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하와 팀원들이 성북구 폐창고에 도착했다. 이게 마지막 남은 곳이었다. 샅샅이 뒤져봤지만 증거라고 할 만한 건 한 개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도 없습니다. 경위님.”
김민석이 헉헉 거리며 달려와 보고했다.
서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었다.
“기가 막히네...마치 우리 동선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팀원들도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하는 팀원들의 기운을 북돋아줄 겸 점심을 쏘겠다고 했다.
“야, 대신 먹고 힘내서 뭐라도 찾아내야 된다, 자식들아. 최 형사. 차고지 리스트 뽑아왔지?”
최 형사는 기다렸다는 듯 리스트를 서하에게 건넸다. 삼겹살 집에 도착해서도 서하는 식사 대신 차고지 위치와 그동안 사건들이 발생했던 장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도박장.
폐창고.
유흥업소.
차고지.
성북구.
성북구.
또 성북구.
서하의 시선이 리스트 한 곳에 멈췄다.
"...잠깐."
최근 발생한 사건들의 위치를 머릿속에 그려보자 이상할 정도로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원이 그려졌다.
마치 누군가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순간, 섬광처럼 하나의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서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원들이 모두 다 놀라서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민석을 다그쳤다.
"민석아, 키."
"네?"
"차 키!"
허둥지둥 열쇠를 건네받은 서하는 그대로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경위님!"
"다 먹고 성북구 ○○동 차고지로 와!"
"왜요?"
서하가 차 문을 열며 씩 웃었다.
"찾은 것 같으니까."
서하가 차고지 문을 열자 끼익- 하는 소음과 함께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서하는 악취에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옆구리에 있던 총을 꺼내들었다. 조심, 조심 발걸음을 죽이며 한걸음씩 안으로 들어갔다.
질척,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발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액체의 느낌에 직감했다. 피다. 여기다. 다음 사건 발생지.
후레쉬를 켜고 말했다.
“숨어있다면 나와. 경찰이다.”
하지만 안은 비어있는 듯 서하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바닥을 비춰보자 역시나 피가 흥건했다. 시체는 없었다. 이미 시체는 처리한 뒤였다. 하지만 아직 흔적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안됐다는 소리다. 곧바로 팀원들에게 연락했다.
“찾았다. 당장 튀어와.”
곧이어 팀원들이 도착했다. 폴리스 라인이 쳐지고 감식반도 도착해서 현장 감식이 진행됐다.
그 시각,
도윤은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다시 걸려온 전화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급한 일 아니면 낮엔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무슨 일이지.”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당황한 듯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여자 형사 하나가 창고에 도착햬서...어떻게 할까요?”
도윤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자 형사?”
남자가 대답했다.
“예. 신원 파악 결과 윤서하 경위라는 형사라고 합니다.”
순간,
도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짧은 침묵 후,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 지켜볼까요?"
"......"
"아니면.."
남자가 말을 흐렸다.
더 말을 잇기도 전에, 도윤이 낮게 말했다.
“건들지 마.”
그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울렸다.
“...예?”
“건들지 말라고. 그 여자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리면 그 손가락 하나하나 부러뜨릴 줄 알아.”
도윤의 살벌한 협박에 남자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알겠습니다. 창고에 피는 아직 처리를 못했는데..”
“냅둬, 어차피 그런 걸로 경찰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은 도윤은 한동안 검게 꺼진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윤서하.
도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필이면."
낮게 새어 나온 목소리가 텅 빈 집 안으로 흩어졌다.
서하는 팀원들과 현장을 조사하며 단서를 한 개라도 더 찾아낼 수 있을까 눈에 불을 켰다. 떨어진 담배꽁초, 머리카락, 남은 발자국까지. 절박한 심정이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온 서하는 서로 돌아와 증거품 목록을 작성하고 감식반에 넘겨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윤은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온다는 약속, 지켰네.”
도윤이 그녀를 안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귓가를 간질였다.
