 은색 포크가 도자기 접시를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격한 분노 대신 심드렁한 시선만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가 터무니없는 농담이라도 꺼낸 것처럼.“또 왜 이래? 어젯밤엔 화가 나서 집에도 안 들어오더니, 밥 먹는 자리에서까지 나를 피곤하게 해야겠어?”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물잔을 들어 올렸다. 말투는 말을 안 듣는 반려동물을 달래기라도 하듯 부드러웠다.“서하야, 아직 화가 안 풀린 건 알아. 그래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나랑 이혼하면 너 혼자 어떻게 살려고? 지금도 일상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진심이에요. 며칠 뒤에 이혼 서류를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이서하는 무릎 위에 놓인 긴 치마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진심이라는 걸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강신혁은 냅킨을 집어 입가를 느긋하게 닦았다. 미간에 차가운 주름이 잡혔다.“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어젯밤 그깟 일 때문이야? 태호 쪽 애들이 말이 좀 심하긴 했지만, 나영이도 좋은 마음으로 널 타이르려던 거잖아. 네 성격 좀 봐. 툭하면 표정 굳히고 이혼하자고 하고. 그러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널 내 모임에 데리고 다니겠어? 넌 그 사람들이랑 어떻게 어울릴 건데?”그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손가락이 긴 커다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녀를 응시했다.“나랑 이혼하면 어디로 갈 건데? 나 말고 누가 널 먹여 살려 주겠어?”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그녀를 위한 충고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장 여린 곳을 파고들었

  • 6년간 사랑받지 못한 아내   6. 이혼

    이른 아침, 이서하는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넘게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부 강신혁에게서 온 전화였다.그녀는 말없이 화면을 껐다.오늘은 선생님을 만나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의논하기로 했다. 더는 강신혁 때문에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카페 구석자리에서 선생님은 서류 목록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았다.“이건 쇼 연출 과정에 필요한 서류 목록이야. 다음 달 안으로 전부 제출하면 비자가 나오는 대로 언제든 출국할 수 있어.”“감사합니다, 선생님.”이서하는 서류 목록을 재빨리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카페를 나선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강신혁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검은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차갑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이서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가방을 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자신이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됐다. 그가 알게 된다면 돌아올 것은 뻔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태도뿐일 테니까.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먼저 입을 연 것은 강신혁이었다. 그는 화를 억누른 채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여기서 뭐 해? 어젯밤엔 왜 집에 안 들어왔어? 전화도 안 받고. 아직도 화난 거야?”어젯밤 친구들이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반걸음 다가서며 내려다보았다.“서하야, 너무 철없이 굴지 마. 다들 장난이 좀 심했을 뿐이야. 그런데 네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내고 나가 버리면 나영이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예전엔 이렇게 철이 없지 않았잖아.”또 철이 없다고 한다.이서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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