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메뉴는 이거다."나는 비장하게 칼을 들었다.스팜을 숭덩숭덩 썰어 솥뚜껑 위에 깔았다. 소시지도 어슷썰기로 듬뿍.거기에 잘 익은 묵은지를 포기째 넣고, 베이크드 빈과 다진 마늘, 고춧가루를 팍팍 뿌렸다.마지막으로 사골 육수(이건 레토르트지만)를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보글보글-얼큰하고 진한 냄새가 진주만 기지의 밤공기를 장악했다.버터와 치즈 냄새에 찌들어 있던 미군들의 코를 강타하는, 치명적인 한국의 향기."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오 갓. 매운 냄새인데... 침이 고여."어느새 S급 헌터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스티브, 리 웨이, 소피아.다들 훈련하다 말고 왔는지 땀범벅인 채로 솥뚜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게 무슨 요리인가?"스티브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부대찌개]."레비아탄이 친절하게 통역해 줬다."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에 한국의 김치를 넣어 끓인 탕입니다. 한미 동맹의 상징 같은 음식이죠.""동서양의 조화라니!"나는 라면 사리 5개를 투하했다.국물을 머금은 면발이 꼬들꼬들하게 익어갔다."자, 드시죠. 숟가락 챙기시고."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숟가락들이 난무했다."뜨거워! 근데... 맛있어!!"스티브가 스팜과 김치를 같이 집어 먹더니 눈을 크게 떴다."이 햄... 내가 알던 그 싸구려 스팜이 맞나? 김치의 산미가 기름기를 잡아주면서... 완벽해!""국물이 예술이군요."리 웨이는 말도 없이 밥을 국물에 말아 먹고 있었다. 무신 체면도 다 버린 듯했다.소피아는 매워서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하아, 하아... 매운데... 계속 들어가요."식구(食口).밥을 같이 먹는 입.서로 다른 나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지만, 솥뚜껑 앞에서 우리는 하나였다.전투의 피로가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형님. 나도... 나도...]스마트워치에서 레비아탄이 울먹거렸다.[나도 부대찌개... 국물에 밥 말아서...]'
하지만.[형님. 쟤 뭐 하냐? 윙크해?]레비아탄이 코웃음을 쳤다.나 역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내 뱃속에 있는 빙정은 물리적인 냉기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간섭마저도 꽁꽁 얼려버리는 절대적인 방벽이었다."눈알 굴리지 마라. 어지럽다."나는 조종간을 당겼다.레비아탄이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대기 중의 수분이 순식간에 응결되며 거대한 얼음 기둥이 형성되었다.끝이 뾰족하게 벼려진, 길이 50미터짜리 [빙결의 창]."밥상머리에서 반찬 투정하면 혼나야지."콰직-!망설임은 없었다.레비아탄이 얼음 창을 양손으로 잡고, 그대로 놈의 거대한 눈동자 한복판에 꽂아 넣었다."끼에에에엑-!!!!"괴수의 단말마가 태평양 한가운데를 울렸다.고막이 터질 듯한 비명.하지만 그 비명조차 오래가지 못했다.파지직- 쩍!창이 박힌 곳을 기점으로 푸른 성에가 번져나갔다.동공, 시신경, 그리고 그 뒤에 연결된 거대한 뇌까지.순식간에 얼어붙어 기능을 정지했다.꿈틀거리던 수천 개의 촉수들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하늘을 가리던 거대한 다리도 쿵 소리를 내며 바다로 떨어졌다.[심해 군주 '폭식의 베히모스' 활동 정지.]"후우..."나는 헬멧을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끝났다.등껍질이 단단해서 고전했지, 배를 까뒤집으니 별거 아니네."자, 이제 수금해야지."나는 레비아탄을 조종해 놈의 명치 부근을 갈랐다.두꺼운 가죽과 지방층을 뚫고 들어가자,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색 광석이 보였다.[SSS급 마석: 군주의 심장]크기가 집채만 했다.지난번 부산 앞바다에서 회수한 것보다 훨씬 크고, 마력의 농도도 짙었다.[우와... 형님! 저거 봐! 마력이 뚝뚝 떨어진다!]레비아탄이 흥분해서 방방 뛰었다.[저거 하나면 나 1년은 충전 안 해도 돼! 아니, 10년도 거뜬해! 빨리 챙겨! 남들이 보기 전에!]나는 녀석의 호들갑에 피식 웃으며 핀잔을 줬다."넌 임마, 우리 둘 시너지로 이미 무한동력 시스템인데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후퇴?'