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그녀의 얼굴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커튼 끝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에는 아주 옅은 바람 소리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전의 햇빛이 다시 떠올랐다. 몇 년 전. 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 햇빛이 눈부시게 맑던 오후였다. 테라스 한쪽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어가는 차와 펼쳐진 책 한 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엘로이즈는 테라스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세는 이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조차 조용했다. 정원에는 바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 "언니이이!!" 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움직였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잔디를 가로질러 빠르게 가까워졌다. 타다닥. 그리고 다음 순간, "언니!! 이것 좀 봐!!" 클레르가 그대로 테라스까지 뛰어 올라왔다. 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 "...클레르."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레스. 연한 크림빛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치맛단은 흙투성이였고, 소매 끝에도 풀잎이 엉겨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가 걸려 있었다. 엘로이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클레르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나 후레지아 꺾어왔어!" 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도 그 꽃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엄청 예쁘지?!" 엘로이즈는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너 또 정원사 아저씨 몰래 꺾어온 거야?" 클레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아닌데?" 대답이 너무 빨랐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클레르가 괜히 시선을 피하며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아닌데." 그 순간, "작은 아가씨!!"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레르의 어깨가 홱 움찔했다. 곧 정원사가 숨을 헐떡이며 정원 쪽에서 뛰어왔다. "꽃 함부로 꺾으시면 안 된다니까요!!" 클레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앗." 그리고 아주 작게, "...들켰다...!!" 겁먹은 목소리. 후레지아 꽃다발을 품에 꼭 안은 채 슬쩍 엘로이즈 뒤로 숨으려 했다. 엘로이즈는 그런 클레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드레스는 엉망이고, 얼굴엔 흙이 묻어 있고, 손에는 몰래 꺾어온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엘로이즈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도록 제가 잘 타이를게요." 정원사는 여전히 난처한 얼굴이었다. "작은 아가씨가 자꾸 담 넘어서 꽃 꺾으시면 곤란합니다..." "클레르." 엘로이즈가 낮게 불렀다. 클레르는 바로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응." "사과드려야지." 클레르의 입술이 잠깐 삐죽 나왔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아저씨..." 정원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듯 작게 헛기침했다. "...다음부터 조심하십시오, 작은 아가씨." 클레르는 금세 다시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는 슬쩍 엘로이즈 쪽을 올려다봤다. "...언니." "왜." 클레르가 조심스럽게 후레지아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언니 줄게." 엘로이즈의 시선이 꽃으로 향했다. 노란 후레지아. 햇빛 아래에서 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클레르는 웃고 있었다. 흙투성이 얼굴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얼굴로. 잠시 후. 클레르는 후레지아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엘로이즈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엘로이즈는 책을 한 손에 든 채 천천히 저택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테라스를 지나 현관 앞 계단에 다다랐을 때, 철컥. 현관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하인들이 양쪽으로 조용히 물러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궁정 대신과 귀족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의 걸음이 멈췄다. "...아버지. 어머니." 차분한 인사. 부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딸에게 향했다. 그리고 곧, 클레르의 모습에서 멈췄다. 진흙이 묻은 드레스. 흙투성이 치맛단. 헝클어진 머리카락. 품에 안긴 노란 후레지아 꽃다발. 부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클레르. 너... 또 정원에 들어가서 놀았구나."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엘로이즈 뒤로 숨었다. "...안 그랬는데."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 엘로이즈는 잠시 클레르를 힐끗 바라봤다가 다시 부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 아버지." 차분하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부인이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오늘 중요한 연회가 있어서."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정리했다. "지금 출발하려던 참이란다." 그 순간. 궁정 대신의 시선이 다시 클레르에게 향했다. 그리고 아주 약간 인상이 구겨졌다. "...하." 그는 클레르의 드레스 차림을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훑어봤다. "드 로베르 가문의 딸이..." 낮고 차가운 목소리. "...저리 시끄럽고 지저분해서야 원." 클레르의 몸이 움찔했다. 대신은 더 가까이 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못마땅하다는 듯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남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소." 그 말만 남긴 채, 그는 그대로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망설임 없는 걸음. 곧 마차 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현관 앞에는 잠시 정적이 남았다. 클레르는 엘로이즈 뒤에서 더 작게 숨었다. 