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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모엘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자 가족들은 모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잖아. 다 가족인데 무슨 말을 못 하겠어? 나도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네, 알고 있어요.”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얼굴에는 무미건조한 미소만이 희미하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정말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지, 그제야 모두 안심한 얼굴로 수연을 데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2층 침실로 향했다.

계단을 막 오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느새 다가온 고진탁이 내 곁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화 안 난 거야?”

걱정이 묻어나는 그 한마디에, 애써 참던 눈물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가슴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서러움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목이 메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고진탁은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수안이 너 진짜 철들었구나? 이런 일로 화낼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사실 너랑 상의할 문제가 있어.”

고진탁은 내 눈을 피한 채 고개를 돌렸다.

“다음 주 결혼식은 미루자. 예전에 수연이 성인이 되면 I국에 데려가 오로라를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이제 성인식도 끝났고, 계속 약속 지키라고 조르더라. 그래서 며칠 뒤에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님까지 다 같이 수연이랑 I국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어때?”

고진탁은 옅게 미소 지었는데 그 눈빛에는 수연을 향한 다정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차피 아직 청첩장도 안 돌렸잖아. 결혼식이야 며칠 미뤄도 괜찮잖아.”

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어 버렸고 감동해서 흘렸던 눈물이 너무도 우스워졌다.

99번이나 버림받고도 나는 아직도 가족들의 사랑을 기대했던 걸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진탁은 답답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수연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어. 그것도 그렇게 먼 곳은 이번이 처음이고.”

“가족이라면 당연히 곁에서 함께해 줘야지. 그리고 너도 오로라 본 적 없잖아? 우리 그냥 신혼여행을 조금 먼저 다녀온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좋아.”

고진탁은 계속 나를 설득하려다 내 대답을 듣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라고?”

나는 길게 숨을 내쉰 뒤 담담하게 말했다.

“결혼식 취소하는 거 동의한다고.”

고진탁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말을 바로잡았다.

“무슨 취소야? 연기지. 결혼식을 어떻게 취소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수연이 있는 한, 우리의 결혼식은 결코 예정대로 치러질 수 없었다.

수연은 나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탐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수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가족들의 편애가 있었기에 수연은 언제나 나를 짓밟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약혼자인 고진탁마저 수연을 더 아끼기 시작했다.

눈은 따갑고 시큰거렸고 몸 곳곳에서는 서서히 가려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마신 망고주스 때문에 결국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인 뒤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침실에는 늘 알레르기 약을 준비해 두었고,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얼른 약부터 먹어야 했다.

“언니, 진탁 오빠랑 가족이랑 같이 I국에 가서 오로라 보는 게 그렇게 싫어?”

등 뒤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잔뜩 서운함이 묻어 있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더 재촉해 위층으로 향했다.

수연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족들 앞에서 울고 떼만 쓰면, 모두가 나를 몰아세우며 수연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참지 못한 사람은 오빠였다.

“그만해! 이수안! 수연이 말하는데 못 들은 것처럼 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 안 났다고 해 놓고, 이제는 얼굴까지 굳히고 사람을 무시하는 거냐? 그게 가족을 대하는 태도야?”

나는 오빠의 고함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 없는 비난은 어린 시절 내내 들어왔기에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막 2층 계단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갑자기 두피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누군가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잡아 끌어당긴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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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9번 끝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10화

    내 눈가는 붉어졌다.지난 십몇 년 동안 외면받으며 살아온 시간을 떠올리자, 이미 마음속으로는 모두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가슴 한편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오빠에게는 기대를 걸었고, 수연이에게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죠.”“그러면 저는요? 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잖아요.”“심지어 제 이름조차 아무런 기대도 담겨 있지 않았어요.”“오빠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부터 지켜주겠다는 의미로 수호라고 지으셨고, 수연이는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로 수연이라고 지으셨다면서요.”“애초에 절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낳으셨어요? 이제 저는 떠났잖아요.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고 서로 각자의 삶을 사는 게 나빠요?”엄마의 눈물은 멈추지 못하고 흐르고 있었다.“수안아... 엄마 아빠가 잘못했어. 우리가 정말 잘못했어.”“너도 우리 딸이잖아. 피를 나눈 가족인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연을 끊을 수 있겠니.”나는 엄마를 똑바로 바라봤다.“차라리... 엄마아빠 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그 말을 끝으로 나는 뒤돌아 백스테이지 안으로 들어갔다.엉엉 울고 있는 가족들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아마 그 한마디가 너무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그 후로 오랫동안 가족들은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과거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알레르기가 있는 나를 창고에 가둔 일, 약혼자인 고진탁이 처제가 될 수연과 여행을 가기 위해 결혼식을 미룬 일까지.모든 사실이 팬들에게 알려졌다.내 노래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내 삶을 알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사람들은 냉정하고 무정했던 가족들과, 끝없이 나를 상처 입힌 고진탁을 거세게 비난했다.특히 수연이는 더 큰 비난을 받았다.내가 사라진 뒤 자신이 대신 고진탁과 결혼하겠다고 했던 말,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까지 인터넷에 퍼졌다.아마 나를 안쓰럽게 여겼던 한 도우미가 그날의 일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분노한 팬들은 별장 앞으로 몰려갔고 수연에게