서하는 그의 품에서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응..오늘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도 드디어 꼬리를 잡은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도윤은 그녀를 안은 팔에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꼬리? 아, 당신이 쫓던 그 조직인가, 거기?”
서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응. 흑룡파. 오늘 새로운 현장을 잡았거든. 거기서 혈흔도 발견됐고..아마 곧 피해자 신분도 특정될 것 같아.”
도윤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듯 말했다.
“고생했네. 위험했던 거 아니야? 당신이 너무 위험한 일에 엮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 말은 도윤의 진심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다. 서하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자신을 염려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걱정 마. 내가 현장 일, 이년 뛰어? 베테랑 형사야, 나.”
피식 웃으며 서하가 그의 품에서 살짝 얼굴을 떼어냈다.
“밥 차려놓고 기다리는 남편 두고 어디 안가니까, 걱정 붙들어 매. 억울해서라도 못 죽지.”
도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당연하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당신은 조금도 다치게 두지 않아."
"절대로."
서하는 그 말을 사랑의 맹세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도윤은 진심이었다.
설령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윤서하만큼은 지킬 생각이었다.
서하가 씻으러 들어간 뒤, 도윤은 식탁에 남아 있던 그녀의 수첩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열려 있는 페이지.
거기에는 그녀가 오늘 현장에 대해 남긴 짧은 메모가 있었다.
‘성북구 OO동 차고지’
‘혈흔 발견’
‘피해자 신원 확인 필요’
도윤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보스.]
[혈흔 확보된 것 같습니다.]
폰을 내려다보던 도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예상보다 빨랐다.
그리고.
예상보다 가까웠다.
그녀가 씻고 나올 동안 도윤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찌개를 데우고 밥을 퍼서 그녀가 나오자마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
그녀가 씻고 나오자 맞은편에 앉아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서하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반찬들로 준비해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물었다.
“당신은 어쩜 이렇게 요리도 잘해? 집안일도 매일같이 완벽하게 해놓고..이렇게까지 안해도 된다니까. 가끔은 좀 편하게 쉬고 있어.”
도윤은 그녀의 밥 위에 그녀가 좋아하는 나물을 얹어주며 말했다.
“당신이 나가서 힘들게 돈 벌어오는데, 난 집안일이라도 열심히 해놓고 기다려야지. 그래야 당신한테 이쁨받지 않겠어?”
서하가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내가 당신 먹여 살리는 줄 알겠다."
"아니야?"
"그건 맞네."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
도윤이 아무렇지 않게 찌개를 퍼주며 물었다.
"근데 오늘 누구랑 나갔어?"
"응?"
"현장."
"민석이랑 최 형사."
"아."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뭐가?"
"남자 둘이라서."
서하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게 왜 다행인데."
"몰라?"
도윤이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 예쁘잖아."
도윤이 그녀의 손을 슬쩍 가져와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뭐가?"
"당신 같은 사람이 왜 나랑 결혼했는지."
"또 그 소리."
"진짜 궁금해서."
도윤이 웃었다.
"당신 주변엔 좋은 사람 많았잖아."
"없었거든."
"있었어."
그 순간.
도윤의 미소가 아주 잠깐 사라졌다.
"그래서 다 치웠잖아."
"...뭐?"
"농담."
그의 능청스러운 말투와 눈짓에 서하는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왜 이래, 나 꼬시는 거야?”
서하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 우리 닮은 예쁜 아이 가질까?”
그리고 그 순간,
화기애애했던 식탁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
도윤의 손이 멈췄다.
국을 뜨던 국자가 허공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서하는 뒤늦게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왜 대답이 없어?”
도윤은 시선을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아?"
그제야 그가 천천히 웃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의 다정한 미소와는 어딘가 달랐다.
"우리 아직 젊잖아."
또 그 말이었다.
서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말 작년에도 했어."
"......"
"재작년에도 했고."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아이 싫어?"
