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오전 10시, 3층 회의실.
디자인팀 전원이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맨 앞자리에는 해솔. 벽 스크린에는 지오의 로고 초안이 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결제과의 리브랜딩이었다. 부산에 본사를 둔 40년 된 과자 회사. 쉽게 말해 브랜드 새 단장 작업이었다. 지오의 안은 단순했다. 40년 동안 과자 봉지에 찍혀 있던 붓글씨 로고를 그대로 살리고, 뭉개진 선만 깔끔하게 정리했다. 색도 원래의 주황을 조금 밝혔을 뿐이었다. 해솔이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안전하네요.” 펜 끝으로 테이블을 톡 쳤다. “5년 전에 많이 보던 방향이에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5년. 지오에게는 그 숫자가 그냥 디자인 유행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력서에 찍힌 공백도 정확히 5년이었다. 어제는 스물다섯 살 막내에게 툴까지 배웠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유진이 지오와 해솔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옆자리 선임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요즘 리브랜딩은 좀 더 과감하게 가는 추세긴 하죠. 젊은 층 겨냥해서.” 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안으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지오는 알았다. 여기서 입을 다물면 이 안은 오늘로 끝이다. 그리고 ‘5년 전 사람’이라는 딱지도 그대로 붙어 남을 것이다. “요청서 첫 줄이요.” 지오의 목소리였다. 모두가 돌아봤다. 입사 이틀째 신입이 팀장 말에 토를 다는 건, 이 회의실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지오는 요청서를 펼치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오래된 브랜드가 새것처럼 보이지 않게.’ 클라이언트가 제일 먼저 쓴 문장이에요.” 해솔의 펜이 멈췄다. “요청서에 적힌 기존 구매층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에요. 마트에서 포장만 보고 늘 사던 걸 집어 가는 분들이고요. 로고가 확 바뀌면 다른 과자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칩니다.” 지오는 화면 속 붓글씨를 가리켰다. “젊은 층은 그다음 문제예요. 이번 요청의 핵심은 기존 손님을 안 놓치는 거고요. 안전한 게, 요구사항입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유진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와. 옆자리 선임은 요청서를 뒤적이다가 첫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정말로 첫 줄에 그 문장이 있었다. 몇몇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해솔은 지오를 봤다. 면접 날처럼, 정면으로. 안경 너머의 눈빛은 읽히지 않았다. 지오도 피하지 않았다. 어제는 먼저 눈을 내렸다. 오늘은 아니었다. 해솔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그 안으로 PT 하세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차갑고, 정확했다. “내일 9시. 본부장님 앞에서.” 그리고 덧붙였다. “혼자서요.” 다음 날 오전 9시, 본부장실 옆 작은 회의실. 지오는 결국 밤을 새웠다. 세수를 두 번 했는데도 눈이 뻑뻑했다. 어제 해솔이 던진 ‘혼자서요’가 밤새 귀에 걸려 있었다. 회의실에는 셋뿐이었다. 본부장, 해솔, 그리고 지오. “시작하세요.” 해솔이 말했다.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지오는 화면 넘기는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이 넘어가지 않았다. 한 번 더 눌렀다. 그대로였다. 해솔은 도와주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보기만 했다. 지오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노트북 키보드로 화면을 넘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툴은 서툴러도, 말은 막히지 않았다. “한결제과 로고는 40년 동안 과자 봉지에 찍혀 있었습니다. 이번 안의 목표는 하나예요. 손님이 마트 진열대에서 봉지를 집었을 때, ‘어, 이거 그거네’ 하는 그 1초를 지키는 겁니다.” 본부장이 턱을 괴고 들었다. 화면이 몇 장 넘어가는 동안, 한 번도 딴 데를 보지 않았다. “그럼 젊은 층은 어떻게 잡아?” “로고 말고, 포장 뒷면이랑 SNS에서요. 얼굴은 그대로 두고 말투만 바꾸는 겁니다.” 본부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얼굴은 그대로, 말투만. 좋네. 한결 사장님이 딱 좋아할 소리야.” 어느새 해솔의 팔짱이 풀려 있었다. 본부장이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 누가 잡았어?” 지오가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권지오 씨 안입니다.” 해솔이었다. 지오는 고개를 돌렸다. 해솔은 지오를 보지 않았다. 화면만 보고 있었다. “그래? 문 팀장도 이 방향 좋다고 봐? 문 팀장 스타일은 아닌데.” “어제 제가 한 번 반려했는데,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올렸습니다.” 