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른 아침, 이서하는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넘게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부 강신혁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녀는 말없이 화면을 껐다.
오늘은 선생님을 만나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의논하기로 했다. 더는 강신혁 때문에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카페 구석자리에서 선생님은 서류 목록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건 쇼 연출 과정에 필요한 서류 목록이야. 다음 달 안으로 전부 제출하면 비자가 나오는 대로 언제든 출국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서하는 서류 목록을 재빨리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카페를 나선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
강신혁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차갑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서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가방을 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이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됐다. 그가 알게 된다면 돌아올 것은 뻔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태도뿐일 테니까.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강신혁이었다. 그는 화를 억누른 채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뭐 해? 어젯밤엔 왜 집에 안 들어왔어? 전화도 안 받고. 아직도 화난 거야?”
어젯밤 친구들이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반걸음 다가서며 내려다보았다.
“서하야, 너무 철없이 굴지 마. 다들 장난이 좀 심했을 뿐이야. 그런데 네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내고 나가 버리면 나영이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예전엔 이렇게 철이 없지 않았잖아.”
또 철이 없다고 한다.
이서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장난이라고? 김태호가 사람들 앞에서 내 절뚝거리는 걸 흉내 낼 때, 당신은 뭘 하고 있었는데?”
강신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친구를 감쌌다.
“태호가 술에 취해서 그랬던 거야. 남들이 하는 말에 뭘 그렇게 신경 써? 꼭 그렇게까지 물고 늘어져야겠어?”
“물고 늘어진다고?”
이서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나조차 나를 지키지 않으면, 대체 누구한테 날 지켜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때 당신은 그 잘난 첫사랑이랑 거의 껴안다시피 하면서 웃고 있었잖아.”
“이서하!”
강신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뼈가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음산한 냉기가 서렸고,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 무거워졌다.
손끝이 저릴 만큼 세게 붙잡혔지만, 이서하에게 남은 감정은 무력감뿐이었다.
역시나. 권나영이라는 이름을 꺼내기만 해도 그는 이렇게 돌변한다.
그녀는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이름을 입에 올렸을 뿐인데도 그는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했다.
지난 6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그의 아내를 모욕해도 그는 모른 척했다. 하지만 누군가 권나영을 조금이라도 험담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람과 대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이서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옆으로 돌아서서 가려 했다.
그 순간, 강신혁은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더니 한숨을 내쉬며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살며시 얹고, 얇은 옷 너머로 손바닥을 그녀의 허리에 밀착했다.
겉으로는 다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서하야, 말 좀 들어. 나랑 나영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 난 그 애를 친여동생처럼 생각해. 아직 결혼도 안 한 애야.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데. 네가 나영이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
이서하의 얼굴이 그의 차가운 정장에 닿았다.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정말 우스웠다.
자신의 상처는 밤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온갖 모욕을 당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녀의 명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격하게 따지지도, 더는 말다툼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제야 이서하가 더는 반박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강신혁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래, 이제 말이 통하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마른 손바닥이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이제 화 풀어. 점심 먹고 내가 쇼핑도 같이해 줄게. 어때?”
이서하는 거절하지 않았다.
마침 그녀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청담동의 고급 레스토랑.
자리에 앉기 전, 이서하는 습관적으로 소매를 잡아당겨 몸에 남은 흉터를 가리려 했다. 두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모아 꼿꼿이 펴고, 걸음걸이마저 일부러 조절했다. 조금이라도 더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서였다.
강신혁에게 창피를 주지 않도록.
지난 6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이제는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문득 손을 멈췄다.
참.
이제는 고쳐야 할 습관도 있는 법이었다.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잘 보이려고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강신혁은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음식이 하나둘 테이블 위에 놓였다. 기름지고 매운 음식이 가득했다. 새빨간 음식들을 바라보던 이서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결혼한 지 6년이나 되었는데, 강신혁은 그녀에게 위장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맵고 차가운 음식도 먹지 못한다는 것을.
그동안 집 밥상에는 늘 그가 좋아하는 음식만 올라왔다. 그녀는 매 끼니 억지로 맞춰 먹었다. 한밤중에 배가 아파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픔이 지나간 뒤, 오히려 온몸을 감싸는 듯한 홀가분함이 밀려왔다.
이제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이서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포크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신혁.”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 다만 가방 끈을 꽉 움켜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그녀가 감추고 있는 긴장감을 드러냈다.
“나 할 말이 있어.”