나는 레비아탄의 콕핏에 앉아 생각했다.여기서 물러나면? 하와이가 뚫린다.그다음은 캘리포니아?어디가 됐든, 태평양 전체가 놈들의 놀이터가 된다.'댐이 터지면 우리 집도 잠긴다.'머릿속에 최 여사님의 김치찌개 냄새가,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미혜 누나의 커피 향이 스쳐 지나갔다.그 평범하고 소중한 것들이, 저 더러운 괴물들에 의해 짓밟히는 상상.우드득.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용납 못 한다.내 밥상은 내가 지킨다."레비아탄."[준비됐어, 형님. 출력 120%. 터지기 직전이야.]"가자. 길은 우리가 연다."나는 콕핏 옆에 붙여둔 네잎클로버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누나. 쿠폰 쓰러 갈게. 딱 기다려.'쿠우웅-!레비아탄이 아크 로열의 갑판을 박차고 뛰어내렸다.바다를 향해.치이이익-!착수와 동시에, 레비아탄의 발밑에서 바닷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단순한 발판이 아니었다.내가 달리는 방향으로, 바다 위에 거대한 얼음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닦여나갔다.[기술: 프로즌 로드 (Frozen Road)]"내 뒤만 따라와!!"나는 스피커로 고함을 질렀다."길은 내가 뚫는다!"파파파팟-!레비아탄이 얼음 길 위를 질주했다.쏟아지는 베히모스의 포격을 [빙검]으로 쳐내고, 정면을 가로막는 해수들을 어깨빵으로 날려버렸다.푸른 뇌전을 두른 흑기사가 전장을 가로지르는 모습.그 뒷모습을 본 S급들의 눈에 다시 불꽃이 튀었다."따라가! 뒤처지지 마!"스티브가 가장 먼저 방패를 들고 내 뒤를 따랐다. 리 웨이와 소피아도, 그리고 절망하던 연합군 병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Z급이 뚫어놓은 길은,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통로였다."키에에엑!"베히모스가 나를 인식했다.거슬리는 파리 한 마리가 다가온다고 생각했는지, 놈이 거대한 앞발을 들어 올려 나를 짓밟으려 했다.산맥만 한 질량. 하늘이 가려졌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하지만 하와이의 바다는 푸르지 않았다.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몰려오는 시커먼 먹구름과, 그보다 더 짙고 끈적한 살기(殺氣)가 바다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DEFCON 1 유지 중][적 주력 부대 접근까지 10분.]숨 막히는 긴장감.수천 명의 연합군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해안포를 점검하고 있었고, 아크 로열의 갑판 위에서도 전투기들이 엔진 예열을 마친 상태였다.하지만 나는 레비아탄의 거대한 발등, 그 그늘진 곳에 낚시 의자를 펴고 앉아 있었다."후루룩-"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달달하고 고소한 향기.[막심 모카골드].미혜 누나가 "가서 당 떨어지면 먹어, 머리 쓰는 데는 이게 최고야"라며 챙겨준 비상식량이었다. 미제 전투식량에 들어있는 밍밍한 커피 가루와는 차원이 다른, 영혼을 울리는 단맛이다.[캬... 형님. 설탕 분자 구조가 아주 예술이야. 냄새만 맡아도 뇌 회로가 끈적해지는 기분인데?]레비아탄이 침을 흘렸다(물론 데이터상으로).나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켰다.어제 새벽, 영상 통화 중에 몰래 캡처한 사진.최 여사님, 할머니, 성배 아저씨, 희선이, 히나, 하루 씨, 철수... 그리고 미혜 누나까지.다들 잠옷 바람으로 옹기종기 모여서 브이(V)를 그리고 있는 하숙집 식구들.'다들 점심은 먹었으려나.'사진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쟁터의 소음이 잠시 멀어지는 기분.지구 반대편에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어이, 하."그때,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스티브가 다가왔다.그는 한 손에 펜과 종이를 들고 있었다. 쓱 보니 'To my family...'로 시작하는 글귀가 보였다.유서?"이 상황에 커피인가? 여유가 넘치는군."스티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레비아탄의 통역이 귓가에 꽂혔다."진정제 같은 겁니다. 한 잔 타 드릴까요? 설탕 두 개 프림 둘?""아니, 됐어."스티브