"아니."
즉답이었다.
오히려 너무 빠를 정도로.
"...근데 왜?"
도윤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그리고 곧 고개를 숙였다.
"그냥."
"......"
"당신이 힘든 거 싫어서."
“난 괜찮다고. 내가 원한다잖아.”
도윤은 그런 서하를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아직 내가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했고....”
"그건 핑계잖아."
서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언제까지 미룰 건데?"
"......"
"나도 나이가 있고, 우리 결혼한 지 벌써 3년이야."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줘."
"서하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달라고."
“....”
도윤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직."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도윤의 말에 서하의 표정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도윤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왜 아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숨이 막히는지.
왜 미래를 상상할 때마다 두려워지는지.
왜 자신은 늘 지금 이 순간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는지.
서하가 알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떠나갈지도 모른다.
도윤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애써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폭풍같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서하는 피곤한 듯 일찍 잠에 들었다.
도윤은 잠든 서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미안."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서하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김민석 세 글자가 떠있었다.
많이 들은 이름이었다. 서하의 팀원 중 막내라고 했던가. 도윤은 잠시 전화를 끊어버릴까 고민하다 그녀를 살짝 흔들어 깨우며 속삭였다.
“서하야, 전화 왔어.”
계속되는 진동 소리와 그의 속삭임에 서하가 눈을 떴다.
서하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왜."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하지만 김민석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경위님."
"왜."
"신원 나왔습니다."
순간 잠이 달아났다.
서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군데."
잠시 침묵이 흐르고,
김민석이 말했다.
"최준혁."
"누구?"
"전직 흑룡회 조직원입니다."
서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민석의 다음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통화 내역 확인했습니다."
"..."
"사망 전 마지막 통화 상대."
민석이 낮게 말했다.
"경찰청 정보과 이정훈 경감입니다."
순간.
아주 찰나였지만, 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서하가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작은 카페 안, 창가 구석 자리에 앉은 남자가 몇 번이고 출입문을 바라봤다. 남자는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손에 쥔 컵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남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세 번째로 창밖을 확인했다. 길 건너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시선이 멈춘 채로 굳어버렸다.몇 초 뒤, 그 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그제야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카페 밖.서하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오후 2시 57분.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3분이 남아있었다. 서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카페 문을 밀었다.딸랑-서하가 카페로 들어서자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표정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서하와 눈을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괜찮아."남자는 자신에게 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술 끝이 떨리고 있었다.서하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둘 사이에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 뒤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서하는 말없이 그의 떨리는 손끝을 유심히 살펴봤다."그때.""그냥 돌아가시라고 했는데."남자가 가방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손을 떨며 한참이나 서하에게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천천히 말씀하세요.""괜찮습니다."서하는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남자가 꼭 쥐고 있던 녹음기를 천천히, 아주 느리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을 거두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녹음기만 바라봤다."...죄송합니다."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자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하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전.""아버지 같은 경찰이 되고 싶었습니다."고개를 떨군 남자는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근데.""아버지는.""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남자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서하는 아무것도 묻지