손에 들고 있던 후레지아 꽃다발이 아주 조금 구겨졌다. 귀족 부인은 그런 둘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이번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았다. "아버지 말씀 들었지?" 클레르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귀족 아가씨가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고..." 시선이 흙 묻은 드레스에 닿았다. "...꾀죄죄한 차림으로 다니면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겠니." 클레르의 손가락이 꽃다발을 꼭 쥐었다. 부인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너 하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어머니!"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순간 끼어들었다. 부인의 말이 멈췄다. 엘로이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클레르를 반쯤 가리듯. "...제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잘 가르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현관 앞 공기가 잠시 조용해졌다. 부인은 말없이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클레르를 천천히 바라봤다. 한 명은 지나치게 일찍 어른이 된 아이. 한 명은 아직도 너무 어린 아이. 부인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안쓰러운 듯. 하지만 그 감정조차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낮은 목소리. 부인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딸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본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드레스 자락이 계단 위를 조용히 스쳤다. 그리고 곧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멀리서 작게 들려왔다. 현관 앞에는 잠시 조용함만 남아 있었다. 멀어지는 마차 바퀴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클레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노란 후레지아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반짝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시무룩하게 내려간 입꼬리. 축 처진 어깨로. 엘로이즈는 그런 클레르를 잠시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숨을 내쉰 뒤 말했다. "...클레르." 낮게 불렀다. 클레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기운 없는 대답. 엘로이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언니 방에 가서 놀래?" 순간 클레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방금 전까지 죽어 있던 표정이 거짓말처럼 살아났다. "그래도 돼?!" 목소리까지 다시 밝아졌다. 엘로이즈는 그런 반응을 보며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짧고 다정한 대답.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가볍게 정리하며 덧붙였다. "대신." 클레르가 바로 자세를 고쳐 앉듯 그녀를 바라봤다. 엘로이즈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어머니, 아버지 돌아오실 때까지만." 클레르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응!!" 방금 전 혼났던 것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품에 안고 있던 후레지아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럼 이거 언니 방에 장식해도 돼?!" 엘로이즈는 꽃다발을 한 번 바라보았다. 노란 후레지아 꽃잎들이 햇빛 아래에서 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클레르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와!!" 그녀는 곧바로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엘로이즈의 방 안. 창밖에서는 늦은 오후의 햇빛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주황빛이 방 안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고, 열린 창문 사이로는 정원의 꽃향기가 아주 옅게 들어오고 있었다. 클레르는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조금 전 갈아입은 새 드레스는 연한 하늘빛이었다. 밝은 색 천 위로 석양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깨끗한 치맛단은 아까의 진흙투성이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엘로이즈는 그 뒤에 앉아서 조용히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빗이 부드럽게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갔다. 사각. 사각. 클레르는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발끝은 침대 아래에서 살짝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그런 움직임을 힐끗 보다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으이구." 낮은 목소리. "여자애가 꼴이 이게 뭐야." 클레르는 바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일부러 이런 건 아닌데." 엘로이즈는 대답 대신 리본을 손에 들었다. 노란빛이 살짝 도는 부드러운 리본. 그녀는 클레르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묶어 올린 뒤 마지막으로 리본을 단정하게 달아주었다. 그리고 거울 속 클레르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다음에는 좀 조심해서 놀아. 또 어머니, 아버지께 혼나지 말고." 클레르는 거울 속 엘로이즈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곧, 헤실헤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응!" 아주 밝은 목소리. "다음엔 드레스 안 더럽히게 조심할게!!" 엘로이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클레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큰 눈. 맑고 숨김없는 눈동자. 사슴처럼 동그랗고, 무슨 감정이든 그대로 드러나는 눈. 조금 전 혼났던 것도 이미 잊어버린 얼굴. 엘로이즈의 손이 리본 끝을 아주 천천히 정리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녀의 시선이 조용히 흔들렸다. '...언니는 가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서만 아주 조용히 이어졌다. '너 성격이 부러워.' 엘로이즈는 거울 속 클레르를 바라봤다. 혼나도 금방 웃고, 상처받아도 오래 끌어안지 않고, 좋아하는 걸 보면 바로 달려가는 아이. 엘로이즈는 그런 클레르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정말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웃었다. "...