지잉-내 시야가 흑백으로 변했다.그리고 그 흑백 세상 속에, 시퍼런 형광색으로 빛나는 실루엣들이 보였다.갑판 위를 기어 다니는 수십 마리의 투명 상어들."찾았다."나는 조종간을 꽉 쥐었다."꼭꼭 숨어라. 지느러미 보일라."파앗-!레비아탄이 갑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스티브의 뒤를 노리던 투명 상어의 머리를 밟아버렸다.퍼억-!"키에엑?!"밟힌 놈의 은신이 풀리며 흉측한 본모습이 드러났다.스티브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신입?!""12시 방향! 둘!"나는 외쳤다.레비아탄의 손끝에서 고압 전류가 레이저처럼 뻗어 나갔다.[기술: 플라즈마 커터 (Plasma Cutter)]치이이익-!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숨어있던 상어 두 마리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잘린 단면이 순식간에 구워지며 갑판 위로 툭, 툭 떨어졌다."좌표 찍어줄 테니까 밥값들 하십쇼!"나는 레비아탄의 센서 데이터를 S급들의 통신기에 공유했다.그들의 고글에 놈들의 위치가 붉은 점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하! 이제 보이는군!"스티브가 씨익 웃으며 방패를 던졌다.정확히 명중. 놈의 대가리가 박살 났다."잘했다, 꼬마!"리 웨이도 신이 났다.위치가 보이면 S급들에겐 사냥 놀이일 뿐이다.그의 언월도가 춤을 출 때마다 상어들이 회처럼 썰려 나갔다.하지만 놈들의 본대는 바다 밑에 있었다.항모의 밑바닥을 갉아먹고 있는 놈들."입수한다."레비아탄이 갑판 난간을 뛰어넘었다.물속으로? 아니.치아아악-!레비아탄의 발바닥에서 고압의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수면 위를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지는 [초저공 호버링(Hovering)]."올라와라, 이 새끼들아!"나는 수면을 손으로 훑으며 지나갔다.손끝에서 흘러나온 전류가 물속으로 파고들었다.지지직!숨어있던 놈들이 감전되어 튀어 올랐다.마치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것처럼."타격(Strike)."파파파팟-!레비아탄이
[밤 10시 / 하와이 인근 해상]전투가 끝난 직후의 고요함.화약 냄새와 비린내가 섞인 바닷바람이 아크 로열의 갑판을 스치고 지나갔다.병사들은 파손된 장비를 수습하느라 분주했고, 나는 갑판 한구석에 낚시 의자(하숙집에서 챙겨옴)를 펴고 앉아 있었다.보글보글-휴대용 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내 앞에는 컵라면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한국인의 영혼, [육개장 사발면]."역시 전투 후엔 탄수화물이지."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스프를 뜯었다.그때, 거대한 그림자들이 내 위로 드리워졌다."킁킁... 또 무슨 냄새지?"스티브 레오였다. 덩치 산만 한 양반이 코를 벌름거리는 꼴이 제법 귀여웠다.그 뒤로 리 웨이와 소피아도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S급 헌터들이라 그런지 밥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한국식 컵라면입니다. 드실래요?"나는 물이 끓은 포트를 들어 올렸다."좋지. 이상하게 배가 고프군."스티브가 쭈뼛거리며 내 옆, 탄약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리 웨이는 "흥, 인스턴트인가."라고 중얼거렸지만, 젓가락을 챙기는 손은 누구보다 빨랐다. 소피아는 아예 내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컵라면을 관찰했다."자, 물 붓습니다. 3분 대기."물을 붓고 뚜껑을 덮었다.그리고 나는 나무젓가락을 쪼개 뚜껑 위에 콕콕 찔러 고정시켰다."오! 저거... 획기적인 기술인데!"스티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겨우 뚜껑 고정하는 거 가지고 저러다니. 미국엔 이런 문화가 없나?"자, 해보세요."나는 젓가락을 넘겨줬다. 스티브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낑낑대며 뚜껑을 찌르려다 컵을 엎을 뻔했다.옆에서 리 웨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무공(武功)을 실어 젓가락으로 뚜껑을 완벽하게 봉인했다. 쓸데없이 고퀄리티다.3분 뒤.우리는 하와이 밤바다를 배경으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면치기를 시작했다."뜨거워! 근데... 맛있어!"스티브가 연신 감탄사를 외치며 국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