  • 99번 끝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9화

    나는 말없이 고진탁을 바라보다가 남자가 끝내 시선을 피하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맞아. 내가 양보해야 했어. 그래서 너를 수연이에게 양보한 거야. 둘이 만나는 게 가장 좋은 결말 아니야?”고진탁은 다급히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차갑게 손을 들어 남자의 말을 막았다.“널 향한 내 마음은, 네가 몇 번이고 나더러 양보하라고 했던 그 순간들 속에서 이미 다 사라졌어.”“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앞으로도 널 위해 날 희생할 생각은 없어.”“아무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지만...난 내 자신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거든.”나의 말에 고진탁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감당하지 못할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나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고 무대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세 사람에게 길이 막혔다.오빠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우리를 떠난 뒤로 정말 많이 달라졌네.”아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수안아... 네 일기장 읽었어. 그제야 그동안 네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 왔는지 알게 됐어.”나는 떠나기 전 방 한구석에 버려두었던 일기장을 떠올렸다.설마 그것을 찾아 읽었을 줄은 몰랐다.아빠는 무거운 목소리로 지난 세월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았고, 그 과정에서 내 성장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했다.그리고 수연이 태어난 뒤에는 내 어린 시절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 사랑을 모두 막내인 수연에게 쏟게 되었다고 했다.또 너무 오랫동안 나를 외면한 탓에, 이제는 어떻게 나를 대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렸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나는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엄마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그날은 정말 우리가 잘못했어. 네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 그렇게 큰 고통을 겪게 했잖아.”엄마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고 목소리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 99번 끝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8화

    “저요? 안 돼요. 저는 한 번도 무대에 올라 공연해 본 적이 없어요.”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사래를 쳤다.하지만 담당 교수님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야. 맑고 깨끗한 음색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능이 아니야.”“게다가 네가 만든 음악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말이야.”교수는 나를 깊이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깊은 음악을 만들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어.”“지나온 모든 고통은 결국 앞으로 성공에 이르는 길이 되어 줄 거라는 걸. 너 자신을 믿어!”“그리고 가진 재능을 마음껏 펼쳐봐. 너는 더 큰 무대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담당교수님의 말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 음악만 듣고도 내 서러움과 오랫동안 참아왔던 나의 마음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고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이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고 내가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했다.담당 교수님이 주최한 음악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나는 직접 만든 신곡을 들고 무대에 올랐고, 첫 무대부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사람들은 내 독특한 음색을 기억했고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나의 노래를 기억했다.담당교수님의 말처럼, 지난날의 고통은 나를 무너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더 높은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창작의 영감은 끊임없이 샘솟았다.운명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던 것에서 시작해, 아픈 과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짧지만 눈부신 삶을 찬미하는 노래에 이르렀다.나는 내 삶의 모든 여정을 노래에 담았다.사람들은 내 음악을 통해 내가 어떻게 한 번씩 탈바꿈해 왔는지를 지켜봤다.그렇게 나는 단숨에 이름을 알렸다.사람들은 나를 전설적인 차세대 전도유망한 음악가라고 불렀다.담당교수님은 나와 함께 여러 도시를 돌며 공연을 이어 갔다.그리고 집을 떠난 지 5년째

  • 99번 끝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7화

    구조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알레르기 때문에 기도가 부어올라 질식한 채 창고 안에서 의식을 잃고 있었다.다행히 구조대원들은 베테랑들이라 곧바로 알레르기 주사를 놓았고, 나는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환자분은 알레르기 때문에 기도가 부어올랐어요. 지금은 부기가 많이 가라앉았지만, 병원에서 정밀 검사받아보세요.”의료진은 나를 부축해 들것 위에 눕혔다.바로 그때, 허 집사가 뒤뜰에서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집 안 가득한 구조대원들을 본 허 집사는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죠?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그러다 들것 위에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른 나를 발견한 순간, 허 집사의 숨이 턱 막혔다.허 집사는 가슴을 움켜쥔 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고 구급대원들은 다급하게 외쳤다.“빨리! 환자를 구급차에 태우세요!”한바탕 정신없는 상황이 지나간 뒤, 의료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죄송한데 방금 다른 환자분이 급성 심근경색이어서요. 지금 바로 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구급차 공간이 넉넉하지 않아요.”나는 그 뜻을 알아들었기에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말했다.“사람부터 살려야죠. 저는 지금 많이 괜찮아졌어요. 조금 있다가 혼자 병원에 갈게요. 비용은 제가 낼 테니, 꼭 살려주세요.”나는 허 집사를 구급차에 태워 보내고 혼자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내 방에는 내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갈아입을 옷 몇 벌, 낡은 일기장 하나, 거의 다 써 가는 클렌징폼 그뿐이었다.액세서리도 명품 가방도 하나 없었다.문득 수연의 방이 떠올랐다.커다란 드레스룸과 화려한 화장대, 그 위를 가득 채운 수많은 액세서리들까지.그러한 것들을 생각한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나는 이 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다.‘그럴 바엔 떠나자.’이곳에는 더 이상 내 자리가 없었다.나는 옷가지만 간단히 낡은 캐리어에 넣고는 99번의 서러움이 빼곡히 적힌 일기장을 한참 바라봤다.끝내 그