바보 같긴." 엘로이즈는 마지막으로 리본 모양을 한 번 더 정리했다. 노란 리본 끝이 머리카락 사이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클레르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는 순간, "우와..." 작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늘빛 드레스. 정리된 머리카락. 노란 리본. 아까 정원을 뛰어다니던 흙투성이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클레르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진짜 예쁘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리본이 흔들릴 때마다 눈도 같이 반짝였다. "언니 진짜 잘 땋는다!" 엘로이즈는 피식 웃었다. "...호들갑은." 하지만 클레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홱 돌아앉아 엘로이즈를 올려다봤다. "맨날 언니가 머리 땋아주면 안 돼?" 엘로이즈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맨날?" "응!" 클레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녀들보다 언니가 땋아주는 게 훨씬 예뻐!" 엘로이즈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클레르는 전혀 꾸민 말 없이 웃고 있었다. 좋으면 좋은 거라고 바로 말하는 얼굴. 엘로이즈는 그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한숨처럼 웃었다. "...그럼 하녀들이 울겠다." "그래도 언니가 더 잘하는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엘로이즈는 결국 시선을 살짝 피한 채 클레르의 이마를 손끝으로 가볍게 밀었다. "...말은 참." 클레르는 밀린 이마를 붙잡고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 속 자기 머리를 보며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진짜 마음에 든다." 엘로이즈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풀어졌다. "...마음에 들면 됐어." 그 말은 작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다정했다. 그때, 거울을 보던 클레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저택 뒤편이 보이는 창문 너머. 늦은 햇빛 아래,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지마다 붉은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꼭 작은 등불 같았다. 클레르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 "우와." 작은 감탄. "사과가 이번에도 주렁주렁 열렸다!" 엘로이즈도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사과나무.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피식, 작은 웃음이 번졌다. "...왜."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너 또 작년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서 사과 따려다 떨어지게?" 클레르의 눈이 순간 커졌다. "...아니!" 바로 반박. 그리고 곧 작게 웅얼거렸다. "...그건 아닌데." 엘로이즈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바라봤다. 클레르는 괜히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창밖 사과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과 보니까 배고파졌어." 다음 순간, "언니!!" 클레르가 홱 돌아보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밥 먹으러 가자!!" 엘로이즈가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클레르는 벌써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고 있었다. "요리사들한테 사과파이 만들어달라고 하자!!" "클레르..." 하지만 이미 늦었다. 클레르는 방문 쪽으로 냅다 달려갔다. 탁. 문 손잡이를 붙잡고 확 열었다. "사과파이!!" 그리고 그대로 복도로 뛰어나갔다. 타다닥. 엘로이즈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레르!" 그녀가 급히 뒤를 따라 나갔다. "뛰지 마, 다쳐!!" 복도 끝에서는 이미 클레르의 밝은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안 다쳐어!!" 엘로이즈는 어이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조용한 걸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클레르의 뒤를 따라갔다. 다시 현재의 엘로이즈의 방 안. 방 안에는 저녁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에 커튼이 느리게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시선은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 저택 뒤편. 멀리 사과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몇 년 전, 클레르가 창문을 붙잡고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바로 그 나무. 하지만 지금의 나무는 달랐다. 가지마다 피어 있었던 연분홍빛 사과꽃들은 계절이 지나 이미 거의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시든 꽃잎 몇 장이 힘없이 흔들렸다. 엘로이즈는 그 나무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술이 움직였다. "...그 아이. 참... 개구쟁이였지." 그림 하일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하지만 엘로이즈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기억은, 조용히 몇 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그녀의 얼굴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커튼 끝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에는 아주 옅은 바람 소리만 남았다.엘로이즈는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전의 햇빛이 다시 떠올랐다.몇 년 전.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햇빛이 눈부시게 맑던 오후였다. 테라스 한쪽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어가는 차와 펼쳐진 책 한 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엘로이즈는 테라스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세는 이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조차 조용했다.정원에는 바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언니이이!!"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움직였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잔디를 가로질러 빠르게 가까워졌다.타다닥. 그리고 다음 순간,"언니!! 이것 좀 봐!!"클레르가 그대로 테라스까지 뛰어 올라왔다.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클레르."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레스. 연한 크림빛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치맛단은 흙투성이였고, 소매 끝에도 풀잎이 엉겨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가 걸려 있었다.엘로이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클레르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나 후레지아 꺾어왔어!"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도 그 꽃만큼 반짝이고 있었다."엄청 예쁘지?!"엘로이즈는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너 또 정원사 아저씨 몰래 꺾어온 거야?"클레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아닌데?"대답이 너무 빨랐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녀를