아침 일찍부터 조직범죄 수사팀 사무실은 분주했다.서하는 어젯밤 민석과 찾아낸 자료들을 팀원들 앞에서 브리핑하며 팀원들의 의견을 받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사건 파일들이 차례대로 펼쳐져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흑룡파 관련 사건들이 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었고, 모든 사건 끝에는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임태성.그 이름 위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잠시 쉬는 시간.민석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경위님.""오늘은 뭐부터 파볼까요."서하는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임태성.""…역시 그래야겠죠.""이번엔 사람을 본다."민석은 금세 의미를 이해했다."...임 검사, 저희가 가능할까요..""응.""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겁나냐?"민석이 피식 웃었다."조금은요.""근데, 경위님도 같이 깨질 거잖습니까."서하는 마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당연하지."“깨져도 너보다 내가 먼저 깨진다. 걱정마.”서하가 민석의 등을 두어번 툭툭 두드리고는 말했다."우리한테 남은 시간은 한 달이야.""시간 없다.""그럼 시작하자."그렇게 두 사람은 오전 내내 검찰 기록과 사건 배당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임태성이 맡았던 사건들, 그중에서도 흑룡파와 연관된 사건들을 따로 분류해 정리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임태성이 맡았던 사건은 흑룡파뿐만이 아니었다. 정치권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들 역시 그의 손을 거쳐 간 경우가 유난히 많았다.사건 번호.담당 부서.기소 여부.불기소 사유.증인 명단.참고인 진술.압수수색 영장.하나하나 비교하기 시작했다.민석이 화면을 보며 서하에게 손짓했다."...경위님.""이거 이상합니다.""흑룡파 사건만 맡은 게 아니네요.""정치인.""재벌.""선거 자금.""재개발 비리...""전부 임 검사 손을 거쳤습니다."서하가 다가와 모니터를 바라봤다."...우연일까."민석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니요.""이 정도
며칠 전.서울지방검찰청.검사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비서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손님 오셨습니다."책상 위 서류를 넘기던 임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예의를 차리고 있었지만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낯선 얼굴, 하지만 이름은 익숙했다.새로운 흑룡파 보스. 강도윤."...도윤 대표."도윤은 가볍게 목례만 했다."처음 뵙겠습니다."임태성이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시죠."도윤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임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간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무슨 일로 검찰청까지 오셨습니까."도윤은 잠시 검사실을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거래를 하나 제안드리려고 왔습니다."임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거래?""예.""검사님도 손해 볼 일은 아닙니다."임태성은 팔짱을 꼈다."들어보죠."도윤은 미리 준비해 온 서류철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하지만 서류를 열지는 않았다.대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요즘.""경찰이 꽤 시끄럽더군요."임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정훈 경위."그 이름이 나오자 검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도윤은 마치 신문 기사를 읽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사건 때문인지.""15년 전 사건까지 다시 들여다본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순간, 임태성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김성철.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윤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괜한 소문이었으면 좋겠습니다."짧은 침묵이 흐르고, 도윤이 이번에는 서류철을 앞으로 밀었다."본론으로 들어가죠."임태성이 천천히 서류를 펼쳤다.첫 장.도심 재개발 사업 투자 계획.두 번째 장.예상 수익.수십억 원.세 번째 장.참여 기업 명단.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사업이었다.임태성이 천천히 서류를 덮었다."...그래서, 이걸 왜 보여주시죠.""
기록보관실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 끝까지 빼곡하게 기록들이 서가에 들어차 있었다. 민석은 양손 가득 사건 기록철을 들고 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쿵.쿵.두꺼운 파일들이 연달아 쌓였다. 표지만 봐도 수십 건이었다.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경위님."서하는 대답 대신 파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민석이 쌓여 있는 기록철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거... 전부 보시게요?"서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이거 15년 치예요."민석이 헛웃음을 흘렸다."며칠은 걸리겠는데요."서하는 첫 번째 파일을 펼쳤다.낡은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다 봐."민석이 그녀를 바라봤다.서하는 시선을 기록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김성철 사건이."잠시 말을 멈춘 뒤 조용히 덧붙였다."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어."민석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무슨 말씀이십니까."