해솔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기가 어제 반려한 안이라는 걸, 본부장 앞에서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지오는 해솔의 옆얼굴을 봤다. 7년 전과 같은 옆얼굴이었다. 턱선이 조금 날카로워졌을 뿐. 해솔은 끝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역시 문 팀장이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추천할 때부터 알아봤지.” 본부장이 서류를 덮었다. “부산 본사 미팅도 이 방향으로 가지. 권지오 씨도 내려가서 직접 설명하고. 일정은 문 팀장이 잡아.” “네.” 해솔이 짧게 답했다. 부산. 지오는 그 단어를 속으로 한 번 더 굴려 보았다. 본부장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지오는 노트북을 챙겼다. 손이 조금 떨렸다. 밤을 새워서인지, 방금 들은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해솔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오 옆을 지나칠 때,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이번 한 번이에요.”어머니는 카페를 나서자마자 곧장 옆 건물로 걸어갔다. 굽 낮은 구두가 보도블록 위에서 또각또각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엄마. 잠깐만요.”지오가 뒤따라가며 불렀다.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회전문을 밀고 로비로 들어섰다.점심시간이 끝난 로비는 한산했다. 안내데스크 직원 둘, 택배 상자를 옮기는 기사 하나. 어머니는 로비 안내판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안내데스크를 지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곧장 향했다.“엄마, 제발.”지오가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어머니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해솔이 나왔다. 외근용 노트북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휴대폰으로 뭔가를 확인하면서. 안경 너머 눈이 화면에서 들어 올려졌다.셋 사이의 거리는 열 걸음 남짓이었다.어머니가 멈췄다.어머니의 얼굴이 굳는 걸 지오는 옆에서 봤다. 방금 휴대폰으로 본 증명사진 속 얼굴이었다. 그리고 7년 전 식탁 위, 뒷모습뿐이던 그 사진의 주인이었다. 어머니는 해솔을 알아봤다.해솔은 어머니를 몰랐다.해솔의 눈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중년 여자였다. 단정한 정장, 진주 귀걸이. 그리고 자기를 똑바로 노려보는 차가운 눈. 해솔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혀졌다. 누구지, 하는 얼굴이었다.그러다 해솔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 갔다.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있는 지오에게로.어머니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엄마, 가요.”지오가 어머니의 팔을 끌었다. 거의 억지로. 어머니의 몸이 반쯤 돌아갔다. 지오는 멈추지 않고 회전문 쪽으로 걸었다. 어머니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회전문 앞에서 지오는 딱 한 번 돌아봤다.해솔이 그 자리에 서
아침 9시, 호텔 로비.지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해솔은 이미 체크아웃을 마치고 소파 앞에 서 있었다.단정하게 다려 입은 흰 셔츠.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묶은 머리. 검은 뿔테 안경. 몇 시간 전 지오의 목을 끌어안고 떨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아랫입술만 조금 부어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이 로비에 둘뿐이었다.“체크아웃 하셨어요? 가죠.”해솔은 지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업무 메일을 읽는 목소리였다.서울행 KTX는 11시였다.회사에서 예매한 좌석은 이번에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지오가 창가에 앉았고, 해솔이 통로 쪽에 앉았다.열차가 출발했다. 해솔은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뭔가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좁은 좌석이었다. 팔걸이 하나 사이.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화면이 보이는 거리였다.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창밖을 보다 눈길이 옆으로 흘렀을 뿐이었다.채린과의 대화창이었다.[채린] 출장 잘 끝났어? 잘 자.그 아래, 방금 보낸 답장.[나] 어제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잤어. 오늘 올라가.해솔의 엄지가 화면을 껐다. 늦었다. 지오는 이미 다 읽었다.해솔이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해솔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지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해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자리 바꿨어요.”해솔은 그 말만 남기고 뒤 칸으로 걸어갔다.지오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봤다.내려올 때는 이 자리에서 해솔이 지오 어깨에 기대 있었다. 