살롱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그림 하일드의 손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고, 흐트러짐없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아까와 달랐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이네스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급하지도 않았고,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숨 막히는 걸음.엘로이즈는 이네스의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하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넘치시는 우리 영애께서..."말은 웃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얇게 차가웠다."왜 제 하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는 그렇게 당황하시는 걸까요?"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엘로이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었다."아, 아니에요."그녀는 손끝으로 자기 드레스 소매를 아주 가볍게 정리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서늘했다."하인, 평민들을 향한 영애의 사랑은 이미 유명하니까요."엘로이즈는천천히 이어갔다."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신다는 얘기는 저도 자주 들었습니다."살롱 안 공기가 순간 흔들렸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네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엘로이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번 달만해도... 일자리 없는 평민들을 위해 직접 하인들을 3명이나 들이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남자로요."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 위로 열이 번졌다.살롱 안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른 영애들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인을 들였다.'귀족 사회에서는 때때로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말.특히 젊은 남자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괜히 더 천천히 들었고, 누군가는 시선을 애매하게 창밖으로 돌렸다.한 영애가 아주 작게 한숨을 삼켰다.또 시작이구나.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손끝에 들어간 힘만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신히 유지된, 그러나 완벽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였다."...글쎄요..."엘로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는..."말끝은 부드러웠다.하지만 이네스는 그 틈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제가 영애였어도... 저 아이에게 잘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이네스는 천천히 이어갔다."아무리 고아원 출신의 하녀라지만... 동생분과 얼굴이 닮았다면..."이네스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돌아가신 동생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되거든요."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한 것이었다.다른 영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겠죠."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네, 어머니."짧은 대답.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괜찮니."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많이 놀랐을 텐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들어가서 쉬렴."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찰싹.짧은 소리."...가자."낮은 목소리.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너."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급하게 다가와 엘로이즈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 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어야 할 가지. 그리고 바로 옆에 박혀 있는 무게.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맞지는 않았어요."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하마터면ㅡ"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 가지를 확인했다. 굵기. 무게. 낙하 위치."...큰일 날 뻔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떨어진 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이상하네."혼잣말처럼 낮게. 하지만 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표정은 다시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손이 굳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방금 전. 나무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철문 밖에서 느껴졌던 그 시선.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철문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카일.'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목이 조여오던 감각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숨이 막히던 순간.'...너도 죽는다. 이해했지?'그 목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림 하일드의 입술이 아주