강신혁은 스테이크를 자르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창밖의 햇살이 창백한 그녀의 옆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이서하는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목이 꽉 막히는 듯했다.
마음속에 너무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말이었다.
이제 한마디씩 꺼내려니, 마치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우리……”
강신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이서하의 손목을 와락 붙잡았다.“너는 나영이 좀 본받으면 안 돼? 네가 나영이를 밀쳐서 다쳤잖아. 그런데 사과 한마디 없이 지금 어딜 가겠다는 거야?”“놔.”“먼저 나영이한테 사과해.”그는 고집스럽게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마치 이서하가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눈앞의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나영이가 다쳤는데 사과 한마디도 못 하겠어? 네 꼴을 좀 봐! 나영이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거야? 왜 맨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데?”이서하는 문득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랫동안 좋아해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6년 전, 그녀는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뒤로는 그날의 사고를 입에 올리지 않고, 몸에 남은 흉터를 내세워 그에게 무언가를 보상해 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가 이 결혼을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심지어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좋은 점을 알아봐 주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바로 지금, 그녀는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자신 혼자만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다는 것을.다른 여자를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강신혁을 바라보던 이서하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끝내 접었다.“강신혁.”그녀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신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가 계속 변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하지만 이서하는 그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후회해.”강신혁은 순간 멈칫했다.“뭐?”“널 구한 걸 후회해.”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예전에는 네 목숨을 구하다가 다쳤어도, 몸에 이런 흉터가 남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난 한 번도 이 흉터로 널 붙잡아 두려 한 적 없어. 네가 내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로
이서하는 휴대폰에 뜬 메시지를 못 본 척했다. 최 감독과 여유롭게 개인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 주 리허설 현장에 가서 돕기로 약속까지 마친 뒤에야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1층 로비를 막 나서자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이서하가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물빛 푸른 그림자가 한발 앞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권나영이 하이힐을 신고 다가왔다. 얼굴에는 어느새 억울하고 가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서하의 팔을 붙잡더니, 듣기만 해도 역겨울 만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서하 언니, 아까 안에서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화내지 마세요…… 신혁 오빠도 탓하지 마시고요. 오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권나영은 이서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그룹 사업에 지장이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부부인 걸 그냥 묵인한 거고요…… 언니는 이해해 주실 거죠, 서하 언니?”말하는 동안 권나영은 별생각 없다는 듯 치맛자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무심코” 이서하의 옷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울퉁불퉁한 흉터를 스쳤다.순간, 구역질 나는 혐오감이 신경을 타고 터져 나왔다. 이서하는 속이 격하게 뒤집혔고, 눈빛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났다.“손대지 마!”이서하는 차갑게 팔을 뿌리쳤다. 본능적으로 권나영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 했다.힘도 거의 주지 않았다. 그런데 권나영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으로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나영아!”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강신혁이 성큼성큼 달려와, 낯빛이 시퍼렇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진 권나영을 와락 품에 안았다.권나영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듯 강신혁의 품에 웅크렸다. 눈물은 말 그대로 뚝뚝 떨어졌고, 그녀는 손목을 문지르며 흐느꼈다.“신혁 오빠…… 서하 언니 탓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 못 버티고 넘어진 거예요…… 서하 언니
“아! 스미스 씨!”권나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이서하의 말을 억지로 끊어 버렸다.그녀는 허둥지둥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더니, 다음 순간 마치 손이 미끄러진 것처럼 와인 반 잔이 하늘색 고급 맞춤 드레스 위로 쏟아졌다.진한 와인이 순식간에 치맛자락을 적시며 눈에 띄게 붉은 얼룩으로 번져 나갔다.“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주의했네요!”권나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냅킨을 집어 들고 얼룩을 닦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말까지 더듬거렸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신혁 오빠, 우리 중요한 회의에 가야 하잖아요! 거기 일이 급해서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날게요!”입으로는 사과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치맛자락을 문질렀다.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괜찮아요. 어서 닦아요.”최 감독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친절하게 냅킨을 건넸다.권나영은 일단 이서하의 말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하지만 이서하가 정말 말을 이으려 했다면, 누가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까?테이블 맞은편에서 강신혁은 와인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장이라도 잔을 깨뜨릴 기세였다.그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이서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당황과 경고, 그리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애원이 뒤섞여 있었다.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그는 그녀에게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흥.이서하는 찻잔을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모금 마셨다.그저 평소 높은 곳에서 군림하던 두 사람이 얼마나 추한 꼴을 보일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최 감독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흥미롭게 물었다.“참, 서하야. 너 결혼했니? 남자 친구는 있고?”“네, 결혼한 지 벌써 6년 됐어요.”이서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제 남편도 강 씨예요.”그 말이 떨어지자 맞은편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숨소리마저 멎은 듯했다.
