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예수의 속은 여전히 다급했다.민두해가 이미 유언장 작성을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걸렸다. 그 안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민도하가 노아리와 예정대로 약혼하겠다고 분명히 말했어도, 계획보다 변수가 먼저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이예수는 만일을 대비해서, 노아리가 쉬는 사이에 병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한 통 걸었다.“이 일 진짜 손 놓고 있을 거야?”“그래도 아리는 당신 딸이잖아.”“또 강서이라는 애가 자꾸 아리 앞길을 막아. 시청에서 항만 재개발 프로젝트 맡고 있다며? 당신이 방법 좀 써 봐. 걔 일이 너무 술술 풀리게 두지 말고.”...강서이가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김설이 바로 따라 들어와 보고했다. “대표님, 조송메디컬 도련님이 또 왔어요.”강서이가 눈꺼풀을 들어 김설을 바라봤다.김설이 얼른 덧붙였다. “제가 돌려보냈어요.”다시 시선을 거둔 강서이는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이어 갔다.김설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이번엔 몇 번이나 더 올까요?”“몰라.” 강서이에게는 그런 걸 맞혀 볼 정도로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그래도 김설은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전 세 번이 한계일 것 같은데요.”강서이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닐 수도 있어.”지금 조송메디컬의 사정은 꽤 심각했다.결국 서태우에게 최소한의 책임감이 남아 있느냐에 달린 문제였다.김설이 나간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급하게 들어왔다. “대표님, 성세그룹 성 대표님이 오셨어요.”강서이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추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왔대?”“협업 건으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세요.” 김설은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강서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그동안 강서이와 성이남이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번번이 성이남 쪽에서 정중하게 거절했다.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먼저 찾아와 협업을 제안한다고?‘그로스캐피탈을 시장 진열대에 놓인 물건처럼 마음대로 골랐다 내려놨다 할
강서이는 예전 일의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더 늦으면 회의 지각하겠다.”“그럼 너 먼저 회사 가.”“너는?”한지수는 손에 든 블랙카드를 흔들었다. “난 당연히 쇼핑이지. 발목도 거의 괜찮아졌어. 오래 걷지만 않으면 돼. 걱정 마.”강서이는 정말 시간이 촉박했다. 한지수에게 몇 가지 주의만 당부하고 급하게 회사로 돌아갔다.한지수는 곧바로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결국 노아리의 병실이 어디인지 알아냈다.한지수는 SNS에 익명 계정으로 접속해서 불꽃놀이 논란이 한창인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불꽃놀이 행사 기획 책임자가 어디 입원해 있는지 압니다.]‘조용히 숨어 있고 싶다고?’‘어림도 없지.’병실 안에서 노아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고작 불꽃놀이 한 번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큰 논란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여론이 커진 뒤 연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이었다.프라임로드투자 주주들이 압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민도하가 직접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이미 소문을 들었다.성이남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벨 소리가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울리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성이남이 상태를 묻는 메시지도 보냈지만 노아리는 답하지 않았다.이예수가 달랬다. “이제 그만 속상해해. 지금 중요한 건 도하가 약혼을 취소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내가 방금 도하한테 전화했으니까 곧 올 거다. 표정 좀 정리해.”노아리가 대답하자마자 민도하가 병실로 들어왔다.민도하는 들어오자마자 노아리부터 살폈다. “몸은 좀 어때?”노아리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이예수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열이 40도까지 올랐는데도 괜찮다고 하네. 내가 일찍 알아서 다행이지. 네가 걱정할까 봐 나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너도 바쁜데 짐이 되기 싫다면서.”“엄마.” 노아리는 더 말하지 말라는 듯 이예
강서이는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살아나겠지.”민도하는 원래부터 노아리 일이라면 끝까지 책임지고 막아 주는 사람이었다.논란은 빠르게 커졌고 소문도 그만큼 빨리 퍼졌다.강서이는 퇴근도 하기 전에 프라임로드투자 내부 상황을 전해 들었다.불꽃놀이 논란 때문에 영승반도체 주가는 계속 떨어졌고, 여파가 프라임로드투자까지 번지고 있었다.주주들의 불만도 상당했다.민도하는 결국 긴급 주주총회를 열 수밖에 없었다.들리는 말로는 주주들이 한목소리로 노아리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했다.그 입장이라는 게 자진 사퇴 같은 조치일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민도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주주들의 압박을 혼자 정면으로 받아냈다.누가 봐도 진심이었다.다만 민도하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강서이도 그 점은 조금 궁금했다.불꽃놀이 논란의 여파는 계속 커졌다. 프라임로드투자 사옥에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돌았다.당사자인 노아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했다.다음 날 강서이가 한지수의 발목을 다시 진료받게 하려고 병원에 갔을 때, 한지수는 기어이 구경하러 가겠다고 졸랐다.강서이가 바로 막았다.한지수가 볼멘소리를 냈다. “왜 못 가게 해? 나 그냥 노아리 망신당하는 거 좀 보고 싶다니까!”“나 회사 돌아가서 회의해야 돼. 제발 나 좀 그만 끌고 다녀.”한지수는 ‘회의’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듯했다. “너는 맨날 회의야? 나 온 지 이틀인데 이틀 내내 회의만 하고 있잖아. 나랑 놀 시간도 없고.”“회의 끝나면 놀아 줄게.”너무 익숙한 말이었다. 어제도 똑 같은 말을 들었다.한지수가 막 항의하려던 때, 강서이가 블랙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이따 비서 붙여 줄 테니까 쇼핑하고 와. 사고 싶은 거 마음대로 사고.”한지수의 태도가 곧바로 180도 바뀌었다. “알았어! 자기야, 회의 잘하고 와. 난 신경 쓰지 마.”병원 로비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그 와중에도