  • 99번 끝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6화

    곧 아빠와 엄마는 다급히 앞으로 달려갔다.시신을 확인한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허 집사...?”“허 집사는 왜 죽은 거야?”“아니... 수안은? 수안이 여기 없다면 대체 어디로 간 거지?”죽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수연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러고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언니가 일부러 숨어서 우리 반응을 구경하는 거겠죠. 가족들이 걱정할 걸 뻔히 알면서 죽은 척까지 한 거잖아요.”“다들 언니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아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코웃음을 치며 분노를 터뜨렸다.“정말 철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수안이 너무 심하네. 우리가 얼마나 걱정할지는 생각도 안 한 거야?”오빠와 고진탁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조금 전 겪은 일로 체면을 구겼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나를 향한 원망에 휩싸였다.고진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내게 전화를 걸었으나 끝내 연결되지 않자 곧바로 메시지를 쏟아냈다.[그만해, 이수안! 우릴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이런 일로 장난을 치다니 정말 악질이네.][당장 와서 우리한테 사과해. 안 그러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결혼식도 바로 취소할 거니까.]오빠도 싸늘한 얼굴로 메시지를 보냈다.[내가 창고에 가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그렇게 자신 있으면 앞으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마. 난 너 같은 독한 동생 필요 없어.]아빠와 엄마도 차츰 진정하기 시작했다.조금 전의 실수는 두 사람을 몹시 민망하게 만들었고, 이제는 나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허 집사는 우리 집에서 20년 동안 일했어.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지. 오늘 이런 일이 생긴 이상, 장례만큼은 제대로 치러야 해.”다들 관심은 모두 허 집사의 장례식으로 향했다.정작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먼저 찾아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내 실종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수연이었다.허 집사의 장례식에 참석해서조차 콧노래

  • 99번 끝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제5화

    엄마는 그대로 눈이 까뒤집히며 뒤로 쓰러지는 것을 오빠가 간신히 몸을 받아냈다.아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비틀거리며 별장 안으로 뛰어 들어간 아빠는 부서진 창고 문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우리 딸... 수안아...”고진탁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목소리마저 떨렸다.“아니... 그럴 리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안이 멀쩡했잖아. 지금도 분명 괜찮을 거야.”정신을 차린 고진탁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그때 수연이 뒤에서 고진탁의 팔을 붙잡았다.“진탁 오빠, 가지 마요. 엄마가 쓰러졌잖아요.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죠.”오빠는 엄마를 부축한 채 어쩔 줄 몰라 고진탁을 바라보자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빨리 차에 태워요. 병원으로 가요.”잠시 말을 멈춘 고진탁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수안이도 보러 가야 하니까.”말끝은 이미 울음에 잠겨 있었다.모두 허둥지둥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에 도착하자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다.“수안아... 우리 딸...”엄마는 오빠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놓지 않았다.“괜찮은 거지? 아직 창고에 있는 거 맞지? 얼른 가서 우리 딸 꺼내 줘.”오빠는 시선을 피했고 차마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수안이는 이제 창고에 없어요. 지금... 보러 가요.”“보러 간다고? 어디로... 어디에 가서 본다는 거야?”엄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의료진의 안내를 받아 시신 안치실 앞에 도착한 순간, 엄마는 또다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곧 의료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오늘 구급차로 이송됐지만 끝내 살리지 못한 분은 한 분뿐이니 마지막으로 인사하시죠.”문이 열리자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 위에 흰 천으로 덮인 시신 하나가 보였다.그 말에 엄마는 순간 무너져 내렸는지 오빠를 미친 듯이 때리며 울부짖었다.“다 너 때문이야! 왜 수안이를 창고에 가둔 거야! 네가 우리 딸을 죽였어! 내 딸 돌려내!”오빠는 밀려 비틀거렸지만 끝내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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