이서하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권나영은 자연스럽게 ‘강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였고, 강신혁마저 입을 열어 부인하지 않았다.이서하의 입가에 자조적인 냉소가 번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반걸음 물러난 뒤, 역겨운 광경에서 멀어지려 몸을 돌렸다.“서하야? 서하 맞니?”그때, 등 뒤에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카리스마가 넘치는 중년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쁨이 가득했다.최 감독이었다.과거 이서하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녀를 정상급 패션쇼 무대에 세워 준 사람이 바로 최 감독이었다. 이서하가 가장 빛나던 시절에도 그녀의 재능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세상에, 정말 너구나!”최 감독은 이서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줄 알았잖아! 그 사고 이후로…… 너, 괜찮았어?”오랜만에 받는 따뜻한 걱정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밀려들었다.이서하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사고 이후, 한때 자랑스러워했던 그녀의 커리어는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흉터와 다리를 저는 후유증은 그녀가 마주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그녀는 좁은 세상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과거의 모든 사람과 조금씩 연락을 끊었다.익숙한 사람들을 더는 만나지 않으면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것은 결코 몸에 남은 상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이서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허리를 폈다.“감독님, 오랜만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저는
“강신혁, 우리 이혼해요.”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 앞에서 이서하는 여전히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했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을 삼킨 것처럼 목 안이 따끔거렸다.맞은편에서 강신혁이 소고기를 썰던 은색 포크가 도자기 접시를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격한 분노 대신 심드렁한 시선만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가 터무니없는 농담이라도 꺼낸 것처럼.“또 왜 이래? 어젯밤엔 화가 나서 집에도 안 들어오더니, 밥 먹는 자리에서까지 나를 피곤하게 해야겠어?”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물잔을 들어 올렸다. 말투는 말을 안 듣는 반려동물을 달래기라도 하듯 부드러웠다.“서하야, 아직 화가 안 풀린 건 알아. 그래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나랑 이혼하면 너 혼자 어떻게 살려고? 지금도 일상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진심이에요. 며칠 뒤에 이혼 서류를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이서하는 무릎 위에 놓인 긴 치마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진심이라는 걸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강신혁은 냅킨을 집어 입가를 느긋하게 닦았다. 미간에 차가운 주름이 잡혔다.“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어젯밤 그깟 일 때문이야? 태호 쪽 애들이 말이 좀 심하긴 했지만, 나영이도 좋은 마음으로 널 타이르려던 거잖아. 네 성격 좀 봐. 툭하면 표정 굳히고 이혼하자고 하고. 그러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널 내 모임에 데리고 다니겠어? 넌 그 사람들이랑 어떻게 어울릴 건데?”그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손가락이 긴 커다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녀를 응시했다.“나랑 이혼하면 어디로 갈 건데? 나 말고 누가 널 먹여 살려 주겠어?”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그녀를 위한 충고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장 여린 곳을 파고들었
이른 아침, 이서하는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넘게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부 강신혁에게서 온 전화였다.그녀는 말없이 화면을 껐다.오늘은 선생님을 만나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의논하기로 했다. 더는 강신혁 때문에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카페 구석자리에서 선생님은 서류 목록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았다.“이건 쇼 연출 과정에 필요한 서류 목록이야. 다음 달 안으로 전부 제출하면 비자가 나오는 대로 언제든 출국할 수 있어.”“감사합니다, 선생님.”이서하는 서류 목록을 재빨리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카페를 나선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강신혁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검은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차갑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이서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가방을 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자신이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됐다. 그가 알게 된다면 돌아올 것은 뻔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태도뿐일 테니까.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먼저 입을 연 것은 강신혁이었다. 그는 화를 억누른 채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여기서 뭐 해? 어젯밤엔 왜 집에 안 들어왔어? 전화도 안 받고. 아직도 화난 거야?”어젯밤 친구들이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반걸음 다가서며 내려다보았다.“서하야, 너무 철없이 굴지 마. 다들 장난이 좀 심했을 뿐이야. 그런데 네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내고 나가 버리면 나영이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예전엔 이렇게 철이 없지 않았잖아.”또 철이 없다고 한다.이서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