서하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민석을 바라봤다."흑룡파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면, 김성철 회계사 한 명으로 끝났을 리 없어.""분명.""비슷한 사건이 더 있었을 거야."민석도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았다.말없이 옆 의자에 앉아 다른 파일을 펼쳤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기록만 넘겼다.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졌다.파일이 한 장 넘어갔다.또 다른 사건.또 다른 종결.또 다른 무혐의.민석이 고개를 갸웃했다."...경위님.""응.""딱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습니다."파일을 넘기던 손을 멈추며 말했다.“분명 사건들이 다 찝찝하게 끝난 건 맞는데…”서하도 손을 멈췄다.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하나씩 보면, 안보이지."그녀는 다시 다음 파일을 펼쳤다."...하지만."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파일이 하나둘 책상 위에 펼쳐졌다.민석은 사건번호를 정리했고, 서하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드르륵.검은 마커 뚜껑을 열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가장 위에 날짜를 적었다
“윤 경위.”“...”“내가 전에도 분명 말했지.”“끝난 일을 뒤돌아보는 버릇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죄송합니다.”서하는 시선을 떨궜다.“사건은 종결됐다.”“...공식적으로는.”박 팀장의 덧붙인 말에 서하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앞으로 한 달."팀장이 책상 위 달력을 한번 훑어봤다."본청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일이 많다.""당분간은 정신없을 예정이라는 뜻이다."“그동안 네가 어디를 뛰어다니는지, 누굴 만나 뭘 캐고 다니는지, 일일이 신경 쓸 여유도 없겠지.”박 팀장이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서하와 눈을 맞췄다.“그 안에,”"흑룡파랑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찾아와.""하지만 한 달 뒤에도 빈손이면.""그땐 정말 사건에서 손 떼야 할거다.“"알겠나."서하가 멍하니 팀장을 바라보았다.“...팀장님.”박 팀장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이번엔 느낌 말고 증거를 가져와."“대답.”“....예, 알겠습니다.”서하의 눈이 의지로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팀장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그럼 나가봐. 팀원들도 퇴근하라고 하고.”팀장실 문이 닫혔다.서하는 문 앞에 잠시 기대 선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경위님?"민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많이 깨지셨습니까...?"서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민석이 괜히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팀장님 하루 이틀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서하가 민석을 바라봤다.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반드시 잡아야겠다.""...예?"민석이 눈을 깜빡였다."아...그쵸.""당연히 잡아야죠."민석이 당황한 듯 서둘러 대답했다. 서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한 달.""우리한테 한 달 주셨어.""...네?"민석의 눈이 동그래졌다."설마...""팀장님이..."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공식적으로 허락하신건 아냐.""하지만, 우리가 증거를 가져오면.""다시 사건을
“이 번호...전부 겹쳐.”서하는 통화 내역을 보며 중얼거렸다.시점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가족들을 만난 사람이 있었어...”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분명해.""이 번호 주인이 가족들을 만났어."서하는 다시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이정훈의 아내, 그리고 아들.전부 한 번씩 통화했을 뿐이지만 분명 겹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이상했다. 통화 시점도, 통화 상대도."...통화 이후에 장례를 서둘렀고.""...그래서 이사까지 갔다."서하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이정훈 가족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들었다.그 이후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민석아.”김민석이 서하의 부름에 곧장 몸을 일으켰다."예, 경위님?““이 번호, 좀 알아봐봐.”서하가 민석에게 통화 목록 자료를 내밀었다.“이 번호요? 뭔가 찾으셨어요?”“아직은. 근데, 뭔가 있는건 맞는 것 같아.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민석은 통화 목록을 내려다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네요. 이정훈 가족들이랑 다 한 번씩 통화한 기록이 있어요.""사건 이후라 그냥 넘어갔는데..."민석이 자료를 다시 훑었다."응."서하가 통화 내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거기다 통화 시점이 장례 전날이랑 이사 전날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아?”"..."“만약, 이정훈 가족들이 누군가를 만났고 그 사람이 가족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면..."민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이 사람부터 찾아야겠네요."서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응.""이 번호. 이번 사건의 시작일 수도 있어."잠시 후,민석이 복잡한 표정으로 서하에게 다가왔다.“알아봤어?”"네. 번호 조회는 해봤는데 등록 정보가 안 나옵니다.""명의도 확인 안 되고요.""대포폰 같습니다."서하는 민석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역시.”민석은 의아한 듯 서하를 바라보았다."예상하셨습니까?""응.""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