부산역 방송이 나올 때까지.올라가는 길에는 옆에 앉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다.지오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안 된다고 말은 했지만, 해솔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지오를 내려다보는 눈이 흔들렸다. 민소매 아래로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지오를 무너뜨리는 동안, 해솔의 숨도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한참 그렇게 버티다가.해솔이 지오의 손목을 잡았다.이번엔 시트에 누르지 않았다.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지오의 손바닥이 해솔의 허리에 닿았다. 민소매 자락 아래, 맨살에.“이제 해요.”작은 목소리였다. 명령이라기보다 무너지는 소리에 가까웠다.지오가 몸을 일으켰다. 해솔은 그대로 지오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됐다. 얼굴이 가까웠다. 해솔이 아직 조금 더 높은 자리였다.지오는 민소매 자락을 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해솔이 팔을 들어 주었다. 옷이 머리 위로 빠져나가고, 풀어진 머리카락이 다시 어깨로 쏟아졌다.가로등 불빛이 이번엔 해솔의 몸 위에 선을 그었다. 둥근 어깨, 도드라진 쇄골, 옅게 붉어진 가슴. 가는 허리까지.7년 만이었다.지오의 손이 해솔의 등을 쓸어내렸다. 척추를 따라, 허리가 움푹 꺼지는 자리까지. 손바닥이 그 자리에 멈추자 해솔의 숨이 멎었다.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손끝에서 하나씩 돌아왔다.지오의 손이 바지 허리춤을 찾았다. 해솔이 허리를 들어 도왔다. 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지오의 가운도 어느새 몸 아래에 구겨져 있었다. 이제 둘 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지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해솔이 어디서 숨을 삼키는지, 어디서 허리를 비트는지, 어디를 만지면 지오의 어깨를 움켜쥐는지. 하나씩 다시 찾아갔다.해솔의 손톱이 지오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허벅지가 가늘게 떨렸다. 이마가 지오의 이마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술 사이에서 섞였다.해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세게. 소리를 삼키려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무언가를 막으려고. 입술 가운데가 하얗게 질렸다.지오의 엄지가 올라갔다.생각보다 손이 먼저였다. 7년 전 작업실에서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엄지가 해솔의 입술을 눌러 이 사이에서 떼어 냈다.“그만 깨
“…해.” 지오가 말했다. 해솔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해솔의 손가락이 반쯤 풀린 가운 끈을 끝까지 당겼다. 면 끈이 고리를 빠져나가며 사르륵 스쳤다. 매듭이 풀리고, 가운 앞자락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한꺼번에 닿았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지오의 몸 위에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쇄골에서 시작해 가슴 사이를 지나, 마른 배 위로. 샤워를 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걸쳤던 가운이었다. 해솔의 시선이 그 빛의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손끝이 시선을 따라왔다. 쇄골 가운데에서 시작해, 불빛이 그은 선을 그대로 덧그리듯 아래로. 가슴 사이를 지나, 명치를 지나. 차가운 손끝이었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부가 오소소 일어섰다. 배꼽 바로 위에서 손끝이 멈췄을 때, 지오가 저도 모르게 배에 힘을 줬다. 지오는 가운을 여미지 않았다. 대신 손이 다시 해솔의 허리로 갔다. 키스할 때 이미 한 번 쥐었던 자리였다. 후드티 아래, 얇은 허리선. 해솔이 그 손목을 잡았다. 손끝처럼 손바닥도 차가웠다. 그리고 떼어 냈다. “손 내려요.” 지오의 손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해솔이 덧붙였다. “아직.” 해솔이 지오의 어깨를 밀었다. 세게 민 것도 아닌데 지오의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걸렸다. 지오는 그대로 침대에 앉았다. 시트가 허벅지 뒤에 서늘하게 닿았다. 해솔이 지오의 무릎 사이에 섰다. 지오보다 한 뼘 작은 해솔이, 지금은 위에서 지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드티를 벗었다. 머리 위로 한 번에. 묶었던 머리가 풀려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안경이 비뚤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안에는 얇은 민소매 하나뿐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둥근 어깨와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다. 7년 전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쇄골이 더 도드라졌고,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옅게 붉어져 있었다. 지오는 보기만 했다. 손은 시키는 대로 시트 위에 있었다. 손가락 끝이 시트를 조금 쥐었다.