그로스캐피탈 정문 앞에서 서태우는 한참을 서성댔다. 그러다 결국 안으로 발을 들였다.안내 데스크 직원은 곧바로 서태우를 알아봤다. 예전에는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직원이 강 대표가 자리에 없다고 말하려던 참에 옆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서태우 도련님 아니야?”심심해서 견디지 못한 한지수가 회사 안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원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발목을 삐었는데도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가 마침 서태우와 마주쳤다.한지수는 서태우를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 인간이 재가 되어도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예전에 서태우가 절친 강서이를 꽤 많이 괴롭혔기 때문이다.한지수는 이것저것 다 어설펐지만 원한을 기억하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본인 말로는 머릿속에 다른 지식이 안 들어가는 이유도 이미 원한으로 꽉 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잠깐만. 해가 서쪽에서 떴나 확인 좀 해 보자.”한지수는 정말 창가까지 가서 밖을 확인했다. 해가 평소처럼 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의심스러운 눈으로 서태우를 봤다. “시력이 안 좋아? 문 잘못 찾은 거 아니야?”“그럼 잘 가. 배웅은 안 할게.”서태우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섰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분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를 뿐만 아니라 부탁하는 태도까지 보여야 했다. “강서이 만나러 왔어.”“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서태우가 어금니를 꽉 다문 뒤 목소리를 높였다. “강서이 만나러 왔다고!”“아, 바빠. 돌아가.” 한지수는 시원하게 손을 휘저으며 성의 없이 쫓아냈다.서태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공적인 일로 할 말이 있어.”“무슨 일이든 지금은 바빠.”“너 진짜...”한지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뭐?”서태우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 삼키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강서이랑 꼭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네가 좀 전해줘.”“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나한
“안 됩니다!” 서태우는 누구보다 서정송이 조송메디컬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조송메디컬이 정말 파산한다면, 서정송도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제가 다시 방법을 찾아볼게요. 꼭 찾아내겠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서정송은 텅 빈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무슨 방법이 더 있겠냐? 방법이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서태우는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예전에 스마트 헬스케어 협업 건으로 강서이를 찾아가라고 했을 때, 난 그게 조송메디컬의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넌 그 흐름을 놓쳤고, 회사의 마지막 기회까지 날려 버렸지.”“죄송합니다...”“내가 계속 강서이와 관계를 잘 유지하라고 했잖아. 넌 늘 듣지 않았지.” “걔는 능력이 있어. 민두해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고. 강서이랑 손잡으면 너한테 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 볼 일은 없었어.”서태우는 고개를 가슴팍까지 파묻을 듯 푹 숙였다. 앞으로도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예전에 서태우도 강서이를 찾아간 적은 있었다. 하지만 강서이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때 서태우는 화가 났다. 강서이가 사적인 감정을 일에 끌어들인다고 생각했다.강서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믿지 않았다.학벌도 화려하지 않았고 경력도 내세울 만하지 않다고 봤다.지난 7년 동안 해 온 일이라고는 잡무를 도맡는 비서 일뿐이라고 깎아내렸다.그래서 강서이를 포기하고 노아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노아리는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인재였고, 세계적인 투자은행에서 일한 경력도 있었다. 대형 항만 인수 프로젝트까지 주도한 적이 있었다.이력만 놓고 보면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노아리와 함께하면 조송메디컬의 추락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능력도 증명하고, 서정송과 서씨 집안이 자신을 다시 보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런데 결과는 어땠나?서정송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G시에 네 이름으로 5천만 달
강서이는 사람들 너머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민도하와 노아리를 발견했다.두 사람은 막 비행기에서 내린 듯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그런데 언론사들이 소식을 미리 입수했는지 일찌감치 공항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기자들이 정보를 얻었다면 환경단체 쪽도 알았을 가능성이 컸다.조금 전 소리를 지른 사람들은 바로 환경단체 관계자들이었다.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온 듯했다. 항의 구호를 외치는 와중에도 논란의 당사자들을 향해 썩은 달걀을 던졌다.민도하는 내내 노아리 앞을 가리면서, 기자들의 카메라에 얼굴이 제대로 잡히지 않도록 막아 줬다.썩은 달걀이 날아오자 곧장 몸을 틀어서 노아리의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그 모습이 전부 강서이의 눈에 들어왔다.강서이의 시선이 잠깐 느슨해졌다. 지나치게 익숙한 장면 탓에 생각이 과거로 밀려났다.예전에는 강서이도 저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민도하의 앞을 막으면서, 썩은 달걀을 대신 맞은 적이 있었다.그때 한지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강서이는 시선을 거두고 전화를 받았다. 방금 전 스쳐 간 묘한 감정은 이미 가라앉았고, 예상했던 일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담담할 뿐이었다.“자기야, 나왔어?”강서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한지수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나 발목 삐었어!]강서이는 한지수를 만나자마자 병원으로 데려가 발목부터 진료받게 했다.의사는 한지수의 발목을 살피는 내내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은 자꾸만 멀쩡한 쪽 발에 신고 있는 하이힐로 향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예쁘게 꾸미고 싶은 건 이해하는데요, 굽이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키도 큰 편인데 굳이 이렇게 높은 걸 신을 필요가 있어요? 이러니 발목을 안 삘 수가 있나요.”한지수는 머쓱하게 코끝을 만졌다. “요즘 여성 요원 역할을 하나 맡았거든요. 하이힐 신고 액션하는 장면이 많아서 미리 적응하려고 그랬어요.”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진료를 마친 뒤, 강서이는 한지수를 부축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병원 야외 주차장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