새벽 두 시.지오는 불 꺼진 방에서 천장만 보고 있었다.잠이 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물을 두 컵이나 마셨는데도 취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는 맑은데 몸만 조금 뜨거웠다.너 세 잔이면 울잖아.자기 입으로 한 말이 자꾸 되감겼다. 7년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던 기억을, 하필 그 얼굴 앞에서 꺼냈다.지오는 휴대폰을 켰다. 메신저 맨 위에 해솔의 마지막 메시지가 떠 있었다. [문해솔] 내일 체크아웃 9시. 로비에서 봬요.업무 말투 그대로였다. 지오는 화면을 끄고 돌아누웠다. 눈을 감았다. 소용없었다.똑똑.노크 소리였다. 옆방 벽이 아니라, 712호 문이었다.지오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해솔이 서 있었다.화장을 지운 맨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 회색 후드티 차림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붉던 얼굴은 이제 원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솔은 멀쩡히 깨어 있는 얼굴이었다.손에는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이거요.”해솔이 봉지를 내밀었다. 안에 숙취 해소제 두 병과 생수 한 병이 보였다.“대신 마신 거, 빚지기 싫어서요.”지오는 봉지를 받았다.“고마워.”반말이 또 나왔다. 해솔은 고치라고 하지 않았다.해솔은 돌아서지 않았다.문턱 바로 바깥에 선 채로 지오를 보고 있었다. 봉지를 건넸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713호는 바로 옆이었다. 세 걸음이면 돌아갈 수 있었다.해솔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드티 끈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복도 조명이 해솔의 안경알에 작게 맺혀 있었다.지오의 입이 먼저 열렸다. 평소라면 끝까지 삼켰을 말이었다.“왜 뽑았어.”합격 전화를 받던 날, 지오는 누가 뽑았는지를 물었다. 지금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해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렸다. 그리고 지오를 똑바로 올려다봤다.“당신이 한 짓 그대로 해 주고 싶어서.”당신.권지오 씨도, 선배도 아닌 호칭이었다. 회사에서는 한 번도 쓰지 않던 말이었다.“내가 한 짓?”물으면서도 짐작
다음 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서울역.부산행 KTX 좌석은 회사에서 한꺼번에 예매해 둔 것이었다. 5호차 9A, 9B. 창가가 지오, 통로 쪽이 해솔이었다.한결제과 본사 미팅. 본부장 지시로 잡힌 1박 2일 출장이었다.비상계단 일이 있고 나서 엿새. 해솔은 그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업무 지시는 메신저로, 대답은 짧게, 눈은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지오도 그렇게 했다.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해솔은 태블릿을 켜고 미팅 자료만 넘겼다.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지오는 창밖을 봤다. 회색 건물들이 뒤로 밀려났다.대전을 지날 무렵, 태블릿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돌아보니 해솔이 눈을 감고 있었다. 태블릿은 무릎 위에 엎어져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자료를 고친 모양이었다. 메신저 마지막 알림이 새벽 한 시였다.안경을 벗은 얼굴은 면접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둥근 볼 때문에, 스물한 살 때 얼굴이 그대로 겹쳤다.지오는 다시 창밖을 봤다.잠시 뒤, 어깨가 무거워졌다.해솔의 머리였다.지오는 그대로 굳었다.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해솔이 깰 것 같았다. 깨면, 이 거리가 끝날 것 같았다.코끝에 샴푸 냄새가 닿았다.익숙한 냄새였다. 7년 전 작업실, 밤새 시안을 붙잡다 지오 어깨에 기대 졸던 해솔에게서 나던 냄새와 아주 비슷했다. 같은 샴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해솔의 셔츠 깃.지난주 거기 있던 붉은 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옅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지오는 그걸 확인한 자기가 싫었다.신경 쓸 자격이 없는 일이었다. 자국이 있든 없든, 누가 남겼든.그런데 방금, 분명히 안도했다.지오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냄새 맡았죠.”지오의 숨이 멎었다.해솔의 목소리였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머리도 그대로 지오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